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보편성이 갖는 의학에세이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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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
서민 지음 / 다밋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의사와 환자의 불신, 나아가 의학계와 일반 사회계의 불협화음이 빚어낸 기이한 구도는 사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의사들은 ‘그들만의’ 담장을 구성하는 부류다. 이것은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차별화된 학문을 학습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의사들이 특별의식이나 권위의식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인류에서 유일하게 인체를 탐험하고 대상으로 삼으며 그것으로 직업을 갖는다는 ‘특별성’ 에서 기인한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나, 레오나르도다빈치의 해부학이 이제껏 여타의 일반 학문 연구자들에게조차 호응을 가져오고 탐구된다는 점을 봐라. 의학은 분명 산의 나무를 베어서 책을 만드는 일이나, 탄소와 수소를 만들어 폭탄을 만드는 일과 구리와 철을 녹여서 합금을 만드는 연금술과는 다르다. 생명을 다루는 인류사의 유일무이한 학문이며, 가치이며 흉내 낼 수 없고 꾸밀 수 없는 독보적인 테마다.
그런 점에서 의학은 인류사(人類史)와 그 맥락을 함께 해 왔다. 과거에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인체탐구의 비윤리성과 몰인정성, 무책임한 자세는 끊임없이 일반인들에게 불신의 벽을 만들고 있다. 정말 어떤 의사가 예수나 마호메드처럼 성인(聖人)의 대열에 오를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들은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직업을 갖고 의술은 인술이라는 숭고한 선서를 하지만 갈수록 다단해지는 현대사회에서 이제 이 말은 정말 ‘그들만의 리그’라는 특권을 형성했다. 이 책의 저자도 감기와 변비와 대머리와 기생충을 말하지만 의사와 환자와의 운명적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의사와 환자의 불협화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환자나 일반인도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로 우리들 ‘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의사와 환자는 서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며, 상호간의 불신은 서로에게 득이 될 게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의사의 잘잘못을 가려 줄, 그래서 거기에 걸맞은 보상 범위를 결정해줄 합리적이고 공정한 기구가 만들어져야 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다. 의사들로 구성된 그 기구가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면, 판사들 중 일부가 의료에 대한 전문성을 가지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듯싶다. 어찌되었건 지금 이대로는 곤란하다. 의사들도 돈만 밝힌다는 비난에서 벗어나고 싶단 말이다!”-(68쪽)
의사의 윤리적 양심에 전폭적으로 인체를 맡기기에는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이 정의로운 모범생 정사각형이 아니다. 의사에게 성인(聖人)의 자질을 무작정 요구하거나, 생활인으로서의 현실성을 초월할 것을 바라는 일도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므로 그들 ‘특별한 인간’들이 환자에게 저지르는 실수(인체에 실수를 가하는 것은 생명과 직결되는 일이다.)를 중간지점에서 가부를 결정해 줄 장치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법에 의지해야 하는 인간의 삶. 생각만으로도 살벌하지 않는가. 의사들의 도덕성이 누누이 거론되고 그들의 양심을 의심하는 사례가 수 없이 반복되어지는 세상에서 그렇다면 이러한 장치 말고 어디에 망가진 인체를 회복하기 위한 호소를 해야 하는가 하는 자문에 이르면 저자의 저 한마디 말은 결코 가볍게 흘릴 말이 아니다.
이것은 안락사 문제 같은 생명윤리 차원을 넘어 인간성의 양심을 열어젖히는 일이다. 시대에 맞는 의학 콘텐츠를 제공하는 일과 더불어 개인의 영달을 목적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의 맹종을 경계할 일이다. 신경외과나 흉부외과 의사들의 숫자가 급격한 감소를 불러오고 성형이나 안과 같은 ‘부의 직접적 신호’와 연결하는 주파수에 의사들은 자신의 ‘기술’을 맡기고 있다. 비타민이 몸에 좋다고 하면서 제약회사의 비타민 홍보비를 받아 챙기고, 대머리 약에 좋다는 한 마디 말이 다시 제약회사로부터 연구비를 받아내는 ‘기술’. 이제 의학의 기술은 날카로운 해부용 메스를 던지고 자신의 개인적 권위와 명예와 부의 축적을 향하는 안테나가 세워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많은 성형의사와 그 많은 의약품의 반짝하는 유행을 어떻게 설명할 텐가.
나는 이 책의 저자가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인체를 대상으로 삼는 직업적 양심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쁘다. 우리사회에서 기득권, ‘특별한 학문을 학습한 사람들’이 갖는 권위와 독선과 위악의 껍데기를 벗어던졌다는 점에서 안도한다. 물론, 이러한 안도를 갖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은 인체를 대하는 저자의 따뜻한 인성과 겸허한 자세다. 육체를 비하하고 죄스럽게 여긴 기독교의 도덕관에 침을 뱉지만 이런 자상한 시력으로 인체를 대하는 의사가 있다는 사실은 내가, 또는 당신이 겪었을(겪을지도 모를) 의료계의 비참함에 완전히 실망을 드리우는 것으로부터 자세를 고치게 한다. 무엇보다 저자가 책의 서두에서 주장하는 ‘소극적 안락사의 인정’은 따로 공부를 하고 싶을 정도로 내 주된 관심사와 일치했음에 반갑다.
지금까지 전작주의에 의하여 저자의 다른 책들을 읽어왔다. 초창기의 엉성하지만 때 묻지 않은 단어들과 십년이 더 지난 후 이어지는 이 책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단어변화와 의학에 관한 대중적 해설은 사뭇 달라짐을 발견했다. 초창기에는 대중성에 집착하는 강도가 높았는지 실용성에서 마이너스의 점수를 부여해야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글쓰기를 배우고 나오며 의사면허를 손에 들고 나오는가.
양심을 잃지 않는 가치가 이 책의 ‘힘’이다. 제목은 '변명'이라고 했지만 쉽고 편하게 읽히는 의학 책이다. 변명이 저자의 말처럼 실시간 대화체로 나아간다면 이것은 변명이 아니라 친절한 설명이며, 강의다. (솔직히 의학이 왜 그렇게 어려운 투로 일관하고 있는지 병원 문을 열고 나올 때 한마디씩 안하는 '비의학인'은 없다) 실용서의 특징이 갖는 단점이 깊이 없음인데, 생각해 보라. 인체에 깊은 통증이 느껴진다면 병원으로 달려가야지 책을 붙들고 몇 번째 페이지인가를 찾고 있을 것인가. 다만, 이 책에서 의료계의 내부 고발 같은 르포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실망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 책을 원한다면 ‘긴박하고 심각한’ 고발소설을 찾아보시길 권한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저자의 의학적 자세는 나르시시즘을 거부하며 동시에 현실성을 강조한다.
이 책의 두 번째 ‘힘’은 대중성과 적절히 타협하고 조화를 이룬 ‘보편적 설명’에 있다. 감기와 변비와 비타민과 포경수술과 제왕절개, 채식주의와 안락사라는 난이도가 높아가는 문제부터 의료수가까지 골고루 짚어본 점에서 의학 에세이의 역할을 발휘했다고 본다. (다만, 삽입된 레이아웃은 이 책에서 '목에 걸린 가시'다)
다음번 책이 언제, 어떤 진솔함의 힘으로 등장할지 속물처럼 저자의 팬이 되어 기다린다. 끝으로 책 표지 뒷장에 나의 허술한 한 줄짜리 서평을 싣는 기회가 와서 무엇보다 얼마나 들떴는지 모른다. 친절한 주치의로부터 오히려 해물이 풍성하게 들어간 짬뽕 한 그릇을 얻어먹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