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

 



 

 

나는 현수를 만나고 돌아온 후로 우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그 글 또한 끊임없는 다시 쓰기의 과정만 거칠 뿐 도무지 완성되지 않았고 여전히 그러고 있는 중이지만, 그 일이 나에게는 도움이 된다. 만약 어떤 식으로든 글을 완결 짓게 된다면(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이지만) 나는 그걸 연경에게 보낼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그게 좋은 생각인지 알 수 없어졌다. 이미 그 일들은 연경에게서 아주 멀리 떠나왔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그것을 복기하는 일은 과거를 기억하거나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일이니까. 그것은 과거를 다시 경험하는 것이 아닌 과거를 새로 살아내는 것과 같은 일이니까. 그러나 읽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글을 쓰는 것은 생각보다 고독한 일이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글을 쓰다가 어쩌면 내가 영원히 혼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게 문득 참을 수 없이 두려워졌다.

_ 정영수, 「우리들」

 

모든 사랑은 언젠가 한 번은 서술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한 번 열린 서술은 종료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랑은 꼭 시작만 있지 끝은 없는 이야기 같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마침표 속에 우주가 있다. 우주처럼 요동치는 물음표도 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사랑이 비워놓은 자리에는 반드시 이야기가 고인다. 어떤 먹먹한 날 편지지 위에 눌러 쓴 미련과 회한으로, 또 어떤 맑은 겨울날 탄식처럼 흘러나온 이름이 흩어지는 입김으로, 이야기는 이런저런 모습을 하고 그렇게 갑자기 왔다가 떠난다. 그리고 약간 다른 얼굴로 다시 온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갑자기. 우리는 그 차이와 반복 속에서, 차이와 반복으로, 완결되지 않을 이야기를 완결하기 위해, 완결하고 싶은 마음도 없이, 혹은 완결하고 싶은 동시에 그 순간을 영원토록 이어나가고 싶은 불가해하면서도 이해 가능한 마음으로, 갑자기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네가 들으면 좋겠지만 듣지 않아도 좋겠고,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를 하지만 벌써 내가 알아들었고, 반복할 때마다 조금씩 색과 향이 달라져서 이야기하면 할수록 도리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랑을 자꾸만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하게 된다. 진행 중인 모든 사랑은 그저 씨앗을 빚는 일. 사랑을 종료함으로써 그 씨앗을 땅에 심는 것.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그 자리를 맴돌며 물을 주고, 가지를 치고, 접붙이고, 가끔은 오래도록 방치하기도 하고, 그렇게 끝나지 않을 뭔가가 진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모든 사랑은 서술되기 위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사랑에 관한 글을 읽고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에겐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 읽은 ---



38.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

손기은 지음 / 드렁큰에디터 / 2020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월급날 따박따박 월급이 들어오는 대신 따박따박 체중이 줄었다. 좋았다. 월급에 버금가는 소득이라고 생각했다. 다이어트를 위해 한 게 딱히 없고, 밥 시간이면 남이 차린 음식을 남의 돈으로 사서 최대한 열심히 많이 먹고 즐기는데도 매달 한 근씩 체중이 감소하니, , 이건 복지야- 했던 것. 그렇게 8개월 남짓 포인트 모으듯 적립식으로 총 3.5kg의 체중은 퇴사 후 두 달 만에 기적처럼 원상복구 되었다. 먹는 것을 워낙 좋아하고 또 먹으면 많이 먹는 편이라 힘들 때도 먹고 즐거울 때도 먹는다. 힘들 때는 먹어도 감량되고 즐거울 때 먹으면 살이 붙는 걸로 봐서, 즐거움이 칼로리가 높은 것 같다. 즐거움을 좀 줄여야 하나.

 

일을 안 한다고 힘든 게 없진 않다. 그렇지만 내가 머저리같이 굴면 딱 내 인생 하나만 머저리 되는 상황에만 살면 기본적으로 마음도 가볍다. 누굴 원망할 필요도 없고. 그래도 아주 가끔은 먹어도 먹어도 살이 찌지 않던 그 시절 자동체중복지 시스템을 떠올린다.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라는데, 힘들 일이 없으면 내가 일류인지 뭔지 알게 뭐야. 사람은 좀 힘들어야 하는 건가? 나는 사실 다시 힘들고 싶은 건가?

 

에라이 모르겠다, 치킨이나 시키자.

 

성취욕이 최고로 치달았을 때는 체력이 밑바닥을 칠 때가 많다. 몸은 노곤노곤한데 기분은 팔랑팔랑하고, 소주가 눈앞에서 출렁출렁하는 밤이면 이보다 더 적절한 건 없다 싶다.

_ 손기은,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

 


 

 


39. 뇌가 섹시해지는 추리 퀴즈 1단계

팀 데도풀로스 지음 / 박미영 옮김 / 비전비엔피 / 2016

 

2단계는 보지 않기로 했다.

 

퀴즈나 퍼즐 풀기는 실로 오래된 인류 공통의 오락거리다. 우리가 아는 모든 문화권에서 여가시간에 문제 풀이를 하고 있으며, 고고학자들은 문명 초창기부터 퀴즈와 퍼즐이 있었다는 기록과 흔적을 발견했다. 지성을 이용하여 문제를 푸는 것은 우리 인류를 지금에 이르게 한 독특한 특성이므로, 그것이 우리의 기본 속성이라고 말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_ 팀 데도풀로스, 뇌가 섹시해지는 추리 퀴즈 1단계

 

 

 

--- 읽는 ---

내일의 연인들 / 정영수

여자들의 무질서 / 캐롤 페이트먼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 / 스티븐 내들러

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 / 김민섭 외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 / 박정호

지식의 세계사 / 육영수

지속가능한 삶을 모색하는 사피엔스를 위한 가이드 / 김선우

크로스 사이언스 / 홍성욱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1-02-05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9번 책은 33번 책 같은 책 아니죠? (‘_‘ )??

syo 2021-02-05 15:08   좋아요 1 | URL
전혀 다른 책입니다. 두 작가님이 마주치면 서로를 좀 한심하게 생각할지도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2-05 15: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영수 저도 읽는 중인데 소설마다 편차 심해요 ㅎㅎㅎ수상 이후 공들여 고친 소설들은 전에 읽었던 거랑 같은 소설 맞나? 싶게 좋고 ㅋㅋㅋ아닌 건 아 그래 이게 내가 알던 영수ㅋㅋㅋ이러고... 조만간 다 읽고 리뷰 써야겠어요. 거의 다 연애소설이긴 하네요.

syo 2021-02-05 15:25   좋아요 4 | URL
ㅎㅎㅎㅎ 정영수에 대한 저의 편견을 내다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나머지 작품들도 읽어보려 했더니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