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영혼의 편지 (반양장)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예술을 향한 광기는 살인으로까지도 이어진다. 김동인의 '광화사'를 읽으며 그것도 예술이라면 예술이고 아름다움이라면 아름다움이겠지 싶어 몸서리쳤던 어느 날이 있었다. 보편적이라 할 순 없겠지만 그리고 현실 아닌 꾸며낸 이야기이긴 하지만 예술은 미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법, 굳이 예술이 아니더라도 한 번 뿐인 인생을 통째로 무언가에 바칠 수 있는 열정이 내게도 허락된다면... 저마다 어린 시절 지녔던 꿈은 달랐겠지만, 정작 어른이 되었을 때 살아가는 모습이 비슷한 것을 보면 현대 사회에서 이는 적지 않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듯하다. 현실적인 것에 목 매달고, 정신을 팔아 물질을 추구하는 것이 정석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는 우리에게 더 이상 꿈꾸지 말길 요구할 뿐이다. 꿈꾸는 이는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고...

지상의 빛이 만들어내는 모든 색을 자신의 캔버스에 담았던 한 인물을 보면서 그가 품었던 예술에 대한 열정이 어떻게 한 인간을 파멸로 몰고 갔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경제난에 시달렸고, 결국에는 자신의 귀를 잘랐던 고흐, 그가 살기에 이 세상은 너무 넓었다. 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그에게 그릴 수 있는 대상이었지만, 그림을 위한 경제력은 뒷받침되지 않은 현실에 그는 괴로워했다. 그런 그에게 동생 테오는 끝까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자기편이었다.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그의 그림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봐 준 동생이라는 존재는 외따로 떨어져 세상을 느끼지 못하는 그에게 사람 냄새를 풍기는 몇 안 되는 대상이었다. 자기 안에 담아놓았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편지지에 빼곡하게 적혔다. 새로운 시도와 좌절, 잊을만 하면 고개를 쳐드는 가난의 힘 그리고 결코 성취할 수 없는 사랑에 이르기까지...
경제적으로 의지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자칫 주눅이 들 수도 있었겠지만, 고흐는 비굴함과 자책감으로 채울 수도 있었을 그 공간을 그림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메웠다. 훗날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이들의 삶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면, 지금은 비참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몫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정해진 방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에게 강점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창의성이라는 날개를 무참히 꺾어버리는 것이 교육이라면, 그의 눈은 교육에 의한 인위적인 세련됨을 알지 못했다. 온몸 가득 흙 냄새로 물든 농부의 모습이야말로 농부다운 것이라는 믿음으로,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대상들에 그는 애정을 불어넣었다. 그것은 어쩌면 일종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향기로운 꽃을 향해 저도 모르게 날개짓을 하는 나비처럼, 흙먼지 날리는 어딘가에 그는 캔버스를 펼쳤을 것이다. 그리고 끝없이 움직이는 대상으로부터 정지된 화상을 얻어내기 위해 그의 손은 분주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따스하게 녹여줄 동생의 편지와, 그로 하여금 계속 그림을 그리게 해줄 경제적 지원을 기다리는 시간들이 길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어쩌면 그 시간은 내가 그를 만나기 위해 건너야 하는 1세기가 넘는 시간보다 더 길지도 모른다. 그 시간들을 견디기 위해, 하나의 편지를 그리고 하나의 그림을 보내놓고는 느끼는 허전함을 또 다른 그림을 그리며 삭혔던 그에게서 나는 광기를 느꼈다. 갚을 수 없을 경제적 도움을 대신해 자신의 영혼을 주겠다던 그의 목소리,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해쳐야 했던 그의 삶 자체가 무시무시한 예술처럼 느껴졌다. 그 예술의 끝은 죽음이었고, 죽음은 그를 완성시켰다. 그의 삶은 절망 속에서 피어난 성공이었고, 예술을 향한 자기 희생이었다. 하지만 그 희생은 수많은 그림을 남겼고, 그 그림들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말하는 방법을 기억하고 있다.

미칠 수 있는 용기를 그의 삶으로부터 발견했다. 그와 같이 사는 것은 두려워하면서, 그처럼 기억되길 꿈꾸는 나에겐 어떤 삶이 허락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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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6월 18일 인도의 마드라스 공항에서 받은 현 인도 총리 만모한 싱의 친필 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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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좋은 책에 대해 너무 많이 딴죽을 거는 것처럼 보여 좀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이왕에 시작한 것이니 계속해보겠다.

11.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공식 영역과 비공식 영역 모두에서 성의 자유를 누리지만, 여성에게는 가족 안에서 출산을 위한 성만을 허용한다. (139쪽) ===> 이 문장은 중문이다.  쉼표 앞의 단문의 주어가 '남성은' 이므로 쉼표 뒤의 단문에서 별도의 주어 표지가 없는 한 동일한 주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뒷 문장의 주어는 누군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이 문장은 비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공식 영역과 비공식 영역 모두에서 성의 자유를 누리지만, 여성은 가족 안에서 출산을 위한 성만을 가질 뿐이다.   

 위와 같이 고치면 쉼표앞에는 '남성은'이 주어이고 뒤에는 '여성은'이 주어가 되어 문법적인 문제가 없어 보인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공식 영역과 비공식 영역 모두에서 성의 자유를 누리지만, 여성에게는 가족 안에서 출산을 위한 성만이 허용될 뿐이다.

 위의 문장도 그런대로 가능해 보인다. 이 경우에는 '성만이'가 주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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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노무현과 이회창 - 손석춘

노무현과 이회창  

차이가 컸다. 노무현과 이회창. 2002년 대선에서 두 사람의 말은 그랬다. 한 사람이 성장을 말할 때, 분배를 공약했다. 한-미 동맹 강화를 말할 때, 사진 찍으러 미국에 가진 않겠다고 공언했다. 무릇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다. 하지만 역사적 가정은 새로운 상상력을 열어주기도 한다. 잠시 가정해 보자. 이회창 정권이 들어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상임을 전제하고 그려보자. 신자유주의 확산으로 부익부 빈익빈은 무장 깊어간다. 중산층이 시나브로 무너지고 아이들과 자살하는 빈민도 나타난다. 그런데 대통령 내외는 골프를 즐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줄이어 자살하는데도 모르쇠했다. 반면에 대통령은 대통령 봉급(혈세)을 꼬박꼬박 모아 재산을 불린다.

민주시민들은 대통령을 어떻게 볼까. 그뿐인가. 권력이 일부의 비리를 빌미삼아 민주·노동 운동 전반을 싸잡아 매도한다. 부자신문도 곰비임비 나팔 불며 정권을 거든다. 대책 없는 농업개방에 항의하는 농민, 칠순에 이르도록 평생 소작을 해온 농부를 공권력이란 이름 아래 국회 앞 아스팔트에서 때려죽인다.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이 빚은 이라크 침략전쟁에 반대여론을 모르쇠하고 참전한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도 전격 합의한다. 그럼에도 언죽번죽 자신들은 힘이 없고 야당과 언론 탓이라고 언구럭을 부린다면 어떻게 될까. 이회창 정권의 운명은.

저 눈부신 민주운동의 전통을 체화한 민중은 결코 침묵하지 않을 터다. 대학가와 노동현장, 한길과 들녘에서 정권 퇴진 투쟁이 여울여울 타오를 게다. 이회창 정권을 두남두며 장·차관과 국회의원이 된 먹물들은 어용 지식인으로 벅벅이 비판받을 법하다.

가정에서 다시 현실로 오기는 쉽다. 앞서 서술한 가정문에서 ‘이회창’만 ‘노무현’으로 바꾸면 된다. 그렇다. 바로 노무현 정권이 집권 3년 동안 해온 일이다. 차라리 이회창씨에겐 억울한 가정일 수 있다. 최소한 그는 우왕좌왕하거나 자기모순은 없었을지 모른다. 재벌 중심의 성장 정책과 노동 탄압, 한-미 동맹을 강화하면서 생뚱한 말로 본질을 흐리진 않을 성싶다.

현실을 직시할 때다. 말과 행동도 구별해 읽어야 옳다. 냉철히 톺아보라. 노무현 정권의 정체는 무엇인가. 과거사법이나 사학법이 상징하듯이 분명 한나라당과 다른 치적은 있다. 하지만 민중 생존권에 이르면 전혀 아니다. 양극화가 더는 덮어둘 수 없는 문제로 떠오르자 대통령은 생색을 낸다. “지지도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문제를 회피하지 않기로 하고 양극화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제기”한단다. 회피하지 않는다며 겨우 ‘의제로 제기’다. 실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남은 임기 ‘전력투구’다. 양극화 해소를 다짐한 직후에 비정규직 확대 법안을 폭력적으로 처리하는 배짱을 보라. 집권 3년 동안 3억5천만원을 불린 대통령 일가에게 불우이웃 돕기도 하지 않느냐고 묻는 누리꾼의 비난은 그저 비아냥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다수 시민단체들은 고요하다. 이회창이 아니라 노무현이 대통령인 까닭이다. 정권의 실정을 옳게 비판해도 궁딴다. ‘민주노동당 시각’이라며 정파적 해석으로 귀를 틀어막는다. 그래서다. 정권은 자신의 무능과 불성실을 야당과 부자신문 탓으로 지청구삼는다. 노동자와 농민의 외마디 절규를 생먹는 대통령이 ‘야당 하고 싶다’고 투정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이회창 정권이라면 더 늦기 전에 민심을 수습하라고 건의하는 참모라도 있지 않았을까. 노 정권의 참모들은 정반대다. 국민에게 도와주지 않았다고 되술래잡는다. 그렇다. 노무현과 이회창. 차이는 크다.

손석춘 기획위원
2020gi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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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 선생의 <비슷한 것은 가짜다>은 예전에 두 번 정도 보았다.  그러면 뭘하나?  내머리 속에 아주 성능이 뛰어난 지우개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걸.  <한시 미학 산책>은 반쯤 보다가 말았다.  詩는 나에게 너무 어렵다. 

- 김소진의 <아버지의 미소>는 3~4년 전에 (하나밖에 없는) 여자 친구(feamale friend)가 생일 선물로 준 것인데 아직 다 못 읽었다. 

- 이오덕의 <내가 무슨..>은 반쯤 읽었으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다.

- <전쟁과 학교> 읽어 보고 싶다.

- 심윤경의 작품도 기대가 된다.

- <그리스인 조르바>는 인내력의 테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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