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사거리 2

 

 

커피를 마실 건지 물으면 너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음을, 되돌려주는 작은 입술을 바라본다. 아직 한기가 남은 아침을 밟아 여기에 왔을 것이다, 입술은, 낙낙한 공간을 숨겼고 단맛이 난다. 식빵 한 조각 허겁지겁 집어 먹은 게 다라고 말하며 커피를 한 모금 삼킬 때 설핏, 나타났다 사라지는 목넘김이 어떤, 메시지 같다. 서둘러 풀어 헤쳐주기를, 기다리는 의미의 꾸러미 같다. 서두르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생각은 늘 생각에, 그친다. 커피의 입김이 방을 한 조각 덥히고 방은 한 모금, 습해진다. 뜨거운 것들이 늘 그랬다. 덥히고 적신다. 눅는 것은 공간만이 아니어서, 접히는 시간, 수축하는 간격, 누르면 누르는 대로, 무한에 가깝게 새어, 나오는 이미지, 무한에 가깝게 맞, 닿아도 닳지 않는 신호체계, , 짓들, 말들, 말썽들, 잊어, 버리는, 잠깐, 이라는 말에 세차게 고개를, 젓는, 휘젓는, 젖는, , , , 없는, 없어지, , , 감고 보면, 영원히 감겨, 있는, 잇는, 잇ㄴ, , , , , ,

 

숨을, 쉬었다,


 

 

 

이제쯤 그들은 서로에 대해 몇 가지를 알게 된다. 그들이 함께 기댈 수 있는 지금 같은 것이 있다. 그 만남은 그 자체의 정수를 취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 둘 다 그 정수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그들 둘 다를 채워준다.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의 의례 속에서 그들은 행복하게 최선을 다한다. 둘 중 하나가 얼마나 많이 가져가는가 하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한계가 없는 육체다. 그것은 그저 잊힐 뿐 결코 고갈될 수 없다. 우리는 그 사실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지만.

_ 제임스 설터, 스포츠와 여가

 

그렇게 말하는 경애를 산주가 안거나 끌어당기면 분명히 따뜻해졌다. 너무 선명하고 가까이 있던, 아주 세세하고 세밀하던, 그러니까 어느 크고 순한 개의 털이나 풀잎의 잔가시들을 만질 때 느껴지는 그 작고 촘촘한 살아 있음.

_ 김금희, 경애의 마음

 

 

--- 읽은 ---



63. 생활 속 법률 상식 사전

김계형, 이재호 지름 / 길벗 / 2019

 

syo는 전문가주의를 혐오하는 구시대적 인간인데도, 법과 병에 관해서는 절대 내 선에서 뭘 어떻게 해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기회가 될 때마다 입이 마르도록 의사들 욕하면서도, 그들의 전문적 지식에 저항할 생각은 정말 1도 없다. 문제가 생겼을 때,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자. 이 책은 전문가의 도움을 대신할 만한 책은 아니고, 그저 내게 도움을 주는 전문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데에 힘을 보태주는 정도다.

 

 

 


64. 머더봇 다이어리 : 인공상태

마샤 웰스 지음 / 고호관 옮김 / 알마 / 2020

 

이른바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이 책 속에 등장하는 것들이 책 밖에 있는 우리와 근본적으로 어떤 시스템을 공유할 거라고 당연하게 가정한다. 간혹 어떤 SF는 그런 가정을 당연히 무시하고, 오히려 너희가 전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시스템이야말로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사전 설명도 없이 무례하게 그냥 툭 내뱉는다. 그럴 때 우리는 정말로 다른 세계에 도착한다. 불완전한 말과 유치하기 짝이 없는 표정, 아무리 애를 써도 전하고 싶은 바를 그대로 전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글, 그런 고장 난 매질을 이리저리 조잡하게 조합해 메시지를 전하려 아등바등하고, 또 그 일에 끊임없이 실패하고, 그러나 그것에 익숙해져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사는 우리가, “그리고 내 기억장치에서 꺼낸 짤막한 기록을 첨부해 그게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었다.”와 같은 문장을 맞닥뜨렸을 때, 거기서부터는 사실 서사나 문장의 생김새 같은 건 아무려면 어떤가 싶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SF가 오히려 소설의 상위범주는 아닌가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앞부분 서른 페이지 남짓 읽으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은 살인을 목적으로 태어난 /인간 구성체라는, 인간 입장에서 보면 사이보그 비슷한 존재인데, 도입 시점에서 이미 지배에서 벗어나 여기저기로 도망다니는 모양이다. 그는 수송선에 올라타기 위해 수송선을 속이고 거래를 하는데, 자기는 자유로운 봇으로 주인에게 돌아가는 중이며 자기를 태워주면 영화, 드라마, , 음악 등등으로 구성된 미디어 팩을 제공하겠다는 것. 그렇게 수송선에 올라타고 나서야 주인공은 사실은 자기가 수송선을 속인 것도 아니고, 이 수송선도 그냥 평범한 수송선이 아니며, /인간 구성체 따위는 한방에 짜부라뜨릴 수 있을 정도의 데이터 공격이 가능한 막강 파워의 고급 시스템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고래뱃속에 든 새우깡 꼴이 된 주인공은 이내 자포자기하고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고, 수송선은 계속 주인공의 드라마 피드 근처를 기웃거린다. 그건 주인공 입장에선 마치 큰 소리로 숨을 몰아쉬며 내 등 뒤에 기댄 채 어깨너머로 개인용 디스플레이를 엿보고 있는 덩치 큰 사람같은 느낌이라고 하는데. 심지어 수송선은 주인공에게 아까 본 드라마를 한 번만 더 보자고 요청하기까지 한다. 이 수송선은 스스로 미디어를 볼 때는 바이러스와 악성 코드와 다른 위험요소를 조사하는 방식으로 플레이할 수 밖에 없는 구조고, 결국 다른 개체가 미디어를 재생할 때 그 반응을 보며 우회적으로 내용을 이해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게다가 인간의 상호작용 구조는 수송선의 시스템과 너무 달라서 인간 승무원의 반응은 수송선에게 의미 있는 데이터가 될 수 없는 실정, 결국 수송선이 드라마나 영화를 소비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봇/인간 구성체인 주인공이 드라마를 보는 것을 보는 것뿐, 그래서 수송선은 모른 척 주인공을 태웠던 것, 뭐 그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둘은 같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는데, 이 거대하고 위대한 시스템은 막상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자, “별 비중 없는 인물이 하나씩 죽을 때마다 동요했다. 스무 번째 에피소드에서 주요 인물 한 명이 죽자, 녀석은 봇이 진단을 돌려야 하는 척하면서 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며 7분 동안 피드에 머물러 있었고 나는 재생을 멈춰야 했다. 그리고 네 편 뒤에 그 인물이 다시 살아나자 너무 안도하는 바람에 우리는 그 에피소드를 세 번 보고서야 넘어갈 수 있었다같은 아주 귀여운 모습을 보여준다. 심지어 드라마 속 우주선이 파괴되고 승무원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암시가 나오자 겁을 먹고 드라마를 보지 못하기도 한다. 마침내 드라마가 끝나자 10분 동안(그 거대한 시스템이 1나노초 동안 해치울 수 있는 수많은 연산작업을 생각하면 10분이란 영겁에 가깝다) 가만히 있다가 마침내 하는 말. “다시 보게 해줘.”


이런 초월적인 지능을 가진 존재가, 너무 인간적이라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뭔가를 배워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이상하게 훈훈하다.

 

  묘사가 비현실적이야.

  (아까도 말했듯이 녀석이 하는 말은 전부 가능한 한 빈정거리는 투로 상상하시길)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비현실이 있고, 모든 사람이 우리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비현실이 있지.”

_ 마샤 웰스, 머더봇 다이어리 : 인공상태

 

 

 


65. 사회학의 쓸모

지그문트 바우만 외 지음 / 노명우 옮김 / 서해문집 / 2015

 

너무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 같지만, 이 책은 교양 수준에서 사회학을 익히려는 사람, 그러니까 사회에 털리지 않기 위한 자기보호 본능의 발현으로 사회학적 지식을 장착하려는 정도나 그 이하에 해당하는 열정을 가진 이들에게 과잉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을 인터뷰한 책이니 당연히 바우만의 사회학에 대한 바우만 자신의 설명이 일부 들어있고 그에 관한 사적 정보들도 녹아 있으니 바우만의 팬이라면 사회학적 목적이 없더라도 읽을 만할 것이다. 사회학에 대해 공부수준의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뚫고 지나가는 일이 한 번쯤 해볼 만한 경험인가에 대해서 syo가 할 수 있는 말은 없겠다.

 

그럼에도 역시 바우만은 바우만이라서 사회학에 직접 관련되지 않은 다른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꽤 있다. 예를 들어, 44, 45번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써 바우만이 펼쳐내는 은유에 관한 사유는 사회학 바깥 영역에 서 있는 독자에게도 이 책의 쓸모를 충분하게 입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멋있는 사람이 되려면 다양한 방면으로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잔뜩 든다…….

 

만약 호문쿨리homuncili로 태어나 시험관에서 배양된 석연치 않은 지식들로 넘쳐나는 진리가 아니라 실제의 세상 살이real life’에 대한 진리를 추구한다면, 카프카, 무질, 보르헤스, 페렉, 쿤데라, 미셸 우엘벡 등으로부터 힌트를 얻는 것 외에 좋은 방법을 선택할 수 없을 겁니다. 또한 세계--존재로서 자기만의 고유한 방식에 대한 진리를 발견하려는 열망이 강한 독자들과 협력하고 싶다면, 그리고 탐색되지 않았거나 간과되었거나 무시되었거나 혹은 시야에서 가려져 있던 대안들을 탐지하고 싶다면, 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독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 스스로 적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언어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경험과 관련된 친숙한 이슈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만약 사회학자가 이러한 사명을 해내지 못할 때 벌어지는 일은 뻔하지요. 당신의 메시지는, 메시지를 비인간화하여 고분고분함으로 가공해내는 경영자를 거들어주는 제안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매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기만적이기까지 한 것이 될 게 뻔합니다.

_ 지그문트 바우만 외, 사회학의 쓸모

 

 

 


66. 외로움을 씁니다

김석현 지음 / 북스톤 / 2020

 

가끔 이런 실험을 생각한다. 작은 방 한 가운데 큰 테이블이 놓여 있다. 그 위에는 에세이라는 장르를 달고 출간 된 책 스무 권이 올려져 있다. 이제 참가자가 방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책을 한 권씩 읽으면서, 이런 것도 에세이라고! 라는 생각이 드는 책들을 방 구석에 비치된 파란색 휴지통에 집어넣는 것이다. 그 옆에 있는 빨간색 휴지통은, 이따위 건 도대체 책이기나 한 건가? 싶은 책들을 위해 특별히 배치한 것으로, 이 통에 들어간 책들은 실험이 종료되면 즉시 소각장으로 가게 된다는 정보가 참가자에게 주어진다.

 

이제 두 쓰레기통에서 나온 책들을 분석해 보면, 실험참가자가 문학을 대하는 태도부터 시작해서, 심지어는 성격의 일부까지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syo 이 책을 쓰레기통에 던지겠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닙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났다는 거죠….

 

생각이 고인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생각이 고이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생각이 고여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외로움도 다르지 않다. 외로움이 고이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이 외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외로움이 고일 여유조차 없는 것일지도. 이렇게 생각하면 외로움도 외롭지만은 않다.

_ 김석현, 외로움을 씁니다

 

 

 


67. 왜 칸트인가

김상환 지음 / 21세기북스 / 2019

 

이런저런 시험을 준비하면서 얻은 좋은 지혜 중 하나는 회독수올리는 게 덮어놓고 짱이라는 것이다. 반복해서 읽다 보니, 반 년이나 지난 뒤에 다시 봤는데도 일부분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두세 번쯤 더 보고 나면 이번 생에 이 책과 다시 마주할 일은 없어지겠구나 싶다.

 

나는 철학 입문 강의에서도 칸트가 발휘하는 놀라운 효력을 일찍부터 실감했다. 칸트의 3대 비판서를 중심에 놓고 가르칠 때 학생들이 가장 열렬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이론철학, 실천철학, 예술철학을 균형 있게 골고루 소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아마 칸트가 철학의 근대적 정체성을 확립한 철학자라는 점에서, 그러나 무엇보다 인간 사고의 다양한 측위를 분석하면서 근대인에게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친 위대한 스승이라는 점에서 보다 큰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_ 김상환, 왜 칸트인가

 

 

 

--- 읽는 ---


인기 없는 에세이 / 버트런드 러셀

축복받은 집 / 줌파 라히리

흐름으로 읽는 프랑스 현대사상사 / 오카모토 유이치로

철학의 슬픔 / 문성원

라캉 읽기 / 숀 호머

천사의 음부 / 마누엘 푸익

마키아벨리 / 김경희

그들은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되었는가 / 김대식

바른 마음 / 조너선 하이트

사회주의 페미니즘 / 낸시 홈스트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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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3-08 16: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르크스 좋아해도 유물론자 아니고 관념론자랬는데...틀렸네요. 관능론자네... ㅋㅋㅋㅋㅋㅋㅋ오늘 페이퍼에 나도 똑같이 읽은 거 세 권이나 이써! 이게 뭐라고 뿌듯합니다.ㅎㅎ

syo 2021-03-08 16:11   좋아요 2 | URL
항상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야한 건 좋은 거다? ㅋㅋㅋㅋㅋ

2021-03-08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8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8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8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21-03-08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뭔가 에로틱하게 애틋한 느낌의 시로군요. 시에도 능력이 있으셨다니... 저는 시인은 일단 무조건 존경하는 관계로 오늘의 syo님을 존경하겠습니다. ^^

syo 2021-03-08 22:47   좋아요 0 | URL
‘시‘까지는 못 되겠으나, 뭔가 야하게 써봐야지 하고 노린 건 사실입니다*^-^*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일단 주신 존경의 유통기한이 1시간 15분 남았으니 감히 그냥 반납 없이 남은 시간 즐기다가 흩어버리기로 할게요 ㅎ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