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가 화가 났다고? | 낙서/일기장 2005/11/18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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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인터넷판 머릿기사가 '부시 화났다' 이다. 그 사람 화난 것이 겁이 난다는 것인지 눈치를 보라는 뜻인지 모르겠지만 현실적으로 미국 대통령이 지구상의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꼭 조선일보의 태도를 비꼴 것도 없는지 모른다. 어떻게 부시같은 사람이 전세계 언론이 눈치를 봐야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는지는 나를 포함한 많은 미국 유권자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미국인들의 인종적 편견을 과소 평가한 Gore 가 멍청하게 유대인 부통령 후보를 써서 남부 표를 모두 잃어서인지 Clinton 이 스캔들로 민주당 이미지를 너무 깍아 먹어서인지. 부시 동생이 Florida 에서 농간을 부려서 인지. 처음 당선 된 것은 사고라고 치고 재선된 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마 '난 동성연애자가 죄인이라고 믿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입니다.' 라고 하니까 순진한 시골 사람들이 그래 좋은 사람인가보다 라고 지지해서 그랬을까?

다음은 부시 재선 직후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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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재선 유감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한달 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부시가 재선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의 정리가 끝나지 않고 있다. 난생 처음 소액이나마 정치헌금을 선거 전략상 중요지역인 오하이오 민주당에 보냈고 직장도 가기 전에 투표부터 했었다. 내가 하도 낙담을 하니까 초등학교 5 학년인 아이가 부시가 우리 가족을 어떻게 할것인지 자기 엄마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아…… 어떻게 미국은 그를 다시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는가?

부시의 재선을 아직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른 다수결 투표제도에 대한 나의 신뢰와 부시가 재선되었다는 사실이 내 마음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인지 부조화 (Cognitive Dissonance)’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부시 재선에서 느끼는 인지 부조화를 줄이기 위해서는 세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한다. 민주주의 선거제도가 바람 직 하지 않다고 믿거나 아니면 이번 대선에 부정이 있었다고 믿거나 아니면 부시에 대한 나의 평가를 바꾸어야 한다.

세가지 중에서 부시에 대한 나의 평가를 재검토 해 보기로 했다. 나는 부시 대통령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부시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도대체 미국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좋은 집안 출신인 덕에 명문대학과 대학원을 다녔지만 하버드 경영 대학원서 그를 가르쳤던 교수에 의하면 그는 최악의 학생 중 하나였다고 한다. 수업시간 중 뒷자리에 앉아 어린 학생들이나 할만한 장난이나 하고 경제 토론을 하면 빈곤의 이유는 사람들이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하고 자기는 베트남 전쟁을 지지한다고 해서 그러면 너는 왜 주 방위군으로 남았냐고 물었더니 아버지 연줄로 그랬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부시와 자주 접했던 어떤 상원 의원에 따르면 부시는 아주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약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 대게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의 약점을 잘 이해하고 보완한 사람들인데 부시는 평생 집안에서 뒤치닥거리를 해줘서 자기 약점을 보안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것 같다고 한다. 부시가 연설이나 기자회견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세계지도자로서 수준 이하라는 생각이 든다. 기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는 장면을 보면 논리도 없는 사람 같고 어떨 때는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는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부시의 나쁜 점만을 보고 있을 수도 있다. 또 젊은 시절을 술만 먹고 지냈어도 새 출발을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대통령이 능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법도 없고 부시의 인간성이나 지적 능력에 대한 나의 평가가 편견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용의가 있다.

나는 또 부시의 정책이 미국과 세계를 망치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을 빛 더미 위에 올려 놓고 대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하느라 세계 환경 보호 조약도 서명하기를 거부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것도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사실 경제나 환경문제에 대하여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그의 정책이 미국과 세계에 정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 올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래도 미국인의 과반수의 지지를 받았는데 설마 5천만 명이 넘는 부시 지지자들이 바보란 말인가? 내가 물론 틀렸을 수도 있다.

부시에 대한 나의 평가 중에 다른 것은 다 틀렸다고 양보 할 수 있어도 한가지 양보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그것은 그의 도덕적 가치관의 문제다. 선거 분석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부시가 선거에서 이긴 이유 중에 하나가 그의 도덕적 가치관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동성연애자들의 결혼을 헌법으로 막으려 하고 낙태를 금지하려 하는 태도 때문에 보수세력이 적극적으로 지원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부시는 보다 중요한 의미에서 도덕적 가치관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내가 보기에 사람의 목숨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죽었고 죽어가는가? 통계에 의하면 이제까지 미군도 1,200명 넘게 죽고 부상자가 10,000 명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약 9,000 명). 그리고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라크 사람들이 죽고 부상 당했는가? 확인되는 이라크인 사망자 수가 15,000 명 정도인데 십만 명 가까이 죽었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아직도 갈길 이 멀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시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죽거나 팔 다리를 잃을 것인가?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는가? 오히려 이라크 전쟁 때문에 테러의 위험이 더 커지지 않았나? 이라크가 9/11 사태를 일으켰다느니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다느니 하는 이유가 사실이 아님이 미국의회가 만든 조사 위원회에 의하여 밝혀졌다. (75% 의 부시 지지자들은 아직도 이라크가 9/11을 일으킨 알 케이다와 관계가 있고 이라크가 대량살상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진짜 이유는 이라크에 친미 정권을 세우면 미국에 이익이 될 것이라는 신보수주의자들의 이론을 부시가 실행해 본 것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아마 부시나 신보수주의자들이 자기 자신들이나 자식들이 전쟁에 나가야 했다면 결코 그런 이유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모병제인 미국에서 실제로 총을 들고 나가야 할 저소득층 병사들과 미국 폭격기가 떨어트리는 포탄에 죽어갈 죄 없는 이라크 사람들의 목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이라크 전쟁을 밀어부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부시의 도덕적 가치관에 중요한 문제가 있지 않나? 이런 식으로 사람 목숨이 소중한지 모르고 명백한 이유 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믿고 있었고 그런 믿음을 바꿀 수가 없다. 아마 나는 계속 ‘인지 부조화’가 가져오는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부시 얼굴이 TV에 비칠 때마다 미간을 찌프리면서 앞으로 4년을 살아야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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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의 편지) ‘10만양병론’과 진보세력 | R통신 2006/02/10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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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만 양병론. 당신도 이미 많이 들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율곡의 유명한 담론입니다. 율곡이 십만 양병론을 주장한 시점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9년 전이었습니다.

  율곡, 이이는 1582년 12월에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마흔일곱 살이었습니다. 당시 왕은 귀가 엷은 선조였습니다. 15년째 집권하고 있었습니다.

  율곡은 병조판서(국방부 장관)로서 국제정세를 분석한 뒤 이듬해인 1583년 2월에 자신의 정책을 ‘6조계’로 정리했습니다. 조정에 곧장 건의했습니다. 율곡이 으뜸으로 강조한 정책은 임현능(任賢能),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하라였습니다. 그랬습니다. 이 또한 오늘의 노무현 정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당시 ‘선조 정권’은 율곡의 6조계를 모르쇠 했습니다. 율곡은 다시 임금 앞에서 ‘양병 십만론’을 제시했습니다. 나라의 기운이 부진함이 극에 달했다면서, 10년이 못 가서 땅이 무너지는 화가 있을 것(不出十年當有土崩之禍)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율곡의 국제정세 분석이 얼마나 예리한가를 보여줍니다. 실제 9년 만에 일본의 침략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10만의 군사를 길러야 한다는 율곡의 간곡한 제안은 묵살 당했습니다. 도승지 유성룡은 “평화시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호랑이를 길러 우환을 남기는 것과 같다”면서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시국을 정확히 읽은 당대의 지성인 율곡은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임금에게 교만을 부렸다”는 이유로 삼사의 탄핵을 받게 됩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숨길 수 없는 우리 역사였습니다. 율곡의 다음과 같은 탄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유성룡이 재주는 훌륭하나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는 병통이 있어 나와 함께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질시에 눈이 먼 유성룡은 결국 전쟁을 맞고서야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는 병통”이 불러온 재앙을 한탄했습니다. 율곡의 10만 양병론은 파벌과 시기로 여론이 바르게 형성되는 것을 가로막을 때 얼마나 큰 위기가 닥칠 수 있는가를 핏빛으로 증언해줍니다.

  그래서입니다. 10만 양병론은 나라를 걱정하는 담론에 언제나 ‘단골’이 되어 왔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구국운동’조차 10만 양병론을 들먹입니다.

  현재 한국사회의 경제활동 인구는 2200만 명입니다. 경쟁력 있는 0.5%, 10만 명의 인재를 키우자는 목소리가 한국의 재계에서 퍼져가고 있습니다. 10만 인재론은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국제경쟁력 강화론과 이어집니다. 심지어 한미자유무역협정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런 논리에 누군가 반대하면, 변화하는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으로 비난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식 경쟁력 강화는 고스란히 양극화 가중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는 세력은 이미 대한민국에서 활개치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더 강화하려는 치밀한 전략과 전술을 펴나가고 있습니다. 10만 양병론의 교훈조차 신자유주의를 심화하는 데 살천스레 이용하는 모습은 새삼 진보세력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래서입니다. 신자유주의가, 한미자유무역협정이, 미친 바람처럼 몰아치는 겨울의 한복판에서 당신께 다시 편지를 띄우며 묻고 싶습니다.

  정작 ‘10만 인재’가 필요한 것은 진보세력이 아닐까요? 민중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10만 명만 힘을 모은다면 한국 사회의 풍경은 질적으로 바뀔 터입니다.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는 그 길에서 눈빛 맑은 당신과 가슴을 열며 소통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자주 편지 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총총 줄입니다.

  

  덧글/ 당신께 처음 드린 편지는 2000년 봄이었습니다. <손석춘의R통신>은 인터넷시대에 맞춘 새로운 칼럼이었습니다. 젊은 벗들에게 드리는 ‘러브레터’를 민망스레 자임한 편지형식의 칼럼들은 한겨레 출판부에서 책으로도 묶여 나왔습니다. 기획위원으로 다시 <한겨레>에 동참하면서 지난 1년 동안 중단한 편지를 띄웁니다. 새 편지는 ‘젊은 벗’으로 제한한 지난 편지들과 달리, 젊은 날의 열정으로 평생을 올곧게 살아가려는, 바로 당신께 부치기로 했습니다. 생활현장에서 당신이 보내시는 답장도 소중히 담아가겠습니다. 저의 전자우편함은 2020gil@hanmail.net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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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의 초심은 어디에?
시민편집인칼럼
한겨레 홍세화 기자
▲ 홍세화 시민 편집인
〈한겨레〉의 초심은 오늘 지면 어디에 남아 있을까? 가령 한국 신문들은 ‘주택’면이 없는 대신 모두 ‘부동산’면을 두고 있다. 한겨레도 예외가 아니다. 부동산이 투기의 대상, 재테크의 수단이 된 한국 사회를 반영한다고 하겠지만, 적어도 한겨레는 초심이 살아 있다면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조건인 주거 공간을 부동산으로 한정할 수 없다. 하다 못해 부동산 사업을 주로 하는 주택공사도 이름만큼은 부동산공사가 아니라 주택공사다.

우리나라가 부동산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제대로 된 주택정책이 없기 때문이다. 참여정부도 철학과 의지 부족으로 주택 ‘정책’이 없으니 계속 부동산 ‘대책’만 내놓는 것이다. 한겨레는 주택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의제화하지 못한 채 정책 부재가 부른 부동산 사태를 추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최근 한나라당의 홍준표 서울시장 후보 경선자가 말한 토지임대 정책과 열린우리당이 발표한 임대주택 정책에 대해서도 한겨레는 이를 받아쓰기만 했을 뿐 그 가능성을 전망하거나 분석한 기사를 내놓지 못했다. 가령 독일의 사회주택 제도나 1만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지자체가 전체 주택의 20%를 낮은 임대료 주택(HLM)으로 건설해야 하는 프랑스의 주택정책 등을 소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 한겨레에서 초심을 찾기 어려운 점은 경제면과 사회면의 불균형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경제와 사회의 균형은 성장과 분배의 균형이며, 소비자와 시민 사이의 균형이다. 정부 부처도 사회부문과 경제부문은 서로 긴장하며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한겨레의 사회부문 기사는 사회면뿐인 데 반해, 경제 기사는 경제면뿐만 아니라 자동차, 재테크, 부동산, 소비생활, 글로벌기업, 증권에다 ‘기업시민’이라는 알쏭달쏭한 면까지 있다. 이를테면, 사회부문은 ‘노동’이 한 면도 없을 만큼 위축되어 있는 반면, 경제 기사는 새끼를 쳐 특화된 면이 한둘이 아니다.

2월7일치 신문은 이러한 불균형이 어떤 몰골을 빚을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 예가 될 것이다. 16면 경제면에는 ‘사브 새 차들 첫선’이라는 설명과 함께 큼직한 자동차 사진이 실렸다. 외제 신차에 기대거나 올라 탄 젊은 여성의 모습을 본 독자는 다시 19면 재테크 다음 면인 20면 자동차 면에서 큼직한 사진이 실린 자동차 관련 기사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20면이 자동차 관련 기사로 채워진 한편, 12면 사회면에서는 ‘민주노총 비정규직법 처리 강행 땐 총파업’이라는 제목과 함께 예의 ‘단결’ ‘투쟁’의 머리띠를 두른 민주노총 임원선거 입후보자들의 사진이 실려 있다. 독자는 그 입후보자들이 어떤 차별성을 갖고 민주노총 임원선거에 임했는지 들어본 적이 없다. 대신 모두 투쟁 일변도라는 기존의 인식을 확인할 뿐이다.

언제부턴가, 한겨레는 노동운동을 비롯한 시민사회 운동 관련 기사를 사진으로 대신하는 데 익숙해졌다. 자동차, 재테크 면을 채우다 보니 더욱 부족해진 지면 상황에서 시민사회 활력소들을 소개할 지면도 인원도 부족해 관련 사안을 분석하고 전망하는 기사를 쓰기 어렵다면 차라리 사진도 싣지 않는 편이 낫다. 사진은 과정을 보여주지 않은 채 최후의 갈등과 투쟁 모습을 담기 쉬우니만큼 독자들에게 사회 변화 동력들을 투쟁 일변도의 이미지로만 각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한겨레가 사회변화 동력들에게 보내는 눈길은 자동차와 부동산에 보내는 시선보다 소홀하다. 한겨레의 초심을 찾기 어려운 것은 한겨레 독자들 역시 과거와 달라 시민이 아닌 소비자로 남았기 때문인가?

홍세화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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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홍세화 - 사회주의에 대하여

사회주의에 대하여

최근에 어느 신문에서 이해찬 교육부장관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젊었을 때부터 이미 사회주의에 이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회주의가 한국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20세기 말 '국민의 정부'의 교육부장관에게 '정치적으로 잘 맞는(politiquement correct)' 인터뷰였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해찬 씨는 나와 서울 문리대 주변에서 몇 차례 스친 적이 있는 대학후배이다. 민청학련 세대의 막내뻘로서 민청학련 사건에 관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인터뷰에서 '젊었을 때'라고 말한 시기가 바로 그때를 말한 것처럼 생각되었고, 그래서 나는 더욱 그의 인터뷰 기사를 흥미롭게 읽었다. 그는 이미 당시부터 사회주의가 한국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만큼 사회주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던가 보다.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회주의에 이끌렸던 나와 사뭇 달랐다. 내가 그렇게 된 데에는 전태일 열사의 영향이 컸다. 그 뒤 4반세기 이상이 지났다. 나는 지금도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느끼고 있다. 나는 지금 "느끼고 있다"라고 썼다. 그러니까 나는 이론적인 밑바탕이 부족한, 다만 느낌으로서의 사회주의자, 즉 감성적인 사회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20대에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사람도, 또 40대가 되어서도 계속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는 사람도 바보 멍청이 축에도 끼지 못하는 최상의 바보 멍청이임에 틀림없다. '세상에 나가기(출세하기)'도 애당초 글러먹은 일이다. 오늘과 같은 시기에 스스로 감성적이나마 "사회주의자요" 하고 떠들고 있으니 말이다.

사회는 수영장과 같다. 헤엄을 잘 치고 다이빙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헤엄을 못 치는 사람도 있다. 사회에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이 있고 돈도 권력도 없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다. 헤엄을 잘 치고 다이빙을 즐기는 사람이 바라는 수영장과 헤엄을 못 치는 사람이 바라는 수영장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전자는 높은 데서부터 다이빙을 즐길 수 있게끔 물이 깊은 수영장을 원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물이깊은 수영장에서 그는 빠져 죽기 십상이다. 그런데 '사회'라는 수영장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수영장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관하여 전자와 후자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쟁투가 벌어진다. 헤엄을 잘 치고 다이빙을 즐기는 사람들은 헤엄을 못 치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수영장을 설계할 자격이 없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아주 오랫동안 그들은 수영장 설계를 독점해왔다. 그들에게 권력과 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헤엄을 못 치는 사람은 수영장 밖에 머물러 소외되거나 수영장에 뛰어들어 죽기살기로 헤엄을 쳐 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당연히 빠져 죽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렇지만 일부 헤엄치기에 성공하고 다이빙을 즐기기까지 이른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자유주의'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한편 빠져 죽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에 견딜 수 없어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빠져 죽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 수영장을 꿈꾸었다. 드디어 그들은 헤엄을 못 치는 사람들과 함께 궐기하여 수영장 설계권을 쟁탈하기도 했다. 그리고 빠져 죽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 수영장을 만들었다. 이 수영장의 이름을 사람들은 '공산주의 사회' 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빠져 죽지 않기를 바라지만 또한 누구나 다이빙을 즐기고 싶어했다. 아무도 '땅 짚고 헤엄치기'식 삶에 만족하지 않았다. 땅 짚고 헤엄치기는 곧 권태를 불러온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아닌 땅 짚고 헤엄치는 수영장을 기획하고 만들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 다이빙을 즐길 수 있는 수영장을 따로 만들어 즐기는 일이 벌어졌다. 그들은 "하나의 사회는 하나의 수영장뿐"이라는 원칙을 배반한 것이다. 이렇게 나는 사회를 수영장에 빗대어 생각해 보곤 한다. 한국 사회라는 이름의 수영장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최근 영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기찻길에서 자살한 사람은 10시간이나 그대로 방치한 채 기차들이 계속 오고갔다. 대처리즘 이후 사기업이 된 영국의 철도회사에게 시신을 수습하는 것보다 기차시각을 맞추는 게 더 중요했던 것이다. 성장과 경쟁 그리고 효율을 모토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인간성을 좀먹어 들어가고 있다. 그래도 영국 사회란 수영장엔 사회안전망이 있다. 비록 신자유주의의 공격으로 토격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 남아 있다. 프랑스에서 사회안전망이 정착되었던 1930년대와 2차대전 직후 프랑스의 국민소득에 비해 오늘 한국의 국민소득이 훨씬 높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수영장에서는 오랜 동안 사회 안전망을 구축을 아주 등한시해왔다. 안전망이 허술한 수영장에서 빠져 죽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언제 빠져 죽을지 모른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최근에 한국에서 자식의 손가락을 자르고 자신의 발목을 자르고 무덤을 파헤쳐 시신까지 자르고 있는 '자르기'사태는 사회윤리의 타락상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사회의 절망과 고통과 불안이 더욱더 심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은 것이다. 최근에 나는 레옹 블룸(Leon Blum:1872-1950)이라는 프랑스 사회주의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한 장의 시디에 담긴 '사회주의 목소리 모음집'에서, 레옹 블룸은 "사회주의는 무엇에서 태어났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인간 영혼의 가장 고귀한 감정의 항거에서 태어난 것이다.…… 사회주의는 비참함, 실업, 추위, 배고픔과 같은 견딜 수 없는 광경이 성실한 가슴들에 타오르게 하는 연민과 분노에서 태어난 것이다. ……한쪽엔 호화, 사치가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엔 거만한 게으름이 있는, 이 터무니없고도 서글픈 대비(對比)에서 사회주의는 태어난 것이다. 사회주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가장 천한 인간의 동기인 시샘의 산물이 아니라, 정의의 산물이며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의 산물인 것이다." 레옹 블룸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사려 깊은 연구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그가 사용한 언어들, 즉 감정의 항거, 성실한 가슴, 연민, 분노, 정의, 동정…… 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가슴에서 태어난 것이다. 레옹 블룸은 누구인가? 20세기 프랑스 사회의 현대화와 사회정의 건설에 공헌한 국가적 인물 중의 하나로 꼽히는 유태인 출신이다. 고등사범(노르말리앵)에서 공부한 뒤, 일찍이 드레퓌스파로 활동했으며 프랑스 사회주의의 큰 별인 장 조레스의 제자이기도 했다. 1930년대 프랑스 국내외에서 극우파가 기승을 부릴 때, 이에 반대한 인민전선(Front populaire)정부의 수반이 되기도 했다. 바야흐로 독일엔 히틀러의 나치가, 이탈리아엔 무솔리니의 파쇼가 권력을 장악했고, 스페인에선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다. 그는 주저 끝에 스페인의 공화국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를 꺼려 좌파들의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곧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2차대전이 터지자마자 패주한 프랑스에 나치독일의 비호 아래 들어선 극우 비쉬 정권이 과거의 정적(政敵)에게 복수의 칼을 댔던 것이다. 그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악명 높은 뷔헨발트 수용소로 끌려갔다. 유태인인 까닭이다. 드디어 나치가 궤멸하자, 기적처럼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그는 다시 프랑스 땅을 밟는다. 그 뒤 1950년 심장 질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사회주의자의 길을 걸어 스탈린주의와 드골주의를 함께 반대했고 인도차이나에 대한 재식민 여론에 강력히 반대하여 탈식민을 역설하였다. 유네스코(유엔 교육 과학문화기구) 창설 위원회 의장에 선출되기도 했던 그는 지금까지도 많은 프랑스인들에게 '양심'의 사표로 기억되고 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썼던 <인간의 단계> 중에 나오는 다음 문구는 특히 유명하다. "인간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정신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다. 하나는 노래하고 탐구하기 윈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행동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형제애를 느끼고 정의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전망하는 사람은 누구나 스러질 수 없는 희망이 타오름을 느끼게 된다." 감옥에서, 그리고 곧 뷔헨발트 수용소에 끌려갈 운명에 앞에 둔 시점에서도 그는 '스러질 수 없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그의 가없는 신뢰는, 그의 스승 장 조레스를 상기시킨다.

프랑스 사회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 조레스는 1903년에 고등학생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의 모든 불행과 우리들이 저질렀거나 또는 겪었던 불의를 관통하여 진실로 남아 있는 것은 인간성에 폭넓은 신뢰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느낌 그리고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거룩한 운명에 대한 예감이 없다면 그것은 스스로 인간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회주의자인 장 조레스와 레옹 불름이 인간성에 대해 폭넓은 신뢰를 가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을까? 사회주의가 고귀한 인간성을 낳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귀한 인간성이 사회주의를 낳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점이 한국 땅에서 사회주의가 무시되거나 차단되어서는 안되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 나는 믿고 있다. 교육의 현장에선 더욱 그러하다. 교육이 인간성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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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라시보 > 누드

올 한 해 연예가 최대의 화두는 아마 '누드'가 아니었나 싶다. 평소 연예가 소식에는 좀 느린 편이라서 대부분 친구들이 '아니 그것도 몰랐단 말이냐'하고 놀라지만 누드 만큼은 나도 관심있게 지켜 봤다.

내가 알고있는 누드를 찍은 여자 연예인들 중 현재 아주 잘 나가고 있는 연예인들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인지도가 한참 떨어지는 정도도 아니다. 그들은 전부 과거 한때 무지하게 잘 나갔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활동을 하지만 인기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자기 분야에서 무언가 명성을 쌓아 놓지도 못해서 내 생각에 그들은 마지막 수로 누드를 둔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엄청난 액수이다. 누드를 찍은 연예인들은 실제로 얼마를 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신문지상에 발표된 금액을 볼짝시면 그 금액이 주로 억단위이다. 물론 잘 나가는 연예인이야 CF몇 편만 찍어도 억단위 금액은 우습게 벌어들이겠지만 잘 나가고 있지 않은 그들에게는 다시 만지기 힘든 거금임이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드를 찍는 이유는 대충 두 가지 이다. 사그라든 인기를 다시한번 지피기 위한 불씨. 그리고 돈 이다.

내 생각에 현재 가장 벗기고 싶은 연예인은 아마 이효리 일 것이다. 몸매도 그만하면 괜찮고 나름대로 매력도 있다. 하지만 이효리는 절대 벗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줏대가 있거나 누드에 관해 알레르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굳이 벗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벗지 않아도 지금 충분하게 인기를 누리고 있고 돈도 잘 벌고 있다. 단 한명이라도 지금 잘 나가고 돈도 잘 버는데 누드를 찍는다면 나는 그녀들이(누드를 찍은) 왜 누드를 찍었냐고 물었을때 가장 흔하게 대답하는 '젊고 아름다운 제 모습을 영원히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어요'를 믿어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잘나가는 여자 연예인 중에서는 아무도 누드를 찍지 않았다. 못나가는 연예인만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남기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고 우기면 할 말 없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저 이유도 존재하긴 하지만 아주 미약하다고 밖에는 보기 힘들다. 적어도 그들이 입으로 말하는 저런 이유로만은 절대로 벗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누드에 대해 이렇게 떠드는 것은 마지막 마지노선이라 여겨졌던 한 여자 연예인이 최근 누드를 찍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생활이 복잡하다는 소문이 많았지만 나는 그 여자 연예인을 꾀나 줏대있게 봤었다. 평소 말 하는걸 들어보면 적어도 머리가 텅 빈 여자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사생활이 문란한거야 말 그대로 지 사생활이니 지가 알아서 할 일이고 나는 그래도 저 여자 연예인은 배울만큼 배웠고 생각도 있는 여자라고 믿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오늘 신문을 보니까 그녀가 누드를 찍는다고 한다. 평소 자신에 대해 입을 다물면 다물었지 미화시켜 얘기하는 법은 없었던 그녀는 과연 누드를 왜 찍느냐는 질문에 뭐라고 답했을까? 역시 젊을때 아름다운 모습 어쩌고 운운할까?

누드를 찍은 후 다들 돈은 좀 만졌을 것이다. 하지만 인기는 잠깐동안 인터넷 검색어에 1위를 차지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고 본다. 실제로 누드를 찍음으로 인해 왕성한 활동을 하는 사람은 최근 누드 열풍에 처음 스타트를 끊었던 모 여배우 한 사람 뿐이다. 그녀도 맡은 역활들이 다소 여배우들이 꺼려하는 노출 심한 연기에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건 그 전보다 섭외가 들어오는 것은 사실인듯 보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부 그대로 이다. 뭔가 뚜렷하게 인기가 오르지 않았다. 누드 서비스를 하는 동안 인터넷 검색어 1위에 자기 이름을 올려두는 것 이외에는 어떤 인기도 얻지 못했다. 그걸로 자기가 부르는 노래가 대박이 나지도 않았고 충무로 캐스팅 0순위가 되지도 않았고 CF섭외가 봇물처럼 밀려들지도 않았다. 즉 인기를 위해 벗은 사람들은 전부 반짝하는 불씨만 피웠을 뿐 곧 사그라 든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돈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는 훨씬 덜 벌었다고 한다. 해킹이랄지 아니면 소송이랄지(유달리 누드를 찍은 연예인들은 송사에 많이 휘말렸다. 돈이 된다고 생각해서 사람들이 많이 꼬이다 보니 저렇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기타등등의 이유로 실컷 벗고는 돈도 거의 못 만져본 사람도 있다.

인기와 돈을 한꺼번에 보상받을 수 있다면, 그게 보장된다면 나는 누드를 찍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기가 떨어지면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인기를 되돌리기 위한 수단으로 옷 벗는게 대순가 싶다.) 그렇지만 인기도 돈도 보상받지 못한다면 대체 왜들 벗는지 모르겠다. 벗어서 다시 돌아올 인기 같으면 애초에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진짜 돈 한 몫 잡아서 연예계를 뜰 정도의 액수가 아니라면 굳이 자신의 이미지를 남정네들 딸딸이용으로 전락시켜 가면서 까지 옷을 벗어제낄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오죽하면 옷을 벗을까 싶기도 하지만 대중 목욕탕에서 조차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일반인들도 누드를 찍는 이 마당에 너무 촌스러운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불특정 다수에게 내 벗은 몸을 공개할 수 있는 일은 내 뇌를 덜어내기 전에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차라리 그녀들이 돈이나 왕창 벌고 연예계를 뜨면 좋겠다. 명품 런칭쇼나 신제품 쇼 같은 곳에 나가서 공짜 선물을 받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팔며 뻔질나게 드나드는 한물 간 여자 연예인 정도의 기억으로 남지 말고 깨끗하게 돈 벌어서 뜨길 바란다. 그게 한때나마 그녀들이 부른 노래, 그녀들이 나온 드라마와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해 주는 마지막 예의 정도로 생각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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