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언젠가는 바닷가에 닿는

 

 

 

한 문장이 필요해서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경우.

 

읽은 책을 자꾸 다시 읽게 만드는 문장은 읽는 사람의 마음속 조용한 바닷가를 적시는 파도처럼 너무 가까이 오지도 너무 멀리 가지도 않고 초연히 늘 거기에 있다. 어떤 시절 어떤 곳에서 궁리하던 나와 만나 나에게 안긴 문장이다. 그저 내게 아름다우므로 점점 내게 더 아름다워지는 바닷가처럼, 모두에게 특별하지 않아서 내가 더 특별하게 여길 수 있는 말이 있다. 그것은 이성의 영역도 감정의 영역도 아니어서, 우연과 기억과 시간, 그 질량 없는 것들이 막막한 질량으로 잡아당기면 밀물과 썰물은 여지없이 인다. 오래 찾아가지 않은 바닷가의 파도 소리는 그렇게 조금조금 커지다, 어느 날, 찾아가 다시 만나지 않으면 안 될 깊은 소리가 되어 안으로 울린다. 그럴 때 돌아가 앉아 고요히 바라보면, 오래 만난 문장은 처음 만난 문장 같기도 하고, 오래 짊어지고 살아온 내가 처음 만난 나 같기도 해서, 파도 소리 잠잠히 잦아들 때쯤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며 일어서는 나는 조금 더 부드럽고 조금 더 힘 있는 내가 되는 것.

 

자꾸 다시 읽는 한 문장은 한 권보다 크고 깊다.

 

 

 

--- 읽은 ---

 


152.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금정연 지음 / 어크로스 / 2017

 

- 일독(170821)

- 재독(210503)

 

아무리 기본값이 잡글이어도 알라딘에서 놀려면 어떻게든 책 이야기를 하긴 해야 하지 않는가. 읽는 건 즐기지만 읽은 걸 이야기하는 데는 아무래도 소질이 없는 syo가 알라딘에 발을 붙이던 시절에 많이 하던 고민이다. 그때 많이 참고했던 게 금정연 선생님. 기회 될 때마다 말하지만 syo의 최초 목표는 보급형 금정연, 금정현 이미테이션 금정역같은 게 되는 거였다.

 

그런 선택을 한 것은 당연히 금정연 선생님의 글에서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애매한 독후감의 세계에는 안 읽고서 읽은 것처럼 쓰기도 있고, ‘읽고서 안 읽은 것처럼 쓰기도 있다. 하지만 이 영역의 최고봉은 바로, ‘안 읽고서 읽은 것처럼 쓴 건지 읽고서 안 읽은 것처럼 쓴 건지 헷갈리게 쓰기. syo는 늘 그런 경지를 추구했다. 빗대어 말하자면, 잘생긴 애와 안 잘생긴 애보다 더 신경 쓰이는 애가 바로 잘생겼는지 안 잘생겼는지 희한하게 모르겠는 애인 것이다.

 

물론 거어어어업나 잘생긴 애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이건 우주의 섭리다.

 

이 책 독후감을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뿌듯하다. 쓴 내가 봐도 안 읽고서 읽은 것처럼 쓴 건지 읽고서 안 읽은 것처럼 쓴 건지 헷갈린다. 내가 이걸 읽었던가?

 

요약하면 멋쩍어지는 일들이 있다. 이 문장은 두 가지 뜻으로 읽힌다. 제법 그럴싸해 보이지만 요약하고 보면 멋쩍은 일이라는 의미로. 도는 요약이라는 행위 자체를 멋쩍게 만드는 일이라는 의미로.

  전자가 삶이라면 후자는 소설이어야 한다. 소설이다, 라고 쓰지 않고 소설이어야 한다, 라고 쓰는 건 여전히 많은 소설들이 삶을 요약하기 때문이다. 메인플롯과 몇 개의 서브플롯으로. 극적인 사건들의 연쇄로. 발단과 전개와 위기와 절정과 결말을 갖춘 이야기로. 그 끝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에피파니로. 이때 요약은 불가피하게 보인다. 모든 삶은 한권의 책에 담기에는 너무 길고, 긴 삶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하니까.

_ 금정연,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153. 사진가의 기억법

김규형 지음 / 21세기북스 / 2021

 

에세이 장르를 줄기차게 읽는다. 사진이나 그림이 종이의 절반을 먹어들어가는 책, 한 줄로 이어 써도 채 한 줄을 다 못 채울 문장을 서너 줄로 나눠서 지면을 채우는 책도 꽤 읽는다. 그렇게 생긴 책들 가운데에도 좋은 녀석들은 종종 있다. 그렇지만 차마 좋은 책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녀석들이 대부분. 앞으로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한 줄로 끝낼 것이다. "내가 더 잘 쓴다." 그리고 그 한 줄을 쓸 때도 나는 결코

 

  내가

  더

  잘 쓴다.

 

이렇게는 쓰지 않을 것이다.

 

내가 더 잘 쓴다.

 

영원한 것은 없다.

하지만 그것을 오랫동안

간직하는 방법은 있다.

 

손에 사진기가 들려 있다면

당신은 이미 그 방법 하나를

알고 있는 셈이다.

_ 김규형, 사진가의 기억법

 

 

 


154. 200년 동안의 거짓말

바버라 에런라이크, 디어드러 잉글리시 지음 / 강세영 외 옮김 / 푸른길 / 2017

 

이번(그러니까 저번)달 책은 읽기 쉽고, 그래서 금방 읽어낼 거라고 예측했지만, 삶이 언제나 그렇듯 이런 일이 엎치고 저런 일이 덮치는데 심지어 그런 일들 밑바닥에 깔린 나의 게으름이 광대하여 결국 기간 내에 읽기는 실패. 이런 것이 인생이라고 늘 배우지만, 배워도 배워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라는 인간의 한결같음은 뭐랄까, 거짓말 같다. 200년이 지나도 낫지 않을 것 같다.

 

과학은 태도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진리를 향해 다가가는 사람들의 태도. 그 태도가 너무나 고결하여 과학이 밝혀낸 진리와 달성한 업적에 대한 존경은 곧 과학에 대한 존경으로 이어진다. 축적된 존경은 신앙이 되고, 과학이라는 말이 신봉의 대상이 되는 순간, 과학적 태도는 자취를 감추기 쉽다. 그건 과학의 잘못일까, 아니면 과학이라는 말을 이용하려는 일부 비과학적 과학자들이 추구한 사리사욕의 결과일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비과학적이지만 당시에는 과학의 이름을 내세웠고 그것이 과학임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논리체계가 있었다고 할 때, ‘그건 사실 과학이 아니었다는 선언은 오늘의 우리에게 손쉽고 깔끔한 선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지켜지는 것은 과학의 태도가 아니라 과학사의 순수성일 뿐이다. 과학적 태도 역시 과학이라는 거대체제에 속하는 인물들이 지켜야 할 윤리학이지, 과학자들이 당연히 지니고 있는 존재론적 특성이 아니다. 과학은 과학 자체로 비과학적태도를 내포할 수 있고, 그런 사례는 널렸다. 자본이 과학에 가하는 영향력을 인정할 수 있다면, 과학적 전문가들이 인간으로서 지닌 편견이 그들의 과학에 미치는 편향을 인정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과학 꺼지라는 게 아니라, 마침내 권위를 획득한 것들은 그 권위를 얻을 수 있도록 해주었던 자신의 가장 훌륭한 특성들과 정반대되는 행위를 하기 쉽다는 것이다. 신앙이 된 모든 것들이 대체로 그러했듯이.

 

한때 과학은 견고했던 권위를 공격했다. 그러나 새로운 과학적 전문가는 권위 그 자체가 되었다. 그의 업무는 무엇이 진실인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적절한가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_ 바버라 에런라이크, 디어드러 잉글리시, 200년 동안의 거짓말

 

그러나 젠더 관점에서 분석된 책을 읽어 놓고서는 젠더의 논점을 삭제하고 원론적이면서 추상적인 리뷰를 쓰는 것, 이 자체가 일종의 권력적 · 정치적 읽기다. 나는 내가 쓴 이 짧은 글이, 다른 맥락에서는 모르겠지만, 이 책의 평으로 여기 붙으면 유해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글이든 자체로 좋고 나쁘지 않다. 정치는 맥락 속에서만 작동하고, 맥락 속에서 정치는 반드시 작동한다. 알면서 왜 이 짓을 하고 있는가. 차라리 아무 말을 하지 말걸.

 

이게 남성으로서 겪는 여성주의 책읽기의 딜레마다. 당사자성이 없는 나는 늘 이딴 글을 써댄다. 이것이 한 책의 목소리를 침묵시키고, 그 책이 노고를 통해 타자의 수렁에서 건져낸 피해자들을 재타자화하는 쓰기가 아니란 말인가. 나는 점점 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지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곤란하다. 계속 길을 찾고는 있지만, 점점 더 멍청해지는 방향으로 가는 것만 같아서 겁이 난다. 멍청하게 똑똑한 인간은 최악이다.

 


 


155. 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자

김재인 지음 / 느티나무 책방 / 2016

 

- 일독(17071x) / 재독(1922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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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란 처음에 의도한 목표와 내가 노력해 생겨난 결과가 어긋날 때, 목표에 이르지 못했을 때를 가리킵니다. 그 어긋남 때문에 사람들은 좌절하고 후회합니다. 후회는 결과에 비추어서 노력을 평가하려 할 때 생깁니다.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거지요. 하지만 결과란 나의 노력과 우주의 조건이 어우러져서 생겨나는 법입니다. 내 노력이 바라던 결과를 낳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목표를 향한 노력이 원하는 결과를 낳지 않는 것이 존재론적 조건 아래에서는 오히려 정상입니다. 차라리 실패가 정상 상태라고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노력하는 순간에 집중해야 합니다. 노력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결과가 나쁠지라도 최대한 노력하는 겁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때, 그 결과와 상관없이, 후회가 남지 않습니다. 후회란 노력에 대한 후회인데, 노력의 순간에 더할 수 없을 만큼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노력과 결과를 분리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야 합니다. 노력은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무조건 수용하기. 그러고 나서 최선을 다한 또 다른 실험을 진행하기. 이런 것의 연속이어야, 이것이 삶이어여 하는 게 '운명애'의 진짜 의미입니다.

_ 김재인, 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자

 

나도 나를 잘 알 수 없는 부분이 그렇다. 어떤 책을 읽을 때는 이건 너무 뻔한 문장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라는 이유로 혹평한다. 하지만 또 어떤 책을 읽으면서는 너무 뻔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특별하지 않은 글자들에 오래 머무른다. 그러면 안 되는 걸까?

 

그러면 안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깨닫는다. 나는 이렇게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나는 독서를 하는 나를 들여다보면서, 인간이, 최소한 나라는 인간이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동물임을 인정하게 된다. (나라는) 인간은 일관적으로 일관성이 없다. 일관성을 추구하고 노력할 뿐이다. 일관성은 존재론이 아니라 윤리학에 가깝다.

 

저 흔하고 뻔한 말이 오늘은 그냥 필요했다.

 

 

 

--- 읽는 ---

소크라테스 씨,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요? / 허유선

경제학의 모험 / 니알 키시타이니

일기를 에세이로 바꾸는 법 / 이유미

나의 칼이 되어 줘 / 다비드 그로스만

읽는 직업 / 이은혜

물리의 정석: 고전 역학 편 / 레너드 서스킨드, 조지 라보프스키

물리가 쉬워지는 미적분 / 나가노 히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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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05-05 1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님이 그렇게 이야기 하시니 금정연님 책도 다시 한번 봐야게써요 (전 제목에 홀려서 돈 아까워했지만) 사서 읽지 않으니 흡족했더라는.
에런라이크 책은 그렇게 읽어도 되고 또 다르게 읽어도 될 것 같아요. 그러니 쓰신 문장 처럼 어떤 책을 읽으면서는 너무 뻔해서 눈길 안주는 글자들에 오래 머무르는 게 ㅡ 목적없는 책읽기가 주는 가장 목적없는 즐거움이고 그걸 알아버리고 나면 목적있는 읽기가 수월하지 않아지잖아요? 다시 돌아가서 한문장을 읽기위한 한권 읽기가 시간낭비처럼 느껴지는 것이 제 요즘 고민입니다. 서글프다.

syo 2021-05-06 01:08   좋아요 1 | URL
쟝님은 지금 일단 덮어놓고 많이 많이 집어삼킬 땐가 보네요.
그럴 땐 또 탐식하고, 목적이 생기면 그때가서 목적 독서 하면 되지요 ㅎㅎㅎ
시간 지나고 나서 보면 내 인생을 흔들었던 책들은 우연히 만났지만 목적을 가지고 읽은 애들이더라구요.

뒷북소녀 2021-05-06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리뷰라니! 저 읽고 싶어지잖아요.ㅋㅋㅋ
세상에... 철학, 경제학도 부족해서...물리학에 미적분이라뇨.
정말 대단하세요.

syo 2021-05-07 02:48   좋아요 0 | URL
대단할 게 하나도 없는 게,
휘적휘적 보는 거라서 완독 즉시 망각의 수렁에 돌입합니다.
보름쯤 지나면 완벽하게 까먹을 수 있습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