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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가치'를 일깨우는 철학동화 한권이 의미 깊다. 세상을 향한 '걸음마'를 배우기 전부터 본능적으로 터득하게 된 '말'이어서 우리들은 당연하고 쉽게 말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에게 말은 무엇인가? '세치 혀를 조심하라'고 하였으며,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한 '말이 씨가 된다'던가?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개미>는 철학동화지만 겨우 80페이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담고 있는 뜻은 살아가는 동안 틈틈이 펼쳐보면서 두곰두곰(두고두고 곰곰이) 되새겨봄직하다.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면, 세상을 사랑하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눈빛만으로도 마음이 오고 갈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철학동화 한권은 남다르게 스며들고 오래 남을 듯하다.
<개미>의 줄거리는 이렇다. 열심이 지나쳐 혹독하게 일을 하는 개미들, 초록개미와 파란개미가 있었다. 색깔만 다를 뿐 일반개미나 다름없는 이들은 더듬이로 의사소통을 하고, 냄새로만 내남(나와 너)을 구분하였다.
그런 어느 날 이들에게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고 손으로 쓰는 인간의 언어'를 쓸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다. 어느 날 찾아 온 이런 기적이 신기하여 개미들은 하루 종일 말만 하며 말의 힘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개미들이 말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요정 '엘로이즈'의 쓸데없는 호기심과 경망스러움에서 비롯된 가볍고 단순한 행동 때문이었다.
천방지축, 사사건건 남의 일에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엘로이즈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사람들이 수다를 떨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다. 참으려고 해도 요술봉이 닿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이 말들은 엘로이즈에 의해 이리저리 옮겨지고 혼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은 엘로이즈를 피했고, 이때 마침 죽어라 일만 하는 개미가 눈에 들어 온 것이다.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쓸데없는 호기심뿐인 엘로이즈에게.
개미들은 기적처럼 다가 온 말에 심취해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개미들 스스로 말이란 자신들에게 걱정거리를 안길 수 있는 것이라 결론짓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말을 갖게 된 개미들에겐 새롭고 강력한 계급이 생겼고, 일개미는 전처럼 슬쩍 빠져나가 나무사이를 놀러 다니는 작고 소소한 여유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말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전에는 더듬이나 냄새로 의사소통을 하다보니 일은 해도 해도 끊임없었다. 그러나 이제 말로 의사소통을 하며 그만큼 의사소통이 원활해지고, 따라서 일주일동안 하던 일을 하루면 끝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젠 남은 여가를 보내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극장, 오페라 하우스, 강연회장을 지었고 가수와 소리꾼, 시인, 웅변가, 이야기꾼이 생겨났다.
마침내 이웃한 초록개미와 파란개미 사이에 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했다. 전에는 서로 아웃으로 살면서 좀 불편해도 넘어 갔는데, 이젠 '말'로 그때그때 바로 표현하다보니 모든 것이 훨씬 더 쉽고 강했다. 추울 때 '나 추워' 하면 더 추운 것처럼. 직접 표현하는 이들의 말은 이젠 단순히 불편한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깊은 감정싸움이 되어가고 있었다.
자부심에 찬 파란개미는 말했다. "파랑은 파릇파릇 귀엽고 팔랑팔랑 친절하며 팔딱 팔딱 싱싱하고 폭신폭신 부드러운 기분 좋고 온갖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 하지만 초록개미들 사이에서 누군가 '파랑'이라고 말하자 파랑개미에게는 '파'괴적이고 '파'르르 성을 잘내고 '팔'푼이인데다 '파'렴치하다는 뜻으로 들렸다. 자부심에 찬 초록개미는 말했다."초록은 초롱초롱 총명하고 출중하고 충성스럽고 침착하고 천재적이고 창의적이라는 뜻으로 들렸지" 하지만 파랑개미 중 누군가 "초록"이라고 말하자 '초'라하고 '촌'스럽고 '촐'싹대고 '초'치기 좋아하는 '천'박한 '철'면피라는 뜻으로 들렸다.-후반부 개미들의 감정싸움 중에서
애초에 색깔개념이 없이 냄새만으로 구분하던 이들은 말이 생기면서 분별력이 생기고, 이렇게 서로가 잘났다고 싸웠다. 이들은 급기야 "우리는 초록색인데 저들은 불쌍하게도 파란색이다" " 파란색으로 태어나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옳지" "파란개미를 타도하자" "오랑캐 초록개미야 꺼져라" 이렇게 저주를 퍼부어대며 격렬하게 싸웠고, 세상은 파랑색도 아닌, 초록색도 아닌 무채색으로 변해갔다.
요정 엘로이즈가 이들에게 왔을 때 개미들의 목이 잘린 채 나뒹굴고 있었다. 개미들의 잘린 목과 시체는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파랑이든, 초록이든 아무런 구분도 없이 무채색으로, 모래와 섞인 채 뒹굴고 있는 무수한 개미들의 시체였다. 이렇게 파랑개미와 초록개미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작가는 왜 하필 개미를 내세워 우리의 말의 가치를 돌아보게 하는 걸까? 티끌만한 개미 한 마리 한 마리가 모여서 조직적인 개미사회를 이루듯, 우리사회역시 한사람 한사람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다시 우리들의 무수한 말과 생각들이 모여서 문화를 이룬다. 초록개미니 파랑개미니 하는 것은 굳이 필요 없을지도 모르는 '이념'이나 '사상'들을 말하는 것 아닐까.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고 편을 가르고 적을 만들고 살아가기도 한다.
우리들에게 말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우리들의 '말'. 그래서 늘 무심히 쓰기도 하였고, 나의 필요에 의해 빙빙 돌려 말하기도 했다. 또한 상대방의 눈치를 보면서 오해하지 않을 말을 골라 썼으며, 필요에 따라 거짓말도 하였다. 그리고 또 나는 어떤 말을 하고 살았던가. 지나고 보니 별거 아닌데 누군가의 말 한마디를 쉽게 털어내지 못하고 나는 왜 소중한 만남을 단절시키고, 결국 등 돌리고 말았던가…. 나의 말을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다.
비단 입으로 직접 하는 말에 불과할까? 요즘에는 인터넷 공간에서 댓글로 상처받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말로 상처받은 사람, 말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사람 모두에게 이 책은 남다를 것이다. 철학동화 <어린왕자>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투명하고 맑으며 깊은 울림으로 다가 온다. 아이들과 함께 언제든 읽어 보고 싶고 누구에게라도 선뜻 권해주고 싶다. 특히 누군가 한마디 말로 상처 받았거나, 말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어서 괴로워하고 있다면 꼭 전해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