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6
헤르만 헤세 지음, 임홍배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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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 날 거대한 바다처럼 엉망진창인 내 인생이 과연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는지 그 기원을 역추적해보면 멍청하게도 이과에 진학했다는 지점에서 폭망의 작은 샘물이 발원했음이 명백하다. 내가 이과를 고른 계기는 2000년대 초, 두 얼간이의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막 고등학생이 된 당시 나의 꿈은 소박하게 우주 정복이었는데, 그 또래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져보는 평범한 꿈이었다. 슬슬 진로에 대한 고민이 시작될 무렵, 발바닥 사탕으로 혓바닥 염색하던 꼬꼬마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에게 조언을 구해 보았다. "우주 정복할라면 이과야, 문과야?" 정말 답도 없는 질문이었다. "이과." 그런데 답이 있었다! "이과라고?" 답이 시답잖아서 되물었다. "우주 정복이라매. 우주잖아 우주. 우주는 이과, 임마."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답 없는 청춘이었다. 만약 내가 골드문트처럼 사랑스럽고 주야장천 반짝거리는 캐릭터였다면, 친구놈이 나르치스처럼 사람의 내부에 심어져 있는 씨앗이 어떤 토양에서 자라야 큰 나무가 될지를 꿰뚫어보는 지혜를 가졌었다면, 내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까?


      내가 수학에 소질이 1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당시 수능은 언어영역 120점, 수리영역 80점 배점이던 시절이었는데, 나는 모의고사를 치면 보통 수리 성적이 언어 성적의 1/3에 가깝게 형성되는 수학병신이었지만 꼴에 또 수포자는 아니었다. 당당하게 이과 가겠다고 진학조사설문지(정식 명칭을 모르겠다)의 이과란에 빨간색 네임펜으로 거대한 V자를 그려 제출했는데, 한 시간도 채 못되어 교무실에서 방송으로 나를 호출했다. 그날 야자 감독이던 국어선생님이 청룡언월도를 꼬나들고 나를 기다리고 계시다가, 내가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내게 달려들어 왜 이과를 지망했는지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하면 내 목을 날려버리겠노라고 으르렁대시었다. "선생님, 저는 어릴적부터 우주 정복을 꿈꾸어 왔습니다. 드넓은 우주는 이과의 영역이 아니겠어요? 그리하여 저는 이과를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다...... 등신이라고 다 미친 놈은 아니었기 때문에. 국어선생님은 나를 앉혀놓고서는 과연 국어선생님답게 4D급 실감나는 내러티브를 동원하여 내가 이과를 가면 내 인생이 어떻게 망할 것인가를 그림처럼 선명하게 일러주셨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소오오오름돋는 선견지명이라 아니할 수 없지만, 나란 놈은 그 피같은 예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가면서 속으로 이럴 시간에 정석을 푸는 게 낫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집합 부분만 새까매진 정석의 바로 그 집합 부분을 검게, 더 검게 만들고 싶었다...... 결국 나는 나르치스의 말을 듣지 않았으니 골드문트는 되지 못하고 꼴드문트가 되고 만 셈이다.


      어찌어찌 2학년이 되고 이과생이 되고 유명한 수학 병신이 되고 인생이 고되고 그러던 시절, 나는 인간의 소질이 참 무서운 놈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고 있었다. 이를테면, 나는 하루 공부의 9할을 수학에 투자하지만, 보통 정도의 수학 재능을 가진 아이가 자기 공부량의 절반만 수학에 투자해도 나는 그 아이를 따라가지 못했고, 만약 수학에 재능이 있는 친구라면 자기 공부량의 1할만 수학에 집어넣고도 나를 손쉽게 능욕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천재론을 신봉하게 되었다.



2.

      나는 "천재가 예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천재'는' 예술을 해야 한다"와 "천재'만' 예술을 해야 한다" 사이의 어느 지점에 위치한 믿음인데, 꼭 예술이 아닌 다른 분야라도 기록적인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능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 지금부터 하루 20시간씩 10년 축구해도 오늘의 호날두보다 축구를 잘 하지 못할 것이다. 설사 운이 좋아서 오늘의 호날두보다 나아진다 해도, 호날두도 10년 동안 노는 것은 아니다.


      재능이 빚어내는 것은 성취뿐만이 아니다. 학문이든 예술이든 아니면 스포츠가 됐든, 인간의 모든 활동은 경제적 보상과는 별도로, 그 활동의 주체에게 세계를 해석하고 조직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200년 전이었으면 정말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었을 축구의 재능이 큰 돈이 되는 시대에 태어난 것은 그의 행운이겠지만, 그와 별개로 호날두의 축구는, 피카소의 그림과 박정현의 노래와 헤세의 소설은 그들 각자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이 세계를 다루는 데 쓰는 총알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 축구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른다. 나르치스는 나르치스의 방법으로, 골드문트는 골드문트의 방법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 하루의 대부분을 뻘짓으로 보내는 나라도, 만약 내가 뻘짓의 천재라면, 나는 뻘짓을 가지고 내 세계를 해석해야 한다. 그게 가장 멀리, 가장 높이 갈 수 있는 길이다.



3.

      이 책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한국에 『지知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들어온 과거가 있다. 확실히 나르치스의 이성 vs 골드문트의 감성 구도는 예술과 지성에 대해 천착하길 즐겨하던 헤세가 의도한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성과 감성을 양쪽에 놓고 대립시킨다거나 결국은 이성과 감성의 조화야말로 진짜배기라는 식의 이분법을 기반으로 하는 사고로 주제를 축소시키고 나면 오히려 이 책의 가치를 제대로 획득할 수 없다. 이분법이 아니라, 천분법 만분법, 무한분법의 삶의 방식과 그 중 자신에게 걸맞는 방식을 택하여 치열하게 살아냄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지혜, 사랑.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런 것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


      책을 펼치기 전에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지만, 다 읽은 책을 덮고 나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나』가 되기를 바라며 권합니다.



160707 一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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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6-07-08 2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참으로 오랜만에 알라딘에서 다시 만나는군요. 젊을 때 읽었을 땐 정말 감동적인 소설이었는데 요즘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들지 너무 궁금한 책이기도 합니다..
http://blog.aladin.co.kr/oren/5403834

syo 2016-07-08 23:26   좋아요 1 | URL
한참 재밌어지는 마당에 다음호에 계속이군요! ㅠ

저도 조만간 다시 한번 더 읽으려고 합니다. 분명히 많은 것들을 놓쳤을 것 같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7-09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지와 사랑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같은 소설이었단 말입니까 ? 몰랐네요... ㅎㅎ

syo 2016-07-09 10:45   좋아요 0 | URL
어쩐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보다 『지와 사랑』을 읽으신 분들이 더 많거나 혹은 더 진하게 감동 받으셨거나 그런 것 같아요. 시사하는 바가 있을까요?

- 2017-04-29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지와 사랑,으로 읽었습니다.
스무 살 때 이책 읽다가 마지막 몇 장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왜 그리 눈이 붓도록 울 수밖에 없었는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