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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이 너무 보잘것이 없어 흔적을 남기는 분이 아무도 없네 그려....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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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경상도 남자이자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마초다.  나는 내가 그렇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름대로 노력한다. 하지만 안해가 '손끝 하나 움직이지도 않고'라는 등의 노래를  매들리로 부르면 도리어 반항심이 생겨서, '그래, 나 원래 그런 놈이다'라고 심술을 부려 버린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이 책은 거기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내 의식의 변화가 문제이겠지.

 

 

  제 주제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나는 자주 책을 보며 '번역이 이게 뭐야'라고 투덜거린다.  사실 자기도 별 뽀족한 실력도 없으면서.  교보에서 앞부분을 슬쩍 보았는데.-그건 그렇고 교보에서 이 책 광고 무지하게 하더라, 왜일까?- 일단 분량이 많지 않아 좀 불만이지만 눈 딱 감고 주문했다.  보통의 경우에는 300쪽이 넘어가지 않는 것은 난 잘 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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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7 [마이리뷰] <당신들은 누구인가?> 90
2006-02-08 [마이리뷰] <당신들은 누구인가?> 90
2006-02-08 [마이리뷰] <당신들은 누구인가?> 90
2006-02-07 [마이리뷰] <당신들은 누구인가?> 90
2006-02-07 [마이리뷰] <당신들은 누구인가?> 90
2006-01-19 [마이리뷰] <목마른 자에게 우물을> 90
아무리 생각해도 희한한 일이다.  전혀 Thanks to의 가치가 없는 리뷰인데도 자그마치 6개나 된다.  기분은 나쁘지는 않은데, 혹시나 알라디너들이 1%의 마일리지에 혹해서 아무거나 누르지는 않나 의심이 된다.  시간이 되면 위의 리뷰들을 다듬어 보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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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의-아마도 10년 전쯤의- 나는 누군가가 존경하는 作家가 있는냐는 물음에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이오덕선생님하고 이이화선생님이요"라고.  참고로 누군가를 지칭할 때 '선생님'이란 말은 내가 쓰는 가장 존경의 표시이다.  이오덕선생님은 예전부터 '우리말 바로쓰기'등의 책을 통해 알고 있었고, 이이화선생님의 경우는 1986년 그러니까 내가 대학에 갓 들어갔을 떄 외가의 서재 한 귀퉁이에 있던 '허균의 생각'이란 책을 읽고 나서 존경하게 되었지 싶다.  안타까운 사실은 나의 큰 외삼촌과 이이화선생님은 37년생 동갑나기 막역한 친구사이였는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뒤로 두 분의 사이가 약간 소원해져서 내가 이이화선생님을 뵐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당시 외가에서 기숙을 하고 있었는데, 동생글의 말에 의하면 그전엔 종종 선생님께서 외가를 방문하셨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큰외삼촌이나 이이화선생님 두 분 모두 올해가 칠순이시다.  두 분의 건강을 빌어 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두 분의 책을 다 읽었느냐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존경하는 것과 책을 모조리 다 읽는 건 다르다고 우겨본다.  이오덕 선생님의 한글 순결주의(?)로 보이는 주장은 좀 다르게 생각하지만 '글말과 입말이 같아야한다'와 '쉽게 써야한다'라는 말에는 무조건 동의한다.  때로는 아무리 읽어도 도저히 알아 볼 수 없는, 온갖 추상의 향연을 벌이는 책들을 보면 난 당혹스럽다.  스스로를 정규 교육을 그런대로 이수한 평범한 30대라고 생각하는 내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글은 도대체 누굴 대상으로 한 것일까?

약간 말이 어긋나 버렸지만, 오랜만에 보는 이오덕선생님의 글이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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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시비돌이 > 노회찬 - 울산 바위는 울산에 있어야 한다

 

1월 31일 (화) 흐림


만 50을 만 7개월 앞두고 지천명(知天命)을 다시 생각한다.

7개월 후에도 지천명하여 하늘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그래도 공자님 말씀이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되새겨 보는 것이다.


사실 나이 마흔에 불혹(不惑)하였다는 공자님 말씀은 나이 마흔이 되기 전부터 그대로 다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흔을 넘긴 후부터 달라지던 존경하던 선배들의 행적을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도 고난의 길을 마다않고 민중의 편에 서왔던 선배들이 마흔을 넘기면서  YS의 품으로 DJ의 무릎 아래로 기득권의 양지를 좇아가는 모습은 불혹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 무렵  논어 위정편을 곰곰이 살펴보다가 든 생각은 사십불혹이란 말도 결국  자신이 밟아온 길과 전혀 다른 세태에 대한 공자의 역설적 표현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삼십이립(三十而立)이란 서른이면 이제 제 발로 뜻을 확고히 세워야 할 나이인데도 홀로서기 못하고 기대어 사는 이들이 많은 현실을 가리킨 것이 아닌가.   사십불혹(四十而不惑)이란 나이 마흔이면 유혹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건만 오히려 본격적으로 유혹에 시달리기 쉽다는 경고가 아닌가. 오십지천명(五十而知天命) 역시 나이 오십에 이르렀는데도 하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안타까워한 말씀이 아닌가. 육십이순(六十而耳順)은 나이  예순이 되어도 여전히 남의 말이 거슬리고 마음에 상처로 남는 연륜의 허망함에 대한 탄식이 아닌가.


논어 위정편에 대한 이러한 역설적 해석을 고집해온 까닭은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사가 대체로 이 해석을 넘어서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적 현상이 가끔 발견되기도 한다. 어제 오늘 보도된 손석희 아나운서의 사표제출 소식 같은 게 그러하다. 그 소식을 듣고 든 첫 생각은  <그래도 그는 나이 오십에 지천명을 하는구나>하는 대견함과 부러움이었다.


원숭이띠로 나와 동갑인 그는 내게 한번도 서로 말 놓고 지내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서로 말을 틀 경우 자신이 훨씬 손해보게 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언젠가 <백분토론>이 끝난 후 스튜디오에서 손석희팬들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하길래 친숙함을 표시하느라 손석희 사회자와 동갑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들이 더욱 반가워할 줄 알았던 것은 나의 착각일뿐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안좋은 방향으로 변했고 나는 후회하기 시작하였다. 


손석희 아나운서가 앞으로 무엇을 하는가는 전적으로 그의 자유이자 권리이다. 능력면에서 보더라도 그는 무엇을 하더라도 잘할 것 같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래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그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며 그것을 우리가 믿고,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손석희 아나운서가 MBC에 사표를 내고 어느 대학교 교수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다소 놀라긴 했으나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작년 가을 자신이 겸임교수로 있는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수업에 일일 초청강사로 오라하여 갔을 때 학생들 앞에 선 그의 모습이 백분토론 사회자만큼 자연스럽고 잘 어울려 보였던 것은 인상깊은 장면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내가 더욱 주목하는 것은 학교로 가더라도 방송인으로 계속 남을 것이며 지금 맡고 있는 프로그램도 지속할 의향이 있다는 보도이다. 그렇다. 왜 우리에겐 오십 육십이 되어도 현장을 지키는 언론인 방송인이 드문가? 동료나 후배가 검찰총장이 되면 사표 쓰고 나오듯이 아나운서도 기자도 나이가 들면 국장, 본부장, 사장 혹은 부장, 편집국장이 되거나 아니면 직업을 바꿔야 하는가? 대통령보다 더 경륜있는 언론인, 대법관보다 더 존경받는 기자나 5선의원보다 더 영향력 있는 방송인은 있으면 안되는가? 


그런 그에게 정치권 일각에서 지방선거 출마를 점치거나 영입설을 흘리는 것은 실로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능력 있고 잘 알려진 사람은 모두 정치를 해야 하는가? 원래 정치는 덜 빼어난 2류들이 하는 일이다. 세계 어느 나라를 보나 빼어난 1류들은 과학기술, 교육, 문학, 예술, 사법 등  각 방면에서 전문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문명사회를 이끌고 있다. 한국정치가 늘 불신을 면치 못하는 것은 그 속에 1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3류와 4류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노동당도  손석희 아나운서에게 민주노동당의 후보로 수도권 한 지역에서 출마할 것을 강권한 적이 있다.  2000년  1월 말 창당한 민주노동당이 창당 석 달도 안된 상태에서 제 16대 총선을 치러야 했던 어려운 처지에서 그는 우리의 <이뤄질 수 없는 희망>이기도 했다. 4년 후 다소 성숙해진 민주노동당은 제 17대 총선 출마제의를 하지 않았다. 방송인으로 남겠다며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밝힌 그에 대한 예의였다. 어제 오늘 우리의 <예의 없는 정치권>은 자기 수준에 맞는 상상력과 억측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간 우리의 정치권은 선거라는 권력투쟁의 장에 1회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각 방면의 전문가들을 희생시켜 왔는가?


울산바위는 울산에 있어야 한다.

금강산 일만 이천봉을 만든다며 저 육중한 바위를 울산에서 올라오게 만든 것은 조물주의 사려깊지 못한 처사였다. 금강산 일만 이천봉 속에 포함되었으면 아무도 찾지 않는 무명의 봉우리로 전락했을 저 바위가 그나마 설악산 근처에 머물게 되어 약간이라도 빛을 발하게 된 것은 불행 중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저 잘생긴 바위가 본디 그대로 울산에 그냥 남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모르는 국민이 없는 명물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안식처를 제공하고 또  전국 각지의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을까.


며칠 후면 입춘이고 날도 풀릴 것이다.

올해 지천명의 나이가 되는 분들은 강원도 울산바위에 한번 올라가봄직 하다.

물론 내년에 그리될 분들도 꼭 한번 올라가 볼 필요가 있다.


울산바위 위에 올라서면, 알기 힘든 천명보다 느끼기 쉬운 자연에 대해 생각해보길 권하고 쉽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자연(自然)-본디 그대로-이기 때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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