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1 叔孫武叔語大夫於朝曰:子貢賢於仲尼.[甲]
19-23-2 子服景伯以①告子貢.子貢曰:"譬之②宮牆,賜③之牆也及肩,竅見室家之好.[乙]
19-23-3 夫子之牆數
人+刃,不得其門而入,不見宗廟之美,百官之富.[丙]
19-23-4 得其門者或寡矣.夫子④之云,不亦宜乎!" [丁]

번역 - 숙손무숙이 조정에서 대부에게 말하였다."자공이 중니보다 어질다." 자복경백이 그 말을 자공에게 알렸다. 자공이 말하였다." (선생님과 나의 어짐을) 궁전의 담에 비유하자면, 나의 담은 어깨에 미쳐 집안의 좋은 점을 엿볼 수가 있지만, 선생님의 담은 여러 길이므로(아주 높아서) 그 문을 통해 들어가지 않는 다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풍부함을 볼 수 없다. 그 문을 들어선 자가 적은 것 같으니 무숙의 말도 역시 마땅하지 않겠는가?"

① 엄밀하게 보자면 以는 전치사로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다. 굳이 목적어를 찾는다면 子貢賢於仲尼가 될 것이다.

② 자장 12장에서는 똑같은 표현이 譬諸(之+於)草木로 쓰이고 있다. 이걸로 미루어 보면 전치사 於는 생략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③ 賜는 자공을 말한다. 논어를 거꾸로 읽어 나가다 보니 이런 설명도 해야 하는군요.

④ 여기서 夫子는 숙손무숙을 말한다.

集註 - 武叔,魯大夫, 名,州仇.[甲] 牆卑室淺.[乙] 七尺曰人+刃 .不入其門,則不見其中之所有,言牆高而宮廣也.[丙] 此夫子,指武叔.[丁]

번역 - 武叔은 노나라 대부이며 이름은 주구이다. 담은 낮고 집은 작아서이다. 일곱 자를 인이라 한다. 그 문을  들어서지 않으면 그 안의 있는 것을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없으니, 담이 높고 궁궐이 넓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夫子는 무숙을 가리킨다.

원문 및 집주 독음
19-23-1 숙손무숙어대부어조왈:자공현어중니.[甲]
19-23-2 자복경백이고자공.자공왈:"비지궁장,사지장야급견,규견실가지호.[乙]
19-23-3 부자지장수인,부득기문이입,불견종묘지미,백관지부.[丙]
19-23-4 득기문자혹과의.부자지운,불역의호!" [丁]

집주 - 무숙,노대부, 명,주구.[甲] 장비실천.[乙] 칠척왈인.불입기문,즉불견기중지소유,언장고이궁광야.[丙] 차부자,지무숙.[丁]  443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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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4월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있다.  난 외국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최근에 본 것이라야 <개미> 정도이다.  이해력과 지구력이 부족해서 50쪽 정도 읽으면 포기해 버린다.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인도이야기>를 끝내고 무모하게 다시 <그리스인 조르바>에 도전한다. 벌써 140쪽까지 보았으니 포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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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깊이와 넓이를 담아낸 충실한 독일사 개설서
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 케임브리지 세계사 강좌 1
메리 풀브룩 지음, 김학이 옮김 / 개마고원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사전은 영어로 쓰면 딕셔너리(Dictionary)인데도, 가끔 연세있는 분들은 사전 가져오라는 말 대신 "콘사이스(concise) 좀 가져오라"고 말하곤 한다. "Concise Dictionary"란 말이 입에 배인 탓일 게다. 메리 풀브룩의 "분열과 통일의 독일사"는 저명한 "케임브리지 세계사 강좌"의 첫 번째 시리즈인데, 원제는 "A CONCISE HISTORY OF GERMANY"이다. 어떤 역사책이든, 모든 역사저술은 "concise"의 운명을 갖는다. 이 말 자체에 "자르다"의 뜻도 있으며, 간결한, 간명한의 의미가 있으니 더욱더 그러하다. 그래서 저자 메리 풀브룩은 사전에 이런 변명 아닌 변명으로 머리말을 시작한다. "이런 종류의 책은 쓰기보다 비판하기가 훨씬 쉬운 법이다. 고도로 복잡한 1천 년 이상의 역사를 얇은 책 한 권에 짜넣으려는 시도는 수많은 전문가들로부터 항의 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의 염려대로 역사란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이며, 그것을 요약한다는 것은 종종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는 뜻일 수 있다. 여기 한 권의 두툼한 책이 있고, 그것을 100명의 학생에게 요약해 레포트를 제출하라는 과제를 내어주었다고 치자. 같은 책을 읽고 요약하는 것이므로 분명 비슷한 내용으로 가득채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하라 역사가들은 계속해서 역사에 대한 새로운 개설서를 쓰는 것일까? 그것이 우리네 교육 커리큘럼처럼 대학 학부에서 교수의 저서를 주요 실라부스로 삼을 일도 없다면 더욱 더 필요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메리 풀브룩은 머리말에서 자신이 비판받기 더 쉬운 일을 어째서 다시 매달렸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는 부분적으로 역사 서술의 본성에 속한다. 역사 서술은 만인이 동의하는 이야기를 단순히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우리에게 전해준 자료 더미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역사서술이란 무릇 역사 전개에서 일부는 선택하고 또다른 일부는 생략하는 무자비한 결정과정이다."

종종 교수들은 학생들의 레포트를 제출받아 채점한 뒤, 남의 글을 베끼더라도 좀 창의적으로 베끼라는 충고를 하곤 한다. IT강국, 첨단을 달리다보니 학문적으로 제법 중요한 개념을 인터넷 검색 엔진에 넣고 검색해보면 가장 앞서 검색 목록에 오르는 것은 리포트 대행 서비스 회사의 사이트들이다. 사용료 몇 백원, 몇 천원으로 몇 만원을 들여 책을 구입하는 비용적 수고는 물론, 그 책들을 일일이 읽고 다시금 요약하고 통합해서 레포트를 제출하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으니 요즘 같은 세태에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나 공부란 스스로 수고로움을 일일이 행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말이 약간 밖으로 샜는데, 저자 메리 풀브룩의 염려는 이 책을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고심할지 모를 독자의 입장에서도 똑같이 반복될 고민이기도 하다. 가끔 한 가지 테마를 놓고 여러 종의 책들을 일괄 구입하다보면(물론 각각의 책들마다 특색은 있지만) 간혹 어떤 경우에는 거의 비슷한 난이도, 비슷한 언급으로 구성되어 다른 책이지만 구태여 두 권 세 권씩 갖고 있을 필요가 없는 책들이 있다. 연구자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특히 한국사 개설서의 경우가 그런 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도 물론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독일사에 관해 다른 개설서를 구입했다고 해서 이 책을 또 읽는 일이 불필요하다거나 동어반복적이라고 느낄 필요는 상대적으로 적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다른 개설서들에서는 중요하게 취급할(현재적 관점이 아무리 큰 변화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과거 역사 속에서 중요하게 취급하는 사건들은 대동소이한 편이다) 사건들을 과감하게 누락하고 있지도 않다. 중요한 사건들은 400쪽 이내의 분량으로도 거의 대부분 수록하고 있다. 옮긴이의 후기도 읽을 만하다. 옮긴이 김학이 선생은 독일사를, 독일 사람도 아니고 굳이 영국의 중견 역사가가 저술한 것을 번역하고, 다시 그것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던진다. 저자 메리 풀브룩이 독일 1천년 역사에 대한 개설서를 쓴다는 것이 의미있는 일일까? 자문자답하듯 옮긴이 역시 자문자답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이 필요한 까닭은 우리 역사학계가 아직 독자적인 시각을 가지고 독일사 전반을 서술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고, 굳이 독일인이 아닌 영국인의 번역을 옮긴 것은 독일역사가에게 드리워진 나치즘의 강박이나, 프랑스 역사가들이 독일에 대해 지닌 강박적 피해의식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영국의 역사가가 지닌 장점 때문이다. 거기에 덧붙이자면(이 부분에는 나역시 동의한다) 영국 역사학계의 학문적 우수성 때문이다.

영국 역사학계는 마르크스주의 세례를 받았지만 다른 유럽 지역의 학계와 달리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유럽 코뮤니즘의 대세를 이루었던 스탈린주의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발전해왔다. E.H.카, E.P.톰슨 등은 물론 에릭 홉스봄 등 영국 역사학계는 영국 문학의 전통 속에서 버밍엄 현대문화연구센터와 일정하게 상호연관되는 학문적 전통을 형성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도 긴장 관계 속에서 발전하는 독특한 흐름을 유지해왔다. 그러한 전통 속에서 메리 풀브룩은 독일의 역사를 서구의 다른 국가들, 특히 영국과 비교해 비정상 발전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기 보다는 독일 당대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다시 말해 독일의 역사가 모든 방향에서 히틀러의 나치즘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음을 드러내는 형태의 역사가 아니라) 묘사하고 있다. 이런 영국 역사학계의 모습은 최근 일본이나 우리의 역사학계에서 자학사관이니, 수정주의 사관이니 해서 벌어지는 일련의 흐름들을 살펴볼 때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개설서라는 의미 자체에 충실하면서도, 독일사에 대해 깊이있는 통찰을 담아낸다는 두 마리 토끼를 훌륭하게 잡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다소 아쉬운 점은 역시 저자 자신이 고민했던 바와 같이 자신이 주장하고 있는 바를 뒷받침할 만한 풍부한 예증을 담아내기에 책의 부피가 너무 얇다는 것인데, 이런 부분들은 다른 책들로 보완해가면 좋을 것이다. 독일사에 대한 완전 초심자를 제외한 분들에겐 훌륭한 입문서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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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종종 번역의 문제점이 발견되곤 한다. 아니, 종종이 아니라 ‘자주’ 목격하곤 한다. 창작에 가까운 번역, 뜻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번역은 낯설지 않다. 오죽하면 ‘번역의 힘’이라는 냉소적인 말이 생겨났겠는가. 그래서일까? 번역가 박상익의 체험적 보고서 <번역은 반역인가>가 개인의 체험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모두의 이야기로 그 심각성이 남다르게 여겨진다.


번역, 그것은 창작만큼이나 중요하다. 번역이 없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는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외국의 것을 우리 것으로 전환시켜주는 것이기에 번역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박상익은 이 중요한 ‘번역’에 문제가 많단다. 첫 번째 문제는 번역자들의 처지다. 번역은 가치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성상 한 권을 번역하기 위해 몇 배, 혹은 몇 십 배의 책을 참고해야 하는 까다로운 작업이지만 번역은 사회에서 ‘쉬운 일’로 취급받는다. 게다가 돈벌이는 어떤가. 생계가 막막할 정도다. 그나마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나 베스트셀러면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문도서의 경우는 그야말로 열악하기 그지없다. ‘기적적’으로 한달에 한권 번역해도 생계문제가 막막하고 사회에서는 알아주지 않으니 벙어리 냉가슴 앓는 심정이라는 건, 그야말로 번역가들을 위한 말일 테다.


하지만 고달픈 환경에도 꿋꿋이 자신의 할 일을 하는 이들이 있다. 박상익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인가. 외부핑계를 대며 ‘못된 짓’하는 번역가들에 대한 일침이 따끔하다. 특히 상아탑에서 진리를 탐구한다는 대학교수들에 대한 비판의 날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모두는 아닐지라도 일부의 대학교수들이 대학원생들을 일꾼으로 동원한다는 건 자주 언급되는데 번역에서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번역거리를 받은 대학교수는 대학원생들에게 나눠준다. 번역해 오라는 것이다. 여럿이 분량을 나눠 번역한 뒤에 모은 번역본을 상상해보자. 그것이 과연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 번역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박상익은 그것이 엄밀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장인정신이 실종된 대로 실종된 번역의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번역’을 두고 ‘반역’이라고 부르는 이 세계에서, 열정을 갖고 뛰어들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격려의 말은 고사하고 되레 말리게 되는 이 세계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 박상익은 그 답은 소박한 것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에서 찾는다.


먼저 번역가의 대우 문제를 보자. <번역은 반역인가>는 번역가의 가치를 제대로 살려주지 못하는 지금으로서는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장인정신으로 1년 내내 번역 일에 매진한 번역가가 힘이 빠져버리는 일이 없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말인데 십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주장이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인재들이 투입되기는커녕 빠져나오는 상황을 조장하는 세계라면 정부나 사회단체가 나서서 도와줄 필요가 있다. 창작의 세계처럼 말이다.


또한 ‘국가’가 앞장서서 번역의 중요성을 일깨워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가까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정부 내에 번역국을 두고 서양 서적을 조직적으로 번역해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서양의 것들을 빠르고, 정확하게 접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변함은 없었는데 이는 국가가 그 중요성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중국이든 서유럽이든 이슬람 문명이든 간에 그들은 외국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국가의 부흥에 도움을 주기 위해 안간힘썼다는 걸 생각해보면 새삼 우리의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박상익은 밖에서 도움을 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안의 세계’도 정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특히 요즘은 인터넷 덕분에 독자들과의 피드백이 원활해진 만큼 얼치기 번역가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능력 있는 번역가들이 설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안과 밖이 함께 개선의지를 보인다면 번역은 온건히 번역이라는 글자로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일 게다.


이 시대는 번역에 무관심했다. 쉬운 일이라 생각했고, 오역이나 비문이 보이면 ‘번역의 힘’을 내뱉으며 그것을 냉소했다. 그러면서도 번역의 중요성을 두 번, 세 번 언급했다. 번역은 왜 중요한지를 묻고 대답하는데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분명 소중한 것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박상익의 체험에서 얻은 모두의 문제에 시선을 돌려야 할 필요성이 있다.


중요한 것을 왜 하찮게 다루는가, 그럴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어떻게 해야 그곳을 정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논의가 핵심이 돼야 한다. <번역의 반역인가>의 마지막 문장처럼 “번역은 결코 반역이 아니다”라는 확신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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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국민학교’는 여전히 살아있다

초등학교로 바뀐 지 10년, 개정운동의 주역 김남식·이치석 선생을 만나다
애국조회와 국기에 대한 맹세, 상명하복의 일제 교육 시스템은 바뀌지 않아

 

2006년 2월 한국의 국가주의는 어떤 정체성을 갖는가. 2002년 전국을 물들인 월드컵 붉은색 티셔츠, 2004년 일본 시마네현의 독도 편입에 대한 애국주의 열풍, 2005년 황우석 사태로 한 ‘황빠’들의 촛불 시위, 그리고 최근 국기에 대한 맹세 폐지를 둘러싼 논란까지. 이들은 한국 국가주의의 징후적 사건들이다.

10년 전 국가주의의 간판을 내린 작지만 괄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1996년 3월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폐지된 것이다. 국민학교 명칭 개정운동의 시작부터 끝까지 헌신한 사람은 국가주의를 거부한 교사들이었다. 김남식(88) 선생과 이치석(52) 선생. 그러나 이들은 “국가주의 간판을 내린 지 10년이 지났지만, 학교 현장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고 말한다. 김씨는 일제시대인 1939년부터 교단에 섰다가 해고와 임용을 반복한 끝에 1985년 정년퇴직했다. 김씨를 개인적 스승으로 모시며 평전을 집필하고 있는 이씨 또한 2004년 퇴직해 학교사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이들에게 한국 교육의 역사를 들으면, 2006년의 국가주의를 해독할 수 있을까. 그들을 2월14일 서울 수유리 4·19공원 앞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뀐 지 10년이 지났다. 당시 명칭 개정을 이끈 김남식(오른쪽), 이치석 선생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국가주의 교육은 그대로" 라고 입을 모은다. (사진/ 류우종 기자)

함석헌 선생의 말에 충격 받다

두 분은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이치석=5·16 군사 쿠데타로 투옥과 파면을 당한 교사들이 만나는 ‘응암동 모임’이 있었다. 응암동의 한 중국집에서 10년 넘게 이어진 비밀모임이었는데, 한 선생의 소개로 그곳에서 가서 김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김남식=1961년이었나. 교원노조(4·19 교원노조라고 불렸다)를 만드는 데 관여했는데, 서울 무악초등학교에서 체포됐다. 토요일 오후였다. 3학년 대 6학년 배구시합이 끝나자마자 끌려갔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반년을 살았던 것 같다.(김남식씨는 아래뻘인 이치석씨에게 존댓말을 했다.)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문제라고 느낀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것 같다.

이치석=1986년 <민중교육> 사건에 연루된 선생님들을 중심으로 민주실천교육협의회 창립식을 할 때였다. 5월15일 흥사단 강당에서 열린 창립식 축사에서 고 함석헌 선생이 민주화 운동에 대한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국민학교란 이름을 두고 어떻게 민족·민주교육을 하겠다는 것이냐?”고 하셨다. 충격을 받았다. 알고 보니 그건 함 선생의 지론이었다.

김남식=함 선생은 예전부터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일본도 국민학교를 소학교로 바꿨는데, 어찌 우리는 국민학교란 이름을 아직 쓰고 있느냐며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하시던 기억이 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함 선생의 말을 흘려들었는데, 이 선생이 나서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치석=국민학교 명칭 개정운동에 뜻을 모은 것은 1991년 가을부터다. 사실 그즈음 전교조에 찾아가 이 문제를 두 차례나 제안했다가 거부당했다. 오히려 ‘국민교육’이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과거의 진실에 대한 조직의 이해가 부족했다고나 할까. 1993년 봄부터 국민학교 명칭 개정을 위한 국회 청원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이를 처음 결정할 때 모인 사람은 단 네 명이었고, 전혀 가망이 없어 보였으나 성패 여부는 따지지 말자고 했다. 그해 6월26일에 <한겨레>에 첫 보도가 났고, 5181명의 이름으로 10월26일 국회에 청원했다. 일흔을 넘긴 김남식 선생의 의지가 큰 힘이 됐다.

김 선생님은 지금도 일제 식민지 교육을 반성하며 넝마를 줍는다고 들었다.


△ 일제 때 소학교 교과서. (사진/ 전쟁과 학교)


△ 아침부너 저녁까지 국가와 부모에 대한 충성이 미덕으로 찬양된다. 1880년 프랑스혁명 기념일에 분열 행진을 하는 파리의 초등학교 학생들 (사진/ 전쟁과 학교)

김남식=처음에는 간디가 제일의 봉사는 변기 청소라는 말을 한 적도 있어 나도 그런 일을 해보자고 해서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내가 왜정 때 학생들에게 일본말 쓰기를 시킨 것에 대해 벌을 받는 의미로 청소를 이어나가고 있다. 1939년 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는데, 일주일에 한 시간짜리 조선어 수업 말고는 우리말을 쓰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주번 교사는 아침마다 4명의 주번에게 각각 ‘국어 상용’이라고 쓰인 손바닥만 한 크기의 패를 줬다. 주번은 우리말을 쓰는 친구를 발견하면 그 패를 그에게 건넸다. 운동장 구석에서라도 우리말을 쓰면 그 패를 받아야 한다. 그 패를 받은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하교 시간까지 못 넘기면, 최종적으로 교무실에 그 패를 들고 가야 한다. 늦게나마 ‘내가 교사로서 참 나쁜 짓을 했구나’ ‘민족반역자였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명칭 변경, 쥐꼬리만 자른 셈

이치석=김 선생님께서는 정년퇴임식에서 그런 고백을 하셨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에 들어가고 이듬해 ‘황국신민’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다. 1938년부터는 우리말을 못 쓰게 했다. 김 선생님이 첫 부임을 하던 때의 시대적 배경이 그렇다.

여하튼 1941년 일제가 만든 국민학교가 1996년 폐지됐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지금 보니 어떤가.

이치석=국민학교는 명칭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학교제’라는 일본식 8년제 의무교육제도의 이름이다. 국민학교 시스템은 여전히 그대로다. 지금 생각해보면, 쥐 뒤꼬리만 자른 게 아니었을까.

국민학교 시스템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말은 일제 국가주의가 2006년의 학교에 살아 있다는 말인가.


△ (사진/ 류우종 기자)

이치석=물론 상당히 달라진 부분도 있다. 애국조회와 국기에 대한 맹세가 아직 남아 있지 않나. 지금도 규모가 크고 화려한 교장실은 옛날과 똑같고, 상명하복의 군대를 연상시킨다. 내가 본 외국의 학교 교장실은 매우 작고 소박했다. 물론 진짜 문제는 가시적인 교장실 풍경이 아니다. 일제시대 전쟁 폭력이 판을 치던 시대에 칸막이 교실에서 적과 아군을 이분법적으로 가르던 일방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국민교육의 가치관이 아직도 여러 가지 변형된 병원체로서 학교 현장을 지배하고 있다. 국민학교라는 이름만 없어진 건 아닐까.

일제시대 애국조회는 어떻게 진행됐나. 김 선생님이 생생하게 기억할 것 같은데.

김남식=월요일이면 애국조회를 했다.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께 충의를 다합니다. 우리들은 인고단련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그는 이어 일본말로도 황국신민서사를 낭독했다.) 이렇게 외우고 히노마루에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동쪽을 향해 동방요배라는 것을 했다. 도쿄의 황궁이 있는 동쪽에 절하는 것이다.

이치석=우리는 국민학교보다 국민이란 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주의 학교 명칭을 고친 뒤에도,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무관심한 학교 현장을 보고 무척 실망했다. 만약 교육부나 교육자들이 진지한 관심을 가졌다면, 이미 애국조회나 국기에 대한 맹세(일제 때는 황국신민서사)도 없어져야 했다.

<한겨레21>이 국기에 대한 맹세를 없애자고 주장을 하자, 사회적인 파란이 일었다. 그러나 네티즌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존치론이 우세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이치석=과거에 대한 망각, 국가주의 교육의 사회적 학습효과 때문이 아닐까?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바꾸자고 했을 때, 반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정이 들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돈이 든다는 것이었다. 국기 맹세를 폐지하자는 데 대한 반대 여론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교육이 무엇인가? 정이니 돈이니 따져선 안 되는 중요한 영역이다.

김남식=(국기에 대한 맹세는) 당연히 폐지돼야 한다.

지금의 교육은 국가만 있을 뿐


△ (사진/ 류우종 기자)

이치석=국가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게 학교 시스템이다. 지금 학교 시스템의 골격은 일제 때 그대로다. 학교는 국가주의 잔재라기보다는 시스템 그 자체다. 오히려 학교 교육을 받은 우리들이 국가주의 교육 시스템을 통과한 잔재라고나 할까. 황우석에 열광하는 네티즌도 국가주의 교육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황우석이 국민을 먹여살린다는 경제논리는 일제시대의 ‘일등국가론’과 무관치 않다.

그렇다면 유럽은 어떤가. 그들 역시 근대국가를 형성하고 국민교육을 하지 않았나.

이치석=국가는 전쟁 수행 기관이었다. 전쟁 수행은 국가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서구에서 국가주의의 절정은 1차 대전이었다. 학교는 그 국가주의 시스템 속에 존재했다. 많은 교사들이 전쟁에 자원했다. 아이들은 군사훈련을 받았다. 지금 학교 제도에도 전쟁의 영향이 남아 있다. 캠핑이나 보이스카우트도 전쟁문화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서구는 전쟁 직후부터 이런 국가주의의 속성을 반성해왔다. 프랑스 교원노조는 전쟁을 비판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 지성인들은 국가주의적 맹목성을 반성하면서 많은 부분을 수정해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국가주의 교육은 일제를 통해 이식됐으며, 분단 상황에서 반공의 이름으로 지속됐다.

냉전이 해체되고 반공이 무의미해졌지만 도덕 교과서엔 개인이 없다.

이치석=전체주의는 개인을 억압하고 집단을 강조한다. 현재의 학교는 과거를 망각하고 있다. 교사들조차 일제가 남겨놓은 유산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개인(individual)은 분할될 수 없는 존재, 즉 전체 그 자체다. 올바른 개인으로 성장시키는 게 교육의 목적이 돼야 한다. 지금의 교육은 주체인 나와 타자를 인식시키지 않는다. 국가만 있을 뿐이다.


국민, 메이지 유신의 발명품

일왕에 대한 충성을 강요한 교육칙어를 1895년 고종이 모방

국민이라는 단어는 메이지 유신 때 영어인 네이션(nation)을 옮긴 말이다. 이것이 한국의 공문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95년 12월 고종 황제가 발표한 교육입국조서에서였다. “교육의 실제는 덕육, 체육, 지육에 있다 하여 새 교육의 대강령 3조를 전국민에게 내렸다… 아! 내가 가르치지 아니하면 국가는 튼튼해지기가 심히 어렵다. 세계의 형세를 보건대 부강하며 독립하여 응시하는 모든 나라는 다 국민의 지식이 개명하였다.”

그러나 이치석씨는 “5년 전 메이지의 교육칙어를 모방한 것”이라고 말한다. 교육칙어는 일왕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도덕의 근원으로 내세웠다. 바로 학교에서 만드는 ‘국민’의 내용이다.

‘국민교육회’ 등 항일운동 차원의 자주적인 국민교육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국민교육은 식민지 친일교육으로 귀결되고 만다. 일본은 1938년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로 바꾸고, 1941년에는 학제 개편과 함께 국민학교령을 발표한다. 대동아공영권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전시 체제에 맞는 정신무장을 강조하기 위해 학제를 개편한 것이다. 쉽게 말해 전시 교육개혁이다. 학교는 점차 군사훈련소가 되어간다.

국민이라는 단어는 해방 뒤에도 강조된다.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인민이라는 용어와 함께 통용됐고, 북한에서 자주 쓴다는 이유로 ‘인민’이라는 이름은 사장됐다. 북한은 인민학교라는 이름을 썼다. 남북한의 학교 교육은 군사주의 경향으로 흘렀다. 이치석씨는 “한국의 국민은 구한말의 국민, 식민지 친일 국민, 분단 시대의 반공 국민으로 세 가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며 “아직 국민국가의 피플(people)로 변모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 참고: 이치석, <전쟁과 학교>,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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