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난생 처음으로 적금을 깨던 기억...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 오웰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

"적금을 하나 깨야겠어."

집사람의 말에 나는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작년 가을의 일이었는데, 갑자기 여기저기 목돈을 쓸 일이 좀 있었다. 이제껏 많은 돈을 벌어들이진 못했지만, 최대한 아끼고 쪼개고 비비고 해서 모아 놓은 돈이 그럭저럭 되었다. 하지만 이제껏 살면서 단 한 번도 적금을 깬다거나, 예금을 왕창 인출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선 집사람의 태연스러운 말이 그야말로 청천벽력에 폭탄선언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가난했나? 가장이랍시고 뭐 이제껏 돈을 팍팍 벌어다 준 적도 없고, 그렇다고 남들처럼 머리 팍팍 굴려서 10억, 20억 재테크를 하는 재주도 없는 판에 솔직히 좀 민망한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간신히 그나마 모아놓은 것을 선뜻 깨버리자는 집사람의 말에, 나로선 불쑥 짜증이 솟구쳤다. 

"그걸 꼭 깨야 돼?"

이렇게 물어보는 내 심정은 무척이나 편치 않았다. 적금을 깬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무기력한 내 가장으로서의 책임에 대한 고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나는 적금을 깬다는 것 자체를 무척이나 "처절하고도, 비참한"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예금이나 적금은 "돈을 넣으라" 있는 것이지, "돈을 쓰라"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백 번 양보해서 혹시 만기가 되었으면 모를까, 결코 덜컥 "중도에 깨버리라"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흔히 주위에서 누군가가 무슨 일로 "적금을 깼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소스라치곤 했는데, 그건 그 사람이 뭔가 대단한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내게 있어서 적금은 말 그대로 한푼 두푼 "모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지, 결코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을 "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기가 되어 목돈이 생겨도 거기다가 또다시 한푼 두푼 덧붙여 "더 많이 모으는" 것이 중요했지, 그렇게 알뜰살뜰 모은 돈을 팍 "써버리는" 것은 도무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아니, 그럼 뭐 하러 적금을 부어? 언제고 쓰자고 붓는 거지, 갖고만 있자고 붓는 거야?"

나보다 훨씬 더 실용적인 금전관을 지니고 있는 집사람은 오히려 내게 면박을 주었고, 나로선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늘 그랬듯이 역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사회생활 경험도 전무하고, 나보다 지금까지 벌어 본 돈의 총액도 적은 집사람은, 적어도 경제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항상 나보다 자신이 훨씬 우월하고 경험도 많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본인이 어린 시절에 한때나마 "가난"이란 것을 겪어 보았다고 자처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늘 나보고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호의호식하고 자라났기 때문에 사고방식이 답답하다는 둥, 진짜 가난해 본 적도 없으면서 궁상만 떤다는 둥, 돈이 있으면서도 유치하게 쪼잔하게만 군다는 둥, 온갖 비난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도... 그걸 안 깨고 어떻게 하는 방법은 없겠느냐고..."

가난... 이야기를 하자면 참으로 나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난 스스로가 가난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때때로 "돈이 없는," 혹은 "돈이 없어서 아쉬운" 느낌이 들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엄청난 부자는 아니다. 물론 아직까지 금전적으로 빚진 것이 없다는 것 (집사람 말로는 요즘 같은 세상에선 카드빚이나 대출금이 없다는 건 결국 부자인 거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하지만.) 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달 생활비 걱정을 안 하고 살아가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가난한 것과 부자인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일 수밖에 없다. 즉 제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더 가난한" 사람보다는 "부자"일 수밖에 없다는 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거리의 노숙자와 이건희 사이의 명백한 차이를 부정하자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른바 부와 가난의 문제는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

집사람은 도리어 짜증을 낸다. 적어도 이 순간, 우리는 결코 부자가 아니다. 사람들은 부자를 증오하고 경멸하기까지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누구나 부자를 동경하고 선망하기까지 한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일종의 자기합리화가 아닐까 싶다. 물론 "진짜" 가난뱅이가 부자를 욕한다면 그건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진짜" 가난뱅이란 누구를 의미하는 걸까? 물론 나야 정말로 "절박한," 그러니까 "처절한" 가난까지 경험해 보진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른바 "상대적 빈곤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마 이런 류의 빈곤감이란 세상 어느 누구라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제아무리 이건희라도 빌 게이츠에 비난하면 "가난한" 존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니 말이다. 혹시 누가 또 아나? 이건희가 사실은 1천억이 아니라 2천억을 생색내며 내놓고 싶었는데, 결국엔 자신이 빌 게이츠 만한 능력이 안 되는 것에 한탄하며 "절박함"을 느꼈는지도 말이다.

 

2.

"하여간, 방법이 없으니, 잔말 말고 적금 깨러 은행이나 가자구!" 집사람이 말했다. "왜 나까지 가야 해?" 내가 물었다. "그거야 당신 이름으로 든 적금이니까." 집사람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그런 적금이 있었어?" 내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들기야 내가 들어줬지." 집사람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그럼 당신이 갔다 오면 되잖아." 내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어이구, 적금 깰 때는 원래 본인이 가야 하는 거거든?" 집사람은 그것도 모르느냐는 투로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아, 그런가? 뭐, 그까이꺼... 가면 가는 거지, 그거야 못 갈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난 좀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 가면 뭐... 좀 쪽팔리는 것 이니야? 창구에서 언니가 막 적금 깨자 말라고 설득이라도 하는 거 아냐? '왜 해약하시는데요?' 어쩌구 하면서 막 이것저것 물어보구." 일종의 "창구공포증," 혹은 "계산대공포증"을 지닌 내가 주저주저하며 물었다. "어이구, 퍽도 그러겠다! 요즘엔 하도 적금 깨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 것 물어보지도 않네요!" 집사람이 꽥 소리를 질렀다. 그제서야 나는 일종의 체념 상태가 되었다. 돈이 필요하긴 필요하지만, 이거 당장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 방법이라곤 단 하나, 지난 몇 년 동안 모아놓은 적금 하나를 털썩 깨트리는 것밖에 없었다.

솔직히 요즘 은행을 가면 무척이나 소외되는 기분이다. 우리 동네만 그런지, 다른 동네도 다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전에 창구에 언니들이 줄줄이 앉아있던 은행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아예 지점의 절반은 툭 잘라서 무슨 VIP 고객 전용 창구로 만들어서 우리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도 없게 해 놓았고, 이제 나머지 공간도 절반으로 툭 잘라서 한쪽에서는 신용카드니 대출에 관한 일만 처리하기 때문에, 이제 남은 창구는 기껏해야 두 개, 아니면 세 개뿐이다. 그러니 입금 출금 등 비교적 간단한 업무를 보러 온 고객들은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다. 혹시나 서너 번호 앞의 다른 사람이 통장을 새로 개설하는지, 아니면 카드를 새로 만드는지 하여간 엄청나게 오랫동안 혼자 창구를 차지하고 있으면, 나머지 기다리는 사람은 짜증이 솟구칠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공과금 납부신청서를 들고 왔다갔다 하는 할머니며, 자기 번호표가 지나갔으니 먼저 해달라고 우기며 창구 앞으로 달려드는 아주머니며, 이리저리 고함치며 뛰어다니는 애들까지 있으면 그야말로 복마전이 따로 없다.

그렇게 하릴없이 은행에 앉아있다보니,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비록 "돈 버는" 재주는 없더라도 "돈 아끼는" 재주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거기 앉아서 생각해 보니 정말 나 자신이 인생의 실패자는 아닌가 하는 막막한 기분이 다 들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어쩔 수 없이 백만 원 짜리 적금 하나를 깨는 신세가 되었지만, 이러다가 다음에 또 하나, 또 하나, 또 하나를 깨고 나면 결국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게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집사람 말도 일리가 있다. 나는 진짜 "가난"을 체험해 보지 못한 까닭에 "가난"이란 말 자체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언제가 어떤 책에서, 사르트르는 자기 지갑에 돈이 없으면 무척이나 초조해서 어쩔 줄 모르는 성격이었다는 대목을 읽은 적이 있는데, 사실 내가 딱 그런 식이다. 지갑에 정말 만 원짜리 하나만 달랑 들어있으면 그때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하고, 그게 오천 원짜리로 둔갑하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천 원짜리로 둔갑하면 그때부턴 내 인생 자체에 대한 회의가 들며, 어느새 지갑은 텅 비고 주머니에서 동전 짤랑거리는 소리만 들리면 문득 자살충동까지 느끼는 것이다. 물론 적금으로는 백만 원을 고스란히 갖고 있으면서 말이다. 집사람은 이럴 때마다 나보고 "궁상 좀 떨지 말라"고 핀잔이지만.

조지 오웰은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서 한 사람이 "가난해지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 가난과의 첫 만남인데, 이것이 너무나도 이상하다. 가난이라면 정말 생각도 많이 했고, 평생 두려워해왔고, 조만간 닥쳐온다고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닥치고 보니 완전히 다르고, 또 시시하게 다르다. 아주 단순하리라고 여겼는데 복잡하기만 하다. 끔찍하리라고 여겼는데, 그저 궁상맞고 따분할 따름이다. 처음에 발견하는 것은 가난의 독특한 비천함, 어쩔 수 없이 겪는 변화. 복잡스러운 쩨쩨함, 주눅들기 따위이다. 이를테면 가난에 들러붙는 비밀주의를 발견한다. 어쩌다 갑자기 하루에 6프랑의 수입으로 줄어들었다. 물론 감히 그렇다는 인정은 못하니까, 예전과 똑같이 생활한다는 시늉만은 해야 한다. 애초부터 거짓말의 그물에 얽혀드는 꼴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감당이 되지 않는다. 빨랫감을 맡기던 세탁소에 발을 끊는데, 그러면 세탁소 여자가 지나가는 당신을 보고 왜냐고 묻는다. 뭐라고 얼버무리면, 그 여자는 다른 데에 맡긴다고 여기고 평생토록 당신과 원수가 진다. 담뱃가게 주인도 볼 때마다 왜 담배를 줄였느냐고 묻는다. 답장하고 싶은 편지들이 있지만, 우표가 너무 비싸 못 보낸다. 다음은 끼니 문제인데, 끼니는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매일 끼니때가 되면 겉으로는 식당에 가는 척 하고 나와서 뤽상부르 공원에서 비둘기를 구경하며 한 시간 빈둥거린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음식을 숨기고 집에 돌아온다. (...) 가정용 식빵이 아니라 호밀빵을 사야만 하는데, 그것은 호밀빵이 더 비싸지만 둥글어서 주머니에 숨겨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 속옷은 불결해지고, 비누와 면도칼은 떨어진다. 머리를 깎을 때가 되면 손수 깎아보지만, 결과가 너무 엉망이라 결국 이발소에 가서 하루치 음식값에 해당하는 돈을 써야 한다. 하루 종일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값비싼 거짓말이다. (...) 얄궂은 재난이 일어나서 먹을 음식을 강탈한다. 마지막 남은 80상팀으로 우유 반 리터를 사서 알코올램프에 데우고 있다. 그것이 끓고 있는데 팔뚝에 벌레가 기어내려온다. 손톱으로 튕겼더니 그 벌레가 그만 퐁당 하고 곧장 우유속으로 떨어진다. 우유를 쏟아버리고 굶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빵집에 빵 1파운드를 사러 가서 여점원이 다른 손님에게 1파운드를 잘라주는 동안 기다린다. 그녀가 서툴러서 1파운드보다 많이 자른다. 그녀는 "손님, 죄송하지만 2수를 더 내시겠어요?" 하고 말한다. 빵이 1파운드에 1프랑이고, 당신이 가진 돈도 정확히 1프랑이다. 당신에게도 2수를 더 내라면 내지 못한다고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질겁하여 내빼게 된다. 용기를 내어 빵집을 다시 찾을 때는 몇 시간이 흐른 뒤이다. (...)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를 발견한다. 빵과 마가린만을 먹고 밖에 나와 가게 유리창을 들여다본다. 통째로 놓인 돼지고기, 소쿠리마다에 따끈한 빵, 벽돌만한 커다랗고 노란 버터, 줄줄이 달린 소시지, 산더미 같은 감자, 맷돌처럼 큼직한 그뤼예르 치즈 등등, 낭비되듯 거대하게 쌓인 음식이 당신을 모욕한다. 그런 많은 음식을 보면 울먹거리는 자기연민이 몰아닥친다. 빵 한 덩이를 잡아채고 내달아 붙잡히기 전에 먹어치우자는 생각도 들지만, 순전히 배짱이 없어서 자제한다. (22-25쪽)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정말 무릎을 탁 치던 기억이 난다. 하긴 그렇다. 여기서 조지 오웰이 묘사한 파리 시절의 체험담은 물론 "극빈"까지는 아닌지 모른다. 그는 어찌 되었건 인텔리이고, 한때는 이렇게 가난하지만 그렇다고 거리에 나가 구걸할 정도까지는 아니며, 정말 그보다도 훨씬 가난하고 처참한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히 내겐 무척이나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어쩌면 그와 내 처지가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조지 오웰은 당시에 가난하긴 했지만, 집안 자체는 제법 돈도 있고 지위도 있는 편이어서 그 생활을 청산하고 영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어딘가 "비빌" 구석이 있었다는 거다. 게다가 가진 돈을 탈탈 털어서 우유를 사서 먹으려다가도, 단순히 "벌레 한 마리"가 퐁당 빠졌다는 것때문에 우유를 몽땅 쏟아버리는 그의 "신사다운" 행동을 보라! 그의 가난은 우리가 생각하는 극한의 가난, 그러니까 "진짜" 가난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느끼기에, 그리고 지금 내가 느끼기에 그런 가난은 분명히 "실재하는" 가난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우유를 쏟아버리는 오웰의 행동을, 그리고 적금을 깨기 위해 은행에 앉아 기다리면서 온갖 궁상맞은 생각에 잠긴 내 행동을 비웃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오웰이나 나나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여기는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작품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 책을 읽어볼 생각을 한 것은 그의 전기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대목을 발견하고 나서였다.

  • 작품 중반에서 주인공은 (...) 부랑자의 꼴이 되어 싸구려 여인숙이 있는 런던의 변두리를 배회한 끝에 당도한 것이 스파이크, 즉 임시 부랑자 수용소였다. (...) 여기서 오웰의 예민한 후각이 발휘되어, 이하의 작품에는 그가 맡아낸 냄새로 넘쳐 있다. "욕실의 광경은 차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 50명의 지저분한 알몸의 사나이들. (...) 그 발의 악취는 영영 잊을 수가 없다. (...) 방마다 연한 비누의 제이에스액과 공동변소의 냄새를 뒤범벅한 것 같은, 싸늘한, 모든 의욕을 빼앗아가는 교도소와 같은 냄새 (...) 문야 열려야 방 안에 가득 괴어 탁해진 악취가 겨우 빠져나간다. (...) 그 스파이크 속에 자욱한 악취가 빠져나가면 공기는 얼마나 맛있게 느껴졌던 것인가, 교외 뒷골목의 공기까지가 말이다." (피터 루이스, <조지 오웰 : 1984년에의 길>, 중앙일보 문예중앙부 옮김, 중앙일보사, 1984, 36쪽)

나 자신이 워낙 "냄새"에 민감해서일까,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정말 그 부랑자 수용소의 고약한 "냄새"가 어디선가 나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받았다. 직접 책을 읽어보니 정말 대단한 작품이었다! 그가 묘사하는 파리의 가난뱅이 생활과 런던의 노숙자 생활은 처참하면서도 딱하지만, 그런 한편으로는 그럭저럭 운치가 있고 재미가 있는 생활이기도 했다. 솔직히 그런 생활을 어느 정도 "즐기는" 것이 아니라면 결코 감내하지 못할, 일종의 낭만적인 모험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조지 오웰의 글솜씨는 무척이나 탁월해서, 위에서 묘사한 그 "냄새"뿐만 아니라 자신이 겪었던 온갖 추접하고, 지저분하고, 야비하고, 우스꽝스럽고, 부조리한 일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피터 루이스는 오웰 자신이 탁월한 작가이긴 하지만, 평생 여성과의 진지한 교제가 드물었기 때문에 유독 "남녀관계"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는 맥이 빠지곤 한다고 따끔하게 지적했지만, 적어도 온갖 부랑자와 건달과 양아치와 도둑이 우글거리는 뒷골목 묘사에서만큼은, 정말 세계 최고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다. 정말 나로선 <동물농장> 이후에 이 작품을 통해서 조지 오웰이란 작가의 매력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으니까.

문득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집사람이 아는 교수님 중 한 분이 오후 서너 시쯤에 학교 후문으로 나오시다가 우연히 후문 옆 담벼락에 기대어 앉은 "여자 노숙자"를 보셨다고 한다. 꽤 오래 전부터 거기 종종 앉아있던 양반이었다고 하니 이전에는 무심코 지나다녔을지 모르지만, 마침 교수님 가방에 점심 때 먹다 남은 샌드위치가 한 쪽 들어있어서 문득 "이걸 저 사람에게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나. 그래서 가방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그 여자 노숙자에게 "이것 가지세요" 하고 내밀자, 그 여자는 앉은 자세에서 고개만 들어서 그걸 빤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하더란다. "전 지금 배고프지 않거든요." 그 교수님은 무척이나 민망해하는 한편, 또 어떤 면에서는 무척이나 놀랐다고 한다. 흔히 우리는 거지니, 노숙자니 하면 더럽고, 무식하고, 가난하고, 항상 굶주려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들만의 상상인 것이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고, 질서가 있고, 세계가 있고, 자존심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고 싶을 때" 그들에게 뭔가를 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할 때" 그들에게 뭔가를 줘야 하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읽은 조지 오웰의 책에 따르면 그러했다.

 

3.

이런저런 생각 끝에, 결국 내 차례가 되어 창구로 다가갔다. 창구의 언니는 역시나 "입에 발린 인삿말"을 건네지만, 적금을 깬다는 사실에 온갖 궁상을 다 떨며 처참한 기분에 사로잡힌 나로선, 그런 빤한 친절과 미소마저도 부담스럽다. 적금을 해약하겠다고 하자, 언니는 여전히 친절한 표정은 유지하면서도, 집사람의 장담과는 달리 이걸 해약하시면 지금 어쩌구저쩌구 하며 만류하는 듯한 말을 했다. 하도 긴장한 탓일까, "그냥 깨 주세요"라고 인상을 팍 쓴 채 이야기했더니 결국 알았다고 해약을 해주긴 했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새로운 적금 상품이라며 뭔가 브로셔 같은 것을 챙겨주기에 무척이나 당황스럽기만 했다. 하긴 내가 맡긴 돈, 내가 찾아가겠다는 데, 은행이 왜 굳이 말려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모든 절차는 1, 2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문득 내 앞에 놓인 백만 원짜리 현금 뭉치를 보고서야, 아, 정말 내가 난생 처음으로 적금을 깬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직접 보니 그래도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뭐, 그까짓 것, 또 모으면 되지 하는 대책없는, 그야말로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 들면서, 일단 필요한 데 쓰고 나면 얼마가 남을 테니, 그걸 갖고 또 뭘 하나 하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하게 되었다.

"뭐야, 아니라더니... 언니가 막 뭐라고 이것저것 물어보던데..." 난 대기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람에게 돌아와 돈을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그러자 집사람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생글거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힛, 그러면 걔네가 군소리 없이 내놓을 줄 알았냐?" 그러면서 집사람은 얼른 돈뭉치를 챙겨넣고, 혀를 날름 내밀어 보이더니 신이 난 듯 총총거리며 앞서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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