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생활사
차윤정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치유와 희망, 생명의 힘... '숲'

새로운 책을 만나는 일은 늘 가슴 설렌다. 첫눈에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책의 첫인상이랄 수 있는 책표지부터 마음을 잡아끄는 책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따뜻해지는 것처럼, 책표지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생각해낼 수 있는 책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표지만으로 글을 쓴 의도를 알 수 있으며, 글쓴이의 삶과 가치관까지 짐작해볼 수 있는 그런 책. 차윤정의 <숲의 생활사>가 나에게는 그 첫 번째 목록에 들어가는 책이다.

<숲의 생활사> 책표지에는 도토리 한 알이 튼튼한 떡잎을 싹틔우고 있다. 도토리는 '나무를 심은 사람(장 지오노)'에서 주인공이 정성스럽게 황무지에 묻었던 '희망의 열매'다. 혹한의 겨울을 이겨낸 작은 도토리 한 알이다. 다행히 가을에 열매나 버섯을 얻기 위하여 산에 오른 사람들의 눈을 벗어났거나, 다람쥐에게 발견되지 않아 싹을 틔울 수 있다. 아니, 다람쥐가 가져다 두었지만, 다람쥐의 타고난 건망증 덕에 먹히지 않고 봄이 되어 싹을 틔울 수 있는 건 아닐까? 도토리로선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건망증 심하며 욕심 많은 다람쥐가 가을에 먹이를 정신없이 끌어 모아 숲 여기저기에 먹을 것을 꿍쳐두는 것이, 주머니마다 무얼 잔득 넣어서 볼록볼록한 사람의 옷을 생각하게 한단다.

이런 다람쥐를 두고 사람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다람쥐는 겨울에 먹을 양식을 맘껏 끌어 모으려고 일을 해 줄 암컷과 의도적인 결혼을 한다는데 만족(?)할 만큼 모았다 싶으면 암컷의 눈을 멀게 하여 겨우내 암컷에게는 떫은 도토리만 주고 저는 달콤한 알밤만 먹는다나? 이렇게 말하면 참으로 비정한 수컷이다.

다람쥐는 욕심이 많아 정신없이 먹이를 끌어들이지만, 한편으로는 건망증이 심해서 숲의 구석구석에 숨겨둔 먹이를 다 찾아 먹지 못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다람쥐가 찾아내지 못하고 겨울이 지나 봄을 맞이한 열매는 싹을 틔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된다.

다람쥐의 지나친 건망증이나 지나친 욕심을 자연계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일종의 '생명의 질서'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영악스러운 자연이 스스로의 조절 능력을 위하여 다람쥐에게 지나친 욕심과 건망증을 함께 주었다는 것이다.

한편의 사람들은 비정한 다람쥐를 만들어내고, 한편의 사람들은 자연의 '생명순환고리 역할자'로서 다람쥐를 만들어낸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 역시 호기심으로 비정한 다람쥐 이야기를 자주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자연이 필요에 의해 선택한 욕심 많고 건망증 심한 다람쥐를 우선으로 한다.

이 책은 도토리 한 알이 틔워내는 싹의 의미가 가득 담겨 있다. 단순한 도토리가 아니라 희망의 숲을 상징하며, 우리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모습 이면에 있는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자연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또한, 우리 숲 학자 차윤정이 들려주는 숲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요,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기울여보기를 바라는 저자의 숲에 대한 애정이랄까. 희망과 치유의 도토리 싹. 숲에 관심을 두고 숲을 이해하며 사랑하는 일은 곧 스스로의 삶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걸 우선 깨닫게 될 것이다.
숲을 통하여 삶의 희망을 얻는다

쓰러진 나무… 폭풍우에 의해 큰 나무가 쓰러지면 숲에는 구멍이 생긴다. 이 구멍을 통해 많은 빛이 들어오면 땅 속에 묻혀 있는 씨앗들이 싹을 내밀기도 하고 옆에서 자라던 나무들이 새로운 가지를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숲은 다양한 나이의 나무들로 짜깁기되고 복잡한 곳이 된다. - '여름, 치열한 생의 의지' 편에서

▲ 거대한 고목의 쓰러짐은 다른 생명의 기회가 된다.
ⓒ2005 웅진닷컴
여름의 거센 폭풍우에 큰 나무 한 그루가 쓰러졌다. 거대한 나무의 그늘에서 언젠가 싹을 틔울 날을 기다리는 씨앗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강자의 소멸은 그늘에서 부실하게 자라나며 곁가지를 맘껏 틔우지 못하는 여린 나무들의 희망이다. 또한 나약한 나무들 스스로가 쓰러짐을 선택함으로써 기꺼이 다른 식물들의 양분이 되어준다. 책 속에서 이 모습을 보며 글을 읽어 나가는 동안 삶의 위안을 얻었다.

지금 나의 삶도 발아를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거대한 나무는 언젠가는 솎아지든 스스로의 쓰러짐이든 그늘을 거둘 것이다. 나의 숲에 찬란한 빛이 들 것이다. 지금 나의 힘듦도 삶의 긴 여정을 놓고 볼 때 일시적인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시절의 힘든 날들은 다시 보면 삶의 배려였다. 좀 더 아름답고 찬란하게 꽃 피울 수 있는 봄을 위한 혹한의 겨울이었다.

숲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책표지도 좋지만 이 책은 나에게 생명의 위대함과 비밀스러움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의 책이어서 자주 들여다본다. 이 책은 숲을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숲의 살아가는 모습을 담았다.

봄에 기지개를 켜고 희망의 싹을 틔운 숲은 여름에 치열한 생의 의지를 보여준다. 자리다툼과 공존으로 가을을 맞이한 숲의 생명체들과 숲은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기 위하여 낙엽을 떨어뜨림으로써 다시 돋을 봄을 준비한다.

이 책은 숲을, 아니 길가에서 만나게 되는 풀꽃 한 송이에도 깃들여 있는 우주를 쉽게 발견해내고 자연에 더 가까워지는 안목을 주게 될 것이다. 숲의 사계절, 숲 속 생물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만나게 되는 자연은 놀랍다.

전체적으로 숲의 4계절을 담았으며, 계절마다 자연의 특성과 모습을 생생한 사진 180여 점과 함께 자세히 담았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아서 틈틈이 사진만 찾아 설명을 우선 읽어도 좋다.

여름의 빨간 열매와 가을날의 빨간 열매의 차이는 무엇일까? 가을에 보라색 꽃이 많은 이유는 무엇이며 밤이나 도토리 같은 열매와 산수유나 산사나무열매의 비밀들은 무엇일까. 가을 열매들이 유독 붉은 이유는 무엇일까, 가늘고 여린 겨울나무가 천근 무게의 눈을 지탱할 수 있는 생명의 비밀은 무엇일까?

이런 것을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 읽다보면 결국 알게 될 것이다. 자연에 관심을 두는 것, 그리하여 좀 더 많이 알아가고 이해하거나 사랑하는 일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임을. 나아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임을. 숲을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숲의 사계절, 그 이야기를 따라 가보니 숲의 생활은 사람의 생활이었다. 사람의 삶 그 자체였다.

"많은 사람들이 숲을 찾고, 숲을 좋아한다고, 숲과 가까이 지낸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다음 물음들에 대해 답을 해보자. 숲에 들어서면 왜 어두운가? 봄 숲에서 야생화는 왜 꽃부터 피울까? 숲의 흙은 왜 검고 축축한가? 깊은 숲의 나비는 들판의 나비에 비해 왜 색도 짙고 몸도 클까? 숲에서는 왜 생물들의 시체를 보기 어려울까? 한 해 동안 숲의 높이는 얼마나 자랄까? 1헥타르의 숲에 저장된 탄소량은 얼마나 될까?… 이 책은 숲을 하나의 공간 또는 큰 생명으로 보고 숲의 생활사를 추적하였다" - 책 머리에서 차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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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2005-11-29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저도 이번에 샀어요. 저자의 <신갈나무 투쟁기>를 읽고 반해 버렸답니다. 차윤정씨는 어쩜, 글도 그리 잘 쓸까요? 문학적으로... 이 책은 바쁜 와중에 읽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고요할 때, 오직 혼자만의 긴 시간을 내서 읽고 싶은 책이지요... 오래 음미하며 읽고 싶은 책이라 아직 덮어 놓고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시절의 힘든 날들은 다시 보면 삶의 배려였다. 좀 더 아름답고 찬란하게 꽃 피울 수 있는 봄을 위한 혹한의 겨울이었다.> 이 부분이 자꾸 제 마음을 울리네요. 저 역시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