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 꼴까닥 침 넘어가는 고향이야기
박형진 지음 / 소나무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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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는 솥단지 밑에 닿아서 노릇노릇하게 탄 것이 더 맛이 있다. 적당히, 정말 적당히 물을 붓고 불을 때면 고구마의 단물이 조금씩 우러나오고 그 물이 쫄아들어서 솥이 거의 탈 정도일 때, 그때 고구마가 푸욱 익을 수 있어야 고구마를 잘 찐 것이다. 그 중에서도 고구마 엿물이 쫀독하게 늘어붙은 것은 특히 더 맛이 있어서 껍질까지 버리지 않고 먹을 수 있다. 껍질은 훌렁훌렁 벗겨서 먹지 않고 내놓거나 함부로 땅바닥에 집어던지면 어른들은 으레껏 저런 빌어먹을 놈의 자식 같으니 하며 혀를 차시는데 잘 찐 고구마 엿물 늘어붙은 맛있는 껍질은 버리라고 해도 버리지 않는 것이다." -책 속에서

가마솥 뚜껑을 열었을 때, 타기 직전까지 적당히 노릇노릇하게 눌어붙어 목젖까지 뜨겁도록 삼키던 맛난 고구마의 뜨거운 김이 아른거린다. 시골에서 자라나 토종의 맛을 잊지 못하는 나는 지금도 무엇이든 일부러 눌어붙인다. 그리하여 자주 즐긴다. 큼지막한 뚝배기에 고구마나 감자는 물론 누룽지도 노릇노릇, 호박죽을 쑬 때도 약간 눌어 숟가락을 거머쥐고 닥닥 긁어먹는다. 이렇게 야금야금 즐기는 맛들이 푸짐한 일품요리의 맛들을 훨씬 웃도는 것은 추억까지 함께 품고 있기 때문 아닐까?

다시, 이어지는 저자의 고구 마이야기는 '어쩜 이렇게까지?'라고 생각할 정도다. 밤이 차야 맛있는 초가을 고구마(밤고구마)는 불을 세게 때서 다 익었는가 싶으면 솥뚜껑을 확 열어야 한다는 것, 날이 추울 때는 물고구마가 맛있으니 물을 나수(충분히) 붓고 불을 진득하게 때며 고구마에 물 먹여 익히라는 것, 밭에서 수수 한두 모가지 꺾어다 올려서 같이 쪄먹는다는 것 등. 고구마와 같이 찐 수수 낟알 까먹으며 소일 삼는 재미는 오죽 하던가.

고구마뿐만 아니라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인정도, 맛도, 글맛까지도 맛깔스럽기가 잘 영근 박을 타서 만든 흡족한 옴박지(큰 바가지) 같다 할까? 계절마다 찰랑이다가 찬바람이 나면 더욱 간절히 추억 속에서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리는 따습고 맛난 것들이, 고구마 조청 졸아들며 코를 자극하던 그 단내가 책을 읽는 내내 추억 속에서 목을 감아오는 듯 하였다.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은, 막내동이로 태어난 저자가 어머니나 누님 등에 업혀 다디던 시절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대략 1960년 중반쯤인데,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보릿고개라고 하는 춘궁기를 혹독하게 이겨내야만 하던 시절이다. 저자를 통해 1958년생 이후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봄날 두엄자리에 김이 오르듯 모락모락 피어난다. 부족한 것이 많고 그렇게 모질었던 배고픔의 시절인데, 먹을 것이든 물건이든 넘쳐나는 풍요 속에서 그때가 더 간절히 그리운 것은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잃어버린 맛도, 잃어버린 정서도 어떻게 다 추억할 수 있으랴만

쌀이 귀하여 겨우내 고구마를 밥 대신 먹다가 명절을 앞두고 조청을 고아, 실에 꿴 무를 넣어 먹던 그 맛을 어찌 잊으랴. 김장 배추를 따며 잘라 깎아 주던 배추 꼬랑지는 또 어떻고? 손님 오면 고급스럽게 내놓는다고 한쪽에 김이나 마른 반찬 거리며 귀하게 한 수저 떠서 물에 타주던 꿀을 생쥐마냥 드나들며 야금야금 얼마나 훔쳐 먹었던가. 메주 쑤는 것부터 청국장 만드는 것이나 두부 만드는 날, 김장하는 날 등의 풍경이 실감나도록 펼쳐진다. 저자는 상추쌈 한 가지를 두고서도 철철 넘쳐나는 맛깔스런 정서는 눈물나도록 정겹다.

“상추쌈에 대해서 꼭 한 가지 말해 둘 게 있다. 맛있게 먹으려면 쌈장도 맛있어야 하지만 상추를 많이 싸야 된다는 말이다. 열장 정도는 못 해도 일곱 여덟 장 겹쳐 싸야 상추의 제 맛이 나지 달랑 한 장 싸서 한 입에 밀어 넣고 먹어봐야 맛이 나지 않는다. 일곱 여덟 장의 상추위에 밥 한 숟가락 푹 퍼 담고, 보리새우젓 반 숟갈 넣고, 또 밥 반 숟갈 정도 퍼 얹고, 된장 조금 켜켜로 싸면 간이 고루 잘 맞아서 좋다. 이걸 양손에 들고 밥태기 뚝뚝 떨어뜨리면서 두 눈 부릅뜨고 우적우적 씹어야 제 맛을 알 수 있는 것이다. -254페이지

상추쌈 하나를 먹더라도 즐기는 정서나 맛이 이렇게 맛깔스러울까 싶다. 맛있는 음식뿐이랴? 책 속에서 만나는 사람 사이의 인정 이야기들도 어찌나 풋풋하고 정겨운지 고향 동네 사람들 이야기 같아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외지로 떠나버린 고향마을이 눈에 선했다. 나뭇짐 이야기, 서리이야기, 사카린을 물에 타먹던 이야기, 생초각시니, 갈비이모니, 두 엿장수 이야기 등 큰 주제 하나에 몇 개씩 꼬리를 지어 나오는 이야기들이 아슴아슴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핏풍은 커녕 좃풍도 아니다(116페이지에서 128페이지)'라는 이야기는 몇 번을 두고두고 더 펼쳐보고 싶다. '머릿니'를 둘러싼 적나라한 이야기다. 가난의 상징이요, 불결하여서 감추고 싶었던 '머릿니'를 이렇게 능청스럽고 천연덕스럽게 추억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양 손톱 사이에서 툭툭 터지며 죽는 이들이 생생하게 생각날 만큼, 어이없도록 능청스럽게 저자는 '머릿니'를 잡고 이야기를 듣는 독자인 나는 '머릿니' 잡는 이야기에 주책 맞게 침을 흘렸으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머릿니는 물론 옷의 서캐까지 아득 바득 잡고 살아야만 했던 시절들 이야기건만 저자의 능청스러운 이야기는 해학의 극치다. 이야기꾼에도 급수가 있나보다. 옛말에 이야기 좋아하면 못 산다는데 못 사는 것은 뒷전이요, 우선 키득거리며 듣는 이야기가 옹골차게 재미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저자의 고향 옆 김제 들녘에서 자란 나에게는 아슴아슴 눈물 머금고 피어나는 내 고향 이야기들이었다.

결코 돌아 갈 수 없음에도 지난 세월로 돌아가고 싶어 함은 지극히 인간적이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 회상할 수 있는 추억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이며, 되돌아갈 수 없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 보고 싶어 함은 흰쌀밥이 귀해서 보리죽을 먹고 살았을지라도 마음만은 풍족하게 살아 왔기 때문이리라. 우리들이 언제든 돌아 갈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끈끈한 고향과 추억을 읽었다. 한 번씩 들춰 더 잊기 전에 내 유년을 이야기 하는 길잡이 삼아 보리라.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은, 10년 전 저자가 이미 책으로 내었던 <호박국에 밥 말아 먹고>를 다시 정리하고 글들을 보탠 것이다. 저자의 또 다른 저서로는 <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가 있는데 '찰지고 맛있는 사람들 이야기'는 매번 이렇게 마음에 착착 감겨든다. 추천사에서 밝힌 윤구병 선생님 말처럼 글들이 눈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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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 사용설명서 4
마이크 해스킨스 지음, 이민아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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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밀수에는 사람뿐 아니라 동물들도 다양하게 동원된다. 1993년 보아 뱀 3백 마리가 든 화물이 미국 경찰 당국에 적발됐다. 3백 마리 전부 뱃속에 코카인 콘돔이 들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밀수꾼들은 운송 중에 뱀의 창자를 수호하기 위한 과격한 방법까지 창안해냈다. 그들은 안에 든 마약을 지키기 위해 보아 뱀들이 항문을 하나하나 꿰매 봉했다. 가련한 수백 마리 파충류의 엉덩이를 꿰매고 앉아 있는 건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들인가?"- 책 속에서

마약 사용설명서가 왜 필요하냐고요?

절대적으로 금기되고 있는 마약에 대하여 그간 나온 책들이 마약을 절대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드러내 놓고 말리는(계도) 것이었다면, 이 책은 아예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자~! 알려 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낱낱이 알려 줄 테니, 좋고 나쁘고 마약을 해야 할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것인지 알아서 판단해~!"

세계적으로 마약관련 책이 수천 종이라던가? 물론 우리나라에도 그간 마약에 대한 일련의 책들이 약간 나왔다. 그러나 이처럼 마약의 사용법부터 마약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속속들이 알려 준 책이 과연 있었나 싶다. 흥미나 지적인 것까지 골고루 갖추어 들려주고 있어서 마약의 다양한 맛을 맘껏 맛보고 취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책은 마약의 겉으로 내민 얼굴은 물론 그 알몸까지 고스란히 보여 주는데 마약의 실체가 이렇게 생생할까 싶다.

마약에 맘껏 중독 되어보세요...단 이 책을 읽는 동안에만

'대마초, 히로뽕, 양귀비'는 내가 알고 있는 마약의 이름이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된 마약의 종류는 어이없게도 많으며, 마약 성분 하나마다 독자적인 역사와 브랜드(?)를 자기들끼리 통하는 속어 또한 절대금기를 가득 품고서 재미있다. 이렇게 많은 마약들이 있었다니? 지구의 총인구중 1억 8만 명이 빠져들고 있는 마약이다. "25명중에 1명은 마약을 하는 셈이네?...그러고 보면 그렇게 특별하거나 멀지만은 않은 세계다?"

그런데, 제아무리 치명적이고 중독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도 멀리해야만 하는 양귀비꽃이다. 하지만 마약은 은밀하게 다가오는 향기다. 그렇다면 마약은 대체 무엇일까?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헤로인은 기침, 코 막힘, 천식, 기관지염에 최고의 약이었다. 바이엘사는 의사들에게 보내는 판촉용 책자에 이렇게 썼다. '헤로인: 기침 진정제...도매상에 바로 주문하십시오' 당시에는 결핵과 폐렴 같은 질병이 가장 주요한 사망원인이었기 때문에, 일상적 기침과 감기만 해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다. 헤로인은 기도를 진정시키고 호흡을 가라앉혀 복용자에게 한 번은 편안한 잠을 선사했다. 그야말로 신이 내린 선물 아닌가!" - 책 속에서

마약이라는 강한 중독성에 절대적으로 가까이 해서는 안 될 것으로 손사래를 칠지 모르지만 엄격히 따지고 보면 우리들이 오늘도 많은 감정과 사연, 목적과 변명을 가지고 즐기고 스스로를 중독시키는 커피, 술, 담배 역시 마약의 일종이다. 그 뿐인가? 코카콜라에 들어 있었던 성분 '코카인' 역시 당연히 마약인데도 보란 듯이 모든 연령층을 대상으로 세계적으로 판매되는 음료다.(코카인에 대해서도 코카콜라를 큰 비중으로 다룬다)

놀랍게도 대마초의 주원료인 대마를 차로 끓여 마신 최초의 기원은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준 신농씨다(이 책에서는 적어도 그렇다). 고고학자들이 주장하기를 인류최초의 마약 사용은 호모사피엔스가 아닌 네안데르탈인이며, 대마초나 아편이 아닌 엑스터시나 암페타민의 성분인 흥분제가 들어 있는 마황이다. 이렇게 마약은 인류의 발생 초기부터 함께 발전(?)해왔으며 처음 도입 될 때는 그야말로 기분 좋고, 병을 고쳐주는 물질이어서 함께 즐기기도 하였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마약, 그리고 뿌리 뽑히기를 바라지만 여전히 함께 걸어 갈 마약은 놀랍게도 우리들의 이성적인 혈관들이 거부하고 있음에도 천사의 얼굴로 스며들어 속삭이고 있었다.

"코카콜라! 맛있어요! 산뜻해요! 상쾌해요!" "아스피린을 믿어 보라고!" "자~ 암페타민 드실 시간입니다" "행복을 위하여 웃음가스로 웃음에 맘껏 빠져 봅시다.~!" "대마초방에 오세요! 15분 동안 밀주보다 훨씬 싸게 맘껏 취할 수 있어요. 물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양껏 사가서 두고두고 취해보세요"

경고 :건강을 해치는 마약, 그러나 읽는 것은 괜찮습니다.

<사용 설명서 - 마약>은, '아주 지적이거나 아주 단순한 흥미'그 틀을 과감히 벗어 던져버렸다. 지적인 상식과, 단순한 흥미를 웃도는 재미가 가히 중독이다. 그야말로 지적인 차원의 것들을 낄낄대며 읽을 수 있다. 한껏 진지하다가 낄낄대며 웃게 만드는 문장이라니, 호기심으로 달라붙었다가 그만 실소를 하게 만든다.

이 책은 쾌락과 각성을 독특하게 뒤섞여 놓은 모든 자연산 식물성 흥분제를 다룬다. 우리들의 몸이 원시에 가까울 때는 담배도 커피도 마약의 범주에 두어 유통을 금지시키기 위해 특별 경찰까지 조직될 정도였다. 마약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이렇게 많았을까 싶다.

마약이란 무엇인가부터 마약마다 각기 다른 특성이나 역사, 연관된 사람들이나 잡학적인 공식 비공식적인 이야기들이 전체적인 줄거리를 이룬다. 인류와 함께 다양하게 진화해 온 마약이야기들로부터 마약에 탐닉하고 즐기는 동물들 이야기도 다룬다. 마약의 주원료 대부분이 식물이다 보니 식물의 역사와 신화와 맞물려 있다. 특정 식물에 대한 관심, 동물 행동 특성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한편으로 유용하지 싶다.

'죽도록 취해서...죽었다...' 마약을 둘러 싼 에피소드로 기록된 역사적인 인물들이나 예술인들도 맘껏 만나 그 변명(?)을 들을 수 있다.

<사용설명서 - 마약>을 펼쳐든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에서였다. 대체 무엇이기에 한번 빠지면 나올 수 없는가? 그리하여 결국 생명까지 야위어 가는가? 호기심으로 펼쳤는데 중독 시키더니 읽는 내내 내 혈관에 강하게 꽂혀지는 짜릿하고 통쾌한 '천의 얼굴 마약의 세계'였다. 아쉽다면 절대 금기요 절대로 갈 수 없기에 더욱 더 막연한 마약에 대한 '신화'와 '환상'이 여지없이 깨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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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깨달음 사전 - 두곰두곰 되새겨 읽는 133가지 우리말
조현용 지음 / 하늘연못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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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단어나 표현이 나오면 매우 궁금해 하며 사전을 찾거나 다른 이들에게 물어 보게 됩니다. 사전을 찾으면서 명쾌한 해석에 기뻐한 적도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전이 참 무미건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어는 살아 있고 우리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데, 사전은 객관적인 사실만을 전달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 조현용

삶과 생활을 반영한 뜻풀이가 돋보이는 책

이 책 <우리말 깨달음 사전>(조현용 지음)은 일상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 133가지를 '다시 들려주는 우리말 에세이집'이다. 이 책이 돋보이는 점을 말하라면,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을 토대로 사전식 배열이 아닌 일상과 함께 하는 '성찰과 깨달음의 우리 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적극적인 삶을 지향'하고 있어서 희망의 이야기들이랄까.

'관계'의 뜻풀이는 '배울수록 아름다워지는 사이'이며, '다르다'는 '공통점을 전제로 해야 하는 차이'라고 저자는 풀이한다. '돌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살피는 일'이라고 설명하는가 하면, '문화'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뜻풀이가 사전적 의미와는 전혀 다르지만 일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적극적인 깨달음의 설명이어서, 나의 것으로 만들어 앞으로 글을 쓰는 동안 좋은 지침으로 삼고 싶다.

'불길한 일, 재수 없는 일. 흔히 경기 따위에서 으레 그렇게 되리라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악운.' 이것은 '징크스'에 대한 사전적인 설명인데, 저자는 '마음먹기에 따라 극복 가능한 우연의 산물일 뿐'이라고 뜻풀이한다. 뜻풀이에 그치지 않고 기분 좋은 징크스를 누구나 스스로 만들어 볼 것을 제안한다. 저자의 말대로 생각해보니 징크스는 사전의 설명처럼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기분 좋은 징크스가 생활 곳곳에서 나의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짜증나다'는 말은 '모든 일에 진심을 다하면 극복할 수 있는 것'이요. '재수 없다'는 '재수 있다'에 밀려나야 할 말'이라고 설명한다. 과연 그래야겠다. 말만 들어도 짜증나기 일쑤였던 피곤한 말들이 이참에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희망의 말'로 바뀌었으면 싶다. 흔히 버릇처럼 쓰는 '바쁘다, 피곤하다'는 '내게서 사람들이 멀어지도록 하는 말'이라고 저자는 말하는데, 이 뜻풀이를 보면서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러고 보니 '바쁘다'라는 말이 어느새 나의 입에 붙어버렸다. 정말 그렇게 바쁘긴 바쁜 건지,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특별할 것도 없을 만큼 바쁘면서 입으로만 바쁘다고 하는 건 아닌지 곰곰 생각해보았다. 내가 무심결에 입으로 바쁘다고 하는 그 순간에 상대방은 바쁜 나를 배려한다고 털어 놓으려던 마음을 하나씩 접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이번 기회에 이유 없이 바쁘기 만한 나의 말버릇을 고치기로 하였다.

가족, 결심, 게으르다, 배려, 꽃, 꿈, 내일, 눈물, 느리다, 늙다, 문화, 분노, 부탁 등, 누구나 쉽게 뜻을 설명할 수 있는 말들이다. 그러나 어디서든 볼 수 없었던 저자만의 아름다운 뜻풀이는 우리말의 향기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우리말 속에 담긴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며, 삶의 자세를 반성하면서 읽은 책이었다. 이 한 권의 책에 담겨진 우리말 뜻풀이가 나에게도 쉽게 쓰여 지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됐으면 좋겠다.

"...많은 부끄러움이 들기도 했습니다. 내가 참 우리말을 모르는구나, 우리의 삶을 겉으로만 파악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 책은 제 오랜 고민들의 소산입니다. 제가 어휘를 통해 얻은 기쁨과 부끄러움이 이 책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제 고민과 부끄러움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조금 더 행복해지고 아름다워지기 바랍니다" - 조현용

건강한 민족은 건강한 모국어(민족어)를 쓴다

프랑스는 모국어에 대해 각별하며 애정 또한 깊다고 한다. 어떤 모임 등에서 대화를 하며 단어 한마디 얼떨결에 잘못 쓴다든지, 제대로 된 표현을 하지 못했을 경우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러워한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제대로 된 모국어 사용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상식 같은 것이어서 모국어 사용을 잘못하는 것은 자존심과 직결된다는 것이다. 참 부럽고 아름다운 프랑스 언어문화다.

또한 우리말의 오염에 대하여 염려하는 어떤 분의 글 중에서 '카자르'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었다. 흑해연안에 10세기까지 있었던 카자르 민족은 카자르어가 사라짐과 함께 지도에서 영영 사라졌다고 한다. 한 민족의 흥망성쇠는 그 나라의 지식인의 의식수준과, 민족어의 건강이 크게 좌우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은 '창씨개명'이니, '제3차 교육령'을 통하여 우리말(조선어)을 빼앗고, 민족혼을 빼앗으려고 잔혹하지 않았던가.

언젠가 메신저 대화를 하고 있는 아이 옆에 있었는데, 친구와 주고받는 대화에 '응'이라는 대답조차 ㅇ.ㅇ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그걸 보며 어른인 내가 고작 해줄 수 있는 것은 "'응'도 하기 귀찮아서 ㅇ.ㅇ이냐?"이었다. 이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약간의 형식적인 설명과 틀에 박힌 가르침이 고작이었다. 내 스스로 여간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래선 안 될 것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언론의 한 부분이랄 수 있는 주체적 입장인 시민기자로서 아닌가.

말로는 한글사랑입네, 우리말이 중요합네 하면서 스스로 하는 말에 대하여 한번 돌아 볼 여유조차 없었다는 부끄러움으로 선택하여 읽은 책이었다. 잘못인 줄도 모르고 무심결에 무수히 사용해 온 우리말에 대한 사죄의 마음으로 읽었다고 할까.

사람의 문화 중 중요한 것은 말과 언어라고 한다. 사람과 동물의 다른 점은 말과 언어일 것인데, 사람으로 태어난 나 자신에게 제대로 된 말은 남을 생각하기에 앞서 나 자신에게 지극한 배려 아닐까 싶다.

두곰두곰? 두고두고 곰곰이? 두곰두곰 미소 짓게 할 우리말 133가지다. 저자의 아름다운 뜻풀이가 돋보이는 우리말 중에서 몇 꼭지를 소개하여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선뜻 이 책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을 계속 써나가야 할 사람들에게, 우리 아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하는 아름다운 우리말 에세이다. 자신의 말과 언어는 자신만이 스스로 노력하여 가꾸어야 하는 것임을 거듭 강조하면서.


우선 덧붙이고 싶은 말 몇 가지

▶독서- 자신을 깨닫고 달리는 생활의 한 부분- …,그저 생활의 한 부분이어야 합니다.…독서는 우리에게 깨달음을 줍니다. '깨닫다'라는 말은 '깨다'와 '닫다'가 합쳐진 말입니다. '닫다'는 옛말에 '달리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자신을 둘러 싼 아집과 이기심을 깨기 위하여 끊임없이 정진하고 달리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에 가까이 가는 길이 아닐까요. 책을 보면서 먼저 간 사람들의 안내를 받으며,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눈물- 오장육부를 돌아 나온 액체 /부탁-주거나 받기에 늘 신중해야 하는 것 /분노-나와 남을 동시에 해치는 것/ 생활계획표-머릿 속에다 짜서는 안 되는 것/손가락질-나머지 손가락은 나를 향하고 있는 것/ 씨앗-한 우주를 간직한 존재/ 아름답다-가장 자신다운 것

외로움-생각의 뿌리에 물을 주는 시간/전염-나의 주변을 바꾸는 것/진실-친절하지 않으면 상처를 주는 것/ 청혼-내가 가진 모든 것을 드리는 것/친구- 평생을 찾아 다녀야 하는 사람/포기- 버려야 할 것만 버리는 것/푸르다- 산과 바다를 바라보는 우리 눈에 씌어진 색

하나- 아름다운 동기로 뭉치는 일/존경할 사람-닮으려고 노력할 사람/화장실-상상과 명상소, 혹은 삶의 활력소/횡단보도-차들이 잠깐 빌려쓰는 인도/흰머리-더불어 함께 한 삶의 깊이가 담긴 것/학문-끊임없이 물으면서 이루는 것

▶저자가 해석하는 말의 또 다른 해석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보충설명으로 덧붙입니다. 참고하여 덧붙이는 것처럼 133가지 말의 해석들을 또 달리 나만의 글씀, 그 소재로 활용해봄도 좋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덧붙이는 우리말은 생각나는 대로 선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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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생활사
차윤정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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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희망, 생명의 힘... '숲'

새로운 책을 만나는 일은 늘 가슴 설렌다. 첫눈에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책의 첫인상이랄 수 있는 책표지부터 마음을 잡아끄는 책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따뜻해지는 것처럼, 책표지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생각해낼 수 있는 책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표지만으로 글을 쓴 의도를 알 수 있으며, 글쓴이의 삶과 가치관까지 짐작해볼 수 있는 그런 책. 차윤정의 <숲의 생활사>가 나에게는 그 첫 번째 목록에 들어가는 책이다.

<숲의 생활사> 책표지에는 도토리 한 알이 튼튼한 떡잎을 싹틔우고 있다. 도토리는 '나무를 심은 사람(장 지오노)'에서 주인공이 정성스럽게 황무지에 묻었던 '희망의 열매'다. 혹한의 겨울을 이겨낸 작은 도토리 한 알이다. 다행히 가을에 열매나 버섯을 얻기 위하여 산에 오른 사람들의 눈을 벗어났거나, 다람쥐에게 발견되지 않아 싹을 틔울 수 있다. 아니, 다람쥐가 가져다 두었지만, 다람쥐의 타고난 건망증 덕에 먹히지 않고 봄이 되어 싹을 틔울 수 있는 건 아닐까? 도토리로선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건망증 심하며 욕심 많은 다람쥐가 가을에 먹이를 정신없이 끌어 모아 숲 여기저기에 먹을 것을 꿍쳐두는 것이, 주머니마다 무얼 잔득 넣어서 볼록볼록한 사람의 옷을 생각하게 한단다.

이런 다람쥐를 두고 사람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다람쥐는 겨울에 먹을 양식을 맘껏 끌어 모으려고 일을 해 줄 암컷과 의도적인 결혼을 한다는데 만족(?)할 만큼 모았다 싶으면 암컷의 눈을 멀게 하여 겨우내 암컷에게는 떫은 도토리만 주고 저는 달콤한 알밤만 먹는다나? 이렇게 말하면 참으로 비정한 수컷이다.

다람쥐는 욕심이 많아 정신없이 먹이를 끌어들이지만, 한편으로는 건망증이 심해서 숲의 구석구석에 숨겨둔 먹이를 다 찾아 먹지 못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다람쥐가 찾아내지 못하고 겨울이 지나 봄을 맞이한 열매는 싹을 틔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된다.

다람쥐의 지나친 건망증이나 지나친 욕심을 자연계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일종의 '생명의 질서'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영악스러운 자연이 스스로의 조절 능력을 위하여 다람쥐에게 지나친 욕심과 건망증을 함께 주었다는 것이다.

한편의 사람들은 비정한 다람쥐를 만들어내고, 한편의 사람들은 자연의 '생명순환고리 역할자'로서 다람쥐를 만들어낸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 역시 호기심으로 비정한 다람쥐 이야기를 자주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자연이 필요에 의해 선택한 욕심 많고 건망증 심한 다람쥐를 우선으로 한다.

이 책은 도토리 한 알이 틔워내는 싹의 의미가 가득 담겨 있다. 단순한 도토리가 아니라 희망의 숲을 상징하며, 우리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모습 이면에 있는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자연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또한, 우리 숲 학자 차윤정이 들려주는 숲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요,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기울여보기를 바라는 저자의 숲에 대한 애정이랄까. 희망과 치유의 도토리 싹. 숲에 관심을 두고 숲을 이해하며 사랑하는 일은 곧 스스로의 삶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걸 우선 깨닫게 될 것이다.
숲을 통하여 삶의 희망을 얻는다

쓰러진 나무… 폭풍우에 의해 큰 나무가 쓰러지면 숲에는 구멍이 생긴다. 이 구멍을 통해 많은 빛이 들어오면 땅 속에 묻혀 있는 씨앗들이 싹을 내밀기도 하고 옆에서 자라던 나무들이 새로운 가지를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숲은 다양한 나이의 나무들로 짜깁기되고 복잡한 곳이 된다. - '여름, 치열한 생의 의지' 편에서

▲ 거대한 고목의 쓰러짐은 다른 생명의 기회가 된다.
ⓒ2005 웅진닷컴
여름의 거센 폭풍우에 큰 나무 한 그루가 쓰러졌다. 거대한 나무의 그늘에서 언젠가 싹을 틔울 날을 기다리는 씨앗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강자의 소멸은 그늘에서 부실하게 자라나며 곁가지를 맘껏 틔우지 못하는 여린 나무들의 희망이다. 또한 나약한 나무들 스스로가 쓰러짐을 선택함으로써 기꺼이 다른 식물들의 양분이 되어준다. 책 속에서 이 모습을 보며 글을 읽어 나가는 동안 삶의 위안을 얻었다.

지금 나의 삶도 발아를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거대한 나무는 언젠가는 솎아지든 스스로의 쓰러짐이든 그늘을 거둘 것이다. 나의 숲에 찬란한 빛이 들 것이다. 지금 나의 힘듦도 삶의 긴 여정을 놓고 볼 때 일시적인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시절의 힘든 날들은 다시 보면 삶의 배려였다. 좀 더 아름답고 찬란하게 꽃 피울 수 있는 봄을 위한 혹한의 겨울이었다.

숲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책표지도 좋지만 이 책은 나에게 생명의 위대함과 비밀스러움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의 책이어서 자주 들여다본다. 이 책은 숲을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숲의 살아가는 모습을 담았다.

봄에 기지개를 켜고 희망의 싹을 틔운 숲은 여름에 치열한 생의 의지를 보여준다. 자리다툼과 공존으로 가을을 맞이한 숲의 생명체들과 숲은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기 위하여 낙엽을 떨어뜨림으로써 다시 돋을 봄을 준비한다.

이 책은 숲을, 아니 길가에서 만나게 되는 풀꽃 한 송이에도 깃들여 있는 우주를 쉽게 발견해내고 자연에 더 가까워지는 안목을 주게 될 것이다. 숲의 사계절, 숲 속 생물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만나게 되는 자연은 놀랍다.

전체적으로 숲의 4계절을 담았으며, 계절마다 자연의 특성과 모습을 생생한 사진 180여 점과 함께 자세히 담았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아서 틈틈이 사진만 찾아 설명을 우선 읽어도 좋다.

여름의 빨간 열매와 가을날의 빨간 열매의 차이는 무엇일까? 가을에 보라색 꽃이 많은 이유는 무엇이며 밤이나 도토리 같은 열매와 산수유나 산사나무열매의 비밀들은 무엇일까. 가을 열매들이 유독 붉은 이유는 무엇일까, 가늘고 여린 겨울나무가 천근 무게의 눈을 지탱할 수 있는 생명의 비밀은 무엇일까?

이런 것을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 읽다보면 결국 알게 될 것이다. 자연에 관심을 두는 것, 그리하여 좀 더 많이 알아가고 이해하거나 사랑하는 일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임을. 나아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임을. 숲을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숲의 사계절, 그 이야기를 따라 가보니 숲의 생활은 사람의 생활이었다. 사람의 삶 그 자체였다.

"많은 사람들이 숲을 찾고, 숲을 좋아한다고, 숲과 가까이 지낸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다음 물음들에 대해 답을 해보자. 숲에 들어서면 왜 어두운가? 봄 숲에서 야생화는 왜 꽃부터 피울까? 숲의 흙은 왜 검고 축축한가? 깊은 숲의 나비는 들판의 나비에 비해 왜 색도 짙고 몸도 클까? 숲에서는 왜 생물들의 시체를 보기 어려울까? 한 해 동안 숲의 높이는 얼마나 자랄까? 1헥타르의 숲에 저장된 탄소량은 얼마나 될까?… 이 책은 숲을 하나의 공간 또는 큰 생명으로 보고 숲의 생활사를 추적하였다" - 책 머리에서 차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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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2005-11-29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저도 이번에 샀어요. 저자의 <신갈나무 투쟁기>를 읽고 반해 버렸답니다. 차윤정씨는 어쩜, 글도 그리 잘 쓸까요? 문학적으로... 이 책은 바쁜 와중에 읽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고요할 때, 오직 혼자만의 긴 시간을 내서 읽고 싶은 책이지요... 오래 음미하며 읽고 싶은 책이라 아직 덮어 놓고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시절의 힘든 날들은 다시 보면 삶의 배려였다. 좀 더 아름답고 찬란하게 꽃 피울 수 있는 봄을 위한 혹한의 겨울이었다.> 이 부분이 자꾸 제 마음을 울리네요. 저 역시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대한민국 사진공화국
정한조 지음, 유준재 그림 / 시지락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사진을 할 때는 노크를 하라고요?

오랫동안 원하던 디지털 카메라를 드디어 갖게 되면서 기분이 한껏 부풀어 나아닌 다른 존재들을 향해 셔터를 마구 눌렀다. 볼품없지만 나의 저작권이 생겼고 사진저작권의 소비자였던 내가 저작권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나는 남의 '저작권'에 대해 어떻게 하였는가.

내가 찍은 '나의 사진'을 갖기 전에는 마우스 두 번 딸각거림으로 '펌'을 하여 블로그를 맛깔스럽게 치장하였다. 밋밋한 텍스트에 그럴싸한 사진을 곁들임이 아무래도 나의 글을 더 폼 나게 하는 것 같았다. 음악에 대한 저작권 문제로 법적공방이 치열할 때도 나의 '펌'은 거리낌 없이 계속되었다. 음악파일만 저작권과 관련되는 줄 착각하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림이나 사진, 즉 '이미지'를 둘러싼 저작권 문제가 불거지고서야 '펌'을 하던 나의 손이 멈칫거리기 시작하였다.

'사진을 할 때는 반드시 노크를 해야 합니다'를 주제로 써 내려간 <대한민국사진공화국>이란 책은 '저작권'과 '초상권'을 다루고 있다. 저작권에 대해선 이젠 어느 정도 많이 알려졌다지만, 정작 초상권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 이쯤에서 한번 생각해보면 어떨까? 언젠가 저작권보다 거대한 소용돌이로 나타날지도 모를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셔터를 생각 없이 누르고 절제 없이 플래시를 터뜨리기 때문이다. 무분별하게 찍고 찍히고 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이나, 일간지에 내가 원하지 않음에도 나의 모습이 버젓이 보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텔레비전이나 일간지의 카메라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허락도 없이 찍어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비록 내가 원하지 않음에도 어떤 특정 장소에 내가 있었음이 텔레비전 같은 대중매체를 통하여 알려지고 그리하여 자신만의 불쾌한 사정이 발생해도 '이왕 이렇게 된 것 할 수 없지'라며 한숨만 쉬지는 않는가?

어느 날 어떤 행사장에 가게 되고 비록 그 장소가 문화적인 자부심이 강한 곳이라고 하여도 내가 그곳에 갔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다. 아니 굳이 숨기지는 않더라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가 나의 모습을 함부로 찍어 신문이든, 이런 인터넷 공간에든 올린다는 것은 원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뉴스를 보다가, 어느 블로그에 방문했다가 우연히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그 까짓것 사진 몇 개 내 블로그에 올렸다고 범죄자 취급해? 벌금까지? 그렇게 아까우면 혼자만의 공간에서 혼자만 볼 것이지…." 혹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때, 자신만의 세계를 표현한 사진을 누가 자기 것인 양 쓰겠다면 선뜻 동의할 수 있을까? 우연한 공간에서 출처 없이 나도는 자신만의 작품(?)이나 심중의 글을 만나게 되고 기분 나빠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자신은 정작 남을 향하여 아무런 배려도 없이 쉽게 셔터를 눌러대면서, 스스로의 모습을 떳떳이 어떤 공간에서건 서슴없이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 되는가?

사진을 한다는 것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행위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계(물질적, 정신적)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고유의 것입니다. 사람만이 이런 세계를 갖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폭을 넓혀보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자기만의 세계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사진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한다는 의미일까요? 그것은 카메라를 이용해 사진으로 찍을 대상의 세계를 담는 행위입니다. 또는 그것을 이용해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창조하는 행위입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세계를 갖고 있는 것처럼(그래서 사진을 하는 것이겠죠) 사진의 대상 역시 고유의 세계를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사진을 찍을 때도 노크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풍경이나 꽃과 같은 어떤 존재에게도 이런 마음가짐일 때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으며 제대로 된 영상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대한민국 사진공화국>은 좋은 사진을 찍는 기술보다는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는 덕목을 가르치는 영상 비평서이다.

대한민국은 인터넷강국, 사진공화국에 우리는 산다

대한민국은 지금 사진으로 넘쳐 난다. 사진만이 아니라 영상이 넘쳐나서 중독의 수준에 이르렀다. 우리가 하루 종일 보는 사진은 과연 몇 장쯤일까? 이른 새벽 일간신문에 끼어 들어오는 전단지의 사진부터 텔레비전을 끄고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과연 얼마만큼의 영상을 접하는 걸까? 그런데 우리가 하루에 만나는 수많은 영상 중에서 꼭 보아야 할 것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영상시대를 이끌어 간다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영상들은 건강한 편인가?

우리들은 무분별한 영상에 끊임없이 자극되고 있으며 중독 되어 있다. 옐로저널리즘 성향의 음란물은 거리에건 인터넷이든 마구 떠돈다. 그야말로 '인터넷강국'은 '스팸물강국'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음란물과 스팸이 넘치고 있다. 또한 난데없이 엽기영상이라는 것이 반짝 뜨면서 사람들은 동물들에게 담배나 술을 들려주고 재미있다고 웃는다. 그것도 모자라서 신생아의 인권은 생각조차 없이 자신만의 공간을 위한 장식물로 쓰려고 웃으며 셔터를 누르기도 한다.

이 책은 절제 없이 마구 눌러대는 셔터로 만들어진 우리시대의 영상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신랄한 글들은 눈물을 쏙 빼게 할 만큼 예리하며 날카롭다. 저자는 영상시대의 대표인 텔레비전과 인터넷만을 비판하지 않는다. 병든 영상의 출발이었던 옐로 저널리즘 성향의 스포츠신문이나 일간지를 비롯하여 그간 몇 년 간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영상관련 사건들을 낱낱이 들추어내어 꼬집는다.

우리 시대의 부끄러운 이야기들이라지만 너무 신랄하고 날카로워 마음이 아리고 아프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문제점으로 느끼고 있는 문제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도 하고 싶었던 말이며 생각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하고 싶었던 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들은 이른바 영상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가장 민감하면서도 앞으로 끊임없이 터질지도 모를 다각도의 많은 문제들을 담고 있는 것들이다.

'영상시대', '1인 디지털카메라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들이다. 디지털 카메라를 갖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생각해보았으면 하는 이야기들이다. 또한 건강한 인터넷 공간을 원하거나, 제대로 된 영상문화를 주도해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또한 반드시 스스로 점검해보고 한번만이라도 정리해 볼 필요성이 있는 이야기들이다.

미술평론가이자 사진학박사인 저자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좋은 사진을 얻고 싶다면 좋은 사진의 선별능력이 우선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유감스럽게도 영상이 병들어 있다. 우리가 함께 그 병든 실체를 똑똑하게 보아서 문제를 우선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래서 우리의 눈을 먼저 씻은 다음 제대로 된 영상문화를 만들어 가자. 그것이 인터넷강국의 자존심이며, 우리 아이들에게 떳떳하게 물려 줄 수 있는 가치 있는 자신이다. 우리들은 영상 시대 주역 아닌가.

한 집에 한 대의 카메라가, 기념적인 날에 찍던 사진의 개념이 이제는 누구나 원하는 만큼 찍어 표현하고 남기는 것으로 변했다. 그야말로 내 맘껏, 내가 원하는 대로 나만의 세계를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남보다 특별하고 의미 있는 사진을 가질 수 있을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누구나 쉽게 디지털카메라를 가질 수 있고 찍고 찍히는 이 시점에 반드시 필요한 우리들이 지켜야 할 영상에 관련된 예절(양심)과 그 잣대를 이 책은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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