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 내외가 엄격했기 때문에 연애라던가 스캔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람 사는 사회에서는 어떠한 장벽이 있더라도 남녀가 사랑에 빠지게 마련이고, 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스캔들도 일어난다.
야사에는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총명한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일부러 방탕한 짓을 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전혀 다르다. 양녕대군은 어느 눈 오는 밤, 풍류를 즐기기 위해 대궐을 나왔다가 마침 가마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는 유부녀 어리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진다. 실록에 ‘자색이 있다’고 기록될 정도로 어리는 뛰어난 미인이었다. 세자 양녕대군과 어리는 거침없는 사랑에 빠졌고,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양녕대군은 폐세자가 된다. 이는 ‘세기의 로맨스’로 불리는 윈저공과 심슨 부인의 사랑과 닮아 있다. 윈저공은 영국의 왕위 계승권까지 포기하고 심슨 부인과 결혼했다.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들의 사랑은 전 세계적인 스캔들이 됐다.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면서 훗날의 세종대왕이 되는 충녕대군이 세자에 책봉된다. 태종은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둘째인 효령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또 그친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술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불가하다.”
효령대군이 왕세자가 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가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이라니 얼마나 황당한가.
충녕대군은 세종이 돼 업적을 남겼지만 자신의 맏며느리인 세자빈을 두 번이나 폐서인으로 만들었다. 두 번째 세자빈 봉씨가 동성애자여서 폐서인이 됐다.
“봉씨가 소쌍을 몹시 사랑하여 잠시라도 그 곁을 떠나기만 하면 원망하고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나는 비록 너를 매우 사랑하나, 너는 그다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하였고….”
실록의 기록이다. 봉씨가 사랑한 여인 소쌍은 궁녀였다.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와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봉씨가 궁녀 소쌍을 사랑한다는 소문이 대궐 안에 파다하게 퍼지자 세종이 소쌍을 추궁했을 때 소쌍이 대답한 말이다.
“소쌍이 단지와 더불어 항상 사랑하고 좋아하여, 밤에 같이 잘 뿐 아니라 낮에도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았습니다.“
세자빈 봉씨는 세종이 추궁을 하자, “소쌍이 단지라는 궁녀와 동성애를 했다”고 발뺌을 한다. 역시 실록에 있는 기록이다.
스캔들은 사실인데도 은폐하려고 하기 때문에 더욱 부풀어진다. 허위 학력 문제로 불거진 신정아씨 문제가 점입가경이다. 비호 인물로 지목된 인사는 한사코 부인하더니 검찰 압수 수사에서 연서로 보이는 이메일이 100여 통이나 발견됐다. 처음부터 은폐하려 하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허위 학력 사건으로 간단하게 매듭지어졌을 것이고, 온 나라를 들끓게 하는 스캔들로 발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선조 때 진주에 사는 하종악의 후처 이씨 부인은 전처의 딸이 그녀가 간음했다고 모함을 하는 바람에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는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다. 영남 학계의 거두인 남명 조식이 “치마를 걷은(은유적으로 음란하다는 의미) 죄”라고 말하자마자, 이씨 부인 간음사건은 스캔들이 되어 영남 일대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런데 당대의 유명 문인인 이정이 “증거도 없고, 남녀의 일은 은미하여 타인이 알 수 없다” 라고 이씨의 편을 들었다. 처사로서 깨끗한 삶을 중요하게 생각한 조식은 이정에게 절교를 선언했다. 이정은 조식에게 실망하여 교분을 나누고 있던 퇴계 이황에게 이 사실을 편지로 알렸다. 이황은 “그만한 일로 절교를 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라고 이정에게 답장을 보냈다. 이황은 완곡한 표현으로 조식을 비판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식의 제자들이 이황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이황의 제자들 역시 조식을 비난했다. 이 사건은 영남 유림의 양대 산맥인 이황과 조식이 서로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조식의 제자들은 이씨 부인의 집으로 몰려가 집을 부수는 행패까지 부렸다. 이때부터 영남에서는 음란한 행위를 한 사람의 집을 부수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이씨 부인 스캔들은 영남 일대를 뒤흔들었고, 조정에서의 논쟁으로까지 번졌다.
조선시대 한 마을에서, 한날 한시에 태어나 18세에 부부가 되어 평생을 서로 깊이 사랑하면서 아름답게 산 부부가 있다. 담락당 하립과 부인인 삼의당 김씨. 이들은 18세의 신혼 첫날밤에 주옥 같은 시로 서로의 사랑을 고백한다.
“삼경에 밝은 달은 봄꽃 같아라/ 꽃이 화려한 때라 달빛이 더욱 곱네/ 달 따르는데 꽃 같은 님이 오니/ 둘도 없는 아름다움이 내 집에 있네.”
신랑 하립이 신부를 위하여 지은 시다.
“하늘엔 달빛이 그윽하고 정원에 꽃이 만개했네/ 꽃 그림자 서로 엉키고 달 그림자 더 할 때/ 달 같고 꽃 같은 우리 님과 마주 앉으니/ 세상의 영욕이야 내 알 바 아니네.“
신부 삼의당 김씨가 신랑 하립을 위하여 지은 시다. 신랑은 신부를 “꽃 같은 임이 왔다”고 반기고, 신부는 “우리 임과 마주 앉으니 세상의 영욕도 필요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조선시대 가장 아름다운 연시 가운데 하나다. 담락당 하립과 삼의당 김씨가 진주 이씨 부인이나 현대의 신정아 스캔들을 알았다면 어찌 생각했을까. 아마 실소하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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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광-저자. 저서로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
http://news.media.daum.net/society/others/200709/15/chosun/v18153165.html?_right_TOPIC=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