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민족, 민족주의, 그리고 '상상의 공동체'

작년에 내한한 바 있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에 관한 몇 가지 자료들을 인용-정리하고자 한다. 나의 관심은 조금더 문학적인 차원에서 러시아 민족주의 혹은, '러시아에서의 네이션과 소설(Nation and Narration)의 문제'란 테마에 놓여 있지만, 사전정지작업의 일환으로 앤더슨의 민족주의 비판적 문제제기에 관한 국내외의 논란(민족주의 vs 탈민족주의)도 얼마간 정리해보고자 하는 것. 물론 그걸 일거에 정리할 만한 역량을 나는 갖고 있지 않으며 대신에 몇 가지 자료를 인용-정리해놓는다.

그러고 몇 시간... 집앞에 있는 PC방을 놔두고 볼일 때문에 나왔다가 5분쯤 거리에 있는 PC방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예상대로 초딩들이 진치고 있는지라 공기가 훨씬 낫다(집앞 PC방은 한 시간만 죽치고 있어도 옷에 담배 냄새가 밴다). 집에 인터넷을 깔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백수파보다는 초딩파에 붙어지내야겠다. 흡연/끽연 문제에 있어서 나는 백수들보다는 초딩들과 더 강한 연대의식, 공동체의식을 느낀다... 

갑작스레 베네딕트 앤더슨 얘기를 꺼내게 된 건(물론 작년봄 그가 강연차 내한했을 때도 몇 마디 거들려다가 그만두긴 했었다) 어젯밤에 문득 호미 바바가 편집한 'Nation and Narration'(Routledge, 1990)을 꺼내들고 서문을 읽게 되었기 때문이다(러시아 국민문학 발생의 문제에 관한 생각을 좀 진전시켜보자는 속내에서. 러시아에서도 이 주제와 관련한 책들을 한두 권 구해왔었다), 그런데 거기 제일 처음 인용되는 문장이 바로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가 아닌가. 다행히 박스에 들어가 있지 않은 국역본을 바로 서가에서 꺼내들었다. 몇 년전에 개정판 원서(1991; 초판은 1983)를 구하려다가 못 구한 적이 있는데(대출중이었던가) 이 참에 구해서 읽어보기로 마음먹고(사실 앤더슨의 기본 아이디어 자체는 이미 제목 자체에 기입돼 있기도 하지만, 여러 소개/해설들을 통해 잘 알려진 것이기도 하다).

책을 열자마자 '감사의 말씀'에 나오는 첫문장. "독자들도 알아보겠지만, 민족주의에 대한 나의 사고는 에릭 아우얼바흐, 발터 벤야민 그리고 빅터 터너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5쪽) 그러니까 <상상의 공동체>를 읽기 전에 예비적으로 좀 읽어줘야 하는 책이 아우얼바하(아우얼바흐;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 벤야민의 <일루미네이션>(<조명>), 터너의 <제의에서 연극으로>(현대미학사, 1996) 등인 것. 전공상으론 가장 가까운(아마도 개인적인 면식도 있을 듯한데) 문화인류학자 터너의 책으로 앤더슨이 참조하고 있는 책은 'Dramas, fields, and metaphors : symbolic action in human society'(Cornell University Press, 1974)이지만, <제의에서 연극으로>에서도 그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간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번째 문장. "이 책을 준비하면서 나의 형인 페리 앤더슨과 안토니 바네트, 스티븐 헤더의 논평과 조언으로부터 크게 도움을 받았다." '뉴레프트지' 편집장으로도 유명한 맑스주의 이론가 페리 앤더슨은 사실 베네딕트 앤더슨보다 일찍 국내에 소개되었고 훨씬 잘 알려져 있다. 한데, 페리는 베네덱트의 형이 아니라 동생이다(베네딕트가 36년생이고, 페리는 38년생이다). 물론 영어 단어 brother는 형/동생을 가리지 않지만, 이 경우에 '나의 형'이라고 옮긴 것은 오역이다. 아주 사소하지만(앤더슨 집안 문제이니까), 번역본에 대한 신뢰에 약간 금이 간다(이런 건 그냥 사실 확인만 해보면 되는 것인데). 본문에서 이 금이 더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밖에(한데, 그런 사소한 오역은 12쪽에서도 나온다. 홉스봄의 책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가 <1788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로 잘못 옮겨졌다. *확인해보니까 원서 자체의 오타이다). 아래 사진은 앤더슨가의 형 베네딕트와 동생 페리. 

 

형 베네딕트가 훨씬 나이들어 보이는 것은 사진 자체가 비교적 최근의 것이기 때문이다. 작년 봄 방한시에 찍은 것이니까. 그때의 인터뷰 기사 두 건을 옮겨온다. 동아일보와 한겨레의 것이다. 내가 더 집어넣은 이미지들도 있다.  

동아일보(05. 04. 26) “20세기 민족주의는 19세기 민족주의와 큰 차이가 없었지만, 21세기 민족주의는 기존의 민족주의와 전혀 다른 ‘돌연변이 민족주의(mutant nationalism)’가 될 것입니다.” 민족주의가 근대의 문화적 산물이라는 학설을 체계화한 베네딕트 앤더슨(69) 미국 코넬대 명예교수가 한국을 처음 찾았다. 그가 1984년 발표한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는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과 함께 민족 또는 민족주의가 근대에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재구성됐음을 정교하게 이론화한 저서로 꼽힌다.

-앤더슨 교수는 한국동남아연구소와 서강대 동아연구소의 공동 초청으로 24일 방한해 26일 서강대 김대건관에서 ‘동남아의 부르주아 과두제’를 주제로 특별강연한 뒤 출국했다. 25일 저녁 그를 만나 최근 동북아에서 거세게 일고 있는 민족주의의 파고(波高)와 관련해 앞으로 민족주의의 전개방향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민족주의는 21세기에도 번성할 겁니다. 민족주의는 이제 우리 몸을 보호해주는 피부 같은 존재가 됐어요.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공동체를 유지해주니까요. 문제는 국내외 갈등상황만 발생하면 이 피부가 벌겋고 크게 부풀어 오른다는 데 있습니다.”

-동북아에서는 민족주의의 파고가 높게 일고 있는 반면 유럽연합(EU)에서는 민족주의를 넘어선 통합의 움직임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독일출신의 라칭거 추기경이 (베네딕토 16세)교황이 됐을 때 영국신문에서는 ‘나칭거’(나치+라칭거의 합성어)라는 제목을 뽑을 정도로 민족주의는 모든 나라에 뿌리 깊게 잠복해 있습니다. 지금 민족주의적 성향이 가장 두드러진 나라가 바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란 점도 이를 증명해요. 동북아의 민족주의 강화현상에도 자본주의화를 택함으로써 혁명의 정통성을 상실한 중국 정부의 국내 정치적 불안감이 깔려있습니다.”

-중국에서 태어나 베트남 유모에게서 자라고 아일랜드 국적으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앤더슨 교수는 19세기와 20세기에 민족주의가 정복과 팽창의 형태로 나타났다면, 21세기 민족주의는 오히려 분열과 해체, 응축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민족국가의 확립이 국경선의 성역화로 나타나면서 1960, 70년대 이후 영토를 넓힌 민족국가는 없지만 구소련이나 유고연방처럼 오히려 영토가 나눠지는 경우는 늘고 있어요. 중국 인도와 같은 다민족국가도 이런 움직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그는 지구화의 흐름 속에 본토가 아니라 해외에 거주하는 민족구성원들에 의해 민족주의가 근본주의화하는 문제도 지적했다.

“아일랜드 본토에서는 아일랜드의 세계적 축제인 ‘성 패트릭 데이’에 동성애자들의 참가를 진작에 허용했지만 미국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아일랜드 인들은 전통에 어긋난다며 절대 허용하지 않습니다. 중국의 대만 공격을 가장 거세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중국 본토인이 아니라 미국의 화교들입니다. 힌두교 근본주의 본부가 있는 곳은 인도가 아니라 영국 런던이죠.”

-앤더슨 교수는 이러한 ‘원거리 민족주의’에는 과거에 대한 자부심과 집착이 숨겨져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민족주의와의 행복한 동거를 위해서는 미래지향적 시각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한겨레(05. 04. 27) “동남아시아에서 90년대 사회 개혁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지만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동남아 사회의 중산층을 이루는 화인들이 개혁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민족주의 연구의 권위자 베네딕트 앤더슨(69) 미국 코넬대 정치학과 명예교수는 26일 오후 서강대에서 한국동남아연구소와 서강대 동아연구소 주최로 열린 ‘동남아의 부르주아 과두제’ 강연에서 ‘도발적’인 문제제기로 말문을 열었다.

-앤더슨 교수는 70년대까지 군부나 우파의 독재정권이 집권해 온 동남아 나라들이 80년대 이후 민주화와 개혁을 추진했지만, 중산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화인(거주국의 국적을 취득한 화교)들이 공적인 문제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개혁이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민주화나 개혁이 성공하려면 고등교육을 받고 경제력이 중산층이 나서야 하는데, 동남아 화인들은 경제적 성공에만 치중할 뿐 정치나 공적 영역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에서 주로 농사를 짓던 화인들은 자연재해나 아편전쟁 등의 정치적 변화를 계기로 동남아 각 지역에 정착했으나, 현지 문화에 동화하지 못해 현지의 사회·정치적 문제가 ‘내 일’로 다가오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칸 영화제에서 <열대병>(2004년)으로 심사위원상을 받은 타이 영화감독 아피차퐁 위라세타쿤이 정작 타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도 이와 연관시켜 설명했다. 타이의 민족주의적 문화나 정신을 표현한 작품에 화인들이 동질감을 느끼지 못해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동남아 화인들이 각 나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예컨대 인도네시아 화인 인구는 3.5%에 불과하지만 전체 상장기업 시가총액의 73%에 이르는 지분을 갖고 있다. 말레이시아나 타이, 필리핀 등에서도 소수의 화인들이 전체 민간 자본의 50% 이상을 갖고 있다.

-화인들에게 부가 집중되면서 집권세력과 화인들의 관계는 자연스레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해 갔다. 화인들은 세금으로 집권층의 재정을 채워줬고, 집권층은 이들의 경제활동을 보장해 줬다. 화인들의 유교적 가부장 문화와 동남아 나라들의 압제적 권력구조가 비슷한 것도 이들이 정치 개혁에 나서지 않는 한 이유라고 앤더슨은 덧붙였다.

-앤더슨 교수는 대표적 저서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1983년)에서 민족의 개념을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체’라고 규정해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리고 최근에 동아일보 게재됐던 신용하 교수의 탈민족주의론 비판. 신교수는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의 권위자이며, (당연하지만) 대표적인 민족주의 옹호론자이다. 그의 기본입장은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  '민족해방적 민족주의'를 구별하고 이 둘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러니까 일제의 침략적 민족주의와 한국의 저항적 민족주의는 같지 않다는 것). 따라서 섣부른 민족주의 비판은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내다버리는 격이라는 게 신교수의 비판이다.    

동아일보(06. 03. 04) 민족은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배우고 믿어 왔듯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는 근원이자 완성일까. 민족주의의 권력 지향성과 배타성 등 부정적 측면을 지적하며 탈(脫)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움직임이 최근 몇 년 사이에 국내 학계에서 확산돼 왔다. 탈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은 상상에 의한 허구라고 주장한다. 반면 민족은 허구가 아닌 실재하는 공동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에 따라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를 둘러싼 학계의 논쟁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신용하(愼鏞廈) 한양대 석좌교수가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는 국내 학계의 탈민족주의 움직임에 대해 포문을 열고 나섰다. 일제하 독립운동사를 주로 연구해 온 신 교수는 한국사회학회 학회지 최근호에 실린 논문 ‘민족의 사회학적 설명과 상상의 공동체론 비판’에서 탈민족주의 이론의 고전으로 꼽히는 베네딕트 앤더슨 미국 코넬대 명예교수의 대표 저서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1984년)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신 교수가 최근 왕성하게 영역을 넓혀 가고 있는 국내 탈민족주의 진영의 학자들을 직접 거명하진 않았지만 이들을 겨냥한 것은 분명하다. 신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내 논문을 계기로 탈민족주의 진영의 학자들과 일대 논쟁을 벌이고 싶다”고 밝혔다. 앤더슨 교수는 <상상의 공동체>에서 ‘민족’이란 개념이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 대륙에서 백인 이주민의 후손(크리올료)들이 유럽 본토인과 다른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면서 발명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 후 민족 개념이 유럽과 제3세계로 퍼져 나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신 교수는 민족은 공동의 언어·혈연·문화공동체라는 객관적 요소에 민족의식이라는 주관적 요소가 더해져 공고해진 실체라고 반박했다. 객관적 요소들로만 형성된 민족을 ‘즉자(卽自)적 민족’이라고 한다면 주관적 요소인 민족의식이 더해진 민족을 ‘대자(對自)적 민족’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상상의 공동체론’은 주관적 요소인 민족의식에만 주목한 나머지 ‘즉자적 민족’을 부인하고 있다는 게 신 교수의 지적이다. 신 교수는 “앤더슨 교수가 ‘상상’이란 표현을 통해 민족을 허위의식, 허구,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몰고 갔다”며 “‘상상의 공동체론’을 약소민족의 해방 투쟁에 적용하면 실재하지도 않은 ‘상상물’을 해방시키기 위해 투쟁한 우스꽝스러운 것이 된다”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이어 “‘상상의 공동체론’은 오늘날 제3세계의 민족해방, 민족통일, 민족국가 건설과 발전을 비판하고 부정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이론적 도구를 제공할 수 있으나 사실에서 이론을 정립하는 경험적 사회과학으로서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맹비판했다. 신 교수는 민족을 ‘에스닉 그룹(ethnic group)’의 일환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비판했다. 에스닉 그룹은 다민족국가인 미국에 적용될 수 있는 ‘문화와 관습의 하위공동체’로서, 민족 형성 이후에 다른 지역에 이민한 탓에 민족의 특성이 많이 해체 소멸돼 가는 정태적 공동체라는 것. 반면 민족은 한 사회의 다수집단의 언어·지역·혈연·문화의 공동체로서 형성돼 발전되어 가는 동태적 문화공동체라는 게 신 교수의 설명이다.

-신 교수는 민족주의를 크게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 ‘민족 해방적 민족주의’로 구별해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는 과거 서구 제국과 일본처럼 다른 약소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빼앗고 억압하는 민족주의이고, 민족 해방적 민족주의는 피압박 민족들이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해 민족의 자유와 해방,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민족주의를 말한다. 그는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 민족 해방적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사회과학 방법론의 기초인 유형화를 소홀히 한 잘못된 비판”이라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제국주의 침략 아래 신음하는 자기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행동이 민족주의 문필가들의 선동에 속아 존재하지도 않는 ‘상상물’에 생명을 바친 어리석은 행동이란 말인가”라고 반문하며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가 아니라 ‘실재(實在)의 공동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하는 기자의 보충기사로 탈민족주의론자들의 견해를 정리하고 있다.

■ 脫민족주의자 주장은 한국의 민족주의는 일제강점기의 가혹한 시련을 견뎌내며 광복과 건국, 근대화와 통일이라는 거대담론을 이끌어 온 견인차였다. 최근에는 세계화의 거센 물결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으로서 민족주의를 외치는 현상이 강화되면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더욱 번성하고 있다. 탈민족주의자들은 이러한 민족주의를 “현대의 신화”라고 지적하며 성역화된 민족주의의 이면에 감춰진 권력지향성, 배타성, 집단성, 가부장성 등을 폭로한다.

 

 

 

 

국내의 탈민족주의 담론을 주도하는 학자로는 임지현(林志弦·역사학) 한양대 교수가 첫손에 꼽힌다. 임 교수는 1999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도발적 저서를 통해 이념으로 기능해 온 민족주의를 정면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식민시대 민족이 국가의 공백을 채워 주는 절대적 신화였다면 광복 이후에는 남북 양쪽에서 모두 권력 유지를 위한 대중 동원 수단으로 쓰였다고 주장하며 민족주의와의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영훈(李榮薰·경제사) 서울대 교수도 탈민족주의를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다. 이 교수는 ‘민족’이라는 말이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고 백두산을 ‘민족의 영산’으로 신격화한 것도 근대의 산물일 뿐이라며 ‘민족주의는 반(反)지성적 신화’라고 맹공을 퍼붓는다.

박지향(朴枝香·서양사) 서울대 교수도 빼놓을 수 없는 논자. 탈민족 담론의 고전으로 꼽히는 영국의 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을 번역한 박 교수는 민족주의를 절대적 가치로 내면화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라고 비판한다.

철학가 탁석산(卓石山) 씨도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라는 저서에서 한국에서 ‘민족’은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처럼 국가 건설이 불가능했던 시기 국가의 대체물로 만들어진 상상의 공동체였던 만큼 국가 수립 이후에는 ‘시민’으로 대체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의 시위 모습이다. 끝으로 마지막 자료는 교수신문에 기고된 김봉률 교수의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비판"(05. 12. 21). 강조는 나의 것이다.

-이안 와트가 18세기 중엽에 '소설의 발생'을 강조하는 것은 18세기 중엽에 소설이 발생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1958년에 <소설의 발생>(열린책들, 1988)이 출간될 때 소설 발생이 제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차 대전 후 미국은 영국을 능가하는 자본주의 진영의 종주국으로 짧은 역사와 전통의 부재라는 특유의 미국적 콤플렉스를 해소하고자 했는데 소설과 관련해서 이루어지는 장르정치학 역시 그 작업의 일환이다. 더 나아가 콤플렉스 해소에 멈추지 않고 근대 민족주의가 미국에서 기원했다는 주장과 함께 소설 역시 미국에서 발생했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근대성의 기원을 전유하려는 전도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정이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와 낸시 암스트롱과 레오나드 텐넨하우스의 <상상의 청교도>(The Imaginary Puritan)에서의 민족주의와 소설의 미국적 전유에서 잘 나타난다.

-근대 영국 자본주의에서 소설이 발생했다는 와트의 명제가 일단 미국에서 제도화되면 두 가지 현상이 생긴다. 첫째는 소설 기원의 문제가 일반 소설의 기원인가 아닌가에 대한 의문과 서구 근대 소설의 기원이 과연 근대 영국에서 일어났는가 아닌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은폐, 배제되고 당연히 소설은 근대 영국에서 발생한 것으로 전제된다. 둘째는 영국과 미국의 관계가 전도된다. 영국에서 기원이 되는 소설이 리얼리즘이고 미국에서 기원이 되는 소설이 로망스라는 전도된 관계는 언제든지 영국 기원설을 미국이 전유하게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암스트롱과 텐넨하우스가 1992년 '상상의 청교도'에서 주장한 ‘소설의 미국 기원설’은 미국적 예외주의를 논리로 내세운다. 소설의 근대영국 기원설이 유럽문학의 전통에서 하나의 예외라는 영국적 예외주의에서 출발했다면 미국적 예외주의 역시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문제의식은 “영국문화가 식민지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준 반면 식민지의 글쓰기가 대서양을 가로질러 영국으로 되흘러 갔을 때 일어났던 것을 탐색해보려고 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들이 보기에 “소설은 무엇보다 최초로 유럽적 장르가 아니고 오히려 식민지 경험을 동시에 기록하고 기록했던 장르”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식민지에서 영어(English) 정체성의 새로운 토대를 창조했던 인쇄문화라는 것이다.

-미국 내에서도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런 주장이 있기 위해서 그 전사로서 있어야 되는 것이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이다. 앤더슨이 강조하는 것은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것보다 미국이 근대 민족주의가 최초로 기원한 나라라는 것이다. 그는 개정증보판 서문에서 자신의 이러한 주장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주목받지 못한 것에 분개하면서 “현 세계의 모든 중요한 것은 유럽에서 기원하였다는 기만에 익숙한 유럽 학자들에” 반기를 들고 “민족주의가 신세계에서 발원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나의 원래 계획의 일부였다”(13-4)고 주장한다. 이처럼, 아메리카 대륙, 특히 미합중국에서 발원한 민족주의가 유럽으로 건너가 언어 민족주의를 유발시켰다는 것은 소설이 미합중국에서 발생해서, 기원의 소설로 주장되는 영국의 <파멜라>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과 같은 논리구조를 이루고 있다.

-앤더슨의 쇼비니즘은 근대 서구소설의 기원과 관련해서 중요한 언문일치와 민족의 문제에 관한 고찰에서 잘 드러난다. 앤더슨에 의하면, 16세기에 서구사회에서 이윤을 위한 지방어 서적의 대량 출판은 다양한 방언들을 소수의 표준어로 활자화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동일한 지방 활자어 서적을 읽는 독자들은 다른 지방 활자어를 읽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유대를 상상하고 의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언문일치가 종교개혁, 자본주의, 절대주의 시대의 지방행정어 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하더라도 수많은 방언들이 난립해 있었고 이를 차츰 해소하여 민족의 경계를 정할 정도의 독점적 언어의 지위를 차지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활자어로 보고 있다. 이 활자어들은 신문과 소설을 통해 나타난다. 그는 “사회적 유기체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통해 달력의 시간에 맞추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를 따라 앞으로(혹은 뒤로) 꾸준히 움직이는 견실한 공동체로 민족을 생각하는 것과 정확히 비유가 된다”고 하면서 민족의 기원과 소설의 기원을 동일시하고 있다. 앤더슨의 인쇄에 대한 강조는 민족과 소설을 함께 묶어 상상의 실재로 만드는데 있다.

-그런데 그에게 상상의 공동체는 민족만이 아니다. 중세 제국도 종교적 “상상의 공동체”이고 세계사적 조건에서 자본가도 “본질적으로 상상의 기반 위에서 결속력을 성취한 최초의 계급”이다. 자본가 계급을 결속시키는 것 역시 앤더슨에게는 활자어로 소설과 신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논리대로라면 근대적인 것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상상의 산물이 된다. 그런데 그가 상상의 공동체로서 민족을 형성하는데 활자어로 된 소설과 신문의 역할을 중점적으로 놓은 것은 일종의 문화적 기술주의이다. 문화의 물질성을 밝힌다는 것이 문화가 물질성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전도된 분석방법을 쓰고 있다.

-앤더슨에 따르면, 초기 서적시장은 라틴어를 아는 소수 엘리트를 겨냥하였으나 인쇄술이 발달하여 16세기 초에 이미 ‘기계제 재생산’의 시대에 들어서서 인쇄자본가들은 대량출판에 눈을 돌렸다. 이미 16세기에 인쇄가 상상의 공동체를 매개할 수 있는 수준에 와 있는데 왜 하필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인쇄만이 최초로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케 하여 민족됨(nationness)을 먼저 자각하게 했을까? 앤더슨은 인쇄된 자국어물들은 단지 “절대주의 전제정”을 중앙화의 도구로 제공했을 뿐이고 어떤 “원형적 민족적 충동”도 없었으며 “백성들에게 언어를 체계적으로 부과한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절대주의 체제에 대한 필자와의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지만, 무엇보다도 민족됨이 공화국의 문제임을 주장하기 위한 예비과정이다.

-그는 언어와 종교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전쟁을 했던 크리올과 본토인의 차별의 문제로 전환한다. 앤더슨은 근대 민족국가의 구체적 형성이 결코 특정 활자어가 결정적으로 도래한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민족이나 공화국이라 정의한 1776년에서 1838년 사이에” 나타난 새로운 정치실체인 미국에서 최초의 민족됨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민족됨”의 주장은 민족과 국가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닌 nation을 혼용하여 반증 회피의 수단으로 삼는다. 사실상 이들이 자각한 것은 민족됨이 아니라 국가의 형성 필요성이었으며, 또한 북미 독립운동을 한 13개 식민주의의 많은 지도자들은 노예를 소유한 부자 농업가들로 사실상 인디언이나 흑인 노예 그리고 프랑스나 스페인계의 일반인들과는 다른, 거의 봉건시대 영주들과 비슷한 지위를 지닌 자들로 근대적 민족의 범주와는 다르다.

-그는 인도를 동인도회사령으로 삼은 것을 예로 들면서 17세기 이후의 해외영토 정복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는 민족주의 이전 시대의 것”으로 정리한다. 그런데 해외 식민지 정복은 선박의 건조나 군대, 엄청난 경비 등으로 인해 국가적 지원체계가 꾸려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고 따라서 절대주의 체제나 그 이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민족주의의 시원을 식민지 본국으로부터 차별을 당하는 크리올의 반항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또한 그것을 모방하여 유럽이 민족주의체제로 나아갔다는 전제 아래 입헌군주제나 절대주의 체제에서의 민족국가의 문제를 배제하였다.

-암스트롱과 텐넨하우스가 제기하는 문제는 '파멜라' 이전에 글쓰기 능력만을 지닌 평범한 여성의 육체를 중요시하는 소설들이 영국 내에서 없다고 할 때 이런 󰡔파멜라󰡕의 전통은 어디서 왔는가하는 것이다. 그들은 귀족에 대한 담론과 보통 사람에 대한 담론이 소설에서 분기하는 지점은 영국적 미국인인 메리 롤란드슨(Mary Rowlandson)이 쓴 <되찾은 포로>(The Redeemed Captive)(영국판 1682)에 있다고 보고 영국 산문의 원천이 되는 것은 17세기 말과 18세기 동안 북 아메리카 식민지들에서 씌어진 포로 서사라고 한다. 이들에 따르면, 17세기 인디언 포로서사에서 장르가 증식되고 분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롤란드슨은 납치된 몸으로 신세계에서 영국을 대표한다. 그는 인디언 즉 비영국적 문화 가운데서 문자해독의 힘을 보여준 영국여성으로서 영국적 미국의 경험이 되는 원천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영국적인 것을 생각해야 되기 때문에 이들 포로서사가 독자들에게 영국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바꾸길 요구하는 데 그것은 문자해독능력 곧 영어를 읽고 쓰는 능력의 문제이다. 특히 프랑스 혁명기 동안 프랑스 인들은 영국인 등장인물에 위협이 되었지만 후기의 포로서사에서 영국인 개인을 유럽 태생의 남녀와 구별해주는 것은 영어에 대한 문자해독능력이었다. 이렇게 해서 “영어”는 영국적인 것의 핵심이 되고 식민지에서 근대 국가의 탄생 문제와 결합한다.

-식민지 모국인 영국에서 독립할 때 민족의 문제에서는 언어를 배제했지만 독립한 이후 민족의 문제에서는 영어 활자어가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했다는 앤더슨과, 인쇄된 영어로 씌어진 포로서사가 최초의 소설이라는 암스트롱과 텐넨하우스는 소설과 신문을 통해 인쇄된 영어를 내세움으로써 유럽대륙과 아시아를 배제하고 급기야 영국을 배제하고 자신들이 민족주의와 소설의 기원을 전유하는 장르정치학의 놀라운 귀결을 보여준다.

김봉률 교수의 글은 '쇼비니스트' 앤더슨에 대한 흥미로운 비판을 담고 있는데, 이에 대한 판단은 <상상의 공동체>을 읽어본 후에 내리도록 하겠다(원서를 오늘 입수했다). 한데, '민족'이 비록 '상상의 공동체'라 하더라도 실감나는 공동체인 것만은 분명하다...

06. 3. 15 - 16.

P.S. 베네딕트 앤더슨 이전에 민족주의 연구에 있어서 최고 권위자는 한스 콘(1891-1971)이었다. 국내에는 그의 <민족주의>(삼성문화재단, 1974), <민족주의시대>(박영사, 1975), <근대 러시아, 그 갈등의 역사>(심설당, 1981), <19세기 유럽 민족주의>(탐구당, 1990) 등의 번역/소개돼 있고, 내가 학부시절에 읽은 것도 그런책들이었다. 앤더슨이 내세우는 것은  이러한 민족주의 연구 접근법에 있어서 자신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평가는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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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광풍, 신문과 방송의 동침
'대한민국'보다 중요한 '대~한민국'
[기고] 정희준 교수... 누가 우리에게 응원을 강요하나
텍스트만보기   정희준(naebido) 기자   
▲ 7일 오후 서울 광화문 청계광장 부근에 설치된 월드컵 홍보 사진에 반월드컵 스티커가 붙어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신통하다. 거의 '자기검열' 수준으로 월드컵에 대한 비판적 의견은 무시해오던 주요 언론매체들이 지난 월요일(5일)을 기점으로 월드컵을 '다시 생각하자'며 사회적 월드컵 올인 현상을 문제 삼고 나섰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서울 도심의 월드컵 조형물을 스티커로 공격(?)하려 한다는 '반(反)월드컵 게릴라 작전' 관련 기사뿐 아니라, 비이성적 월드컵 광풍을 비판하는 사설까지 등장하니 조금 어리둥절하면서도 반가웠다. 게다가 방송사까지! 그것도 그들의 간판 뉴스에!

그러나 적이 의심스럽다. 혹시 이것마저도 '월드컵'이라면 무엇이든 가져다 진열하려는 저들의 상술은 아닌지. 또 심히 염려스럽다. 어느 기자의 표현대로 "우리는 월드컵 열풍도 전하지만 반대 움직임도 전달했다! 봤지?"하는 식으로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의도는 아닌지. 그리고 이 비상식적, 몰이성적 월드컵 광풍을 창조한 주인공이 바로 그들, 언론매체라는 부끄러움을 가리려는 것은 또 아닌지.

사실 몇몇 신문의 비판 기사는 그 진정성이 엿보인다. 예를 들어 경향신문은 월드컵 첫 경기인 토고전이 열리는 13일이 4년 전 양주군 효촌리의 두 소녀 미선이, 효순이가 우리를 떠난 날이라고 회고하며 함성을 내지르기 전에 잠시라도 그들을 추모하는 순간을 가질 것을 제안한다. 당시 '월드컵 치매'에 걸려 그들을 모른 척(?) 했던 우리의 모습을 나무라면서.

그러나 또 다른 몇몇 신문들은 역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지난 5일은 우리의 미래를 좌우할 한·미FTA 협상이 시작된 날이지만 이들은 FTA보다는 가나와의 평가전을 1면에 내걸었다. 그렇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보다 더 중요하다.

신문과 방송의 동침

사실 작금의 월드컵 광풍에서 정말 '오버'하는 매체는 방송 쪽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비판이 지난 몇 달간 있었다. 보스니아전 직후, 평가전에 불과한데도 전체 50분 중 25분, 날씨를 포함해 32꼭지 중 16꼭지를 축구에 쏟아 부은 MBC '축구데스크'를 보라.

그런데 신기하게도 신문사들은 언론의 본분을 내팽개쳐버린 방송사를 비난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나 경영상으로나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이들인데도, 또 신문은 여론을 등에 업을 수 있었는데도 월드컵에 대해서만큼은 이들 신문사는 '자정'했다. 왜? 신문 역시 월드컵에서 따먹을 게 많기 때문에.

그래서 그랬나 보다. 지난 3월, 서울시가 월드컵 기간에 서울광장을 SK텔레콤에게 넘겨 사실상 서울시민을 재벌에게 팔아넘겼다는 비난이 인 적이 있는데, 그 SK텔레콤컨소시엄의 멤버들은 KBS SBS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등의 방송사와 신문사였다. 이들은 연합군이 되어 본선도 아닌 평가전에서부터 시민들을 펜스 안에 몰아넣고 판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서울광장의 이미지를 국민에게 살포하면서 바로 이것이 월드컵의 참맛이고 유일한 애국의 길이라고 가르치며 우리를 부추기고 있다. 동참하지 않으면 '국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자본과 미디어의 야합

▲ 26일 저녁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의 축구대표팀 평가전에서 붉은악마 응원단이 대형 태극기를 펼쳐들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미디어가 이렇게 월드컵을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 이유는 월드컵 기간에 한몫 보려는 상업자본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4년 전 3개 지상파 4개 채널이 안면몰수하고 한국팀의 경기를 동시에 중복 중계하는 식으로 돈을 자루에 쓸어 담고, 직원들에게 1000만원에 이르는 포상금을 지급하게 된 배후에는 자본의 엄청난 광고물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때와 다를 바 없이 자본과 미디어의 동맹이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들의 '짝짝꿍'이 일찍 시작되었다. 그 이유는 별다를 것 없다. 사실 한국축구는 해외원정 월드컵에서 이제까지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더구나 이번 월드컵은 독일에서 열리니 스위스와 프랑스에겐 사실상 홈구장이다. 당연히 16강조차 불투명하고 이는 이른바 '월드컵 특수'의 단축을 의미한다. 바로 상업자본이 염려하는 바다.

방송사의 걱정도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토고전이야 밤 10시 시작이니 시청자 붙들기에 어려움이 없지만, 새벽 4시로 예정된 스위스전과 프랑스전은 골칫거리이다(사실 광고 좋아하기는 둘 다 똑같지만 방송이 신문보다 더 오버하는 이유도 이것 아닐까 싶다).

결국 수익 극대화 작업을 가로막는 이러한 요인들을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월드컵 열풍을, 즉 월드컵 특수를 극대화시키는 동시에 하루라도 일찍 일으켜 세워 그 기간을 최대한 늘이는 것이다.

FIFA '요건 몰랐지?'

이제 FIFA의 상업화는 말릴 재간이 없다. 이제 중계권료라는 것은 그냥 집에 있는 TV 수상기를 갖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거주공간(TV)뿐 아니라 일상공간(멀티미디어 휴대폰), 직업공간(인터넷), 이동공간(DMB), 그리고 거리응원공간(전광판)까지 분할하여 따로 값을 매긴다.

또 실시간 중계뿐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5분, 10분, 40분, 24시간 지연 중계하는 준실시간 중계(near live), 그리고 월드컵 동영상을 따로 가격을 매겨 계약한다. 오직 하나의 콘텐츠를 가지고 우리의 일상을 시와 공으로 분할하여 쪼개 파는 상술의 극치를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기업으로부터 받는 엄청난 스폰서십도 있다. FIFA는 이번 월드컵에 15개 다국적기업을 공식스폰서로 선정하여 각각 추정액 5000만∼7000만 달러를 받았다. 또 2007∼2014년까지의 다년 계약을 별도로 추진하여 현대자동차, 소니, 아디다스, 코카콜라, 비자, 아랍에미리트항공 등 6개사로부터 1억9500만 달러에서 3억500만 달러에 이르는 돈을 받고 이들을 '최고등급파트너'로 삼았다.

이처럼 FIFA가 중계권료와 스폰서십 계약을 독점하다보니 2010년 월드컵 개최지인 남아공은 경제적 수익을 바랄 수 없는 상황에 처했고, 결국 국회 체육위원장이 나서서 FIFA의 수익독점을 비난하기에 이른다.

뻔뻔스런 애국

그러나 국내기업의 상업주의는 FIFA의 뺨을 쳐버렸다. 혹자는 월드컵은 원래 상업적이니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을 거라면 너무 비판하지 말라고 짐짓 점잖게 타이르려 든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의 '월드컵 장사'는 그야말로 독보적, 세계 최고 수준이다. 외국의 기업들도 월드컵 마케팅을 하지만, 이는 선수단 지원과 관객과 참여자에 대한 편의제공 수준이다. 이 땅의 그들처럼 국민을 응원시키겠다고 나서지는 않는다.

이 땅의 상업자본은 응원분위기를 뻥튀기하고 '국민'을 꼬드기기 위해 '국민배우' 안성기, '국민가수' 윤도현, '국민여동생' 문근영을 등장시켰다. 4년 전 SKT는 한석규를 내세워 '대∼한민국' 동작을 외우게 하더니 이번엔 KTF가 문근영을 내보내 응원 전엔 체조도 하셔야 한다며 '국민체조'를 하라고 우리를 들볶는다. 통신사에 이어 월드컵 판에 뛰어들어 눈부신 전쟁(錢爭)을 치르고 있는 업계는 바로 은행업이다. 정리해고의 선두주자인 은행들이 태극기를 치켜들고 (외국인들까지 등장시켜) 애국을 호소하는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다.

자본의 응원, 자본의 애국이다. 그러나 태극기와 민족을 들먹이는 이들이 과연 평소 애국애족적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이 응원과 애국의 깃발을 치켜들고 앞장서는 모습을 볼 때면 살짝 열이 오르고 속이 쓰린 것이다.

'꿈은 안 이루어진다'

'꿈은 이루어진다'. 4년 전 붉은악마가 카드섹션으로 선보였는데, 이제는 기업의 광고에 등장한다. 꿈이란 수면 중 일어나는 일련의 시각적 심상이라 한다. 그 특성으로는 꿈꾸는 '나'는 현실의 '나'와는 단절되어 있고, 또 꿈은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불합리하고 근거 없는, 괴기한 것이라 한다. 결국 꿈이란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기업은 우리에게 '꿈은 이루어진다'며 주문 외우듯 한다. 이는 고단한 현실을 덮어 버리려는 마약에 다름 아니다.

자신들의 꿈을 이미 이룬 자본이 꿈을 이루지 못한 우리에게 곧 이루어질 거라면서 계속 최면을 걸고 있다. 4년 전 이들은 월드컵을 통해 횡재했다. 수십조에 이르는 이른바 경제효과는 이들이 독식했다. 우리에겐 추억뿐, 모든 건더기는 이들이 다 주워 갔다.

월드컵 보러 집 나간 이성을 기다리며

월드컵 상업화의 구조를 들여다보자. 월드컵은 1994년 미국을 찍고 나와 상업화됐다. 본격적 세계화의 시점이다. 포화상태에 이른 미국시장의 대안을 찾던 미국기업은 서구 중심의 '화이트 올림픽'에서 모든 대륙을 열광시키는 월드컵으로 눈을 돌렸다. 미국에서 축구를 싫어하는 것은 매우 지당하고 대단히 미국적인 것이었지만, 이들은 월드컵을 통해 시장개척에 나섰다.

그 효과는 만점짜리다. 그래서 1986, 1990, 1994월드컵을 통틀어 스폰서로 참여한 미국기업은 총 11개 중 단 4개였지만, 이번 월드컵의 공식스폰서 중 미국기업은 전체 15개 중 7개다(그 외 일본 2, 네덜란드 1, 한국 1, 아랍에미리트 1, 주최국 독일 3). 이들은 우리의 일상을 점령하려 하고 있다. 월드컵을 이용해 시장을 확장하려는,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침투하려는 미국 기업들의 장삿속은 그래서 얄밉기만 하다.

그러나 지금의 월드컵광풍은 그런 얄미움보다는 이성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자본과 미디어가 오직 월드컵만 살포하는 가운데 우리 사회는 '불꺼진 사회(black-out-society)'가 될 위기에 처했다. 영어의 'black out'은 정전, 소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일시적인 의식의 상실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군사적 개념이 더욱 의미심장하다. 이는 본격적 미사일 공격에 앞서 먼저 핵공격으로 적의 미사일 방어체계를 무력화시키는 교란 전술이다.

5일 시작된 한미FTA 협상은 초고속으로 진행될 것이다. 월드컵은 한국사회를 '블랙 아웃'시킬 것인가. 월드컵이라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의식을 상실하고 방어신경이 무력화된 우리는 과연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 월드컵은 자본의 블랙 아웃 선제공격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긴 대추리 사람들의 비극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또 지방선거는 끝났지만 시장, 구청장에서부터 시의회, 구의회까지 한 정당이 싹쓸이 한 우리 동네는 앞으로의 4년을 놓고 걱정도 많고 그들의 취임 전에 할 얘기도 많다. 우리는 지금 할 이야기가 이렇게도 많단 말이다.

 

원문 :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36770&ar_seq=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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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에로이카 > [오마이뉴스] 이해영 교수 인터뷰

"한·미 FTA, 식민지 땅으로 가는 통로"
[인터뷰] 이해영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기획연구단장
텍스트만보기   이정훈(typology) 기자   
▲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이해영 교수.
ⓒ 이정훈
"한미 FTA는 한국이 식민지로 가는 통로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미국 자본이 경쟁하는 땅으로 변해, 한국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선 땅이 될 것이다."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공동대표 오종렬) 정책기획연구단장 이해영 한신대학교 교수의 일성이다.

이 교수는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주최로 5일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에서 열린 FTA 협상반대 기자회견 자리에서 "우리 정부는 한미 FTA 협상을 부실하게 준비하고 졸속으로 처리하려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낯선 식민지, 한미 FTA>라는 책을 출판한 이 교수는 "FTA에 대해 경제학자들은 물론 대학생들도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며 "한미 FTA가 타결되면 우리나라에서는 대규모 실업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음은 기자회견을 마친 이해영 교수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FTA에 관심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가?
"IMF 이후 한미가 추진하고 있던 BIT(투자협정)의 형편없는 내용을 알게 되면서 관심을 가졌다. FTA는 원래 상품에만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FTA는 상품뿐만 아니라 모든 경제 분야에 걸쳐 있다. 한미 FTA는 BIT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미 FTA는 식민지로 가는 통로

- BIT는 또 뭔가?
"BIT는 투자협정이라는 말이다. 투자협정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투자협정 중에서 '이행의무부과금지' 조항이라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이 조항에 따르면 미국의 회사가 한국 영화관을 매입 운영할 때 스크린쿼터에 따른 146일 한국영화 의무상영 기간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한 마디로 이익만 내면 되고 의무 같은 것은 없다.

FTA의 투자조항이 투자협정을 그대로 떠안은 것인데, 서비스와 투자 중심으로 가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미국 자본이 한국 기업을 M&A(인수와 합병) 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외국인 직접 투자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미국 자본이 한국 기업을 인수하게 되면 제일 먼저 기존에 있는 직원들을 정리해고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이익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고용창출효과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고용창출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 정부가 FTA 협상 관련 문건을 전혀 공개하고 있지 않은데.
"그래도 추정은 가능하다. 투자 조항은 이미 나와 있다고 봐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투자협정의 내용들이 그대로 FTA에 들어와 있다. 구체적인 협상안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정부가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 왜 일반 시민들이 FTA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생각하는가?
"몰라서 그런 것 같다. 대다수가 수출 자유화에 왜 반대하느냐고 한다. 본래 의미를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식민지 협정이다. 투자협정이 가져올 피해는 FTA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FTA의 피해는 클 것이다."

- FTA에 대해 경제학자들도 많이 모르는 것 같다.
"특수한 분야이다. 경제학자들이 이미 신자유주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FTA는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다. 법학, 정치 문제이면서 경제 분야에 총망라되어 있는 고도의 전문적 문제이다."

"대규모 정리해고자 양산할 것"

▲ 이해영 교수는 한미 FTA는 공동체의 삶을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이정훈
- 한미 FTA 저지 교수학술공대책위원회(공동대표 김세균)에는 몇 명의 교수가 참여하고 있는가.
"200명이 넘게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전공분야가 각각 다르다. 또 워낙 특수한 분야이다 보니 새롭게 공부해야 하는데,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다. 경제 관련 교수들도 20명 정도 있다."

- 경제를 전공한 교수들은 한미 FTA의 심각성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경제학계는 신자유주의가 거의 지배했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일부 단체에 소속돼 있는 학자들만이 한미 FTA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 여러 경제학자들을 만나면 견해가 많이 다르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자신들도 교육자라서 교육은 장사가 아니라 공공 분야임을 누구보다 잘 알 텐데 그것 역시 서로 생각이 많이 다르다."

- 시민사회단체들의 반응도 조금 늦은 게 아닌가.
"경제 이슈는 어려운 과제다. 특히 통상 분야는 더욱 전문적이고 어렵다. 그동안 시민사회단체들도 통상 이슈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다가 IMF 이후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현재는 국내 다른 이슈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운동하고 있다."

- 대학 강단에 있는데 경제 문제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은 어느 정도인가.
"관심이 많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관심이 많다. 그런데 자기 경제 문제만 관심이 많다. 국민경제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국민경제가 죽는데 자기는 살아남을 것 같은가. 많이 안타깝다. FTA가 체결되고 나면 더 이상의 고용창출은 없을 것이다."

- 한미 FTA가 체결되고 나면 실업률은 어느 정도가 되리라 예상하는가.
"실업률은 예상하기조차 어렵다. M&A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미국 자본이 한국 기업을 인수하면 정리해고부터 할텐데 그것만해도 엄청날 것이다. 현재 IT 산업에 국가가 목을 매고 있는데 고용창출 효과가 낮은 분야이다. 따라서 성장해도 고용 효과는 작을 수밖에 없다."

- 최근 <낯선 식민지, 한미 FTA>라는 책을 냈는데.
"쉽게 쓴다고 했지만 쉽지는 않은 내용이다. 아무리 쉽게 써도 통상, 경제 분야의 책은 어렵다. 기본 지식이 없어서 그렇다. 이번 책은 그 동안 썼던 글을 모은 것이 아닌 새로 쓴 내용들이다."
관련
기사
이 기사는 기독교 인터넷 신문 에큐메니안(http://www.ecumenian.com)에도 올렸습니다.
2006-06-07 16:50
ⓒ 2006 OhmyNews
* 기사원본주소 :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36651
Copyright 1999 - 2006 OhmyNews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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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노마디즘 대 노마디즘

계간 <황해문화>에

교수신문(06. 06. 05)

이정우, "홍윤기 교수의 비판에 답한다"

천규석의 ‘노마디즘은 침략주의다’를 읽으면서 황우석을 생각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아연한 문제들이 얽혀 난맥상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홍윤기가 몹시 거친 글을 다시 얹음으로써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홍윤기의 글에 대해 직접적 대응을 하기보다는(그럴 경우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빠질 수 있기에) 천규석, 홍윤기, 나아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하나의 핵심적인 오류를 지적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려 한다. 수많은 오류들이 얽혀 있지만 지면 관계상 매우 중요한 하나의 오류만을 이야기하려 한다.

‘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 하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적 구분들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전제하는 대립의 관계로 오해하는 것이다.

가령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을 보자. 홈 패인 공간에서는 모든 것들이 그 홈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반면 매끄러운 공간은 이런 홈을 가지고 있지 않고 따라서 다른 종류의 운동이 가능하다. 대부분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을 이렇게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홈 패인 공간이라는 공간이 어딘가에 있고 그것과 대립하는 매끄러운 공간이 그것과 대립해서(‘opposition’의 관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개념적/형식적 구분”을 “실재적/실체적 구분”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A라는 공간은 홈 패인 공간이다.” 이런 식의 명제는 들뢰즈/가타리에게는 무의미한 명제이다. 그것은 마치 “10kg은 무거운 무게이다”라는 말만큼이나 무의미한 명제이다. 무겁다/가볍다는 것은 대립의 관계도 아니고(‘대립’이라는 두 실재/실체가 서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양자택일의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연속적인 정도(degree)의 관계이다. 10kg은 11kg보다 가벼우며 동시에 9kg보다 무겁다. 어린아이에게는 무겁지만 트럭에게는 가볍다. 이 관계를 마치 가벼움이라는 어떤 것이 어딘가에 있고 무거움이라는 어떤 것이 어딘가에 있어 그 둘이 대립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이지 곤란하다.

요컨대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별도로 존재하는 그 어떤 존재가 아니다. 이는 개념적 구분일 뿐이며, 또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한 공간이 시간성을 얼마나 내포하고 있는가를 표시하는 지표(index)일 뿐인 것이다. 무거움, 가벼움은 어떤 존재들이 아니다. 어떤 존재에 붙는 성격들이다. 마찬가지로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도 존재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어떤 공간이 있을 때 그 공간의 성격을 서술해주는 개념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오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오인이 있다. 그것은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들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부여해 이해하는 경우이다. 바로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공간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공간이라는 식 말이다. 리좀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樹木型)은 나쁜 것이라는 식이다.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모든 오해들의 절반 이상이 바로 이 오해에서 유래하는 듯싶다. 리좀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암(癌)이야말로 정말 리좀적이 아닌가? 초국적 기업들이야말로 정말 리좀적이지 않은가? 바이러스야말로 정말 리좀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들뢰즈/가타리는 암, 초국적 기업들, 바이러스 등을 좋은 것들로 간주한다는 이야기가 되는가? 리좀/수목형, 홈 패인/매끄러운 등은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이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 “좋은/나쁜”이라는 가치들이 실체화되는 것이 아니다.

리좀이 좋은 것이 아니다. 어떤 리좀이 좋은 것이다. 매끄러운 공간이 좋은 것이 아니다. 어떤 매끄러운 공간이 좋은 것이다. 홈 패인 공간, 수목형 등은 현실적인 질서들이다. 리좀, 매끄러운 공간 등은 이 현실적인 질서를 극복하려는 운동들이다. 그러나 리좀, 매끄러운 공간으로 간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우리의 현실을 보다 나은 현실로 바꾸어나가기 위해서는 분명 리좀적 운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리좀적 운동으로 갔다고 해서 우리 현실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파괴적이고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천의 고원’을 조금이라도 성실하게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들뢰즈/가타리가 이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홍윤기는 그의 글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이동성과 정주성을 근본적 차이를 가진 대립 범주로 설정”했다고 말하면서, 천규석과 더불어 “이동성과 정주성이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실존 ‘범주’의 규명과 관련된 근본적 차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그리고 “유목주의”는 “이동 마인드”를 본질로 하는 침략주의이며, 들뢰즈/가타리의 사유가 바로 이런 침략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모든 점들은 접어두자. 우리는 여기에서 천규석-홍윤기가 방금 말한 오류들, 들뢰즈/가타리의 개념들을 실재적 대립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두 일반적인 오류 위에 다시 이들의 특수한 하나의 오류, 정말이지 심각하고 어이가 없는 오류를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이들이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투영해 엉뚱하게 오해한 후, 다시 이들에게 그 이분법 중에서 나쁜 경우를 귀속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들뢰즈/가타리에게 리좀적인 것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수목형 현실이다. 변화와 창조는 리좀적 사유를 요청한다. 그러나 리좀의 사유를 도입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리좀이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천규석-홍윤기는 들뢰즈/가타리의 본지와는 전혀 반대로 나쁜 리좀들을 이들의 주장으로 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유목적인 것”이 좋은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나쁜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물론 이 때 좋음과 나쁜의 기준을 긋기가 쉽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런데 천규석-홍윤기는 참으로 이상하게도 들뢰즈/가타리가 나쁜 유목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들의 생각으로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들뢰즈/가타리는 국가장치의 “외부”를 두 가지로 본다.(여기에서 “외부”를 즉물적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 하나는 국가들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가진 거대한 세계적 기계들로서 그 예로서 “초국적 기업들, 산업 콤비나트, 기독교 · 이슬람교를 비롯한 거대 종교들 및 종교 단체들”을 들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이것들과 대조적으로 국소적인(“로칼”한)  “무리들, 주변부 사람들, 소수자들”을 들고 있다.(『천의 고원』 445/689쪽. 이 대목은 천규석이 그나마 “읽었다”고 한 바로 그 대목임에 주목하자) 이 두 경우는 모두 국가장치의 “외부”를 형성하지만, 그러나 서로 대조된다. 하나는 국가/법조차도 우습게 보는 거대한 자본권력들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자들이다.(들뢰즈/가타리는 후자에 대해 “신원시주의=neoprimitivisme”라는 말을 쓰고 있다. 바로 천규석 등이 추구하는 생태공동체가 이 신원시주의의 한 형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은 바로 후자의 “외부” 즉 소수자들의 철학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마디즘’은 바로 거대 자본권력들의 “유목주의”을 비판하는 철학, 소수자 윤리학과 소수자 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는 철학이다.

그런데 보라. 천규석과 홍윤기는 이들의 철학을 완벽하게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의 철학을 바로 이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주적인 “시장제국주의 철학”으로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상에 대해 좀 부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있다. 어떤 점들에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플라톤에 대해 “감각적 쾌락만 추구하는 퇴폐주의자”라고, 헤겔에 대해 “역사를 무시하는 추상적 정신의 소유자”라고, 맑스에 대해 “노동자들의 현실을 모르는 부르주아 철학자”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을 그야말로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홍윤기, "이정우 대표의 반론을 읽고 다시 답함"

천규석 선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 대한 철학아카데미 이정우 대표의 악성 서평(교수신문 제 396호)만 보면 지금도 처음 느꼈던 당혹감과 혐오감이 되살아난다.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에서 같은 책을 서평하기로 했던 나의 글은 결국 들뢰즈/가타리의 원본 유목주의에 대한 이해의 정확성뿐만 아니라 ‘철학하는 것’의 정체성과 ‘철학하는 인간’의 사회적 위상까지 심각하게 생각해본 긴 반성문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정우 대표가 인신비방이 가득 찬 그 서평에서 자신이 전문 철학자임을 내세워 천 선생이 제기한 쟁점과는 전혀 무관하게, 당신 들뢰즈 책을 불어로 읽었느냐 안 읽었냐, 2천5백년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서양 철학 공부나 하고 그 글을 썼냐 안 썼냐, 대학원생의 엉터리 번역을 엉터리로 읽었냐 아니냐고 넋두리하는 태도를 보고 경악했다. 사실 그렇게 말할 정도면 그 책에 대한 서평 자체를 거부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정우 씨도 이번 글에서 자인했듯이 그렇게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빠진” 그의 글을 서평이라고 실어준 ‘교수신문’이 사실 더 한심했다. 내가 아니라 이정우 씨와 독자들, 또 천 선생에게 뒤늦게나마 사과할 일이다.

흔히 철학은 철학전공자나 하는 난해한 학문 분야라고 생각된다. 분명히 철학에는 철학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학문적인 지식, 역사, 그리고 전문서적이 있다. 그러나 문명 수준이 일정 정도 도달해 인간의 관심이 다양하게 분화하는 시대나 생활권에는 이런 전문소양과는 전혀 독립적으로 ‘철학함’의 능력이 분출된다. 이 때 ‘철학함’은 자신과 동료 인간의 생각, 말, 행위, 나아가 삶의 방식과 세계의 존립이 왜 정당한지를 그 근거(ground)에서 물으면서 그 근본적인 해답을 추구하는 고도의 사고활동 또는 담화활동이 된다. 문제현장에서 이뤄지는 바로 이런 고도의 인간 활동이 사실 전공으로서의 철학의 가장 근원적인 탐사영역이다.

‘황해문화’에서 나는 무분별한 유목주의 추종에 단지 분개할 뿐만 아니라 그 근원까지 비판하려고 한 농사꾼 천규석 선생을 바로 이런 가장 원초적 의미에서의 철학하는 인간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철학함은 철학전공자 이전에 시민의 권리이며, 철학에서의 민주주의야말로 이 시대 한국의 철학을 융성하게 할 가장 기본적인 활동조건이다. 이정우 대표는 철학의 바로 이런 조건을 말살하고 철학활동을 그 싹에서부터 뭉개는 일종의 학문적 焚書를 자행한 것이다.

그런데 철학전공자로서의 지적 권력을 한껏 내세운 이 대표의 노마디즘 이해가 과연 농사꾼 철학자를 있는 대로 경멸할 만큼 정확한가. 결론부터 말해, 잔뜩 기대를 갖고 이번 글을 본 나는 이 대표가 과연 들뢰즈/가타리의 원서를 그 쪽마다 제대로 독해했는지를 크게 의심하게 됐다. 무엇보다 이 대표는 들뢰즈/가타리가 ‘철학했던’ 현장의 그 생생한 맥락을 투철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바로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이 아주 어처구니없는 오독을 자행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게 됐다. 


그가 거론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 하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적 구분들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전제하는 대립의 관계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씨는 노마디즘을 본격적으로 사고실험한 이 책 제12장에 나오는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의 개념들을 예로 들고 있다. 이 대표에 따르면, “홈 패인 공간이라는 공간이 어딘가에 있고 그것과 대립하는 매끄러운 공간이 그것과 대립해서(‘opposition’의 관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 그런 식의 이해는 “개념적/형식적 구분”을 “실재적/실체적 구분”으로 오인하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렇다면 이 대표에게 바로 물어보자. 들뢰즈/가타리는 “홈 패인 공간”(espace strie’.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줄줄 홈패인 공간”이다)과 “매끄러운 공간”(espace lisse. 더 실감나에 번역하면 “매끈매끈한 공간”이다)을 ‘개념적으로’ 왜 굳이 구분하였는가. 아마 원전에 더 충실하자면 이 구분에 “숭숭 구멍난 공간”(espace troue’)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개념이 ‘실체’(substance)는 아니더라도 ‘실재'(reality)와는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갖거나 갖지 않아야 한다면 공간에 관해 이렇게 세 가지 개념을 구분함으로써 노마디즘과 관련해 들뢰즈/가타리가 철학적으로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이 씨는 ‘줄줄 홈이 패였다’든지, ‘매끈매끈하다’든지, ‘숭숭 구멍났다’라고 표현된 공간들이 “별도로 존재하는 그 어떤 존재가 아니라 개념적 구분일 뿐이며, 또 정도의 문제일 뿐”이며, “어떤 공간이 있을 때 그 공간의 성격을 서술해주는 개념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단지 “성격 서술”을 위해 이런 식으로 구분했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상태에 있는 것을 서로 달리 묘사하기 위해 ‘다른 표현어를 썼다’고 해야지 ‘서로 다른 개념으로 구분했다’고는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정우 씨는 그저 대상을 묘사하기 위해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철학적 문제의식에 부응하는 핵심적 사안을 포착하기 위해 서로 구분되는 ‘개념’으로 그것을 규정하는 일을 전혀 혼동하고 있다.(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공간의 성질을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하려고 각기 다른 표현을 쓴 것이 아니라 그 단어들을 記標로 하여 각기 다른 문제의식을 대변하는 記意를 선명하게 개념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하지만 사실 그다지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이 대표는 이 공간 구분과 연관시켜 ‘유목적 전쟁기계’를 가장 특정적으로 정식화시킨 ‘천 개의 고원’ 제12장의 공리III에 딸린 다음의 도식을 기억할 것이다.(원전 518쪽; 국역본 797쪽)


누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적어도 들뢰즈/가타리 텍스트의 이해가 문제된다면 거기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이라는 “표현”은, 그 누구도 아닌 들뢰즈/가타리 자신에 의해,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하는 “실체”와 단정적으로 연관지어져 있다. 매끈매끈한 공간을 실체와 연관되지 않은, 단지 “성격 서술”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정우 대표의 자유다. 하지만 그들을 오해한다는 사람에 대해 자해성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 이 대표가 그렇게 숭모하는 들뢰즈/가타리 자신은 서로 성격이 차이나는 공간들을 서로 구별되는 삶의 방식의 “실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개념 구분을 실체적 구분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려면 먼저 들뢰즈/가타리부터 비난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절대 원전을 읽을 리 없다고 생각되는 독자들을 상대로 ‘원전 사기극’을 연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정우 씨가 “이런 식의 오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오인”이라고 하여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들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부여해 이해하는 경우”를 거론하면서 역시 이 공간 구분을 예로 들어 “바로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공간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공간이라는 식”, 그리고 “리좀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은 나쁜 것이라는 식”의 이해를 비난하고 드는 것도 정말 의심스러운 지적이다. 문제가 되는 제12장에서 들뢰즈/가타리가 던지는 가장 큰 화두는 “국가 모델” 또는 “국가 장치”에 포획되지 않은 탈억압적 삶이 어떤 형태로 가능하겠느냐 하는 문제다. 다시 말헤 들뢰즈/가타리는 ‘국가’에 관한 생각에서 단순히 ‘바람직한 국가’를 구상한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면서 삶은 여전히 가능해지고 활력에 찰 수 있는 그 한계선을 추적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들뢰즈/가타리는 적어도 그 문제의식에 있어서는 ‘국가의 궁극적 소멸’을 전망한 맑스/엥겔스의 후계자다.


그들은 바로 이런 문제구도에서 국가를 가능하게 했던 모든 것이 실은 유목민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문명을 소급해가면서 입증하려고 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국가가 기반이었다고 생각되었던 전쟁, 야금술 등등 모든 문명적인 것이 원래는 국가의 영토를 무력화시킨 유목민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인류학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천규석 선생은 정확하게 그 반대의 방향으로 문제에 접근했다.) 따라서 들뢰즈/가타리에 있어 “팍스 몽골리카의 중심이 거기에 종속되어 있던”, “스텝의 매끈매끈한 공간 자체”는 어떤 경우에도 억압적인 국가장치 외부에 있는, 더 권할 만한 좋은 삶의 터전이었다. 다시 말해 들뢰즈/가타리는 결코 존재세계에 대한 무위자연적 관조를 행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관념상으로는 그 모든 억압의 구조적 응집이라고 생각되는 국가라는 정주체에 대해 유사혁명적, 또는 그들의 용어를 따르자면. 탈영토화하는 도주선을 개척한 것이다. 그래서 숭숭 구멍난 공간은 줄줄 홈패인 공간의 지하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으로 통하는 도주로로 잠복한다고 상정되는 것이다.


‘유목민’ 개념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탈국가기획을 구체화시키는 실천적 구상으로서 결코 가치중립적인 서술이 아니다. 그들은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반자본주의적인 혁명아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천규석 선생의 의혹을 충분히 감당할 만큼 ‘실천적으로 포괄적인’ 전략가들은 못되었다. 바로 이 점에서 천규석 선생은 소위 원전을 읽었다는 이정우 씨보다 훨씬 정확하게 쟁점을 파악했다.


리좀이나 수목형에 대한 세간의 이해를 이정우 씨가 오해라고 비난한 것을 보면서 나는 정말 실망했다. 들뢰즈/가타리에 있어 리좀과 유목민의 개념은 그 문제층위가 다르다. 이정우 씨의 반론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들뢰즈/가타리의 책을 그들의 문제수준에 따라 ‘개념’ 수준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유유자적하는 태도로 쓰는 고급 독후감과 치열한 문제의식을 붙잡고 지적인 근거를 찾으려고 분투하는 철학적 담론은 어떤 경우에도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점에서 볼 때 학문적 자폐성에 침몰된 원전 팟쇼보다는 자기 문제의 전정성을 호소하는 농사꾼 철학자가 아무래도 나아보이는 것 같아 철학 전공자로서는 몹시 씁쓸하고 미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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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디즘 문제의식, 농사꾼 철학자가 원전 파쇼보다 정확
이정우 대표의 반론을 읽고 다시 답함

2006년 06월 05일   홍윤기 동국대 이메일 보내기

▲홍윤기 교수의 글이 실린 황해문화 최근호 ©
천규석 선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 대한 철학아카데미 이정우 대표의 악성 서평(교수신문 제 396호)만 보면 지금도 처음 느꼈던 당혹감과 혐오감이 되살아난다.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에서 같은 책을 서평하기로 했던 나의 글은 결국 들뢰즈/가타리의 원본 유목주의에 대한 이해의 정확성뿐만 아니라 ‘철학하는 것’의 정체성과 ‘철학하는 인간’의 사회적 위상까지 심각하게 생각해본 긴 반성문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정우 대표가 인신비방이 가득 찬 그 서평에서 자신이 전문 철학자임을 내세워 천 선생이 제기한 쟁점과는 전혀 무관하게, 당신 들뢰즈 책을 불어로 읽었느냐 안 읽었냐, 2천5백년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서양 철학 공부나 하고 그 글을 썼냐 안 썼냐, 대학원생의 엉터리 번역을 엉터리로 읽었냐 아니냐고 넋두리하는 태도를 보고 경악했다. 사실 그렇게 말할 정도면 그 책에 대한 서평 자체를 거부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정우 씨도 이번 글에서 자인했듯이 그렇게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빠진” 그의 글을 서평이라고 실어준 ‘교수신문’이 사실 더 한심했다. 내가 아니라 이정우 씨와 독자들, 또 천 선생에게 뒤늦게나마 사과할 일이다.

▲서울신문에 보도된 노마디즘 논쟁 관련 기사 ©


흔히 철학은 철학전공자나 하는 난해한 학문 분야라고 생각된다. 분명히 철학에는 철학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학문적인 지식, 역사, 그리고 전문서적이 있다. 그러나 문명 수준이 일정 정도 도달해 인간의 관심이 다양하게 분화하는 시대나 생활권에는 이런 전문소양과는 전혀 독립적으로 ‘철학함’의 능력이 분출된다. 이 때 ‘철학함’은 자신과 동료 인간의 생각, 말, 행위, 나아가 삶의 방식과 세계의 존립이 왜 정당한지를 그 근거(ground)에서 물으면서 그 근본적인 해답을 추구하는 고도의 사고활동 또는 담화활동이 된다. 문제현장에서 이뤄지는 바로 이런 고도의 인간 활동이 사실 전공으로서의 철학의 가장 근원적인 탐사영역이다.

‘황해문화’에서 나는 무분별한 유목주의 추종에 단지 분개할 뿐만 아니라 그 근원까지 비판하려고 한 농사꾼 천규석 선생을 바로 이런 가장 원초적 의미에서의 철학하는 인간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철학함은 철학전공자 이전에 시민의 권리이며, 철학에서의 민주주의야말로 이 시대 한국의 철학을 융성하게 할 가장 기본적인 활동조건이다. 이정우 대표는 철학의 바로 이런 조건을 말살하고 철학활동을 그 싹에서부터 뭉개는 일종의 학문적 焚書를 자행한 것이다.


그런데 철학전공자로서의 지적 권력을 한껏 내세운 이 대표의 노마디즘 이해가 과연 농사꾼 철학자를 있는 대로 경멸할 만큼 정확한가. 결론부터 말해, 잔뜩 기대를 갖고 이번 글을 본 나는 이 대표가 과연 들뢰즈/가타리의 원서를 그 쪽마다 제대로 독해했는지를 크게 의심하게 됐다. 무엇보다 이 대표는 들뢰즈/가타리가 ‘철학했던’ 현장의 그 생생한 맥락을 투철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바로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이 아주 어처구니없는 오독을 자행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게 됐다. 


그가 거론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 하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적 구분들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전제하는 대립의 관계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씨는 노마디즘을 본격적으로 사고실험한 이 책 제12장에 나오는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의 개념들을 예로 들고 있다. 이 대표에 따르면, “홈 패인 공간이라는 공간이 어딘가에 있고 그것과 대립하는 매끄러운 공간이 그것과 대립해서(‘opposition’의 관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 그런 식의 이해는 “개념적/형식적 구분”을 “실재적/실체적 구분”으로 오인하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렇다면 이 대표에게 바로 물어보자. 들뢰즈/가타리는 “홈 패인 공간”(espace strie’.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줄줄 홈패인 공간”이다)과 “매끄러운 공간”(espace lisse. 더 실감나에 번역하면 “매끈매끈한 공간”이다)을 ‘개념적으로’ 왜 굳이 구분하였는가. 아마 원전에 더 충실하자면 이 구분에 “숭숭 구멍난 공간”(espace troue’)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개념이 ‘실체’(substance)는 아니더라도 ‘실재'(reality)와는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갖거나 갖지 않아야 한다면 공간에 관해 이렇게 세 가지 개념을 구분함으로써 노마디즘과 관련해 들뢰즈/가타리가 철학적으로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이 씨는 ‘줄줄 홈이 패였다’든지, ‘매끈매끈하다’든지, ‘숭숭 구멍났다’라고 표현된 공간들이 “별도로 존재하는 그 어떤 존재가 아니라 개념적 구분일 뿐이며, 또 정도의 문제일 뿐”이며, “어떤 공간이 있을 때 그 공간의 성격을 서술해주는 개념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단지 “성격 서술”을 위해 이런 식으로 구분했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상태에 있는 것을 서로 달리 묘사하기 위해 ‘다른 표현어를 썼다’고 해야지 ‘서로 다른 개념으로 구분했다’고는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정우 씨는 그저 대상을 묘사하기 위해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철학적 문제의식에 부응하는 핵심적 사안을 포착하기 위해 서로 구분되는 ‘개념’으로 그것을 규정하는 일을 전혀 혼동하고 있다.(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공간의 성질을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하려고 각기 다른 표현을 쓴 것이 아니라 그 단어들을 記標로 하여 각기 다른 문제의식을 대변하는 記意를 선명하게 개념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하지만 사실 그다지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이 대표는 이 공간 구분과 연관시켜 ‘유목적 전쟁기계’를 가장 특정적으로 정식화시킨 ‘천 개의 고원’ 제12장의 공리III에 딸린 다음의 도식을 기억할 것이다.(원전 518쪽; 국역본 797쪽)


누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적어도 들뢰즈/가타리 텍스트의 이해가 문제된다면 거기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이라는 “표현”은, 그 누구도 아닌 들뢰즈/가타리 자신에 의해,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하는 “실체”와 단정적으로 연관지어져 있다. 매끈매끈한 공간을 실체와 연관되지 않은, 단지 “성격 서술”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정우 대표의 자유다. 하지만 그들을 오해한다는 사람에 대해 자해성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 이 대표가 그렇게 숭모하는 들뢰즈/가타리 자신은 서로 성격이 차이나는 공간들을 서로 구별되는 삶의 방식의 “실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개념 구분을 실체적 구분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려면 먼저 들뢰즈/가타리부터 비난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절대 원전을 읽을 리 없다고 생각되는 독자들을 상대로 ‘원전 사기극’을 연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정우 씨가 “이런 식의 오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오인”이라고 하여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들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부여해 이해하는 경우”를 거론하면서 역시 이 공간 구분을 예로 들어 “바로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공간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공간이라는 식”, 그리고 “리좀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은 나쁜 것이라는 식”의 이해를 비난하고 드는 것도 정말 의심스러운 지적이다. 문제가 되는 제12장에서 들뢰즈/가타리가 던지는 가장 큰 화두는 “국가 모델” 또는 “국가 장치”에 포획되지 않은 탈억압적 삶이 어떤 형태로 가능하겠느냐 하는 문제다. 다시 말헤 들뢰즈/가타리는 ‘국가’에 관한 생각에서 단순히 ‘바람직한 국가’를 구상한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면서 삶은 여전히 가능해지고 활력에 찰 수 있는 그 한계선을 추적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들뢰즈/가타리는 적어도 그 문제의식에 있어서는 ‘국가의 궁극적 소멸’을 전망한 맑스/엥겔스의 후계자다.


그들은 바로 이런 문제구도에서 국가를 가능하게 했던 모든 것이 실은 유목민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문명을 소급해가면서 입증하려고 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국가가 기반이었다고 생각되었던 전쟁, 야금술 등등 모든 문명적인 것이 원래는 국가의 영토를 무력화시킨 유목민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인류학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천규석 선생은 정확하게 그 반대의 방향으로 문제에 접근했다.) 따라서 들뢰즈/가타리에 있어 “팍스 몽골리카의 중심이 거기에 종속되어 있던”, “스텝의 매끈매끈한 공간 자체”는 어떤 경우에도 억압적인 국가장치 외부에 있는, 더 권할 만한 좋은 삶의 터전이었다. 다시 말해 들뢰즈/가타리는 결코 존재세계에 대한 무위자연적 관조를 행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관념상으로는 그 모든 억압의 구조적 응집이라고 생각되는 국가라는 정주체에 대해 유사혁명적, 또는 그들의 용어를 따르자면. 탈영토화하는 도주선을 개척한 것이다. 그래서 숭숭 구멍난 공간은 줄줄 홈패인 공간의 지하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으로 통하는 도주로로 잠복한다고 상정되는 것이다.


‘유목민’ 개념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탈국가기획을 구체화시키는 실천적 구상으로서 결코 가치중립적인 서술이 아니다. 그들은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반자본주의적인 혁명아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천규석 선생의 의혹을 충분히 감당할 만큼 ‘실천적으로 포괄적인’ 전략가들은 못되었다. 바로 이 점에서 천규석 선생은 소위 원전을 읽었다는 이정우 씨보다 훨씬 정확하게 쟁점을 파악했다.


리좀이나 수목형에 대한 세간의 이해를 이정우 씨가 오해라고 비난한 것을 보면서 나는 정말 실망했다. 들뢰즈/가타리에 있어 리좀과 유목민의 개념은 그 문제층위가 다르다. 이정우 씨의 반론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들뢰즈/가타리의 책을 그들의 문제수준에 따라 ‘개념’ 수준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유유자적하는 태도로 쓰는 고급 독후감과 치열한 문제의식을 붙잡고 지적인 근거를 찾으려고 분투하는 철학적 담론은 어떤 경우에도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점에서 볼 때 학문적 자폐성에 침몰된 원전 팟쇼보다는 자기 문제의 전정성을 호소하는 농사꾼 철학자가 아무래도 나아보이는 것 같아 철학 전공자로서는 몹시 씁쓸하고 미안할 뿐이다.

필자는 베를린자유대에서 ‘변증법비판과 변증법구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등의 공저와 ‘의사소통의 철학’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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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06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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