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노마디즘 대 노마디즘

계간 <황해문화>에

교수신문(06. 06. 05)

이정우, "홍윤기 교수의 비판에 답한다"

천규석의 ‘노마디즘은 침략주의다’를 읽으면서 황우석을 생각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아연한 문제들이 얽혀 난맥상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홍윤기가 몹시 거친 글을 다시 얹음으로써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홍윤기의 글에 대해 직접적 대응을 하기보다는(그럴 경우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빠질 수 있기에) 천규석, 홍윤기, 나아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하나의 핵심적인 오류를 지적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려 한다. 수많은 오류들이 얽혀 있지만 지면 관계상 매우 중요한 하나의 오류만을 이야기하려 한다.

‘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 하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적 구분들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전제하는 대립의 관계로 오해하는 것이다.

가령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을 보자. 홈 패인 공간에서는 모든 것들이 그 홈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반면 매끄러운 공간은 이런 홈을 가지고 있지 않고 따라서 다른 종류의 운동이 가능하다. 대부분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을 이렇게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홈 패인 공간이라는 공간이 어딘가에 있고 그것과 대립하는 매끄러운 공간이 그것과 대립해서(‘opposition’의 관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개념적/형식적 구분”을 “실재적/실체적 구분”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A라는 공간은 홈 패인 공간이다.” 이런 식의 명제는 들뢰즈/가타리에게는 무의미한 명제이다. 그것은 마치 “10kg은 무거운 무게이다”라는 말만큼이나 무의미한 명제이다. 무겁다/가볍다는 것은 대립의 관계도 아니고(‘대립’이라는 두 실재/실체가 서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양자택일의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연속적인 정도(degree)의 관계이다. 10kg은 11kg보다 가벼우며 동시에 9kg보다 무겁다. 어린아이에게는 무겁지만 트럭에게는 가볍다. 이 관계를 마치 가벼움이라는 어떤 것이 어딘가에 있고 무거움이라는 어떤 것이 어딘가에 있어 그 둘이 대립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이지 곤란하다.

요컨대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별도로 존재하는 그 어떤 존재가 아니다. 이는 개념적 구분일 뿐이며, 또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한 공간이 시간성을 얼마나 내포하고 있는가를 표시하는 지표(index)일 뿐인 것이다. 무거움, 가벼움은 어떤 존재들이 아니다. 어떤 존재에 붙는 성격들이다. 마찬가지로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도 존재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어떤 공간이 있을 때 그 공간의 성격을 서술해주는 개념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오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오인이 있다. 그것은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들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부여해 이해하는 경우이다. 바로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공간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공간이라는 식 말이다. 리좀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樹木型)은 나쁜 것이라는 식이다.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모든 오해들의 절반 이상이 바로 이 오해에서 유래하는 듯싶다. 리좀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암(癌)이야말로 정말 리좀적이 아닌가? 초국적 기업들이야말로 정말 리좀적이지 않은가? 바이러스야말로 정말 리좀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들뢰즈/가타리는 암, 초국적 기업들, 바이러스 등을 좋은 것들로 간주한다는 이야기가 되는가? 리좀/수목형, 홈 패인/매끄러운 등은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이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 “좋은/나쁜”이라는 가치들이 실체화되는 것이 아니다.

리좀이 좋은 것이 아니다. 어떤 리좀이 좋은 것이다. 매끄러운 공간이 좋은 것이 아니다. 어떤 매끄러운 공간이 좋은 것이다. 홈 패인 공간, 수목형 등은 현실적인 질서들이다. 리좀, 매끄러운 공간 등은 이 현실적인 질서를 극복하려는 운동들이다. 그러나 리좀, 매끄러운 공간으로 간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우리의 현실을 보다 나은 현실로 바꾸어나가기 위해서는 분명 리좀적 운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리좀적 운동으로 갔다고 해서 우리 현실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파괴적이고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천의 고원’을 조금이라도 성실하게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들뢰즈/가타리가 이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홍윤기는 그의 글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이동성과 정주성을 근본적 차이를 가진 대립 범주로 설정”했다고 말하면서, 천규석과 더불어 “이동성과 정주성이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실존 ‘범주’의 규명과 관련된 근본적 차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그리고 “유목주의”는 “이동 마인드”를 본질로 하는 침략주의이며, 들뢰즈/가타리의 사유가 바로 이런 침략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모든 점들은 접어두자. 우리는 여기에서 천규석-홍윤기가 방금 말한 오류들, 들뢰즈/가타리의 개념들을 실재적 대립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두 일반적인 오류 위에 다시 이들의 특수한 하나의 오류, 정말이지 심각하고 어이가 없는 오류를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이들이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투영해 엉뚱하게 오해한 후, 다시 이들에게 그 이분법 중에서 나쁜 경우를 귀속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들뢰즈/가타리에게 리좀적인 것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수목형 현실이다. 변화와 창조는 리좀적 사유를 요청한다. 그러나 리좀의 사유를 도입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리좀이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천규석-홍윤기는 들뢰즈/가타리의 본지와는 전혀 반대로 나쁜 리좀들을 이들의 주장으로 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유목적인 것”이 좋은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나쁜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물론 이 때 좋음과 나쁜의 기준을 긋기가 쉽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런데 천규석-홍윤기는 참으로 이상하게도 들뢰즈/가타리가 나쁜 유목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들의 생각으로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들뢰즈/가타리는 국가장치의 “외부”를 두 가지로 본다.(여기에서 “외부”를 즉물적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 하나는 국가들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가진 거대한 세계적 기계들로서 그 예로서 “초국적 기업들, 산업 콤비나트, 기독교 · 이슬람교를 비롯한 거대 종교들 및 종교 단체들”을 들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이것들과 대조적으로 국소적인(“로칼”한)  “무리들, 주변부 사람들, 소수자들”을 들고 있다.(『천의 고원』 445/689쪽. 이 대목은 천규석이 그나마 “읽었다”고 한 바로 그 대목임에 주목하자) 이 두 경우는 모두 국가장치의 “외부”를 형성하지만, 그러나 서로 대조된다. 하나는 국가/법조차도 우습게 보는 거대한 자본권력들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자들이다.(들뢰즈/가타리는 후자에 대해 “신원시주의=neoprimitivisme”라는 말을 쓰고 있다. 바로 천규석 등이 추구하는 생태공동체가 이 신원시주의의 한 형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은 바로 후자의 “외부” 즉 소수자들의 철학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마디즘’은 바로 거대 자본권력들의 “유목주의”을 비판하는 철학, 소수자 윤리학과 소수자 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는 철학이다.

그런데 보라. 천규석과 홍윤기는 이들의 철학을 완벽하게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의 철학을 바로 이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주적인 “시장제국주의 철학”으로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상에 대해 좀 부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있다. 어떤 점들에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플라톤에 대해 “감각적 쾌락만 추구하는 퇴폐주의자”라고, 헤겔에 대해 “역사를 무시하는 추상적 정신의 소유자”라고, 맑스에 대해 “노동자들의 현실을 모르는 부르주아 철학자”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을 그야말로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홍윤기, "이정우 대표의 반론을 읽고 다시 답함"

천규석 선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 대한 철학아카데미 이정우 대표의 악성 서평(교수신문 제 396호)만 보면 지금도 처음 느꼈던 당혹감과 혐오감이 되살아난다.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에서 같은 책을 서평하기로 했던 나의 글은 결국 들뢰즈/가타리의 원본 유목주의에 대한 이해의 정확성뿐만 아니라 ‘철학하는 것’의 정체성과 ‘철학하는 인간’의 사회적 위상까지 심각하게 생각해본 긴 반성문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정우 대표가 인신비방이 가득 찬 그 서평에서 자신이 전문 철학자임을 내세워 천 선생이 제기한 쟁점과는 전혀 무관하게, 당신 들뢰즈 책을 불어로 읽었느냐 안 읽었냐, 2천5백년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서양 철학 공부나 하고 그 글을 썼냐 안 썼냐, 대학원생의 엉터리 번역을 엉터리로 읽었냐 아니냐고 넋두리하는 태도를 보고 경악했다. 사실 그렇게 말할 정도면 그 책에 대한 서평 자체를 거부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정우 씨도 이번 글에서 자인했듯이 그렇게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빠진” 그의 글을 서평이라고 실어준 ‘교수신문’이 사실 더 한심했다. 내가 아니라 이정우 씨와 독자들, 또 천 선생에게 뒤늦게나마 사과할 일이다.

흔히 철학은 철학전공자나 하는 난해한 학문 분야라고 생각된다. 분명히 철학에는 철학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학문적인 지식, 역사, 그리고 전문서적이 있다. 그러나 문명 수준이 일정 정도 도달해 인간의 관심이 다양하게 분화하는 시대나 생활권에는 이런 전문소양과는 전혀 독립적으로 ‘철학함’의 능력이 분출된다. 이 때 ‘철학함’은 자신과 동료 인간의 생각, 말, 행위, 나아가 삶의 방식과 세계의 존립이 왜 정당한지를 그 근거(ground)에서 물으면서 그 근본적인 해답을 추구하는 고도의 사고활동 또는 담화활동이 된다. 문제현장에서 이뤄지는 바로 이런 고도의 인간 활동이 사실 전공으로서의 철학의 가장 근원적인 탐사영역이다.

‘황해문화’에서 나는 무분별한 유목주의 추종에 단지 분개할 뿐만 아니라 그 근원까지 비판하려고 한 농사꾼 천규석 선생을 바로 이런 가장 원초적 의미에서의 철학하는 인간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철학함은 철학전공자 이전에 시민의 권리이며, 철학에서의 민주주의야말로 이 시대 한국의 철학을 융성하게 할 가장 기본적인 활동조건이다. 이정우 대표는 철학의 바로 이런 조건을 말살하고 철학활동을 그 싹에서부터 뭉개는 일종의 학문적 焚書를 자행한 것이다.

그런데 철학전공자로서의 지적 권력을 한껏 내세운 이 대표의 노마디즘 이해가 과연 농사꾼 철학자를 있는 대로 경멸할 만큼 정확한가. 결론부터 말해, 잔뜩 기대를 갖고 이번 글을 본 나는 이 대표가 과연 들뢰즈/가타리의 원서를 그 쪽마다 제대로 독해했는지를 크게 의심하게 됐다. 무엇보다 이 대표는 들뢰즈/가타리가 ‘철학했던’ 현장의 그 생생한 맥락을 투철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바로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이 아주 어처구니없는 오독을 자행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게 됐다. 


그가 거론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 하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적 구분들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전제하는 대립의 관계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씨는 노마디즘을 본격적으로 사고실험한 이 책 제12장에 나오는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의 개념들을 예로 들고 있다. 이 대표에 따르면, “홈 패인 공간이라는 공간이 어딘가에 있고 그것과 대립하는 매끄러운 공간이 그것과 대립해서(‘opposition’의 관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 그런 식의 이해는 “개념적/형식적 구분”을 “실재적/실체적 구분”으로 오인하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렇다면 이 대표에게 바로 물어보자. 들뢰즈/가타리는 “홈 패인 공간”(espace strie’.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줄줄 홈패인 공간”이다)과 “매끄러운 공간”(espace lisse. 더 실감나에 번역하면 “매끈매끈한 공간”이다)을 ‘개념적으로’ 왜 굳이 구분하였는가. 아마 원전에 더 충실하자면 이 구분에 “숭숭 구멍난 공간”(espace troue’)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개념이 ‘실체’(substance)는 아니더라도 ‘실재'(reality)와는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갖거나 갖지 않아야 한다면 공간에 관해 이렇게 세 가지 개념을 구분함으로써 노마디즘과 관련해 들뢰즈/가타리가 철학적으로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이 씨는 ‘줄줄 홈이 패였다’든지, ‘매끈매끈하다’든지, ‘숭숭 구멍났다’라고 표현된 공간들이 “별도로 존재하는 그 어떤 존재가 아니라 개념적 구분일 뿐이며, 또 정도의 문제일 뿐”이며, “어떤 공간이 있을 때 그 공간의 성격을 서술해주는 개념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단지 “성격 서술”을 위해 이런 식으로 구분했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상태에 있는 것을 서로 달리 묘사하기 위해 ‘다른 표현어를 썼다’고 해야지 ‘서로 다른 개념으로 구분했다’고는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정우 씨는 그저 대상을 묘사하기 위해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철학적 문제의식에 부응하는 핵심적 사안을 포착하기 위해 서로 구분되는 ‘개념’으로 그것을 규정하는 일을 전혀 혼동하고 있다.(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공간의 성질을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하려고 각기 다른 표현을 쓴 것이 아니라 그 단어들을 記標로 하여 각기 다른 문제의식을 대변하는 記意를 선명하게 개념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하지만 사실 그다지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이 대표는 이 공간 구분과 연관시켜 ‘유목적 전쟁기계’를 가장 특정적으로 정식화시킨 ‘천 개의 고원’ 제12장의 공리III에 딸린 다음의 도식을 기억할 것이다.(원전 518쪽; 국역본 797쪽)


누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적어도 들뢰즈/가타리 텍스트의 이해가 문제된다면 거기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이라는 “표현”은, 그 누구도 아닌 들뢰즈/가타리 자신에 의해,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하는 “실체”와 단정적으로 연관지어져 있다. 매끈매끈한 공간을 실체와 연관되지 않은, 단지 “성격 서술”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정우 대표의 자유다. 하지만 그들을 오해한다는 사람에 대해 자해성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 이 대표가 그렇게 숭모하는 들뢰즈/가타리 자신은 서로 성격이 차이나는 공간들을 서로 구별되는 삶의 방식의 “실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개념 구분을 실체적 구분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려면 먼저 들뢰즈/가타리부터 비난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절대 원전을 읽을 리 없다고 생각되는 독자들을 상대로 ‘원전 사기극’을 연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정우 씨가 “이런 식의 오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오인”이라고 하여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들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부여해 이해하는 경우”를 거론하면서 역시 이 공간 구분을 예로 들어 “바로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공간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공간이라는 식”, 그리고 “리좀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은 나쁜 것이라는 식”의 이해를 비난하고 드는 것도 정말 의심스러운 지적이다. 문제가 되는 제12장에서 들뢰즈/가타리가 던지는 가장 큰 화두는 “국가 모델” 또는 “국가 장치”에 포획되지 않은 탈억압적 삶이 어떤 형태로 가능하겠느냐 하는 문제다. 다시 말헤 들뢰즈/가타리는 ‘국가’에 관한 생각에서 단순히 ‘바람직한 국가’를 구상한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면서 삶은 여전히 가능해지고 활력에 찰 수 있는 그 한계선을 추적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들뢰즈/가타리는 적어도 그 문제의식에 있어서는 ‘국가의 궁극적 소멸’을 전망한 맑스/엥겔스의 후계자다.


그들은 바로 이런 문제구도에서 국가를 가능하게 했던 모든 것이 실은 유목민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문명을 소급해가면서 입증하려고 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국가가 기반이었다고 생각되었던 전쟁, 야금술 등등 모든 문명적인 것이 원래는 국가의 영토를 무력화시킨 유목민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인류학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천규석 선생은 정확하게 그 반대의 방향으로 문제에 접근했다.) 따라서 들뢰즈/가타리에 있어 “팍스 몽골리카의 중심이 거기에 종속되어 있던”, “스텝의 매끈매끈한 공간 자체”는 어떤 경우에도 억압적인 국가장치 외부에 있는, 더 권할 만한 좋은 삶의 터전이었다. 다시 말해 들뢰즈/가타리는 결코 존재세계에 대한 무위자연적 관조를 행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관념상으로는 그 모든 억압의 구조적 응집이라고 생각되는 국가라는 정주체에 대해 유사혁명적, 또는 그들의 용어를 따르자면. 탈영토화하는 도주선을 개척한 것이다. 그래서 숭숭 구멍난 공간은 줄줄 홈패인 공간의 지하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으로 통하는 도주로로 잠복한다고 상정되는 것이다.


‘유목민’ 개념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탈국가기획을 구체화시키는 실천적 구상으로서 결코 가치중립적인 서술이 아니다. 그들은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반자본주의적인 혁명아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천규석 선생의 의혹을 충분히 감당할 만큼 ‘실천적으로 포괄적인’ 전략가들은 못되었다. 바로 이 점에서 천규석 선생은 소위 원전을 읽었다는 이정우 씨보다 훨씬 정확하게 쟁점을 파악했다.


리좀이나 수목형에 대한 세간의 이해를 이정우 씨가 오해라고 비난한 것을 보면서 나는 정말 실망했다. 들뢰즈/가타리에 있어 리좀과 유목민의 개념은 그 문제층위가 다르다. 이정우 씨의 반론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들뢰즈/가타리의 책을 그들의 문제수준에 따라 ‘개념’ 수준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유유자적하는 태도로 쓰는 고급 독후감과 치열한 문제의식을 붙잡고 지적인 근거를 찾으려고 분투하는 철학적 담론은 어떤 경우에도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점에서 볼 때 학문적 자폐성에 침몰된 원전 팟쇼보다는 자기 문제의 전정성을 호소하는 농사꾼 철학자가 아무래도 나아보이는 것 같아 철학 전공자로서는 몹시 씁쓸하고 미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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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디즘 문제의식, 농사꾼 철학자가 원전 파쇼보다 정확
이정우 대표의 반론을 읽고 다시 답함

2006년 06월 05일   홍윤기 동국대 이메일 보내기

▲홍윤기 교수의 글이 실린 황해문화 최근호 ©
천규석 선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 대한 철학아카데미 이정우 대표의 악성 서평(교수신문 제 396호)만 보면 지금도 처음 느꼈던 당혹감과 혐오감이 되살아난다.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에서 같은 책을 서평하기로 했던 나의 글은 결국 들뢰즈/가타리의 원본 유목주의에 대한 이해의 정확성뿐만 아니라 ‘철학하는 것’의 정체성과 ‘철학하는 인간’의 사회적 위상까지 심각하게 생각해본 긴 반성문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정우 대표가 인신비방이 가득 찬 그 서평에서 자신이 전문 철학자임을 내세워 천 선생이 제기한 쟁점과는 전혀 무관하게, 당신 들뢰즈 책을 불어로 읽었느냐 안 읽었냐, 2천5백년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서양 철학 공부나 하고 그 글을 썼냐 안 썼냐, 대학원생의 엉터리 번역을 엉터리로 읽었냐 아니냐고 넋두리하는 태도를 보고 경악했다. 사실 그렇게 말할 정도면 그 책에 대한 서평 자체를 거부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정우 씨도 이번 글에서 자인했듯이 그렇게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빠진” 그의 글을 서평이라고 실어준 ‘교수신문’이 사실 더 한심했다. 내가 아니라 이정우 씨와 독자들, 또 천 선생에게 뒤늦게나마 사과할 일이다.

▲서울신문에 보도된 노마디즘 논쟁 관련 기사 ©


흔히 철학은 철학전공자나 하는 난해한 학문 분야라고 생각된다. 분명히 철학에는 철학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학문적인 지식, 역사, 그리고 전문서적이 있다. 그러나 문명 수준이 일정 정도 도달해 인간의 관심이 다양하게 분화하는 시대나 생활권에는 이런 전문소양과는 전혀 독립적으로 ‘철학함’의 능력이 분출된다. 이 때 ‘철학함’은 자신과 동료 인간의 생각, 말, 행위, 나아가 삶의 방식과 세계의 존립이 왜 정당한지를 그 근거(ground)에서 물으면서 그 근본적인 해답을 추구하는 고도의 사고활동 또는 담화활동이 된다. 문제현장에서 이뤄지는 바로 이런 고도의 인간 활동이 사실 전공으로서의 철학의 가장 근원적인 탐사영역이다.

‘황해문화’에서 나는 무분별한 유목주의 추종에 단지 분개할 뿐만 아니라 그 근원까지 비판하려고 한 농사꾼 천규석 선생을 바로 이런 가장 원초적 의미에서의 철학하는 인간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철학함은 철학전공자 이전에 시민의 권리이며, 철학에서의 민주주의야말로 이 시대 한국의 철학을 융성하게 할 가장 기본적인 활동조건이다. 이정우 대표는 철학의 바로 이런 조건을 말살하고 철학활동을 그 싹에서부터 뭉개는 일종의 학문적 焚書를 자행한 것이다.


그런데 철학전공자로서의 지적 권력을 한껏 내세운 이 대표의 노마디즘 이해가 과연 농사꾼 철학자를 있는 대로 경멸할 만큼 정확한가. 결론부터 말해, 잔뜩 기대를 갖고 이번 글을 본 나는 이 대표가 과연 들뢰즈/가타리의 원서를 그 쪽마다 제대로 독해했는지를 크게 의심하게 됐다. 무엇보다 이 대표는 들뢰즈/가타리가 ‘철학했던’ 현장의 그 생생한 맥락을 투철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바로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이 아주 어처구니없는 오독을 자행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게 됐다. 


그가 거론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 하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적 구분들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전제하는 대립의 관계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씨는 노마디즘을 본격적으로 사고실험한 이 책 제12장에 나오는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의 개념들을 예로 들고 있다. 이 대표에 따르면, “홈 패인 공간이라는 공간이 어딘가에 있고 그것과 대립하는 매끄러운 공간이 그것과 대립해서(‘opposition’의 관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 그런 식의 이해는 “개념적/형식적 구분”을 “실재적/실체적 구분”으로 오인하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렇다면 이 대표에게 바로 물어보자. 들뢰즈/가타리는 “홈 패인 공간”(espace strie’.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줄줄 홈패인 공간”이다)과 “매끄러운 공간”(espace lisse. 더 실감나에 번역하면 “매끈매끈한 공간”이다)을 ‘개념적으로’ 왜 굳이 구분하였는가. 아마 원전에 더 충실하자면 이 구분에 “숭숭 구멍난 공간”(espace troue’)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개념이 ‘실체’(substance)는 아니더라도 ‘실재'(reality)와는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갖거나 갖지 않아야 한다면 공간에 관해 이렇게 세 가지 개념을 구분함으로써 노마디즘과 관련해 들뢰즈/가타리가 철학적으로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이 씨는 ‘줄줄 홈이 패였다’든지, ‘매끈매끈하다’든지, ‘숭숭 구멍났다’라고 표현된 공간들이 “별도로 존재하는 그 어떤 존재가 아니라 개념적 구분일 뿐이며, 또 정도의 문제일 뿐”이며, “어떤 공간이 있을 때 그 공간의 성격을 서술해주는 개념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단지 “성격 서술”을 위해 이런 식으로 구분했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상태에 있는 것을 서로 달리 묘사하기 위해 ‘다른 표현어를 썼다’고 해야지 ‘서로 다른 개념으로 구분했다’고는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정우 씨는 그저 대상을 묘사하기 위해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철학적 문제의식에 부응하는 핵심적 사안을 포착하기 위해 서로 구분되는 ‘개념’으로 그것을 규정하는 일을 전혀 혼동하고 있다.(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공간의 성질을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하려고 각기 다른 표현을 쓴 것이 아니라 그 단어들을 記標로 하여 각기 다른 문제의식을 대변하는 記意를 선명하게 개념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하지만 사실 그다지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이 대표는 이 공간 구분과 연관시켜 ‘유목적 전쟁기계’를 가장 특정적으로 정식화시킨 ‘천 개의 고원’ 제12장의 공리III에 딸린 다음의 도식을 기억할 것이다.(원전 518쪽; 국역본 797쪽)


누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적어도 들뢰즈/가타리 텍스트의 이해가 문제된다면 거기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이라는 “표현”은, 그 누구도 아닌 들뢰즈/가타리 자신에 의해,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하는 “실체”와 단정적으로 연관지어져 있다. 매끈매끈한 공간을 실체와 연관되지 않은, 단지 “성격 서술”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정우 대표의 자유다. 하지만 그들을 오해한다는 사람에 대해 자해성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 이 대표가 그렇게 숭모하는 들뢰즈/가타리 자신은 서로 성격이 차이나는 공간들을 서로 구별되는 삶의 방식의 “실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개념 구분을 실체적 구분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려면 먼저 들뢰즈/가타리부터 비난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절대 원전을 읽을 리 없다고 생각되는 독자들을 상대로 ‘원전 사기극’을 연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정우 씨가 “이런 식의 오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오인”이라고 하여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들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부여해 이해하는 경우”를 거론하면서 역시 이 공간 구분을 예로 들어 “바로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공간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공간이라는 식”, 그리고 “리좀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은 나쁜 것이라는 식”의 이해를 비난하고 드는 것도 정말 의심스러운 지적이다. 문제가 되는 제12장에서 들뢰즈/가타리가 던지는 가장 큰 화두는 “국가 모델” 또는 “국가 장치”에 포획되지 않은 탈억압적 삶이 어떤 형태로 가능하겠느냐 하는 문제다. 다시 말헤 들뢰즈/가타리는 ‘국가’에 관한 생각에서 단순히 ‘바람직한 국가’를 구상한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면서 삶은 여전히 가능해지고 활력에 찰 수 있는 그 한계선을 추적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들뢰즈/가타리는 적어도 그 문제의식에 있어서는 ‘국가의 궁극적 소멸’을 전망한 맑스/엥겔스의 후계자다.


그들은 바로 이런 문제구도에서 국가를 가능하게 했던 모든 것이 실은 유목민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문명을 소급해가면서 입증하려고 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국가가 기반이었다고 생각되었던 전쟁, 야금술 등등 모든 문명적인 것이 원래는 국가의 영토를 무력화시킨 유목민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인류학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천규석 선생은 정확하게 그 반대의 방향으로 문제에 접근했다.) 따라서 들뢰즈/가타리에 있어 “팍스 몽골리카의 중심이 거기에 종속되어 있던”, “스텝의 매끈매끈한 공간 자체”는 어떤 경우에도 억압적인 국가장치 외부에 있는, 더 권할 만한 좋은 삶의 터전이었다. 다시 말해 들뢰즈/가타리는 결코 존재세계에 대한 무위자연적 관조를 행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관념상으로는 그 모든 억압의 구조적 응집이라고 생각되는 국가라는 정주체에 대해 유사혁명적, 또는 그들의 용어를 따르자면. 탈영토화하는 도주선을 개척한 것이다. 그래서 숭숭 구멍난 공간은 줄줄 홈패인 공간의 지하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으로 통하는 도주로로 잠복한다고 상정되는 것이다.


‘유목민’ 개념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탈국가기획을 구체화시키는 실천적 구상으로서 결코 가치중립적인 서술이 아니다. 그들은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반자본주의적인 혁명아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천규석 선생의 의혹을 충분히 감당할 만큼 ‘실천적으로 포괄적인’ 전략가들은 못되었다. 바로 이 점에서 천규석 선생은 소위 원전을 읽었다는 이정우 씨보다 훨씬 정확하게 쟁점을 파악했다.


리좀이나 수목형에 대한 세간의 이해를 이정우 씨가 오해라고 비난한 것을 보면서 나는 정말 실망했다. 들뢰즈/가타리에 있어 리좀과 유목민의 개념은 그 문제층위가 다르다. 이정우 씨의 반론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들뢰즈/가타리의 책을 그들의 문제수준에 따라 ‘개념’ 수준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유유자적하는 태도로 쓰는 고급 독후감과 치열한 문제의식을 붙잡고 지적인 근거를 찾으려고 분투하는 철학적 담론은 어떤 경우에도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점에서 볼 때 학문적 자폐성에 침몰된 원전 팟쇼보다는 자기 문제의 전정성을 호소하는 농사꾼 철학자가 아무래도 나아보이는 것 같아 철학 전공자로서는 몹시 씁쓸하고 미안할 뿐이다.

필자는 베를린자유대에서 ‘변증법비판과 변증법구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등의 공저와 ‘의사소통의 철학’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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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06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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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홍윤기 교수의 비판(황해문화 여름호) 등에 답한다
"들뢰즈/가타리 반대로 뒤집어 왜곡"

2006년 06월 05일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이메일 보내기

천규석의 ‘노마디즘은 침략주의다’를 읽으면서 황우석을 생각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아연한 문제들이 얽혀 난맥상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홍윤기가 몹시 거친 글을 다시 얹음으로써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홍윤기의 글에 대해 직접적 대응을 하기보다는(그럴 경우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빠질 수 있기에) 천규석, 홍윤기, 나아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하나의 핵심적인 오류를 지적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려 한다. 수많은 오류들이 얽혀 있지만 지면 관계상 매우 중요한 하나의 오류만을 이야기하려 한다.


‘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 하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적 구분들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전제하는 대립의 관계로 오해하는 것이다.


가령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을 보자. 홈 패인 공간에서는 모든 것들이 그 홈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반면 매끄러운 공간은 이런 홈을 가지고 있지 않고 따라서 다른 종류의 운동이 가능하다. 대부분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을 이렇게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홈 패인 공간이라는 공간이 어딘가에 있고 그것과 대립하는 매끄러운 공간이 그것과 대립해서(‘opposition’의 관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개념적/형식적 구분”을 “실재적/실체적 구분”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A라는 공간은 홈 패인 공간이다.” 이런 식의 명제는 들뢰즈/가타리에게는 무의미한 명제이다. 그것은 마치 “10kg은 무거운 무게이다”라는 말만큼이나 무의미한 명제이다. 무겁다/가볍다는 것은 대립의 관계도 아니고(‘대립’이라는 두 실재/실체가 서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양자택일의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연속적인 정도(degree)의 관계이다. 10kg은 11kg보다 가벼우며 동시에 9kg보다 무겁다. 어린아이에게는 무겁지만 트럭에게는 가볍다. 이 관계를 마치 가벼움이라는 어떤 것이 어딘가에 있고 무거움이라는 어떤 것이 어딘가에 있어 그 둘이 대립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이지 곤란하다.


요컨대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별도로 존재하는 그 어떤 존재가 아니다. 이는 개념적 구분일 뿐이며, 또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한 공간이 시간성을 얼마나 내포하고 있는가를 표시하는 지표(index)일 뿐인 것이다. 무거움, 가벼움은 어떤 존재들이 아니다. 어떤 존재에 붙는 성격들이다. 마찬가지로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도 존재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어떤 공간이 있을 때 그 공간의 성격을 서술해주는 개념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오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오인이 있다. 그것은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들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부여해 이해하는 경우이다. 바로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공간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공간이라는 식 말이다. 리좀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樹木型)은 나쁜 것이라는 식이다. (※수목형 사유란 나무가 주변의 잔가지나 곁뿌리들을 중심으로 끌어들여 동일화하고 포개는 사유, 유일한 중심을 상정한 사유를 의미함-편집자)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모든 오해들의 절반 이상이 바로 이 오해에서 유래하는 듯싶다. 리좀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암(癌)이야말로 정말 리좀적이 아닌가? 초국적 기업들이야말로 정말 리좀적이지 않은가? 바이러스야말로 정말 리좀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들뢰즈/가타리는 암, 초국적 기업들, 바이러스 등을 좋은 것들로 간주한다는 이야기가 되는가? 리좀/수목형, 홈 패인/매끄러운 등은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이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 “좋은/나쁜”이라는 가치들이 실체화되는 것이 아니다.


리좀이 좋은 것이 아니다. 어떤 리좀이 좋은 것이다. 매끄러운 공간이 좋은 것이 아니다. 어떤 매끄러운 공간이 좋은 것이다. 홈 패인 공간, 수목형 등은 현실적인 질서들이다. 리좀, 매끄러운 공간 등은 이 현실적인 질서를 극복하려는 운동들이다. 그러나 리좀, 매끄러운 공간으로 간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우리의 현실을 보다 나은 현실로 바꾸어나가기 위해서는 분명 리좀적 운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리좀적 운동으로 갔다고 해서 우리 현실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파괴적이고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천의 고원’을 조금이라도 성실하게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들뢰즈/가타리가 이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홍윤기는 그의 글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이동성과 정주성을 근본적 차이를 가진 대립 범주로 설정”했다고 말하면서, 천규석과 더불어 “이동성과 정주성이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실존 ‘범주’의 규명과 관련된 근본적 차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그리고 “유목주의”는 “이동 마인드”를 본질로 하는 침략주의이며, 들뢰즈/가타리의 사유가 바로 이런 침략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모든 점들은 접어두자. 우리는 여기에서 천규석-홍윤기가 방금 말한 오류들, 들뢰즈/가타리의 개념들을 실재적 대립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두 일반적인 오류 위에 다시 이들의 특수한 하나의 오류, 정말이지 심각하고 어이가 없는 오류를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이들이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투영해 엉뚱하게 오해한 후, 다시 이들에게 그 이분법 중에서 나쁜 경우를 귀속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들뢰즈/가타리에게 리좀적인 것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수목형 현실이다. 변화와 창조는 리좀적 사유를 요청한다. 그러나 리좀의 사유를 도입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리좀이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천규석-홍윤기는 들뢰즈/가타리의 본지와는 전혀 반대로 나쁜 리좀들을 이들의 주장으로 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유목적인 것”이 좋은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나쁜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물론 이 때 좋음과 나쁜의 기준을 긋기가 쉽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런데 천규석-홍윤기는 참으로 이상하게도 들뢰즈/가타리가 나쁜 유목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들의 생각으로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들뢰즈/가타리는 국가장치의 “외부”를 두 가지로 본다.(여기에서 “외부”를 즉물적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 하나는 국가들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가진 거대한 세계적 기계들로서 그 예로서 “초국적 기업들, 산업 콤비나트, 기독교 · 이슬람교를 비롯한 거대 종교들 및 종교 단체들”을 들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이것들과 대조적으로 국소적인(“로칼”한)  “무리들, 주변부 사람들, 소수자들”을 들고 있다.(『천의 고원』 445/689쪽. 이 대목은 천규석이 그나마 “읽었다”고 한 바로 그 대목임에 주목하자) 이 두 경우는 모두 국가장치의 “외부”를 형성하지만, 그러나 서로 대조된다. 하나는 국가/법조차도 우습게 보는 거대한 자본권력들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자들이다.(들뢰즈/가타리는 후자에 대해 “신원시주의=n?oprimitivisme”라는 말을 쓰고 있다. 바로 천규석 등이 추구하는 생태공동체가 이 신원시주의의 한 형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은 바로 후자의 “외부” 즉 소수자들의 철학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마디즘’은 바로 거대 자본권력들의 “유목주의”을 비판하는 철학, 소수자 윤리학과 소수자 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는 철학이다.


그런데 보라. 천규석과 홍윤기는 이들의 철학을 완벽하게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의 철학을 바로 이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주적인 “시장제국주의 철학”으로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상에 대해 좀 부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있다. 어떤 점들에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플라톤에 대해 “감각적 쾌락만 추구하는 퇴폐주의자”라고, 헤겔에 대해 “역사를 무시하는 추상적 정신의 소유자”라고, 맑스에 대해 “노동자들의 현실을 모르는 부르주아 철학자”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을 그야말로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정우 / 철학아카데미·공동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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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이다

한때 정치인의 전유물이었던 ‘뻔뻔함’은 이제 대중들의 일상 속으로 … 과연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이 있다. “뻔뻔스럽고 부끄러워함이 없음”이란 뜻이다. 후안무치에 친화적인 정치판에선 상대편을 비난할 때 자주 쓰는 상용어지만, 보통 사람들 사이에선 큰 욕이다. 넓고 묽게 보자. 후안무치를 도덕의 경계선상에 걸쳐 있는 하나의 인간적 특성으로 보자.

김구가 이승만의 적수가 되지 못한 이유

정치인의 제1 자질이 무엇일까? 단연 후안무치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도덕감정을 고수하면서 정치를 한다는 건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정치인에겐 비상한 수단을 사용하고 상황에 따라 언행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 정치인의 제1 자질은 ‘후안무치’다. 대통령이 된 사람은 경쟁자들과 비교할 때 이 자질이 더 뛰어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만들어내며 그 능력을 잘 보여주었다. 1990년 1월 3당 합당 발표 장면. (사진/ 연합)

다른 나라를 볼 것도 없이 한국 현대사만 살펴봐도 이는 분명해진다. 대통령이 된 사람들은 경쟁자들과 비교해볼 때 후안무치 자질이 더 뛰어났다. 예컨대 이승만과 김구를 비교해보라. 김구도 다른 독립투사에 비하면 꽤 후안무치한 편이었지만 감히 이승만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이는 대통령들에게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이 있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은 기본이고 거기에 후안무치 자질이 더해져야만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영삼부터 살펴보자. 3당 합당과 내각제 각서 파동은 김영삼의 탁월한 후안무치 능력을 보여주었다. 정계은퇴 식언과 ‘20억+알파’ 사건은 김대중의 후안무치 능력을, 대선후보 전 동교동계에 대한 우호적 태도와 지역주의 양비론의 일시적 위장 등은 노무현의 후안무치 능력을 입증해준다.

대체적으로 보아 높이 오른 사람일수록 후안무치를 저지른 건수가 더 많고 농도가 더 강하다. 피부가 얇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사람이 정치인이 되거나 조직의 리더가 된 걸 본 적이 있는가? 설사 있다 하더라도 유능하진 않았을 게다.

정치는 인간의 야수적 속성을 다루는 영역이다. 어느 영역치고 그 속성과 무관하랴만, 본격적인 권력투쟁이라는 점에서 정치를 따라갈 수 있는 영역은 없다. 경제 영역의 투쟁도 무섭긴 하지만, 그쪽은 이익 중심이기 때문에 이익과 더불어 이념·명분 등이 칼춤을 추는 정치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이는 경제계의 거물이었던 정주영과 김우중이 정치판에 뛰어들거나 기웃거리다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졌는가를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제 영역에서도 후안무치가 경쟁력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최근의 삼성과 현대차 사태를 보라. 왜 잘나가는 재벌그룹 총수일수록 후안무치의 농도가 강한가? 그건 평소 후안무치했기 때문에 그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답으로 대신하면 되겠다.


△ 올 초부터 대학 내 선거 관리권은 선거관리위원회로 2004년 총장임명 후보자 선출선거를 하고 있는 한 대학의 교직원들. (사진/ 연합 조용학 기자)

주변을 둘러보기 바란다. 후안무치 자질이 비교적 뛰어난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게다. 그들에겐 좋은 점이 많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교섭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비교적 탁월하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이미 권력을 가진 쪽은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즉, 같은 선수를 알아보고 요청·요구에 응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뻔뻔함’은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자신의 후안무치를 자각할 수 있는가? 없다! 바로 여기서 비극이 싹튼다. 자신이 후안무치하다는 자의식을 갖게 되면 후안무치를 구사하기 어려워진다. 후안무치를 “안녕하세요”라고 가볍게 인사하는 기분으로 체화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보통 사람의 상식적 판단을 넘어서는 일을 해도 그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같은 후안무치 자질을 가진 측근 인사들에게 의존해봐야 별 도움이 안 된다.

대중은 묘한 동물이다. 그들은 정치인의 후안무치가 필요악임을 흔쾌히 인정하면서도 어느 순간 돌아서서 후안무치하다고 욕을 한다. 언제 어느 경우에 그러는지 그건 확실치 않다. 그들은 “해도 너무하네”라고 하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괜찮고 어디서부터 너무한 건지 그들 자신도 답을 갖고 있진 않다. 그래서 정치는 늘 대중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게임이 된다.

1920년대 후반 미국 마피아 조직을 주름잡았던 알 카포네는 “상류사회란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고 이익을 만끽하려는 뻔뻔스러운 놈들로 이 ‘훌륭한 사람들’은 합법적인 공갈을 일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폭이 감히 그런 말을 해? 아니다. 상류층의 후안무치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조폭도 당당해진다. 일반 대중인들 무얼 망설이랴. 민주화 이후 한국인에게 나타난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는 후안무치의 일상화다.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의 반열에 올랐다. 보수파들은 그게 민주화 탓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게 아니다. 후안무치의 엘리트 독식 체제에서 대중화 체제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니 일단 긍정적 변화로 보는 게 옳다.

그건 마치 아줌마들의 후안무치를 비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남존여비 가부장 체제하에서 처녀 때까지 억눌려왔던 후안무치 욕구가 애 낳고 폭발하면 원인부터 따져보는 게 옳다. 나는 후안무치해도 좋지만 너는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후안무치의 평준화는 사회 정의다.

독일에 페터 슬로터다이크라는 괴짜 철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위선적 계몽주의’를 질타하면서 ‘뻔뻔함’을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이자 실천 항목으로 제시했다. 이론과 명분대로 살려면 위선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표현 양식이라 할 뻔뻔함을 발휘하면서 문제를 짚어보자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깨닫기 어려운 심오한 뜻이 있겠지만, 후안무치를 다시 보자는 메시지만큼은 그대로 접수해도 좋겠다. 사실 한국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돼온 것이다. 한동안 열풍이 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이 기(氣) 살려주기 운동’도 기실 따지고 보면 이 후안무치한 세상에서 내 새끼 경쟁력 키워주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

지금 이 후안무치 이야기를 행여 냉소로 이해하면 크게 실수하는 거다. 지금 우리는 세상의 문법에 대해 탐구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이 이대로 좋은가 하는 걸 정색을 하고 살펴보자는 뜻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혁명의 순수성은 2주일을 넘길 수 없다”고 했다. 민주화운동이나 개혁의 순수성은 얼마나 갈까? 2개월? 2년? 얼마이건 그 주체는 모른다. 왜 그런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주체에겐 후안무치 자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서 보기엔 이미 순수하지 않은데도 자신은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걸 무슨 수로 막으랴.


△ <조선일보>는 문화적으로 ‘좌파 담론’의 상품화에 열을 올리는데, 그건 단지 극우성을 위장하려는 술책일까. 상점 앞의 신문 가판대.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농민운동가 천규석이 <쌀과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지나고 보니, 60~80년대까지의 그 풍성했던 민주화운동이란 것들도 잘난 놈들에게는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동시에 거두어갈 기회로 활용되었다”고 독설을 퍼부었을 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면 민주화운동을 한 인사들은 어떤 공직도 맡지 않고 계속 밖에서만 떠돌아야 하고, 공직은 운동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이 독식해야 한다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천규석이 말하고자 한 건 운동가들의 공직 진출 자체가 아니라 공직 진출 이후 보여주는 모습일 거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는 글과 말로만 운동을 했던 지식인들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혹 나는 나의 글을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챙기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모든 지식인들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질문이다. 후안무치는 정치인들만의 무기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고종석은 언젠가 ‘글쓰기의 무서움’이란 글에서 “자신의 발언을 자신의 발 밑에 조회해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는 절제는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모두에게 긴요한 덕목이 되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자신이 실천할 수 없다 하더라도 옳은 메시지라면 널리 전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반론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로 인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너무 심각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한국 사회엔 ‘담론의 거품’이 너무 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좀 유치한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 구체적 각론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이야기는 유치해질 수밖에 없다는 변명도 덧붙이면서 말이다.

적어도 <한겨레21> 수준의 잡지에선 ‘부국강병론’이니 ‘소득 2만달러론’이니 하는 것은 경멸받기 딱 좋은 보수파 담론으로 통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멸이 과연 정직한 것인가에 강한 의문을 품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국가주의·민족주의는 무조건 때려야 진보고 품위 있는 지식인으로 통하는 이 풍토가 언행일치를 전제로 한 정직성에 근거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잠시 <조선일보>를 보자. 이 신문은 자주 문화적으론 ‘좌파 담론’의 상품화에 열을 올린다. <조선일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극우성을 위장하려는 술책이라는 모범답안을 내놓을지 모르겠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그게 그 신문 독자들이 원하는 상품이기도 하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가?

“잘 살아보세”는 “잘 써보세”로 바뀌고…

‘보보스의 법칙’이란 게 있다. 미국에서 학생운동권 출신이지만 일류대를 나와 좋은 직장을 갖게 된 이른바 ‘보보스족’이 정치경제적 풍요를 누리면서 과거 운동권 시절과 비교해 갖게 되는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문화적으로만 진보 냄새를 피우는 걸 말한다.

과연 <한겨레21>의 독자들은 <조선일보> 독자들과 얼마나 다른가?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물론 삼위일체를 고수하는 게 옳다거나 바람직하다는 법은 없다. 얼마든지 각기 따로 놀 수 있다. 다만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일관된 경향성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김대중 정권은 물론이고 노무현 정권이 경제적으로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동의한다. 그런데 ‘성장주의 패러다임’이 과연 한국인 다수가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인가?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멀리 나간 것 아닌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사라진 유물이 아니다. “잘 써보세”로 바뀌었을 뿐이다. 민주시민의 윤리는 소비자 윤리로 대체되었다. 소비자가 악덕 상인에 분노하듯, 민주시민은 악덕 정치권에 분노하는 정도의 윤리는 갖고 있지만, 단지 거기까지뿐이다. 민주주의는 소비주의와 결탁했다. 민주시민은 그 이상의 선은 넘으려 하지 않는다.

일부에 지나지 않을망정, 그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매년 해외여행을 하고 중형차를 굴리고 골프를 치기도 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대학은 재벌 총수들에게 구걸하다시피 해서 얻은 돈으로 이른바 ‘대학 개혁’을 하고 있지만, 그것에 저항하진 않으며 그로 인한 수혜만 누린다.

이런 지적은 부당한 것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았던 미국의 노엄 촘스키가 짜증을 냈듯이, 유치하다고 짜증을 낼 만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논점은 지식인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의 담론 생산이 현실 세계와 맺는 관계다. 그 괴리가 클수록 지식인의 ‘상징 자본’은 튼실해질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세계를 바꾸는 데 어떤 실천력을 갖는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제도와 법의 차원에선 한국 사회는 개혁을 할 만큼 했다. 물론 할 게 더 남아 있고 앞으로 더욱 해야겠지만, 제도와 법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남아 있으니 그게 바로 의식과 행태의 영역이다. 예컨대 정치판에선 ‘보스 정치’가 거의 사라졌지만, 대학엔 건재하다. 학연주의와 파벌주의는 정치권 뺨을 치고도 남는다. 대학 내 선거 수준도 직업 정치판 선거보다 높지 않다는 이유로 관리권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빼앗겼다. 그런데 나를 포함해 그 바닥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늘 사회를 향해서만 설교를 늘어놓는다.

정치권 동지들을 새삼 경외하다

자신의 후안무치에 대해 가끔이나마 자각을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럴 때마다 글쓰기가 몹시 싫어지니까 말이다.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게 되면 여러 가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언행일치를 하는 사람 위주로 글쓰기 시장이 물갈이돼 담론과 세상의 거리가 좁혀지고 그에 따라 실천력도 강해질 게 아닌가. 정치권의 후안무치 동지들에게 새삼 경외감을 갖게 된다. 그들에겐 이런 고민도 없을 터이니 말이다. 아닌가? 모르겠다.

 원문 : http://h21.hani.co.kr/section-021128000/2006/05/02112800020060504060804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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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사마천 > 노무현의 실패는 강준만과 추미애를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꽤 똑똑한 것처럼 보이는데 알고보면 얼뜨기 같은 존재들이 있다.
본인들은 별로 수긍하지 않겠지만 내가 볼 때는 유시민과 노무현 그리고 공병호가 그렇다.

최근 선거를 둘러싸고 다시한번 바람아 불어다오, 한나라당과 차별성 등의 단순한 논리를 통해
지지를 끌어내보려고 애쓰던 몇몇 논객들이 떠오른다. 아쉽지만 본질을 못 보고 지엽에 머무르면서 헛수고 한 격들이다. 알라딘에서도 몇분 발견되었는데 개인적으로 훌륭하고 글솜씨, 매너, 열정 모두 빠질 것 없던 분들인데 지금은 안타까워하실 것 같다. 그래도 헛수고는 헛수고일 뿐이다.

오늘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열우당의 무능과 노무현의 오만에 있다.
자신이 탄핵이라는 고초를 겪어가며 별 경력도 역량도 안되는 인물들을 대거 당선 시켜 열우당을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하는 노무현의 오만은 열우당을 일정한 정치적 파트너로 여기지 않고 수족으로만 고려할 뿐이다. 대체로 스탈린 이후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그꼴이었고 가깝게는 박정희, 전두환이 그런 식이었다.

하여간 노무현 앞에서기만 하면 작아지는 열우당은 민심을 가깝게 듣는 위치에서 만들어지는 의견으로 관료를 견제하며 정치적 방향을 잡는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권력이 셋으로 나뉘어 균형 잡고 성장하는 현대정치의 원리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최근 수년간은 전혀 이런 기능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핵심에 노무현이 자기 주변에 대해 가진 불신이 깊게 작용한다.
청와대 초기의 측근이었던 유인태에게 던졌다는 경기고,서울대 나온 당신 같은 사람은 나 같이 상고밖에 못 나와 고생한 사람의 심정을 이해못한다는 말이 그러한 불신을 잘 표현해준다. 그에게는 정당도 사회적 원로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오랫동안 가깝게 보좌한 이광재,천호선과 같은 학생운동 경력 이상의 사회적 경험이 없는 소수의 측근과 과거 친분을 맺은 몇몇 지인들 수준을 넘지 못한다.

덕분에 내각은 돌려먹기가 많다. 부동산 정책의 첫단추를 잘못 뀄던 김진표가 오늘 교육부에 있는 식이다. IMF 환란을 불러일으킬 당시 금융정책 실패 책임진 인물이 노무현의 지인이라는 이유로 복귀한다. 부산상고 출신들 열심히 챙겼는데 왜 안알아주냐고 문재인이 부산정권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일이 안되는 배경에는 모두 문제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자신의 문제가 가장 크다. 자기계발서 여러가지 들추어 보아도 가장 핵심에 너 자신을 제대로 알고 바꾸라는 메시지 하나가 놓여 있을 따름이다.
선거라는 비싼 과정을 거치면서 민심을 전달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문제가 없다고 고집부리는 노무현을 보면서 정말 헛똑똑이 하나 잘 못 뽑은 덕에 이꼴을 당하고 있는가 하는 한심한 생각만 든다.

다시 시간을 돌려보면 분열을 막으려 하던 강준만의 고언을 한사코 거부하며 매몰차게 비웃던 유시민의 독살스러운 표정이 생각난다. 특히 선거 끝난 날 강준만을 보면서 흘러간 물 취급하던 그 표정은 아직도 잊혀지 않는다.

요즘 유시민도 많이 수그러들었던데 이제 강준만과 유시민 누가 더 오래갈까 곰곰히 따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답은 뻔하다. 노무현이 가도 추미애를 비롯한 다른 생각을 하며 민주주의를 꿈꾸던 사람들은 더 오래 남을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희망을 꿈꾸며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과오들을 교정하자. 문희상이 했던 말대로 차라리 열우당을 없애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민심에 대한 수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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