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낮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얘길 듣고 뉴질랜드 부모님께 알린 뒤 동두천에서 할머니가 폐렴으로 입원해 계신 용인까지 갔다. 차 없는 나는 대중교통을 쓰는데 1호선-7호선-분당선-용인경전철을 거쳐 모두 3시간 반이 걸렸다. 빨리 돈 벌고 면허 따서 차를 사야지..

 

가 보니 1930년생이신 할머니는 의식이 없으셨고 두 분 다 직장에 휴가내셨다는 인천작은아버지어머니가 두 딸, 내 셋째넷째친사촌동생들,과 함께 나머지 가족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이런저런 얘기-그러니까 존엄사와 연명치료, 포항지진, 수능, 혼인 한 해 막 넘긴 언니사촌동생의 신혼부부생활, 대학생인 동생사촌동생생활-를 하다 미처 모르던 걸 하나 알게 됐는데 할머니에게 군인인 첫나면이 있었고 혼인한 지 스무날째 625 나는 바람에 전장에 나서는 걸 본 게 살아서 마지막 본 것이었다고.

 

그렇게 청상이 되신 뒤 스무 해 동안 시어머니 모셨고 시어머니 돌아가신 뒤인 1970년대 초에야 중매로 3녀3남 둔 홀아비인 할아버지를 만나서 사셨다고. 스무날 남편 때문에 스무해 시어머니 모신 것도 잔혹극인데 할아버지는 돈 못 버시는 데다 무지막지하게 가부장적-2017년 유행하는 말로 영락없는 한남충, 내가 한남충인덴 유전효과도 있는 듯 싶다. 그렇다고 조상 탓만 하고 앉아있으면 어느 속담의 슬기로움을 증명하게 될 뿐이니 눈 떠서 한남충에서 벗어나야겠다-이셨으니 정말 기구한 삶을 사셨다는 걸 깨달았다. 할머니가 유전적으로는 3녀3남의 어머니가 아니고 7남5녀의 할머니가 아닌 것은 이미 알았고 할머니 나이로 봤을 때 할아버지 만나기 전에 다른 남편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은 했지만 어른들께 여쭤봐서 얘기ㄹㅡㄹ 들은 건 어제 처음이었다. '고작 스무날 같이 살았을 뿐인 데다 사진도 드문 때여서 첫남편 얼굴 기억도 안 난다'고 언젠가 인천작은어머니께 말씀하셨다고.

 

그렇게 다섯이 임종을 기다리는데 이윽고 급한 볼일 때문에 늦으신 수원작은아버지 가족도 오셔서 병실은 미어터질 거 같았다. 이 때 간호사가 와서 살펴보고 하는 말이 '아침보다 상태가 나아져서 일단 위기는 넘긴 거 같다'고. 가족회의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났다. 일단 수원작은아버지가 홀로 병실을 지킨다.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정상적으로 출근/등교를 하되 일 끝나는 대로 병원으로 온다. 다만 일 하다가도 위급연락을 받으면 되도록 바로 달려오는 것으로 한다. 인천작은아버지가족은 모두 인천으로 돌아가셨고 백수인 나는 동두천보다는 용인에서 훨씬 가까운 수원작은아버지댁에서 작은어머니와 사촌과 대기하기로 됐다. 날 밝으면 작은어머니랑 나는 병원으로 가고 여자인 첫째친사촌동생과 남자인 둘째친사촌동생은 일단 출근한다. 뉴질랜드 부모님과 내 동생은 못 오시겠지만 백수인 나라도 임종했으면 좋겠고 임종 때 되도록 많은 이들이 함께했으면 좋겠다. 할머니, 좋은 장손이 못 돼서 미안해요. 이제 곧 괴로웠던 이세상에서 벗어나시면 저세상에서는 편하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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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2017-11-28 화요일 새벽2시24분인데 잠이 안 와서 이 글 쓰며 알라딘 서재글 뒤적이며하다 재미난 걸 하나 알아냈다. 여섯 주 전인 2017-10-13 금요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제수씨가 아들을 낳아 동생은 아빠가 됐는데 이름을 현겸으로 붙였다. 돌림자가 상자여서 돌림자를 따르면 상현이나 상겸이가 됐어야하지만 돌림자 무시하기로 했다. 재밌는 건 나도 아버지도 돌림자를 몽자로 알고 있었는데 추석 때 수원작은아버지랑 얘기하다 돌림자가 상자인 걸 알게 됐다. 아버지랑 나랑 돌림자를 몽자로 생각한 까닭은 현대 정주영 회장 때문이었다. 정주영 회장 동생이 정세영이고 아들들이 정몽구,정몽헌,정몽준처럼 몽자 돌림이니 정씨에 영자 돌림인 내 항렬 다음 세대는 몽자 돌림자로 생각했는데 우리 부자가 놓친 결정적인 거 하나를 수원작은아버지께선 아셨다. 현대 정씨는 하동 정씨고 우리는 동래 정씨인 거. 동래 정씨에선 영자돌림 다음에 상자 돌림이란다. 동생이 현겸이 태어난 걸 알려오며 영어이름은 헨리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하자 난 13일의 금요일 태어났으니 제이쓴이 어떠냐고 이메일을 써 보냈었다. 그러다 바로 조금 전 곧 돌아가신 지 7주기가 되는 물만두님 서재글 읽으며 옛 추억에 잠겨있다가 현겸이란 이름이 어디서 나왔을지 짐작이 갔다. 만화가 천계영의 <언플러그드 보이> 주인공 이름이 강현겸이란다. blog.aladin.co.kr/mulmandu/248336 내가 알기로 동생은 이 만화 읽은 적 없으니 아마 제수씨가 이 만화의 팬이고 이름을 고른 것도 제수씨일 듯 싶다. 부모님게는 비밀로 하기로 맘먹었다. 첫손자 이름이 며느리가 좋아한 만화 속 사람 이름이란 걸 아시면 시부모며느리 사이가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증조모는 죽고 증손은 태어나는 거를 생각하다 문득 박완서선생님 수필 셋이 생각났다. 셋 다 죽었거나 죽음을 앞둔 이들-나이든 증조모, 교통사고로 죽은 외삼촌, 몸져누운 할머니-과 파릇파릇 어린 갓난쟁이를 이야기삼은 건데 하나는 1970년대 말인지 80년대 초 박완서선생님의 갓난 손자와 선생님의 어머니께서 어울리는 걸 보시고 쓰신 것으로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문학동네,2015)인가 <지금은 행복한 시간인가>(문학동네,2015)에 실렸고 둘째는 선생께서 1988년에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얼마 뒤 태어난 둘째손녀가 자라는 모습을 보시고 쓰신 건데 아마 <한 길 사람 속>(작가정신,1995)인가 <어른노릇 사람노릇>(작가정신,1998)에 실렸을 거고 특히 어렴풋하지만 '그애가 자라는 걸 보면서 아들 잃은 슬픔을 더 잘 견뎌냈다. 손녀는 아들을 대신한 거 같았다. 나는 다른 손자녀들이 내 편애를 느낄까 두렵다'라는 대목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마지막 셋째는 노무현 참여정부 후반기 때 쯤에 박선생님이 아시는 분을 문병가서 그 환자분과 환자분의 손-성별은 잊었다-이 함께하는 걸 보시고 쓴 거였다. 이건 아마 <호미>(열림원,2007)였나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현대문학,2010)였나 <세상에 예쁜 것>(마음산책,2012)에 실렸을 거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글에선 환자분 이름을 밝히시지 않으셨는데 어디선가 그 환자분이 고 김점선 화백이란 얘길 읽었는지 들었는지 한 기억이 난다. 언제 시간 나면 열댓권쯤 되는 선생님 산문집을 다시 발표 순서대로 주욱 읽어봐야겠다. 다시 수필 셋으로 돌아가자. 셋 다 나이와 병과 교통사고가 대표하는 죽음과 갓 태어난 어린이가 대표하는 삶을 대조하며 사람 한살이의 허망함과 숭고함을 노래하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침 동생 아들이자 할머니 증손자는 6주 갓난쟁이고 수원작은집 1녀1남의 둘째인 내 둘째친사촌동생도 맏딸에 이어 둘째가 곧 태어난다. 그렇게 한세대는 사라지고 다음세대가 바통을 이어받는다. 삶은 한없이 덧없으면서도 한없이 장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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