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공명
지율 스님 지음 / 삼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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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 스님의 질문을 이 사회는 어떻게 이해했을까?
 
지율스님의 두 권의 책 <초록의 공명> <지율, 숲에서 나오다>는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다. 책은 간결한 형태의 일기와 시, 편지글들이고 환경운동가 이전에 사진가였던 저자가 찍은 사진들을 페이지 사이에서 자주 볼 수 있어서 그다지 지루하지 않다. 그러나 쉽게 넘겨가며 읽다가 걸려드는 것들이 있어서 결코 쉽지만 않은 것이 또한 이 책들이었다.

목숨까지 내걸 만큼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고 절실하단 말인가? 자연환경도 결국 그 가치를 알아주고 혜택을 누릴 사람이 없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은 인간으로서 지나친 이기일까?

"… 신자유주의의 흉내를 내어 '신 개발주의'라는 말을 쓰거나 혹은 건설업 위주의 경기 부양책 때문에 지율 스님 사건이 생겼다고 단순하게 얘기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사건이다. … 지율은 한 종교인이며, 구도자이고, 한 여성이고,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이 시대를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율에겐 관심이 많고, 지율이라는 몸을 빌려서 던져진 질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 도롱뇽이 죽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롱뇽도 살 수 없는 상황, 즉 지금의 흐름이 계속되었을 때 우리나라는 '아픈 아이들의 세대'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질문이기도 하고, 또한 어른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석훈(초록의 공명, 지율 스님의 질문을 이 사회는 어떻게 이해했을까? 중에서)


최근 몇 년 간 지율스님은 우리들에게 천성산과 도롱뇽이 의미하는 질문과 답으로 존재했다. 나 역시 환경보호론 쪽이고 불자지만 근본적인 입장이 같다고 무조건 수긍하기보다는,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좀 더 알아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싶고 냉정한 판단을 하고 싶어서 이 두 권의 책을 선택하였다.

<초록의 공명>은 지율 스님의 두 번째 책으로 2004년 4월 이후 천성산 홈페이지에 틈틈이 올린 글과 지율스님이 직접 찍은 사진들을 모아 엮었다. 글들은 비교적 짧고 간결하며 쉽다. 하지만 자연의 일원으로서, 같은 생명체로서 잘려 나가는 자연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고 있는 글들이어서 그 여운이 깊다.

전체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첫 부분은 2004년 3월 초부터 1백일 단식을 끝낸 2005년 2월 3일까지 매일의 심경을 기록한 일기 형식이다. 이어지는 가운데 부분은 지율스님의 자연과 환경에 대한 기본적인 주관과 가치기준을 좀 더 확실히 엿볼 수 있는 자연에 대한 자유로운 단상과 성찰에서 오는 자연과의 교감, 여러 곳에서 강연하였던 원고모음이다.

끝부분에 외부 인사들이 기고한 글과 신문기사 등을 수록하였는데, 다양한 시각의 이 글들은 그간 우리에게 있어 왔던 지율과 천성산과 도롱뇽으로 대표되는 사건(?)의 줄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그러나 지율스님의 책이라고 하여서 자신의 방법만이 옳다고 옹호하는 시각이나 자신에게 공감하는 글만 실려 있는 것은 아닌, 비교적 냉정한 시각의 글들도 보인다. 몇 년 간의 과정을 정리하기에 유용하다.

<지율, 숲에서 나오다>는 '도롱뇽소송' 과정까지 이어지는 책으로, 80여 일간의 단식을 비롯한 43일 동안의 삼천배, 부산역에서 출발하여 천성산으로 이어지는 삼보일배 등의 과정을 담았다.

첫 부분에는 단식과정의 심경을 볼 수 있는 일기형태의 글이 이어진다. 또한 자연의 일부인 우리들이 어떻게 자연과 교감하며 살아가야 하는지의 필요성과 함께 지율 스님이 직접 카메라에 담은 아름다운 자연의 사진들이 눈길을 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불쑥 다가온 지율 스님이지만 자연과 교감하였던 한 개인의 맑은 속내와, 2년 여에 걸쳐 천성산의 구석구석을 탐사하여 얻어진 자료를 바탕으로 한 환경문제에 대한 지율의 객관적이며 적극적인 자세를 볼 수 있다.

책 뒷부분에는 도롱뇽 소송과 관련된 이야기와 세계 각 환경단체들의 동참문이 실려 있다. 아울러 세계의 환경보호운동에 대한 실례가 실려 있어서 환경문제를 좀 더 심각하게 받아 들여야 하는 이유를 쉽게 파악해볼 수 있다.

이 두 권의 책에는, 급하게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숨가쁘게 진행되었던 그간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정리하고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전체적인 맥락의 글들이 많이 보인다. 무엇을 얻든, 공감이든 안티든 독자 각자의 몫일 것이다.

환경지키기 결국 우리 스스로의 몫이다

공명(公明)-사사(私事)로움이 없이 공정(公正)하고 명백(明白)함

사실 지율 스님만의 초록공명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하는 우리들의 환경을 우리 스스로 지켜내야 하는 우리들의 공명이어야 맞지 않을까?

우리들은 내 고향의 변해버린 정취와 추억을 회상하고 안타까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최첨단의 대중매체가 편하고 유용한 사람들이다. 또한 삭막해진 환경과 산업발전의 부산물로 얻어진 내 아이의 아토피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이 환경의 오염에 몸을 담그고 살아가는 아픈 현실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다.

최근 몇 년간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왔던 지율 스님인가? 지율은 스님이라는 특정종교인의 자세보다는 자연의 한 존재로서 자연의 또 다른 생명들과 함께 건강하게 호흡하고 살아가고 싶어 하는 적극적인 생태주의자다. 지율의 초록 공명으로 우리들의 자연에 대한 본성을 모두 대신 할 수도 없고, 대중매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들이 우리 모두의 시각일수도 없으며 목소리와 뜻을 전부 대신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싶다.

지율의 목숨을 건 단식의 초록공명이든, 다양한 대중매체든 우리들 스스로의 자성과 성찰을 위한 보조자료일 뿐이고 이런 것들을 참고하거나 도움삼아 우리들 저마다 스스로의 공명은 스스로 찾아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스스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해보자. 지율에게 깊이 공감하든, '안티지율'이든, 비구니 승려라는 종교적인 것도 모두 나중으로 두고 한 개인이 같이 살아가야하는 자연을 지켜내려는 가장 근본적인 목소리를 스스로 판단해보기에 썩 도움이 될 만한 글들이다.

"지난 1백 일 단식 이후, 몇 달을 지나오면서 저는 이 사회가 움직이는 보다 큰 동력을 보았으며 줄곧 '어떤 운명' 앞에 서있는 저와 천성산을 보았습니다. 저와 천성산은 누구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 정치와 거대한 자본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톱니바퀴의 축에 끼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으며, 권력과 정치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그들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진실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제 몸에는 그들이 지나간 수없이 많은 바퀴자국이 있으며 상처는 오히려 제 안쪽에서 점점 깊어지고 있습니다."- <초록의 공명> 머리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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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위의 과학 - 내가 아는 도로, 알아야 할 도로 공학과의 새로운 만남 24
신부용.유경수 지음 / 지성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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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보도나 신호등 하나 설치하는데 드는 비용은? 도로가 일직선이면 그만큼 시간이 단축될 뿐더러 기름값이 적게 들어 에너지 절약효과도 클 텐데 굳이 곡선이어야 할까? 사망사고가 난 곳에서 사고가 되풀이 되는 이유는? 소문처럼 귀신이라도 붙은 걸까? 우리의 교통사고 사망률이 높다는데 대체 어느 정도일까? 우리나라의 도로에 들어가는 돈은?….'

도로를 이용하면서 이 정도의 생각은 누구나 하였을 법하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도로에 대해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도로는 이제 현대인들에게 필수다.

산업발전과 함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자동차 보급과 경제발전의 주역으로서의 도로의 기능만 앞세우다보니 오늘날의 도로에는 교통사고를 일으킬만한 치명적인 함정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도로와 교통사고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교통사고 사망자를 줄일 수 있을까? 우리의 도로는 지금 어떤 모습이며 어떤 길을 걸어 왔는가? 도로의 증설만이 교통정체를 해결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환경까지 생각하는 최적의 도로를 만들 수 있을까?

정작, 도로의 주이용자인 우리는 도로에 대하여 얼마만큼 알고 있으며, 앞으로 우리와 함께 할 도로에 대하여 우리가 이 시점에서 알아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안전한 교통생활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도로위의 과학>은 '내가 아는 도로 알아야 할 도로'라는 부제와 함께 도로의 모든 것을 들려준다. 지금 우리가 이용하는 현재의 도로는 물론, 인류와 함께 해왔던 역사속의 도로들, 즉 도로의 발생부터 인류에게 그간 있어온 수많은 도로의 모습을 책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또한 자동차와 함께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도로의 모습까지 다각도로 제시하고 있다. 세계의 도로와 교통정책은 물론 우리나라의 과거, 현재, 미래의 도로를 본다.

책은 전체적으로는 큰 길의 시작과 함께 우리가 날마다 만나고 이용하는 현재의 도로에 중점을 두었다. 자동차를 이용하여 고속도로를 달리거나 도심의 거리를 걸으면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많은 구조물들부터 현재의 교통정책들까지 담겨있다. 또한 도로건설과 관련된 전반적인 것들까지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놓아서 이제까지 잘 모르고 있던 도로에 관한 많은 것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저자는 도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도로는 가능한 한 적게, 그리고 좁게 만들어야 한다. 다만 모든 사람들이 가고 싶은 곳에 편하고 안전하고 신속하게 도달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이러한 것이 도로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특히 승용차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승용차를 많이 이용하면 할수록 사회는 황폐해지고 경제적 부담도 커진다."- 책 속에서

세계 보건기구에 의하면 해마다 교통사고 사망자는 전 세계 120만 여명으로, 현대 역사상 최대의 재앙이라는 2004년의 동남아시아 지진해일피해 사망자 15만의 8배에 해당된다. 그것도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점점 늘어가는 추세라니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또한 교통사고는 현대인의 사망이유 9위이며 이렇게 계속되면 2030년에는 3위에 이른다고 한다. 교통사고 사망자의 40~50배에 해당하는 사고 부상률 까지 계산하면 5000만을 웃돌며, 이는 우리나라의 총인구를 웃도는 수치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통사고 사정은 어떤가? 2003년에는 교통사고가 약 25만 건이 발생했는데, 7212명이 사망하고 37만 6503명이 부상을 입었다. 부상자가 없는 사고는 통계에 잡히지 않으며… 한해 38만 명이 부상을 당한다면 10년이 지나면 부상자가 380만 명. 20년이 지나면 760만 명. 우리나라 인구 4800만 명 기준 20년을 돌아보면 6명에 한명 꼴로 부상을 당했다는 이야기다. 한 가족 구성원이 3.5명이라고 할 때 두 집 건너 한집은 부상자가 났다는 통계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를 가만히 내버려 두고 살 수 있을까?"- 책 속에서 요약

세계의 각 나라들마다 교통사고의 증가에 위협을 느끼며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저자가 들려주는 교통선진국들의 다각적이며 다양한 실례들 중에 마음을 끄는 것은 현재에도 계속 진행 중인 스웨덴의 비전제로 운동(Vision Zero)이다.

스웨덴의회는 1997년에 교통사고 사망자를 단 한명도 내지 말자는 다짐과 함께 비전제로 정책을 도입하였다. 이런 노력으로 인구 900만에 자동차보유는 400만대로 2002년 인구 10만 명당 교통사고 사망자는 6.0명이며 영국과 함께 세계 최저의 수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미국과 함께 15명이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사고발생시 응급처치에 관한 것인데 교통사고도 많을뿐더러 응급처치가 미약하고 구조자체가 불편한 우리가 적극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정책이다.

사고를 줄이거나 예방하는 차원의 정책은 종종 있어왔지만 단 한건의 교통사망사고도 있어선 안 된다는 정책을 국가에서 먼저 채택한 적은 세계적으로도 그간 없었다고 한다. 교통선진국들 중에는 선거공약으로 교통정책을 내놓는 후보들이 많으며 이렇게 공약한 교통정책은 정치로 이어진다고 한다. 또한 개인이 사고를 냈을 경우에도 운전자에게 눈에 띌만한 잘못이 없으면 도로설계의 잘못을 물어 국가를 상대로 소송까지 가능하다고 한다. 급발진 등으로 사고가 나도 권리 찾기에 힘든 우리나라로선 부러운 사례들이 많이 보인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도로에서 위협적인 팻말을 자주 만나고 있다. '교통사고사망지점'임을 알려주거나 '사고 많은 지역'임을 알리는 캠페인 팻말들이다. 이것은 교통사고를 줄이거나 사망자를 막을 수 있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보다 적극적이며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 해결해야만 가능하다. 또한 개인은 누구에게나 일어 날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에게 일어 날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안전한 교통생활환경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이제까지 보았던 도로가 다시 보이고, 끊임없는 문제제기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재미있다. 알고 있으면 운전이 훨씬 즐거울 것이다.

'카파라치들은 어디로 갔을까?' '교차로와 속도감시 카메라' '운동신경이 발달한 사람은 음주운전을 해도 괜찮을까?'…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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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의 쿠바 - 체 게바라와 함께 한 혁명의 현장
그레고리 토지안 지음, 홍민표 옮김, 오스왈도 살라스.로베르토 살라스 사진 / 황매(푸른바람)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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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의 쿠바(원제 Fidel's CUBA)>는 쿠바혁명 40주년을 맞이하여 발간된 사진 에세이집으로 '쿠바혁명과 피델 카스트로, 그리고 체 게바라'를 생생한 감동으로 다시 만날 수 있다.

이 사진 에세이집에 수록된 100여 장의 흑백사진들은 세계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또한 사진들마다 사진가의 회상이 수필 한 편씩을 이루고 있는데 사진만큼이나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로, 사진을 통하여 보는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이 독특한 매력으로 전해진다. 흑백의 사진들마다 강렬하고 의미 또한 깊으며 사진 한 장마다 감동적인 이야기 한편들이다.

사진을 찍은 주인공은 '오스왈도 살라스'와 '로베르토 살라스' 부자로 이들은 혁명의 현장에 늘 밀착되어 있었다. 그것도 혁명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카스트로가 선택한 사진가여서 그만큼 가까이 밀착하여 수많은 이야기들을 사진으로 찍어 냈으며 관련한 이야기들을 많이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들의 사진은 혁명을 성공하게 하였으며 세계인들의 가슴에 깊고 강렬하게 파고들었다.

책 속에서 만나는 흑백의 사진들은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아 낼 줄 알았던 살라스 부자에 의한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쿠바혁명 생생한 기록들이다. 또한 사진가 자신들의 이야기다. 이 책을 펼쳐들 독자들은 사진과 짧은 에세이로 구성된 이야기가 지닌 방대함에 놀라고 말 것이다. 이들의 사진을 통하여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뒤를 따라가는 동안 이들의 인간적인 매력에 또한 놀랄 것이다.

쿠바 혁명은 성공했지만 쿠바인들의 삶은 더 나아진 것 없이 여전히 힘들다. 그러나 쿠바인들에게 최고의 지도자는 변함없이 피델 카스트로뿐이다. 체 게바라는 39살의 나이에 죽었지만, 책은 물론 영화로도 끊임없이 제작되는가 하면 여전히 세계인들의 많은 관심과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가?

한 순간도 혁명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사나이 피델 카스트로의 이야기와 쿠바혁명의 현장이, 살라스 부자의 탁월하고 독특한 감성과 사진가의 열정으로 생생하게 전해져온다.

혁명의 숨 가쁜 현장과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그리고 민중들

▲ 피델 카스트로
ⓒ 황매
센트럴 파크 앞을 지나고 있는 변호사 카스트로의 모습이다. 세계인들에게 혁명 지도자 카스트로의 모습은 구김이 많은 푸른 제복과 덥수룩한 수염에 모자를 쓴 모습, 민중에게 연설하는 모습 등으로 많이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사진 에세이집에서는 이런 모습과는 다른 의외의 모습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굵은 역사의 줄기 속에 가려진 이면의 이야기들이나 모습이 또 다른 감동으로 전해져 온다.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 사진이 그 중 하나로 아버지 오스왈도 살라스가 찍었다. 카스트로는 게릴라가 되기 전에 말끔한 정장을 즐겨 입는 변호사였고 소일삼아 가난한 노동자의 사진 스튜디오에 자주 들렀다. 책 속의 사진마다 회상을 적고 있는 아들 로베르토 살라스는 이때 14살로 카스트로에게 커피를 자주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사진마다 들려주는 회상기가 독특하고 재미있다.

▲ 야구하는 피델 카스트로
ⓒ 황매
쿠바인들은 야구를 좋아하며 카스트로 역시 야구를 좋아하고 즐겼다고 한다. 책 속 사진들을 보다가 시계를 두 개 차고 있는 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끌었다. 카스트로는 산 속에서 늘 두 개의 시계를 찼는데 이것은 하나의 시계가 멈추는 만약의 경우에 또 다른 시계로 동료들과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라고. 이런 이야기만이 아닌 카스트로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들과 이야기가 많이 보인다. 그래서 집어 든 순간 여간해서 놓기 힘든 책이다.

▲ 연설하는 피델 카스트로
ⓒ 황매
1964년의 피델 카스트로. 연단에 서서 청중을 매혹하는 피델 카스트로의 능력은 대단하였으며 이와 관련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온다. 대부분의 웅변은 몇 시간 동안 계속되고 밤새 계속되기도 예사였으며 민중들은 열광하였고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웅변가의 어깨에는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 오랫동안 평화롭게 즐기다 가곤 하였다. 청중들은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쿠바의 종교에서 비둘기는 마법을 상징).

피델 카스트로는 자석 같은 연설가였다고 사진가는 회상한다. 부패한 정권 바티스타에 대한 청중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고 양키달러로 대표되는 미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와의 만남
ⓒ 황매
아르헨티나 출신의 게릴라 게바라에게 쿠바인들은 아르헨티나식 최고 감탄사 'Che(hey man)'를 붙여 '체 게바라'라고 부르길 좋아하였다. 전직 변호사 카스트로와 전직 의사 게바라는 29살과 27살에 만났지만 만나기 전부터 각각 다른 곳에서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두 사람이 만나 쿠바 혁명을 이끌었다. 5장에서 체 게바라 이야기를 풍성하게 접할 수 있다.

게릴라가 되기 전의 체 게바라는 사진으로 돈을 벌었다고 하는데, 기자들의 카메라를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언론 앞에 늘 수줍어했다고 한다. 카스트로는 물론 체 게바라와도 밀착되어 있었던 사진가의 회상을 통하여 체 게바라의 인간적인 면모를 더 깊은 감동으로 만날 수 있다. 세계에 많이 알려진 체 게바라의 사진들은 대부분 이 사진가에 의해서다.

▲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최고의 지도자다
ⓒ 황매
이 사진은 사진가의 열정 덕분에 멋지게 탄생한 사진이다. 카스트로의 조각상 같은 이 사진을 쿠바인들은 좋아한다. 사진가를 미처 알아보지 못한 군인에 의해 폭행당한 사진가가 아픈 배를 움켜잡고 트럭에 누운 채 찍어서 이런 구도의 사진이 탄생했다. 사진가의 열정도, 사진도 멋있다.

이 사진집은 순수하게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멋진 기회가 될 것이다. 사진을 따라 혁명가와 함께 고산지대의 오솔길을 걷는가 하면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작전을 짜며 가득 피워 올린 시가연기로 자욱한 방안도 엿볼 수 있을 것이며 쿠바 민중들과 함께 카스트로의 자석 같은 힘에 열광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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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망에 담아온 산사 이야기 2
임윤수 글.사진 / 가야넷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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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福)은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짓고 거두는 삶의 과정

"복(福)은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짓고 거두는 삶의 과정이라고 한다. 땅 일궈 씨를 뿌리고 한 여름날 땀줄기 쏟아내며 잘 가꾼 농부가 좋은 결실을 거두듯, 삶의 과정에서도 항상 뿌리고 가꿔야 거둬들일 수 있는 삶의 열매가 바로 복이다."
- <걸망에 담아 온 산사 이야기> 2권 '괴산 백운사 마애약사 여래불편'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는 새해 덕담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며 절실한 표현이어서 대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누는 인사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라는 인사도 주고받는다. 그런데 남을 향하여 하는 인사란 결국 '자신을 위해서'란 생각이다. 남에게 인사를 하면서 스스로 겸손해지며 인사를 통한 순수한 배려는 자신을 돋보이게 한다. 인사를 서슴없이 하자. 특히 새해를 활짝 웃으며 아낌없는 덕담으로 축원해주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 "새해 소원성취하세요" "새해 건강하세요!"

<걸망에 담아 온 산사 이야기>를 틈나는 대로 한 꼭지씩 읽는 동안, 복(福)의 상징인 당나라 명주현의 계차(契此)스님을 자주 생각하였다. 가진 것 없는 걸인스님이 그래도 가진 것이 있다면 포대(자루나 걸망) 하나뿐이었다. 삶을 달관하여 신통력을 가진 스님이 들고 다닌 신비스러운 포대를 붙여 포대화상이라고 불렀는데, 전설적인 이 선승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복의 상징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계차, 즉 포대화상은 포대 하나 가지고 다니면서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 손을 벌려 구걸을 하여 포대 속에 차곡차곡 넣었다가,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포대속의 물건을 꺼내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아무리 넣어도 포대는 넘치지 않았고 아무리 꺼내도 포대는 바닥나지 않았다.(포대화상과 관련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오지만 복과 관계되는 포대 이야기만.)

가진 것은 많지만 나눌 줄 모르는 것을 자신이 대신 구걸하여 필요한 곳에 나눔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복을 짓게 하였으며, 가난한 사람은 복을 받고 다시 다른 사람과 나누게 하였다. 포대화상이 사람들 사이에서 복을 나누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어떻게든지 함께 나누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우리들 사이에서 서로 나눌 수 있는 복(福)도 포대화상의 포대처럼 끝없이 받아도 넘치지 않고 남에게 얼마든지주어도 바닥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걸망에 담아 온 산사 이야기 1, 2>는 산사기행문이면서 단순하게 사찰을 향해 가는 여정만을 담고 있는 것만이 아닌 저자의 성찰이 돋보이는 글모음집이다. 복을 상징하는 포대화상의 이야기처럼 산사에 깃들인 이야기들이 생생하고 재밌다. 산사를 향하는 여정은 물론 눈여겨보아야 하는 문화재나 풍경도 사진으로 가득 담겨 있다.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걷는 듯 다정하다. 두 권에서 순전히 절집이 좋아 찾아가는 여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으며 해인사나 실상사처럼 이미 많이 알려진 곳을 다시 찾는 것도, 이름도 다소 낯선 작은 암자나 산기슭에 버려진 듯 천년을 살고 있는 마애불을 찾아가는 여정도 즐겁다. 석주 스님은 물론 몇 년 사이 입적한 여러 스님의 다비모습은 쉽게 볼 수 없는 소중한 자료이다.

사진으로나마 찾아보는 산사고 이미 가보았던 곳이어서 추억과 함께 가보기도 하는 절집이지만 들려주는 사람이 어떤 곳을 먼저 열어 주는가에 따라 그 느낌은 다르다. 아울러 스스로에게든, 남에게든 복을 짓는 마음으로 읽어 나가다 보면 훨씬 실감난다. 열심히 산다는 것, 자신에게 충실하다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바로 복이다. 돌부처님의 은은한 미소처럼 다른 사람을 위하여 배려하는 마음도 또한 복을 짓는 것이다.

걸망과 포대가 같은 물건이기도 하고, 책에서 만나는 이야기들이 포대화상의 신비로운 포대에 채워지고 꺼내져도 바닥날 줄 모르는 물건들처럼 술술 재미있거니와, 재미 사이로 틈틈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글들이어서 그런지 책을 펼쳐 읽으면서 포대화상의 복을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남에게든, 나에게든 복을 짓는 '2006년'을 살고 싶다

김제 흥복사(2004년 10월 화재로 전소)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는데, 이른 새벽의 여명이 눈부실 만큼 많은 눈이 내렸었다.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이른 새벽의 눈 속에 입김이 얼어붙는 줄도 모르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녔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문득 돌아 본 등 뒤에는 방향도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고 헝클어진 모양새의 발걸음이 정신없이 엉켜있었다.

내가 이미 찍은 발자국들은 땅에 굳어 비질을 어렵게 할 것이며, 또 다른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내가 이미 찍은 발자국을 밟으며 걸을 것이었고 눈이 녹기 전까지 길이 될 것이기도 하였다. 함박눈은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지만 내가 이미 찍은 발자국 그 흔적 위에 눈이 내려 아무런 흔적 없이 쌓이기란 힘든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스물 성년이었다.

한해를 다시 돌아본다. 내가 남긴 발자국은 어디에 있으며 내가 남긴 마음은 다른 사람들 가슴에 어떤 씨앗이 되었을까? 복을 많이 받았는가 아니면 복을 많이 지었는가? 처음에는 기사를 쓰면서 하나씩 더해지는 숫자들을 조바심으로 보태었다. 그러나 성년의 나이에 눈 쌓인 새벽 산사에서 문득 뒤돌아보았던 내 어지러운 발걸음이 떠올라 앞으로만 향하여 치닫던 날을 돌아보기를 몇 번 하였던가.

조급한 마음이 들 때마다 손에 펼쳐지는 대로 한 꼭지씩, 산사에 들러 법당을 찾아 108배를 하는 마음으로 읽었던 이 글들은 내 자신 스스로에게 복을 짓는 방법과 다른 존재에게 복 짓는 방법을 생각하게 하였다. 올해는 어떤 복(福)을 지을 것인가?

오유지족(五唯知足; 스스로 족함을 안다. 오직 만족할 줄 알면 행복해지고 부자 된다. 자신을 둘러 싼 모든 것들은 자신에게 있다)이라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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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과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까
하이먼 러치리스 지음, 김정희 옮김 / 에코리브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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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컵이나 그릇)이 깨지면 불길하다? 그날은 하루 종일 재수 없는 일만 생긴다? 13일의 금요일에는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이 일어난다?

그야말로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자니 께름칙하기도 하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 보았을 이런 미신(?)들은 과연 사실일까?

또한 수많은 대중에게 읽혀지길 바라며 일간지에는 '일일운세'나 '별자리운(점성술)' 등이 실린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인 4명 중 1명이 점성술을 믿고 의지하여 미국 내 1000종이 넘는 신문에 매일같이 별자리 운세가 실린다고 하는데 이 별자리 점을 믿거나 말거나 저자가 과학적으로 분석해내는 방법은 흥미롭다.

<어떻게 하면 과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까?> 저자 하이먼 러치리스는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의 별자리 점을 쳐주기로 유명한 점성가 조앤 퀴글리(Joan Quigley)와 전 미국대통령 레이건에 얽힌 이야기를 통하여 점성술을 다각적인 측면에서 분석한다.

레이건 자신의 책 '내 차례(My Tum)'에서 밝히고 있고, 조앤 퀴글리도 자신의 '조앤이 말하는 것(Whan Does Joan Say?)'에서 밝히고 있는 이야기를 토대로 하는데 별다른 생각 없이 호기심으로 보기도 하던 점성술의 '허'가 보인다.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재직 당시에 중요한 방문 약속을 해야 할 때, 이를 낸시 여사가 수없이 바꾼 적이 있다고 하는데 대부분 조앤 퀴글리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1987년, 2차 세계대전 때 죽은 독일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독일 비크베르크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이 방문에 대한 논란이 일자 낸시는 조앤 퀴글리에게 이 일정의 '운'을 검토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조앤 퀴글리는 추모헌화가 예정된 이른 아침이 레이건이나 세상에 불운하다며 몇 시간이 지난 11시 45분을 주장했다고. 이 말을 적극 수용한 낸시는 대통령 보좌관에게 예전처럼 시간 변경을 고집하였다.

조앤 퀴글리가 시간 변경을 주장하며 태양이니 수성 혹은 사자자리의 특성을 거론하여 내세운 이유는 이론적으로 탄탄하며 무척 과학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저자가 제시하는 과학적인 사고로 보면 단순하며 동화식의 이론일 뿐이다.

조앤 퀴글리의 주장대로 보면 행사를 주관하는 태양은 오직 레이건 만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 말하자면 태양은 세상의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레이건이 행사를 치를 그 시각에) 모두 관여하여 개개인의 별자리마다 그에 적합하게 영향을 미치는 전지전능하거나, 아니면 오직 레이건의 사자자리에만 레이건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과연 정말 그럴까?

자, 어떻게 하면 과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까? 과학적으로 사고할 필요성은 무엇인가? 과학은 인류에게 무엇인가?

"이 책은 과학의 방법, 즉 미신적이고 동화식으로 생각하는 방법과 구별되는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에 관한 책이다. 또한 어떻게 과학이 세상을 변화시켰으며, 오늘 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관해 설명하는 글이다. 먼저 300년 전인 16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마법'을 '범죄'로 여긴 잘못되고 미신적인 사고방법이 무고한 사람들을 처형하는데 어떻게 오용되었는지를 살펴보자" -머리말 중에서

미신적인 사고(생각)에 의한 오용의 위험에 대하여 저자가 예로 들고 있는 것은 '마녀사냥'과,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눈부신 발전의 과학의 토대가 되었던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 뉴턴 같은 과학자들의 주장이다.

세일럼의 소녀 8명이 한 장소에서 집단적 발작증세를 일으켰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이들에게 마녀가 깃들었기 때문이라며 소녀들에게 생각나는 사람들을 말하라고 강요하였다. 소녀들은 생각나는 대로 이웃 사람과 친구의 부모형제를 말하였다. 이렇게 거론된 사람들은 합리적이지 못한 단순한 검증만을 거쳐서 사형에 처해졌다. 마녀가 언제 기습할지 모르니 사형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라 믿으면서. 자, 오늘날이라면 소녀들의 발작을 어떻게 분석하여 해결할까?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과학적인 사실들이 그 당시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단으로 몰려 사형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계 관련 이론도 갈릴레오의 지구관련 이론도 이단으로 간주되어서, 이들의 주장이 진실로 확인됨에도 불구하고 주장하고 동조해 준다는 것은 종교의 이단아였으며 사형의 이유였다. 그래서 이들 중에는 감옥에 갇히거나 일부 학설들은 죽은 후에나 세상에 발표되었다.

이렇게 그간 인류에게 있었던 사실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 가다보면 과학자들이 어떻게 세계의 진실을 밝혀냈는지, 과학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어 놓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필요성을 느끼게 하며, 과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가설을 세우고 접근하여 바라보아 추정해야 하는지, 여러 측면의 이야기와 가설을 통하여 알려준다.

'과학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마지막 주제는 과학이 인류에게 어떤 방법으로 밀접해있는지를 다양하게 접근하여 알려준다. 과학은 우리 생활에 깊이 관여하고 있으며, 과학은 더 나은 삶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러나 많은 부작용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과학지식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관점을 조금만 달리하여 본다면, 인류의 당면문제들을 좀 더 과학적인 눈으로 본다면 모두가 문제 해결자가 될 수도 있다.

동전을 던져 앞면과 뒷면 나올 그 확률은? 생각 없이 동전을 던지다가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이 정말로 50:50인지 갑자기 궁금해 질 때가 있다? 동전을 던진 수의 절반이 정말 앞면이고 나머지 절반은 정말 뒷면일까? 자, 언제까지 던지고 던져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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