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


절대 읽지 않을 걸 알면서 왜 쓰는 것일까요, 어쩌면 절대 읽지 않을 걸 알기 때문에 쓰는 것일까요, 언젠가 부끄러울 걸 알면서 왜 쓰는 것일까요, 혹시 언젠가 부끄러울 줄 알기 때문에 쓰는 것일까요, 어째서 슬프지 않은데 슬픈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슬프지 않아서 슬픈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슬픈 이야기를 하여서 슬픈 것입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현실이고 사랑했던 마음이 추억이라면, 현실이 충만한 가운데 충만하지 않은 추억을 헤집으며 일부러 슬퍼지려 하는 마음은 현실의 추억입니까, 추억의 현실입니까.





상대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은 감정을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겠으나, 내가 나에게 유일해지고 싶은 감정은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라면 부를 방법이 없다. 

_박준, 『운다고 다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들이 첫번째 나무에 이르렀을 때, 비용은 교수형을 당한 사람이 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혀가 밖으로 나와 있었고, 달이 시체를 창백하게 비추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비용은 앞으로 나아갔다. 근처 나무에도 교수형을 당한 사람이 매달려 있었지만, 역시 모르는 사람이었다. 비용은 주위를 둘러보았고 나무에 늘어뜨린 시체로 가득한 숲을 보았다. 그는 시체를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차분하게, 미풍에 흔들거리는 다리들 사이를 헤매면서. 그러다 그의 형을 발견했다. 그는 목에 매인 줄을 단검으로 잘라내 형을 풀밭 위에 내려놓았다. 시체는 죽음과 추위로 굳어 있었다. 비용은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순간 형의 시체가 말을 했다. 여기의 삶은 널 기다리는 하얀 나비로 가득해, 내 동생아, 시체가 말했다. 다 애벌레들이야.

_안토니오 타부키, 『꿈의 꿈』



중2병 2학기


말하면 모든 일이 나빠질 거라는 생각에, 모든 나쁜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말이 이룰 수 있는 게 없었기에, 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행복한 시간들을,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지나가고 싶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네가 알 것임을 네가 말하지 않았는데 내가 알았다. 틀렸다. 그것도 나쁜 생각이었다. 생각만으로 일이 나빠지고 있었다. 내가 나빠지고 있었다. 그저 아무 말도 못하고 마음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날 내가 거칠게 열어본 너의 마음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 말하는 것이 무참한 폭력일 수 있듯, 그날 네가 손도 대지 않았던 나의 마음이 너로 가득 차 있었다고 오늘 추억하는 것이 오만일 수 있음을 알았다. 나는 아직 시인이 되지 못하여 시월이 오면 고작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다. 나는 그때 네 사람이 되지 못하여 고작 이런 글을 쓰지 않고는 가을을 날 수가 없다.





먼 곳은 늘 먼 것의 아우라로 인해 동경의 빛으로 빛난다.

_장석주,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역설적이게도 잊으려고 하면 잊히지 않고 오히려 기억하려 하면 잊게 된다. 사라짐을 잊을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것을 흔적으로 남겨놓을 때다. 흔적으로 기록하고 그 흔적을 중심으로 언어의 탑을 쌓으면 우리는 그만큼 충격적인 현실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반대로 무조건 잊기 위해 눈을 감으면 어떻게 될까? 오히려 현실의 무게가 더욱 우리를 짓누른다. 

_맹정현, 『트라우마 이후의 삶』



"전 여전히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드너 씨. 당신과 부인의 출발점은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가드너 씨, 당신이 그동안 불러 온 이 노래들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겁니다. 심지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 노래들이 모두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연인들이 사랑을 잃고 헤어져야만 한다면, 그건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영원히 함께해야 마땅합니다. 그 노래들이 이야기하는 바가 이런 거 아닌지요."

_가즈오 이시구로, 「크루너」, 『녹턴』




고3병


바람 부는 언덕에 조용히 앉아 잎 떨구는 나무를 보았다. 흰 바람을 몸에 감고 있었다. 갑자기 가을이었다. 사람들은 사진 속에 가을을 담아 가져가려고 분주하다. 나는 마음의 주둥이를 열고 그저 가을이 주는 만큼 담아 왔지만 마음이 얕아 넉넉히 챙기진 못했다. 모자란대로 아껴 먹으며 이 시간을 날 것이다. 겨울이 오기를 빈 공간으로 기다리겠다.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 살아 있는 삶, 다시 말해서 죽음이 함께 깃들어 있는 삶을 고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_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고요를 만나면 고요 속에 가만히 서 있는다. 고요의 세계 안에서 빛은 사물의 색들을 선명하게 살려 내고 사물은 사물대로 그 확고한 형태를 되찾아 빛난다. 고요는 곧 질서요 투명함이다. 

_ 장석주, 『일요일의 인문학』



도처에 시계 아닌 것이 없다. 물은 흐르는 시계고 꽃은 피어나는 시계고 사람은 늙어가는 시계고 철새는 날아가는 시계고 바람은 불어가는 시계다. 생명들도 생명 아닌 것들도 다 무엇인가의 시계이며 거대한 우주라는 시계의 부품이다. 

함민복 <시계>, 강정 외, 『시인의 사물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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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10-14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빠른 성장중이시군요.^^

syo 2017-10-14 20:48   좋아요 1 | URL
그러나 중2병은 영원히 회귀하는 불치병입니다...... 고3이 되어도 33이 되어도 때가 되면 산란기 연어마냥 다시 중2가 되는 것입니다.

서니데이 2017-10-14 20:50   좋아요 1 | URL
그럼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젊다는 말씀이잖아요. 부러워지고 있어요!!

syo 2017-10-14 20:51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그것이...... 중2병 안 앓아보셔서 모르시는 것 같은데,

중2는 인생에서 제일 늙은 나이입니다. 세상 모든 슬픔과 고통을 지 혼자 다 짊어지는(짊어진다고 생각하는) 나이거든요 ㅋㅋㅋㅋ

독서괭 2017-10-15 2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oon애보 syo님의 아픈 시월이군요.. 그날 내가 거칠게 열어본 너의 마음은 비어 있었고 그날 네가 손도 대지 않았던 나의 마음은 너로 가득 차 있었다- 참 마음 아픈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