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은 ---
179. 오늘부터 부러움에 지지 않고 살기로 했다
지그리트 엥겔브레히트 지음 / 이동준, 나유신 옮김 / 팬덤북스 / 2018
우리가 누구이든, 무엇을 할 수 있거나 갖고 있는 것과 관계없이 다양한 관점에서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비교하는 습성을 끊으려면 산 속에 들어가 혼자 살아야 한다. 물론, 우리는 거기서도 산 속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할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비교를 멈출 수 없다. 그러니 근본적으로 비교하기를 '금지'하는 것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보다는 비교를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히 살펴보고, 종전과는 다른 비교 사용법을 고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_ 지그리트 엥겔브레히트, 『오늘부터 부러움에 지지 않고 살기로 했다』
이 책이 태어난 의미를 저보다 잘 설명하기는 어렵겠다. 핵심은 저기에 다 있다. 부러움은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이용하라. 말은 쉽다만.
이런저런 수단을 동원하면 지금 내 머리를 점령하고 있는 부러움 한 개를 제낄 수는 있겠다. 하지만 부러움이라는 것은 파이널 스테이지가 없는 슈팅 게임 속 외계 비행체처럼 무한한 총알을 난사하며 무한히 밀려온다. 내 몸과 내 감정이라는 조막만 한 전투기 조종사에 불과한 우리는 신들린 컨트롤과 기기묘묘할 정도의 미세조정을 동원해 부러움의 폭격을 요리조리 피해 보겠지만, 무한 앞에서 영원한 것은 없는 법, 부러움의 탄환은 시시때때로 가슴에 박히고, 행복한 삶을 위해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그 감정을 적출해야 한다. 가까스로 그것에 성공하거나 혹은 그냥 제거할 수 없는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겨우 한숨 돌리고 고개를 들면, 저기 저 앞에서 부러움 폭격단이 무한의 군세로 다시 진군해오는 모습이 보인다. 이번 감기를 이겨도 우리는 다음 감기를 또 이겨야 한다. 부러움도 그렇다. 그러니까 결국 이것은 영원히 회귀하는 삶을 앞에 두고, ‘어차피’와 ‘그럴수록 더욱’ 가운데 뭘 고를 것인가의 문제 비슷하다. 이 책은 후자를 선택한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게 다소 허망해 보이거나 ‘말은 쉽다만’으로 수렴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도 노력은 해봐야 한다. 내 부러움이니까. 최소한 이 책만큼은 노력해보자는 것.
180. 유괴의 날
정해연 지음 / 시공사 / 2019
약간 특이한 캐릭터들이 있고, 그들의 조합이 가져다주는 약간의 재미가 있다. 약간이다. 이 장르의 책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반전이 있다. 약간 놀랍다. 그 외에는 별 게 없었다. 메시지 투척이 없을 거라면 더 재미있거나 더 아름답거나 순간의 마음을 더 잘 그려내거나 했으면 좋았을 텐데. 페이지는 정말 빨리 넘어갔는데, 최근 다른 어떤 책에서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는 말을 칭송처럼 쓰고 또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해 슬쩍 조롱하는 듯한 글을 읽고 어느 정도 동의했다. 그래서 페이지가 빨리 넘어가요, 라고 말하기가 참 애매하고 애매한 만큼 조심스럽긴 하다.
181. 이까짓, 털
윰토끼 지음 / 봄름 / 2021
얼굴에 털이 꽤 나는 편이다. 코 아래 솜털이 나기 시작한 게 중학교 때였는데, 면도하면 두꺼워진다는 무서운 소리를 들어서 정말 손 한번 대지 않고 오냐오냐 해줬건만, 그 버릇없는 털은 고등학교 때쯤 벌써 ‘솜’털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로 자기주장이 강했다. 숨 쉴 때마다 부르르 떨릴 정도의 존재감을 갖췄으니 차라리 ‘숨’털이라고 부르는 게 나았겠다. 거기만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볼따구에도 털은 있었다. 걔도 어느 순간부터는 무시하기 어려울 수준에 이르렀고, 결국 면도를 시작하던 무렵부터 바로 제초 대상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면도 부위의 털들은 더 두껍고 더 격렬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현재는 아침에 면도해도 점심때쯤 얼굴이 거뭇거뭇해지고, 오후에는 면도 좀 하고 다니라는 말을 반드시 한 번은 듣는 수준에 도달했다. 아, 이놈의 털들 다 죽었으면.
그렇지만 이놈의 털들을 이까짓 털들로 여기며 살려고 들면 그럴 수는 있었다. 그냥 내 내면의 털가치평가위원회와 협상만 잘 하면 되는 문제니까. 하지만 이놈의 털들을 이까짓 털로 만들기 위해 그 이상의 것들과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몸의 털이 사회적 심지어 도덕적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경우들. 외부의 시선이 몸에 침투하고 몸을 강제하는 것은 모든 몸에 공히 벌어지는 일이지만, 몸의 주인에 따라서 그 강도, 기준, ‘위반’시 처벌 수위가 다르다.
그녀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속눈썹을 뽑아내는 아찔한 고통을 참았을까(겨드랑이털 뽑는 것보다 더 아팠을 것 같은데). 내가 그 시절의 그녀들을 떠올리듯 자신보다 과거의 아름답다 칭송받았던 다른 여자들을 떠올렸을까. 아름다움을 외면하며 살 수 없었던 수많은 여자들을 떠올리며 그래도 지금이 낫다, 그렇게 자위했을까.
이제는 매끈한 때보다 수북할 더 관심을 받는다. 낮에도 하늘에 별이 떠 있지만 누구도 말하지 않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건 말하지 않지만 그게 보이는 순간은 또 귀신같이 짚어낸다. 그렇다면 내 몸의 털들은 별과 동급인가. 별도 밤에는 당당히 빛을 발하는데, 나의 털들에게는 그런 밤이 찾아올 수 있을까.
_ 윰토끼, 『이까짓, 털』
사실 얼굴 말고도 전체적으로 털이 좀 강세다. 체감 통계상 얼굴 털로는 상위 10% 정도에 들 것 같고, 여기저기의 털들도 대충 중윗값 이상은 칠 듯. 근데 그럴 거면 도의상 머리숱도 그래야 하잖아? 하여간 지 맘대로야 이 털새끼들…….
182. 철학사 아는 척하기
데이브 로빈슨 지음 / 주디 그로브스 그림 / 양영철 옮김 / 이병창 감수 / 팬덤북스 / 2021
완독에 20분쯤 걸렸다. 10분 남짓 읽었더니 절반이더라. 오히려 내가 놀라 멈춘 케이스. 뭐지? 내가 미쳤나? 다음 날, 남은 절반도 앞쪽 절반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내가 미친 것이 아닌걸로.
그나저나 감수자 이병창 선생님은 같은 출판사에서 내신 선생님 저서 제목에도 ‘아는 척하기’라는 말을 다셨는데, 이건 출판사의 취향인 건가? 이 책과 그 책을 놓고 보면 ‘척하기’에 더 가까운 건 이 책이겠다. 진짜 이 책으로는 척할 수만 있다. 뭔가 더 할 수가 없다. 그럴 수 있었다면 30분도 안 돼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183. 메리, 마리아, 마틸다
메리 을스턴크래프트, 메리 셸리 지음 / 이나경 옮김 / 한국문화사 / 2018
혹스 모클리J. W. Mauchil와 에커트J. P. Eckert를 아십니까. 혹은 조금 더 유명한 사람으로 폰 노이만Von Neumann은 아시는지?
모클리와 에커트는 에니악ENIAC이라는 30톤짜리 공학용 계산기를 만들었는데, 프로그래밍이 가능했던 에니악은 최초의 컴퓨터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스위칭 소자를 배선으로 연결하는 방식이어서 지금의 컴퓨터 구조와는 약간 다르다. 현재는 프로그램 내장 방식이라는 구조를 사용하는데, 이를 제시한 것이 폰 노이만이라는 유명한 천재였다(프로그램 내장 방식의 실제 창시자를 에커트로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니까 거칠게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쓰는 컴퓨터(및 핸드폰을 비롯한 프로그램 구동이 가능한 거의 모든 전자기기)의 육신과 영혼의 구조를 처음 세운 사람들로 저 세 할아버지를 언급해도 틀리지는 않는다는 것. 그러나 오늘날 태평양 건너편의 창고에 쌓인 물건을 직접 구매하고 결제하기 위해 엄지 두 개로 아이폰의 액정을 두드리면서, 우리 중 누구도 모클리와 애커트와 폰 노이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을 조금이라도 퇴근을 앞당기기 위해 엑셀을 공부하고, 4차산업 혁명이라는 알 수 없는 놈의 협박에 굴복해 코딩을 공부하고, 남들 다 하는 것들을 못하고 뒤쳐지는 인간이 되기 싫어서 새롭게 등장하는 SNS며 메타버스며 기기묘묘한 플랫폼에 대해서 공부하지만, 그 모든 것의 시발점에 있는 모클리와 에커트와 폰 노이만에 대해서 공부하지 않는다. 시초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폰 노이만이 컴퓨터의 구조에 대해 쓴 책이나 논문은 당시에는 기술적 의미가 있었지만 이제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르다.
이 책 속의 세 작품은 역사적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계보학적 위치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메리들은 용감했고 명민했다. 시대와 맞섰고 후대를 위한 초석을 닦았다. 기록할 만하고 칭송할 만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 책을 읽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이 이 책 속의 작품을 쓰지 않았더라도 그 칭송의 크기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을 것이다. 솔직히 이 책은 그들이 대표작으로 남긴 작품들의 아우라를 일부 걷어냈다.
184. 스퀴즈 플레이
폴 오스터 지음 /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
- 일독(long long time ago……)
- 재독(210527)
기량의 절정기에서 끔찍한 교통사고로 장애를 얻게 되어 은퇴한 천재 야구선수가,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을 계기로 사람들의 사랑을 얻었고 그 힘으로 정치에 뛰어들 예정이다. 그런 그에게 영문을 알 수 없는 협박 편지가 날아들고 그는 탐정을 찾아온다. 조사가 시작되면서 조금씩 밝혀지는 과거사와 주변 인물들, 숨겨진 사건들, 그리고 반전들……. 뭐 익숙한 그림이다.
탐정소설이라고 해야 하나?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슬립』도 그랬지만, 왜 이 장르 속 등장인물들은 다들 이렇게 ‘말솜씨 한번 대단’할까? 이렇게 웃기게 비꼬려면 사람이 얼마나 비비 꼬여야 하는 걸까.
길게 한 대목 뽑아 보겠다.
<아주 큰 녀석>은 스테레오 전축이 놓여 있는 방구석에서 내가 아까 틀었던 레코드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가 레코드판을 집어들고 커버에 찍힌 모차르트 초상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이 친구가 누구지? 징그러운 호모 색시처럼 보이는데.」
「그 친구는 2백 년 전에 죽었어. 세 살 때 이미 당신의 그 고릴라 같은 대갈통 속에 들어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지성이 그 친구의 무릎뼈 속에 들어 있었지.」
「망할 자식. 말솜씨 한번 대단하군.」
<아주 큰 녀석>이 말했다. 레코드를 재킷에서 꺼내어 양면을 유심히 살펴 보더니 둘로 딱 쪼개 버려싸. 그리고는 레코드 조각을 마룻바닥에다 내던졌다.
「당신 말야, 그 짓을 한 벌로 천 년 동안 불지옥에서 고통받게 될 거야.」
「미안해. 손이 미끄러졌나 봐.」
그는 당황한 체하면서 두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녀석을 무시하고 <그냥 큰 녀석>한테 말했다.
「자, 이젠 저 친구랑 꺼지는 게 어때? 메시지도 전했으니, 더 이상 얘기하고 자실 것도 없잖아?」
「천만에. 나는 당신한테 메시지를 전했지만, 당신은 나한테 대답을 주지 않았어.」
<그냥 큰 녀석>이 말했다.
<아주 큰 녀석>은 책장으로 다가가더니 책 몇 권을 마룻바닥에 내던진 다음, 긴 팔을 선반 속으로 집어넣어 나머지 책을 쓸어 버렸다. 책은 와르르 굴러 떨어지면서 레코드 플레이어의 투명한 플라스틱 덮개에 부딪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냥 큰 녀석>은 시큰둥한 채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즐거워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한테는 그가 해야 할 일이 었었고, 짝패도 마찬가지였다.
「제기랄. 오늘 내가 왜 이러지? 이런 실수를 하다니, 탈이 나도 단단히 났나 봐.」
<아주 큰 녀석>이 말했다. 녀석은 실내 장식가가 되는 게 꿈인 모양이었다. 한가한 저녁에는 기발한 착상을 얻기 위해 『아름다운 집』최신호를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몇 분도 지나기 전에 그는 내 거실을 온통 새로 설계하다시피 했고, 일을 다 끝냈을 때쯤이면 내 거실은 그가 의도한 대로 새로운 모양을 갖추게 될 터였다. 그의 수법은 물건을 사방에 흩뜨려 놓는 이른바 분산식이었고, 방은 최고로 멋진 집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파격적인 매력을 갖게 될 터였다.
_ 폴 오스터, 『스퀴즈 플레이』
스퀴즈 플레이는 폴 오스터의 출세작이 나오기 전에, 심지어 폴 오스터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쓴 탐정 소설이라고 한다. 비슷한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유괴의 날』과 나란히 읽게 된 건 우연인데, 그 덕에 어떤 책은 더 훌륭해 보였고 또 어떤 책은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였다. 확실히 폴 오스터는 글을 잘 써. 내 청춘의 한 시대를 함께 했던 나의 폴 아저씨.
그렇지만 『빅 슬립』을 떠올려 보면 웬만해선 다 고만고만해지는 슬픔.
--- 읽는 ---
인문교양책 만드는 법 / 이진
세상 친절한 경제상식 / 토리텔러
철학의 태도 / 아즈마 히로키
1417년, 근대의 탄생 / 스티븐 그린블랫
시민의 물리학 / 유상균
나의 첫 투자수업 1 : 마인드 편 / 김정환, 김이안
스스로를 아는 일 / 앙드레 지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