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tella.K > 4월 26일 수요일 발 알라딘 늬우스

안녕하십니까? 알라딘 늬우스입니다.

먼저 첫소식입니다. 알라딘 예찬.

지난 4월 17일 우리의 조선인님께서는 <알라딘 마을뿐이다.>라고 하는 페이퍼를 올리셔서 무려 20분의 추천을 받아 화제를 모으셨습니다.

마이페이퍼 링크 주소 : http://www.aladin.co.kr/blog/mypaper/859439


 거의 모든 알라디너들이 이에 동감을 표해주셨는데요, 조선인님 이 날의 페이퍼를 보면,

- 기꺼이 지른 신간이 주문한 다음날 할인쿠폰이벤트중이고, 책은 이미 배송중일 때 비명 지르고 싶은 그 심정, 털어놓을 곳은 알라딘 마을뿐이다. 란 표현이 있었는데 정말 이런 경우 있으시죠. 그때의 기분을 뭘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사자성어가 생각이 나는군요. 오.비.이.락! 어떤 사람은 뭐 밟았다. 뭐 그러기도 하더라만요.

이 페이퍼에 대한 댓글도 다양해서 마태우스님, 저두 동감^^ 제 사진을 올려놔도 "집어 치워라"고 하지 않는 곳은 알라딘 마을 뿐이죠^^라고 하셨고,  Mephisto님은 자식자랑....마님자랑...마당쇠자랑 갖은 팔불출 짓을 해도 싫은 소리 하나 없는 곳입니다..^^.라고 하시며 은근히 자기 페이퍼의 정당성을 부각시키셨는데요, 그렇지요. 누가 뭐랄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반면,   잉크냄새님은 그래서 이리 오래도록 저의 발걸음을 잡아놓고 있나 봅니다. 라고 하셔서 요즘 유행하고 있는 하이쿠의 짙은 서정을 보여주시기도 하셨고, 수암님처럼, 때로 국어사전도 펼쳐 보았답니다. 그래도 자꾸만 예전 스타일이 나와서리.... 하시며 학구열을 보이시기도 하셨는데요, 역시 이래저래 알라딘은 예찬받아 마땅한 것 같습니다.

제가 알라딘 예찬에 한마디 거든다면, 외로운 밤 허벅지를 꼬집지 않아도 되는 곳이 알라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푸하하하!

두번째 소식입니다. 알라딘 폐인을 위한 클리닉 생기려나?

아, 다음 소식은 앞서 보도해 드린 내용과는 다소 상치되는 내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알라딘이 좋다보니 알라딘 폐인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었는데요 이에 대한 대안들이 속속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우리의 푸하님께서 <알라딘 서재중독에서 벗어나는 '나'의 방법>을 올려 주셨습니다.

(마이페이퍼 링크 주소 : http://www.aladin.co.kr/blog/mypaper/862052

)

여기서 보면, 만약 ‘서재중독’이라고 규정할 심리상태가 있다면  해결할 방법으로 부정의 방법이 아닌 긍정의 방법을 사용해보는 것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부정하는 것은 ‘정말 하루에 한 번만 인터넷 해야지...’와 같이 무엇을 안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긍정의 방법은 ‘어떤 목적을 세우는 것’ 그리고 여기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알라딘 서재도 더욱 제대로 이용할 수 있거든요.(이쯤 되면 제가 너무나 하릴없이 빈둥되는 사람 쯤으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ㅠㅜ 그건 아니구요 제가 하고자하는 바가 저랑 조금 안 맞아서 너무나 하고 싶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이곳이 좋아서요...^^) 하셨는데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역시 푸하님도 알라딘이 좋은 것은 어찌할 수 없으신가 봅니다.

그에 대해 우리의 바람구두님도 즉각 <알라딘 서재 이용하는 법>이란 페이퍼를 올리셨습니다.

 (마이페이퍼 링크 주소 : http://www.aladin.co.kr/blog/mypaper/862344)

그 글에서 보면, 5) 즐찾에 연연하지 않으며, 댓글이나 추천에 연연하지 않는다. 맺고 끊는 것을 정확히 한다. (자신의 즐찾을 능력 밖으로 인연따라 너무 늘려두지 않는다.)란 글이 눈에 띄는데요, 그래서일까요? 9개의 댓글 중 논지를 벗어나 "마로가 많이 컸네요. 어흥... 무서운 사람... 흐흐 말처럼 실천한다면 저도 좋으련만..."이란 말로 일축의 묘미를 보여주셨는데요, 이런 필살기는 바람구두님만이 보여주실 수 있는 것으로 다른 알라디너들은 따라서 하시면 즐찾에서 제명 당하는 수가 있으니 조심해 주시기 바라구요, 댓글에 대해서는 꼭 답례의 글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세번째 소식입니다. 이벤트는 진화한다.

제가 이 시간을 통해 자주 이벤트 소식을 전해드리곤 했는데요, 이미 캡처 이벤트나, 책 소개 이벤트, 또는 글짓기 이벤트는 고전이 된 것 같습니다. 나날이 진화해 가는 이벤트를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 끝난 라주미힌님의 <하이쿠 이벤트>가 화제를 모았는데요, 특별히 라주미힌님은 @&----이것을 장미라 우기시면서 각 츨전 하이쿠에 최고 5개까지 허용할 수 있다는 조항을 만드셨는데 @&----이 장미라...뭐 우기시면 할 수 없죠. 장미라고 하는 수 밖에. 근데 그런 조항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추천은 한번이지만 이건 많게는 5개까지 받을 수 있으니...참고로 저는 그 이벤트에 참여를 못해서 저딴 장미를 못 받았는데요, 오늘의 알라딘 늬우스에 대해 여러분의 공정한 심사를 받겠습니다. 저도 장미 보내주세요~

이런 와중에 오늘  승주나무님께서 또 이벤트를 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름하여 <최다 추천, 최다 땡스투 작품을 찾아라!!!>인데요, 이거이거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이 기회에 최다 추천의 리뷰를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조사하면 다 나옵니다. 밝히시죠!

마지막 소식입니다. 이 주의 한컷. 순서인데요,  

여러분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Anne Frank House라고 합니다. 이 사진을 올리신 kleinsusun 님께서 <11년 전 말하지 못했던 솔직한 견문록>에 올리신 사진인데요,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수선님께선

1942년에,
일본 식민지였던 그 암담하고 가난하고 서러웠던 시기에,
도대체 우리 할머니는 어떤 집에 살았을까?

그 생각을 하니...
<안네의 일기>를 읽었을 때 보다 가슴이 더 아팠다. 마구마구 아팠다.
도대체 우리 할머니는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았을까

란 글로 저곳을 다녀오신 소감을 말씀해 주셨는데요,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BRINY님께서는 침략군에게 죽음을 당한 한 가난한 나라의 시골 소녀가 쓴 일기가 발견됐다면, 과연 그 일기는 <안네의 일기> 처럼 될 수 있었을까? -->동감입니다. 이 말씀에 저도 동감입니다.

아, 이시간 마치기 전에 지난 4월 15일 발 알라딘 늬우스에서 스텔라님이 물만두님께 맞아서 눈탱이가 밤탱이가 됐다는 보도는 근거가 없는 보도로서 단지 때마침 눈다래끼가 난 스텔라님이 물만두님께 혐의를 뒤집어 씌우기 위한 계략이었기에 보도를 삭제하는 바입니다.

지금 스텔라님과 물만두님은 아주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죠, 물만두님!

자, 그럼 @&---장미 주시기를 잊지 마시기를 바라면서 늬우스를 마칩니다. 감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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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난생 처음으로 적금을 깨던 기억...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 오웰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

"적금을 하나 깨야겠어."

집사람의 말에 나는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작년 가을의 일이었는데, 갑자기 여기저기 목돈을 쓸 일이 좀 있었다. 이제껏 많은 돈을 벌어들이진 못했지만, 최대한 아끼고 쪼개고 비비고 해서 모아 놓은 돈이 그럭저럭 되었다. 하지만 이제껏 살면서 단 한 번도 적금을 깬다거나, 예금을 왕창 인출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선 집사람의 태연스러운 말이 그야말로 청천벽력에 폭탄선언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가난했나? 가장이랍시고 뭐 이제껏 돈을 팍팍 벌어다 준 적도 없고, 그렇다고 남들처럼 머리 팍팍 굴려서 10억, 20억 재테크를 하는 재주도 없는 판에 솔직히 좀 민망한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간신히 그나마 모아놓은 것을 선뜻 깨버리자는 집사람의 말에, 나로선 불쑥 짜증이 솟구쳤다. 

"그걸 꼭 깨야 돼?"

이렇게 물어보는 내 심정은 무척이나 편치 않았다. 적금을 깬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무기력한 내 가장으로서의 책임에 대한 고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나는 적금을 깬다는 것 자체를 무척이나 "처절하고도, 비참한"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예금이나 적금은 "돈을 넣으라" 있는 것이지, "돈을 쓰라"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백 번 양보해서 혹시 만기가 되었으면 모를까, 결코 덜컥 "중도에 깨버리라"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흔히 주위에서 누군가가 무슨 일로 "적금을 깼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소스라치곤 했는데, 그건 그 사람이 뭔가 대단한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내게 있어서 적금은 말 그대로 한푼 두푼 "모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지, 결코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을 "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기가 되어 목돈이 생겨도 거기다가 또다시 한푼 두푼 덧붙여 "더 많이 모으는" 것이 중요했지, 그렇게 알뜰살뜰 모은 돈을 팍 "써버리는" 것은 도무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아니, 그럼 뭐 하러 적금을 부어? 언제고 쓰자고 붓는 거지, 갖고만 있자고 붓는 거야?"

나보다 훨씬 더 실용적인 금전관을 지니고 있는 집사람은 오히려 내게 면박을 주었고, 나로선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늘 그랬듯이 역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사회생활 경험도 전무하고, 나보다 지금까지 벌어 본 돈의 총액도 적은 집사람은, 적어도 경제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항상 나보다 자신이 훨씬 우월하고 경험도 많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본인이 어린 시절에 한때나마 "가난"이란 것을 겪어 보았다고 자처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늘 나보고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호의호식하고 자라났기 때문에 사고방식이 답답하다는 둥, 진짜 가난해 본 적도 없으면서 궁상만 떤다는 둥, 돈이 있으면서도 유치하게 쪼잔하게만 군다는 둥, 온갖 비난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도... 그걸 안 깨고 어떻게 하는 방법은 없겠느냐고..."

가난... 이야기를 하자면 참으로 나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난 스스로가 가난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때때로 "돈이 없는," 혹은 "돈이 없어서 아쉬운" 느낌이 들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엄청난 부자는 아니다. 물론 아직까지 금전적으로 빚진 것이 없다는 것 (집사람 말로는 요즘 같은 세상에선 카드빚이나 대출금이 없다는 건 결국 부자인 거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하지만.) 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달 생활비 걱정을 안 하고 살아가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가난한 것과 부자인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일 수밖에 없다. 즉 제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더 가난한" 사람보다는 "부자"일 수밖에 없다는 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거리의 노숙자와 이건희 사이의 명백한 차이를 부정하자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른바 부와 가난의 문제는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

집사람은 도리어 짜증을 낸다. 적어도 이 순간, 우리는 결코 부자가 아니다. 사람들은 부자를 증오하고 경멸하기까지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누구나 부자를 동경하고 선망하기까지 한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일종의 자기합리화가 아닐까 싶다. 물론 "진짜" 가난뱅이가 부자를 욕한다면 그건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진짜" 가난뱅이란 누구를 의미하는 걸까? 물론 나야 정말로 "절박한," 그러니까 "처절한" 가난까지 경험해 보진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른바 "상대적 빈곤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마 이런 류의 빈곤감이란 세상 어느 누구라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제아무리 이건희라도 빌 게이츠에 비난하면 "가난한" 존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니 말이다. 혹시 누가 또 아나? 이건희가 사실은 1천억이 아니라 2천억을 생색내며 내놓고 싶었는데, 결국엔 자신이 빌 게이츠 만한 능력이 안 되는 것에 한탄하며 "절박함"을 느꼈는지도 말이다.

 

2.

"하여간, 방법이 없으니, 잔말 말고 적금 깨러 은행이나 가자구!" 집사람이 말했다. "왜 나까지 가야 해?" 내가 물었다. "그거야 당신 이름으로 든 적금이니까." 집사람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그런 적금이 있었어?" 내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들기야 내가 들어줬지." 집사람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그럼 당신이 갔다 오면 되잖아." 내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어이구, 적금 깰 때는 원래 본인이 가야 하는 거거든?" 집사람은 그것도 모르느냐는 투로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아, 그런가? 뭐, 그까이꺼... 가면 가는 거지, 그거야 못 갈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난 좀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 가면 뭐... 좀 쪽팔리는 것 이니야? 창구에서 언니가 막 적금 깨자 말라고 설득이라도 하는 거 아냐? '왜 해약하시는데요?' 어쩌구 하면서 막 이것저것 물어보구." 일종의 "창구공포증," 혹은 "계산대공포증"을 지닌 내가 주저주저하며 물었다. "어이구, 퍽도 그러겠다! 요즘엔 하도 적금 깨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 것 물어보지도 않네요!" 집사람이 꽥 소리를 질렀다. 그제서야 나는 일종의 체념 상태가 되었다. 돈이 필요하긴 필요하지만, 이거 당장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 방법이라곤 단 하나, 지난 몇 년 동안 모아놓은 적금 하나를 털썩 깨트리는 것밖에 없었다.

솔직히 요즘 은행을 가면 무척이나 소외되는 기분이다. 우리 동네만 그런지, 다른 동네도 다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전에 창구에 언니들이 줄줄이 앉아있던 은행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아예 지점의 절반은 툭 잘라서 무슨 VIP 고객 전용 창구로 만들어서 우리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도 없게 해 놓았고, 이제 나머지 공간도 절반으로 툭 잘라서 한쪽에서는 신용카드니 대출에 관한 일만 처리하기 때문에, 이제 남은 창구는 기껏해야 두 개, 아니면 세 개뿐이다. 그러니 입금 출금 등 비교적 간단한 업무를 보러 온 고객들은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다. 혹시나 서너 번호 앞의 다른 사람이 통장을 새로 개설하는지, 아니면 카드를 새로 만드는지 하여간 엄청나게 오랫동안 혼자 창구를 차지하고 있으면, 나머지 기다리는 사람은 짜증이 솟구칠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공과금 납부신청서를 들고 왔다갔다 하는 할머니며, 자기 번호표가 지나갔으니 먼저 해달라고 우기며 창구 앞으로 달려드는 아주머니며, 이리저리 고함치며 뛰어다니는 애들까지 있으면 그야말로 복마전이 따로 없다.

그렇게 하릴없이 은행에 앉아있다보니,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비록 "돈 버는" 재주는 없더라도 "돈 아끼는" 재주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거기 앉아서 생각해 보니 정말 나 자신이 인생의 실패자는 아닌가 하는 막막한 기분이 다 들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어쩔 수 없이 백만 원 짜리 적금 하나를 깨는 신세가 되었지만, 이러다가 다음에 또 하나, 또 하나, 또 하나를 깨고 나면 결국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게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집사람 말도 일리가 있다. 나는 진짜 "가난"을 체험해 보지 못한 까닭에 "가난"이란 말 자체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언제가 어떤 책에서, 사르트르는 자기 지갑에 돈이 없으면 무척이나 초조해서 어쩔 줄 모르는 성격이었다는 대목을 읽은 적이 있는데, 사실 내가 딱 그런 식이다. 지갑에 정말 만 원짜리 하나만 달랑 들어있으면 그때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하고, 그게 오천 원짜리로 둔갑하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천 원짜리로 둔갑하면 그때부턴 내 인생 자체에 대한 회의가 들며, 어느새 지갑은 텅 비고 주머니에서 동전 짤랑거리는 소리만 들리면 문득 자살충동까지 느끼는 것이다. 물론 적금으로는 백만 원을 고스란히 갖고 있으면서 말이다. 집사람은 이럴 때마다 나보고 "궁상 좀 떨지 말라"고 핀잔이지만.

조지 오웰은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서 한 사람이 "가난해지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 가난과의 첫 만남인데, 이것이 너무나도 이상하다. 가난이라면 정말 생각도 많이 했고, 평생 두려워해왔고, 조만간 닥쳐온다고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닥치고 보니 완전히 다르고, 또 시시하게 다르다. 아주 단순하리라고 여겼는데 복잡하기만 하다. 끔찍하리라고 여겼는데, 그저 궁상맞고 따분할 따름이다. 처음에 발견하는 것은 가난의 독특한 비천함, 어쩔 수 없이 겪는 변화. 복잡스러운 쩨쩨함, 주눅들기 따위이다. 이를테면 가난에 들러붙는 비밀주의를 발견한다. 어쩌다 갑자기 하루에 6프랑의 수입으로 줄어들었다. 물론 감히 그렇다는 인정은 못하니까, 예전과 똑같이 생활한다는 시늉만은 해야 한다. 애초부터 거짓말의 그물에 얽혀드는 꼴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감당이 되지 않는다. 빨랫감을 맡기던 세탁소에 발을 끊는데, 그러면 세탁소 여자가 지나가는 당신을 보고 왜냐고 묻는다. 뭐라고 얼버무리면, 그 여자는 다른 데에 맡긴다고 여기고 평생토록 당신과 원수가 진다. 담뱃가게 주인도 볼 때마다 왜 담배를 줄였느냐고 묻는다. 답장하고 싶은 편지들이 있지만, 우표가 너무 비싸 못 보낸다. 다음은 끼니 문제인데, 끼니는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매일 끼니때가 되면 겉으로는 식당에 가는 척 하고 나와서 뤽상부르 공원에서 비둘기를 구경하며 한 시간 빈둥거린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음식을 숨기고 집에 돌아온다. (...) 가정용 식빵이 아니라 호밀빵을 사야만 하는데, 그것은 호밀빵이 더 비싸지만 둥글어서 주머니에 숨겨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 속옷은 불결해지고, 비누와 면도칼은 떨어진다. 머리를 깎을 때가 되면 손수 깎아보지만, 결과가 너무 엉망이라 결국 이발소에 가서 하루치 음식값에 해당하는 돈을 써야 한다. 하루 종일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값비싼 거짓말이다. (...) 얄궂은 재난이 일어나서 먹을 음식을 강탈한다. 마지막 남은 80상팀으로 우유 반 리터를 사서 알코올램프에 데우고 있다. 그것이 끓고 있는데 팔뚝에 벌레가 기어내려온다. 손톱으로 튕겼더니 그 벌레가 그만 퐁당 하고 곧장 우유속으로 떨어진다. 우유를 쏟아버리고 굶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빵집에 빵 1파운드를 사러 가서 여점원이 다른 손님에게 1파운드를 잘라주는 동안 기다린다. 그녀가 서툴러서 1파운드보다 많이 자른다. 그녀는 "손님, 죄송하지만 2수를 더 내시겠어요?" 하고 말한다. 빵이 1파운드에 1프랑이고, 당신이 가진 돈도 정확히 1프랑이다. 당신에게도 2수를 더 내라면 내지 못한다고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질겁하여 내빼게 된다. 용기를 내어 빵집을 다시 찾을 때는 몇 시간이 흐른 뒤이다. (...)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를 발견한다. 빵과 마가린만을 먹고 밖에 나와 가게 유리창을 들여다본다. 통째로 놓인 돼지고기, 소쿠리마다에 따끈한 빵, 벽돌만한 커다랗고 노란 버터, 줄줄이 달린 소시지, 산더미 같은 감자, 맷돌처럼 큼직한 그뤼예르 치즈 등등, 낭비되듯 거대하게 쌓인 음식이 당신을 모욕한다. 그런 많은 음식을 보면 울먹거리는 자기연민이 몰아닥친다. 빵 한 덩이를 잡아채고 내달아 붙잡히기 전에 먹어치우자는 생각도 들지만, 순전히 배짱이 없어서 자제한다. (22-25쪽)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정말 무릎을 탁 치던 기억이 난다. 하긴 그렇다. 여기서 조지 오웰이 묘사한 파리 시절의 체험담은 물론 "극빈"까지는 아닌지 모른다. 그는 어찌 되었건 인텔리이고, 한때는 이렇게 가난하지만 그렇다고 거리에 나가 구걸할 정도까지는 아니며, 정말 그보다도 훨씬 가난하고 처참한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히 내겐 무척이나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어쩌면 그와 내 처지가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조지 오웰은 당시에 가난하긴 했지만, 집안 자체는 제법 돈도 있고 지위도 있는 편이어서 그 생활을 청산하고 영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어딘가 "비빌" 구석이 있었다는 거다. 게다가 가진 돈을 탈탈 털어서 우유를 사서 먹으려다가도, 단순히 "벌레 한 마리"가 퐁당 빠졌다는 것때문에 우유를 몽땅 쏟아버리는 그의 "신사다운" 행동을 보라! 그의 가난은 우리가 생각하는 극한의 가난, 그러니까 "진짜" 가난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느끼기에, 그리고 지금 내가 느끼기에 그런 가난은 분명히 "실재하는" 가난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우유를 쏟아버리는 오웰의 행동을, 그리고 적금을 깨기 위해 은행에 앉아 기다리면서 온갖 궁상맞은 생각에 잠긴 내 행동을 비웃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오웰이나 나나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여기는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작품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 책을 읽어볼 생각을 한 것은 그의 전기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대목을 발견하고 나서였다.

  • 작품 중반에서 주인공은 (...) 부랑자의 꼴이 되어 싸구려 여인숙이 있는 런던의 변두리를 배회한 끝에 당도한 것이 스파이크, 즉 임시 부랑자 수용소였다. (...) 여기서 오웰의 예민한 후각이 발휘되어, 이하의 작품에는 그가 맡아낸 냄새로 넘쳐 있다. "욕실의 광경은 차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 50명의 지저분한 알몸의 사나이들. (...) 그 발의 악취는 영영 잊을 수가 없다. (...) 방마다 연한 비누의 제이에스액과 공동변소의 냄새를 뒤범벅한 것 같은, 싸늘한, 모든 의욕을 빼앗아가는 교도소와 같은 냄새 (...) 문야 열려야 방 안에 가득 괴어 탁해진 악취가 겨우 빠져나간다. (...) 그 스파이크 속에 자욱한 악취가 빠져나가면 공기는 얼마나 맛있게 느껴졌던 것인가, 교외 뒷골목의 공기까지가 말이다." (피터 루이스, <조지 오웰 : 1984년에의 길>, 중앙일보 문예중앙부 옮김, 중앙일보사, 1984, 36쪽)

나 자신이 워낙 "냄새"에 민감해서일까,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정말 그 부랑자 수용소의 고약한 "냄새"가 어디선가 나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받았다. 직접 책을 읽어보니 정말 대단한 작품이었다! 그가 묘사하는 파리의 가난뱅이 생활과 런던의 노숙자 생활은 처참하면서도 딱하지만, 그런 한편으로는 그럭저럭 운치가 있고 재미가 있는 생활이기도 했다. 솔직히 그런 생활을 어느 정도 "즐기는" 것이 아니라면 결코 감내하지 못할, 일종의 낭만적인 모험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조지 오웰의 글솜씨는 무척이나 탁월해서, 위에서 묘사한 그 "냄새"뿐만 아니라 자신이 겪었던 온갖 추접하고, 지저분하고, 야비하고, 우스꽝스럽고, 부조리한 일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피터 루이스는 오웰 자신이 탁월한 작가이긴 하지만, 평생 여성과의 진지한 교제가 드물었기 때문에 유독 "남녀관계"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는 맥이 빠지곤 한다고 따끔하게 지적했지만, 적어도 온갖 부랑자와 건달과 양아치와 도둑이 우글거리는 뒷골목 묘사에서만큼은, 정말 세계 최고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다. 정말 나로선 <동물농장> 이후에 이 작품을 통해서 조지 오웰이란 작가의 매력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으니까.

문득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집사람이 아는 교수님 중 한 분이 오후 서너 시쯤에 학교 후문으로 나오시다가 우연히 후문 옆 담벼락에 기대어 앉은 "여자 노숙자"를 보셨다고 한다. 꽤 오래 전부터 거기 종종 앉아있던 양반이었다고 하니 이전에는 무심코 지나다녔을지 모르지만, 마침 교수님 가방에 점심 때 먹다 남은 샌드위치가 한 쪽 들어있어서 문득 "이걸 저 사람에게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나. 그래서 가방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그 여자 노숙자에게 "이것 가지세요" 하고 내밀자, 그 여자는 앉은 자세에서 고개만 들어서 그걸 빤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하더란다. "전 지금 배고프지 않거든요." 그 교수님은 무척이나 민망해하는 한편, 또 어떤 면에서는 무척이나 놀랐다고 한다. 흔히 우리는 거지니, 노숙자니 하면 더럽고, 무식하고, 가난하고, 항상 굶주려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들만의 상상인 것이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고, 질서가 있고, 세계가 있고, 자존심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고 싶을 때" 그들에게 뭔가를 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할 때" 그들에게 뭔가를 줘야 하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읽은 조지 오웰의 책에 따르면 그러했다.

 

3.

이런저런 생각 끝에, 결국 내 차례가 되어 창구로 다가갔다. 창구의 언니는 역시나 "입에 발린 인삿말"을 건네지만, 적금을 깬다는 사실에 온갖 궁상을 다 떨며 처참한 기분에 사로잡힌 나로선, 그런 빤한 친절과 미소마저도 부담스럽다. 적금을 해약하겠다고 하자, 언니는 여전히 친절한 표정은 유지하면서도, 집사람의 장담과는 달리 이걸 해약하시면 지금 어쩌구저쩌구 하며 만류하는 듯한 말을 했다. 하도 긴장한 탓일까, "그냥 깨 주세요"라고 인상을 팍 쓴 채 이야기했더니 결국 알았다고 해약을 해주긴 했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새로운 적금 상품이라며 뭔가 브로셔 같은 것을 챙겨주기에 무척이나 당황스럽기만 했다. 하긴 내가 맡긴 돈, 내가 찾아가겠다는 데, 은행이 왜 굳이 말려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모든 절차는 1, 2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문득 내 앞에 놓인 백만 원짜리 현금 뭉치를 보고서야, 아, 정말 내가 난생 처음으로 적금을 깬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직접 보니 그래도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뭐, 그까짓 것, 또 모으면 되지 하는 대책없는, 그야말로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 들면서, 일단 필요한 데 쓰고 나면 얼마가 남을 테니, 그걸 갖고 또 뭘 하나 하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하게 되었다.

"뭐야, 아니라더니... 언니가 막 뭐라고 이것저것 물어보던데..." 난 대기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람에게 돌아와 돈을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그러자 집사람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생글거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힛, 그러면 걔네가 군소리 없이 내놓을 줄 알았냐?" 그러면서 집사람은 얼른 돈뭉치를 챙겨넣고, 혀를 날름 내밀어 보이더니 신이 난 듯 총총거리며 앞서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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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강유원의 책 읽기 목록

<장미의 이름>을 원전과 비교 교열하며 60페이지에 달하는 ‘오역파일’노트를 만들어 출판사에 전달해서 화제가 되었던(명성을 떨치는 번역자 이윤기가 이 일로 자극을 받아 개역판을 내기로 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회사원 철학박사’ 강유원. 언젠가 그가 우리교육 교사 아카데미에서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책읽기 강의’ 과정 중 추천도서 목록을 작성한 적이 있다.


1차와 2차를 합쳐 총 140권으로, 대부분 ‘슬로 리딩(slow reading)’을 목표로 하는 무거운 책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질적 수준이 보장된 필독 교양서들이라고 봐도 되겠다. 상대적으로 1차에 비해 2차 도서들이 조금 더 다가가기 편한 책들로 구성되어 있다.

 

1차

1. 고전
김산해,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휴머니스트
성서, 창세기, 요한복음
호메로스, 천병희(옮김), 일리아스, 단국대 출판부.
소포클레스, 천병희(옮김), 오이디푸스왕과 안티고네, 문예출판사.
마키아벨리, 강정인(옮김), 로마사논고, 한길사.
단테, 한형곤(옮김), 신곡, 서해문집.
홉스, 김용환(옮김), 리바이어던, 살림출판사.
다윈, 박동현(옮김), 종의 기원, 신원문화사.
공자, 미야자키 이치사다(해석), 논어, 이산.
루이스, 단테, 푸른숲.

2. 한국과 동남아시아
정문태, 전선기자 정문태 -- 전쟁 취재 16년의 기록, 한겨레신문사.
박명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나남출판.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웅진닷컴.
오오누키 에미코,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모멘토.
존 키건, 전쟁의 얼굴, 지호.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인물과사상사.
빅터 데이비드 핸슨, 살육과 문명 , 푸른숲.
마이클 매클리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유인선,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이산.
이삼성, 우메바야시 히로미치 외, 동북아시아 비핵지대, 살림출판사.

3. 미국의 패권주의와 중앙아시아
로버트 카플란, 타타르로 가는 길, 르네상스.
후안 고이티솔로, 전쟁의 풍경, 실천문학사.
노르만 핀켈슈타인, 홀로코스트 산업, 한겨레신문사.
찰스 킨들버거, 경제강대국 흥망사 1500-1990, 까치글방.
정수일, 이슬람 문명, 창작과비평사.
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 사계절.
프랜시스 로빈스 외,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이슬람사, 시공사.
하워드 터너, 이슬람의 과학과 문명, 르네상스.
타리크 알리, 근본주의의 충돌, 미토.
랄프 쇤만, 잔인한 이스라엘, 미세기.

4. 전쟁의 엔진, 자본주의
리오 휴버먼,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책벌레.
어니스트 볼크먼,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이마고.
고바야시 히데오, 만철滿鐵, 산처럼.
고모리 요이치,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뿌리와이파리.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한길사.
더글러스 러미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녹색평론사.
장하준, 사다리 걷어차기, 부키.
에르네스트 만델, 즐거운 살인: 범죄소설의 사회사, 이후.
하워드 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이후.
로버트 브레너, 혼돈의 기원: 세계 경제 위기의 역사 1950~1998, 이후.

5. 민주주의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후마니타스.
로버트 달,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로버트 퍼트남, 사회적 자본과 민주주의, 박영사.
한국정치연구회(편), 박정희를 넘어서, 푸른숲.
버나드 마넹, 선거는 민주적인가, 후마니타스.
허승일, 로마공화정, 서울대학출판부.
레오나르도 브루니, 피렌체 찬가, 책세상.
데이비드 브룩, 우익에 눈먼 미국: 어느 보수주의자의 고백, 나무와숲.
프랜시스 라페 외, 굶주리는 세계, 창비.
홍은택,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 창비.

6. 현대사회와 커뮤니케이션
사카이 나오키, 번역과 주체, 이산.
코린 쿨레, 고대 그리스의 의사소통, 영림카디널.
칼레 라슨 외, 애드버스터, 현실문화연구.
데스몬드 모리스, 인간의 친밀행동, 지성사.
톨스타인 베블렌, 한가한 무리들, 동인.
알버트 바라바시, 링크: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 , 동아시아.
김경용,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자크, 기자의 본성에 관한 보고, 서해문집.
로버트 팩스턴, 파시즘, 교양인.

7. 정보화 사회
허버트 실러, 정보불평등, 민음사.
마뉴엘 카스텔, 정보도시, 한울.
웹스터, 정보사회이론, 사회비평사.
어슐러 휴즈, 싸이버타리아트, 갈무리.
제러미 리프킨, 소유의 종말, 민음사.
댄 쉴러, 미국의 새로운 세계지배 전략 디지털 자본주의, 나무와숲.
제이슨 엡스타인, 북 비즈니스, 미래사.
조셉 테인터, 문명의 붕괴, 대원사.
빌렘 플루서, 디지털시대의 글쓰기, 문예출판사.
이충웅,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 이제이북스.

8. 역사
하비 케이, 과거의 힘: 역사의식, 기억과 상상력, 삼인.
라인하르트 코젤렉, 지나간 미래, 문학동네.
에릭 홉스봄, 역사론, 민음사.
한스 위르겐 괴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뿌리와이파리.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레이 황,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 푸른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독서의 역사, 세종서적.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한길사.
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 까치.
리사 자딘, 상품의 역사, 영림카디널.

9. 동아시아
마루야마 마사오(외),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조너선 스펜스, 천안문, 이산.
윌리엄 시어도어 드 베리, 다섯 단계의 대화로 본 동아시아 문명, 실천문학사.
가시모토 미오/미야지마 히로시,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역사비평사.
허수열, 개발없는 개발, 은행나무.
티모시 브룩, 쾌락의 혼돈, 이산.
마르티나 도이힐러,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 아카넷.
강재언, 선비의 나라 한국 유학 2천년, 한길사.
유길준, 서유견문, 서해문집.
후쿠자와 유키치, 학문의 권장, 소화.

10. 예술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예경.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창비.
알베르토 망구엘, 나의 그림읽기, 세종서적.
고바야시 다다시, 우키요에의 미, 이다미디어.
진 쿠퍼,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까치.
데이비드 호크니, 명화의 비밀, 한길사.
오주석, 한국의 미 특강, 솔출판사.


2차

1. 역사이야기
강명관,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슈바이츠, 어제의 세계, 지식공작소.
반 룬, 인류이야기, 아이필드.
단턴, 고양이 대학살, 문학과지성사.
홀랜드, 공화국의 몰락, 웅진닷컴.

2. 문화
미치너, 소설, 열린책들.
임석재, 땅과 인간/기독교와 인간, 북하우스.
라이히-라니츠키, 사로잡힌 영혼, 빗살무늬.
베리, 현대 문학이론 입문, 시유시.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이제이북스.

3. 자연과학
해리스, 작은 인간, 한길사.
길리스피, 객관성의 칼날, 새물결.
웹스터, 과학기술과 사회, 한울.
로버츠, 석유의 종말, 서해문집.
사이키스, 이브의 일곱딸들, 따님.

4. 경제와 세계화
신이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동아시아.
마르틴, 세계화의 덫, 영림카디널.
이정전, 시장은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한길사.
갈브레이드, 불확실성의 시대, 범우사.
하일브로너, 고전으로 읽는 경제사상, 민음사.

5. 인물평전
갈로,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푸른숲.
허마이오니 리, 버지니아 울프, 책세상.
김현우, 안토니오 그람시, 살림.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4-5(율리우스 카이사르), 한길사.
박홍규,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 미토.

6. 정치사상
블룸, 셰익스피어의 정치철학, 집문당.
강준만, 나의 정치학 사전, 인물과사상사.
뮬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한울.
로크, 통치론, 문학과지성사.
폴라니,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책세상.

7.사회과학
부르디외, 과학의 사회적 사용, 창비.
엘리아스, 기득권자와 아웃사이더, 한길사.
하비, 파리 모더니티의 수도, 생각의나무.
일리히, 학교없는 사회, 미토.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나남.

8. 철학
가라타니 고진, 윤리21, 사회평론.
브루노 스넬, 정신의 발견, 까치.
박해용, 철학용어용례사전, 돌기둥.
야스퍼스, 위대한 사상가들, 책과함께.
프리틀라인, 서양철학사, 서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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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손석춘,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름

손석춘,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름
[서평]『과격하고 서툰 사랑 고백』

비판 언론인의 역할 모델

우리 사회 비판적 언론인으로서 하나의 역할 모델을 만든 손석춘이 새 책을 냈다. <과격하고 서툰 사랑고백>. 짧은 글들을 묶은 것이지만 어느 한 편도 예사롭거나 그저 그렇게 쓰지 않은, 그야말로 정곡을 찌르며 문제들을 돌파해 들어간다. ‘손석춘식 글쓰기’가 갖는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요즘같이 미문과 스타일이 압도하는 글쓰기 추세를 마땅치 않게 보는 사람으로서는 반갑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반갑다는 표현은 어쩌면 부적절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면 푹신한 소파나 안락의자에 앉아 긴장 없이 눈 가는대로만 읽을 수 있는 그런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세를 고쳐 잡아야 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읽게 하는 게 손석춘, 그의 글이다. 불편하게 만들지만, 현실과 비판적으로 마주하는 일이라는 것이 본디 그런 것 아닌가.

그의 글이 문제 삼고 있는 현실은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대학, 언론에서부터 시작하여 한 자리하는 실력자들 거의 전체를 망라한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거대언론과 그 사주들, 수구보수 정당의 시대착오적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과 일본의 지도급 인사들이 보이는 패권적 행태도 피해가지 않는다.

누구보다 비판의 핵심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개혁’을 ‘개혁’할 때다. 낡은 것으로 고침은 결코 개혁이 아니다. 개혁은 새롭게 고침이다...... 간곡히, 거듭 촉구한다. 이 땅의 민중이 열망해 온 ‘개혁’을 더는 우롱하지 말라. 누가 권력을 주었는지 잊었는가.”

손석춘이 노무현 정부에게 던지는 이 말 속에 한국 사회의 슬픈 현실이 있다. 민주개혁의 실종과 사망, 그것은 타살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죽음, 곧 자살이었던 것이다.

냉전반공주의의 뒤틀린 심사를 나타낸 김수환 추기경도 성역일 수 없었으며, 정연주 KBS 사장과 이미 운명을 달리한 정운영 중앙일보 논설위원에 대한 비판 역시 날카롭다. “언젠가 내가 타락할 때 그 잘못을 지적해 줄 후배를 ‘각오’하고 있다.” 오늘의 사회 현실에서 이런 자세를 갖는 언론인이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크게 위안 받는다.

회피하고 싶은 불편함

손석춘이 비판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오해다. 손석춘은 먼저 흥분하지 않는다. 사태의 앞뒤를 가리고 경중을 따져 문제의 원인과 구조의 얼개를 밝히고 나서야 그는 책임감을 촉구한다. 그런데도 그의 글에 대해 너무 세다고 말하거나, 지나치게 날카롭다고 하면서 회피하는 주변의 평가가 많다. 왜 그럴까? 의아할 따름이다.

그의 글이 날카롭게 보이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사태의 핵심 구조를 집약적으로 아주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나 할 수 없는 큰 장점이고 오히려 부럽기까지 한 일이다. 그는 문제를 돌려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글의 핵심 주제에 다가가는 방식은 직접적이며 초스피드이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이런 저런 관계 때문에 쓸데없이 눈치 보지 않으니 이 역시 좋은 점이다.

추상적 원리나 외국의 철학 사조들을 경쟁적으로 인용하는 것으로 자신의 지적 우월성을 떠벌리는 종속적이고 속물적인 지식인 문화가 압도하는 현실에서, 현실을 말하고 그것도 곧바로 말하는 자세는 높이 평가받을 일이다.

“대한민국 자본주의가 오늘 천박한 까닭도,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비인간적인 살벌한 경쟁에 내몰리는 이유도, 다른 데 있지 않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아직 12%에 지나지 않아서다.” 얼마나 간명하고 명쾌하게 핵심을 찌르는 말인가?

그런데도 손석춘을 불편해하는 분위기는 강하다. 어떤 이는 손석춘이 아무리 오늘의 한겨레가 처해 있는 현실을 실증한다 하면서 이러니저러니 해도 손석춘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돌려 묻고, 어떤 이는 그의 글이 너무 선동적이라고 해서 탓한다. 그래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인가? 이 책에서 손석춘은 자신이 이렇게 평가되는 것에 대해 정말 애끓게 설명하고 솔직하게 이해를 구하려 한다. “오랜 세월 한국의 부자신문과 친미언론들이 퍼뜨려 좋은 말들에 우리 모두 어느새 친숙해 있어서다. 그 결과일 뿐이다. 저자의 칼럼이 ‘과격’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이도 모자라 그는 “저자의 칼럼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에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저자가 지상에서 할 수 있는 사랑이라고 다짐해본다”고 말하고, “그랬다. 독자에 드리는 서툰 사랑의 편지, 연서였다”라며 절절한 사랑 고백을 한다.

그러나 이 글이 손석춘의 바람대로 읽힌다면 오늘의 한국 사회는 낙관의 모티브가 된다. 그럴까? “비판을 본령으로 하는 언론인에게 결국 남는 것은 인간적 쓸쓸함이 아닐까”를 끄트머리에 덧붙이는 그의 말은, 불의에 대한 분노와 거짓에 대한 비판, 그리고 꿈을 향한 열정이 상실되어버린 오늘 바로 우리의 자화상에 가깝지 않은가 싶다.

우리는 모두 부라퀴들

‘부라퀴’. 손석춘이 잘 쓰는 우리말 표현이다. “제게 이로운 일이면 영악하게 덤벼대는 사람”을 뜻한다. 우리 주위를 채우는 사람들, 그가 진보건 보수건 떠나 대체적으로 이런 류의 사람들이다. 무슨 한가한 도덕률을 되말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 주변이 그렇다는 것은 뭔가 한국 사회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이다. 손석춘이 강조하듯 “민주주의를 일궈온 우리가 ‘무장해제’ 말아야”했는데, 무장해제 되었다는 말이다.

손석춘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런 우리 스스로들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심리의 반영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 퇴락에 대해 일말의 공범의식이 있는데 그 불편함을 마주하기 싫다는 표현이다. 그래도 회피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손석춘은 책에서 자주 이런 말은 한다. “주장은 하되 ‘거짓말’은 말라.” 우리 모두 그래야 할 것이다. 알맹이 없이 이미지만이 난무하고 참과 거짓이 뒤섞인 오늘의 세상에서 손석춘은 불편하다. 그래서 그는 더욱 의미가 있다.

끝으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사람들과 더불어 숨쉬고 싶어 하는 <과격하고 서툰 사랑고백>에 살짝 수작을 걸어본다. “너, 참 괜찮은 놈이야. 근데 말이야, 왜 읽고 나니까 속이 후련하면서도 가슴이 저리면서 아파오지? 아직 미련이 남아서일까, 희망을 버리지 못해서일까?”

 

조현연/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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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서평단에 뽑혀 좀 전에 택배로 받은 책이다.  더불어 여러 가지 팜플렛도 함께 왔다.  그 중에 알책이라는 격월간 잡지(?)가 눈에 띈다.  개마고원, 그린비, 돌베개, 동아시아, 바다출판사, 삼인, 서해문집, 이론과 실천, 이학사, 지호, 푸른 역사, 휴머니스트 등 12개의 인문학 전문 출판사들이  공동으로 발행한다고 한다.  삼인의 책은 거의 다 가지고 있고, 개마고원, 그린비, 돌베개, 푸른역사, 휴머니스트이 책은 몇 권이 있다.  나머지 출판사의 책들은 별로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  이상할 정도로 출판사도 따져가며 책을 보기 때문에 그런 가보다.  특히나 동아시아라는 출판사는 무척 생소하다.  한 번 검색해 보아야겠다. 휴머니스트의 책은 고미숙의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린비의 책은 리라이팅 클레식 3권이 있다.  더 있을 수도 있으나 우선 기억나는 건 그 정도이다.   휴머니스트는 발행 부수를 명기하는 내가 아는 한 우리 나라 유일의 출판사이다.  중국의 책들은 대부분 발행 부수를 기록한다.  아무튼 내게는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고미숙의 책은 보기는 그런대로 쉬우나 - 아주 쉽지는 않다 - 글쎄다 리뷰를 잘 쓸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일은 저질렀으니 최선을 다해 보아야지.

고미숙의 책을 보고 언젠가 <수유+너머>의 세미나를 들으러 간 적이 있다.  참가비만 - 누구나 세미나 참가하려면 매월 1만원의 회비를 내야한다 - 내고 나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 - 이질적이라고 해야 하나 - 에 그냥 다음부터 가지 않았다.  아마 나의 쓸데없는 열등감이나 숫기없음의 소산이겠지. 

그래도 <수유+너머>의 연구원들이 부럽긴 하다.   나야 그저 그들의 연구 성과를 날로 야금 야금 갉아 먹는 정도에서 만족을 해야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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