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홍세화 - 사회주의에 대하여
사회주의에 대하여
최근에 어느 신문에서 이해찬 교육부장관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젊었을 때부터 이미 사회주의에 이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회주의가 한국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20세기 말 '국민의 정부'의 교육부장관에게 '정치적으로 잘 맞는(politiquement correct)' 인터뷰였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해찬 씨는 나와 서울 문리대 주변에서 몇 차례 스친 적이 있는 대학후배이다. 민청학련 세대의 막내뻘로서 민청학련 사건에 관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인터뷰에서 '젊었을 때'라고 말한 시기가 바로 그때를 말한 것처럼 생각되었고, 그래서 나는 더욱 그의 인터뷰 기사를 흥미롭게 읽었다. 그는 이미 당시부터 사회주의가 한국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만큼 사회주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던가 보다.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회주의에 이끌렸던 나와 사뭇 달랐다. 내가 그렇게 된 데에는 전태일 열사의 영향이 컸다. 그 뒤 4반세기 이상이 지났다. 나는 지금도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느끼고 있다. 나는 지금 "느끼고 있다"라고 썼다. 그러니까 나는 이론적인 밑바탕이 부족한, 다만 느낌으로서의 사회주의자, 즉 감성적인 사회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20대에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사람도, 또 40대가 되어서도 계속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는 사람도 바보 멍청이 축에도 끼지 못하는 최상의 바보 멍청이임에 틀림없다. '세상에 나가기(출세하기)'도 애당초 글러먹은 일이다. 오늘과 같은 시기에 스스로 감성적이나마 "사회주의자요" 하고 떠들고 있으니 말이다.
사회는 수영장과 같다. 헤엄을 잘 치고 다이빙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헤엄을 못 치는 사람도 있다. 사회에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이 있고 돈도 권력도 없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다. 헤엄을 잘 치고 다이빙을 즐기는 사람이 바라는 수영장과 헤엄을 못 치는 사람이 바라는 수영장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전자는 높은 데서부터 다이빙을 즐길 수 있게끔 물이 깊은 수영장을 원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물이깊은 수영장에서 그는 빠져 죽기 십상이다. 그런데 '사회'라는 수영장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수영장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관하여 전자와 후자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쟁투가 벌어진다. 헤엄을 잘 치고 다이빙을 즐기는 사람들은 헤엄을 못 치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수영장을 설계할 자격이 없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아주 오랫동안 그들은 수영장 설계를 독점해왔다. 그들에게 권력과 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헤엄을 못 치는 사람은 수영장 밖에 머물러 소외되거나 수영장에 뛰어들어 죽기살기로 헤엄을 쳐 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당연히 빠져 죽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렇지만 일부 헤엄치기에 성공하고 다이빙을 즐기기까지 이른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자유주의'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한편 빠져 죽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에 견딜 수 없어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빠져 죽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 수영장을 꿈꾸었다. 드디어 그들은 헤엄을 못 치는 사람들과 함께 궐기하여 수영장 설계권을 쟁탈하기도 했다. 그리고 빠져 죽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 수영장을 만들었다. 이 수영장의 이름을 사람들은 '공산주의 사회' 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빠져 죽지 않기를 바라지만 또한 누구나 다이빙을 즐기고 싶어했다. 아무도 '땅 짚고 헤엄치기'식 삶에 만족하지 않았다. 땅 짚고 헤엄치기는 곧 권태를 불러온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아닌 땅 짚고 헤엄치는 수영장을 기획하고 만들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 다이빙을 즐길 수 있는 수영장을 따로 만들어 즐기는 일이 벌어졌다. 그들은 "하나의 사회는 하나의 수영장뿐"이라는 원칙을 배반한 것이다. 이렇게 나는 사회를 수영장에 빗대어 생각해 보곤 한다. 한국 사회라는 이름의 수영장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최근 영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기찻길에서 자살한 사람은 10시간이나 그대로 방치한 채 기차들이 계속 오고갔다. 대처리즘 이후 사기업이 된 영국의 철도회사에게 시신을 수습하는 것보다 기차시각을 맞추는 게 더 중요했던 것이다. 성장과 경쟁 그리고 효율을 모토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인간성을 좀먹어 들어가고 있다. 그래도 영국 사회란 수영장엔 사회안전망이 있다. 비록 신자유주의의 공격으로 토격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 남아 있다. 프랑스에서 사회안전망이 정착되었던 1930년대와 2차대전 직후 프랑스의 국민소득에 비해 오늘 한국의 국민소득이 훨씬 높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수영장에서는 오랜 동안 사회 안전망을 구축을 아주 등한시해왔다. 안전망이 허술한 수영장에서 빠져 죽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언제 빠져 죽을지 모른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최근에 한국에서 자식의 손가락을 자르고 자신의 발목을 자르고 무덤을 파헤쳐 시신까지 자르고 있는 '자르기'사태는 사회윤리의 타락상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사회의 절망과 고통과 불안이 더욱더 심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은 것이다. 최근에 나는 레옹 블룸(Leon Blum:1872-1950)이라는 프랑스 사회주의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한 장의 시디에 담긴 '사회주의 목소리 모음집'에서, 레옹 블룸은 "사회주의는 무엇에서 태어났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인간 영혼의 가장 고귀한 감정의 항거에서 태어난 것이다.…… 사회주의는 비참함, 실업, 추위, 배고픔과 같은 견딜 수 없는 광경이 성실한 가슴들에 타오르게 하는 연민과 분노에서 태어난 것이다. ……한쪽엔 호화, 사치가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엔 거만한 게으름이 있는, 이 터무니없고도 서글픈 대비(對比)에서 사회주의는 태어난 것이다. 사회주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가장 천한 인간의 동기인 시샘의 산물이 아니라, 정의의 산물이며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의 산물인 것이다." 레옹 블룸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사려 깊은 연구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그가 사용한 언어들, 즉 감정의 항거, 성실한 가슴, 연민, 분노, 정의, 동정…… 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가슴에서 태어난 것이다. 레옹 블룸은 누구인가? 20세기 프랑스 사회의 현대화와 사회정의 건설에 공헌한 국가적 인물 중의 하나로 꼽히는 유태인 출신이다. 고등사범(노르말리앵)에서 공부한 뒤, 일찍이 드레퓌스파로 활동했으며 프랑스 사회주의의 큰 별인 장 조레스의 제자이기도 했다. 1930년대 프랑스 국내외에서 극우파가 기승을 부릴 때, 이에 반대한 인민전선(Front populaire)정부의 수반이 되기도 했다. 바야흐로 독일엔 히틀러의 나치가, 이탈리아엔 무솔리니의 파쇼가 권력을 장악했고, 스페인에선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다. 그는 주저 끝에 스페인의 공화국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를 꺼려 좌파들의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곧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2차대전이 터지자마자 패주한 프랑스에 나치독일의 비호 아래 들어선 극우 비쉬 정권이 과거의 정적(政敵)에게 복수의 칼을 댔던 것이다. 그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악명 높은 뷔헨발트 수용소로 끌려갔다. 유태인인 까닭이다. 드디어 나치가 궤멸하자, 기적처럼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그는 다시 프랑스 땅을 밟는다. 그 뒤 1950년 심장 질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사회주의자의 길을 걸어 스탈린주의와 드골주의를 함께 반대했고 인도차이나에 대한 재식민 여론에 강력히 반대하여 탈식민을 역설하였다. 유네스코(유엔 교육 과학문화기구) 창설 위원회 의장에 선출되기도 했던 그는 지금까지도 많은 프랑스인들에게 '양심'의 사표로 기억되고 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썼던 <인간의 단계> 중에 나오는 다음 문구는 특히 유명하다. "인간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정신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다. 하나는 노래하고 탐구하기 윈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행동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형제애를 느끼고 정의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전망하는 사람은 누구나 스러질 수 없는 희망이 타오름을 느끼게 된다." 감옥에서, 그리고 곧 뷔헨발트 수용소에 끌려갈 운명에 앞에 둔 시점에서도 그는 '스러질 수 없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그의 가없는 신뢰는, 그의 스승 장 조레스를 상기시킨다.
프랑스 사회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 조레스는 1903년에 고등학생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의 모든 불행과 우리들이 저질렀거나 또는 겪었던 불의를 관통하여 진실로 남아 있는 것은 인간성에 폭넓은 신뢰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느낌 그리고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거룩한 운명에 대한 예감이 없다면 그것은 스스로 인간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회주의자인 장 조레스와 레옹 불름이 인간성에 대해 폭넓은 신뢰를 가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을까? 사회주의가 고귀한 인간성을 낳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귀한 인간성이 사회주의를 낳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점이 한국 땅에서 사회주의가 무시되거나 차단되어서는 안되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 나는 믿고 있다. 교육의 현장에선 더욱 그러하다. 교육이 인간성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