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햇빛

 

 

 

1

 

꼬박꼬박 출퇴근 다니던 때보다 한 주에 두어 번 대문 밖 구경하면 허허 출타가 잦구나 싶은 요즘에 하늘 올려다볼 일이 더 많다. 한 번 쓰고 나니 두 번 쓰기는 겁날 만큼 식상한 문장이지만, 저런 문장이 가져다주는 어떤 정동까지 식상한 것은 아니다. 일상이 바빠지면 하늘 자체를 잊어버리고 살거나, 아니면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이 오래 잊고 살아온 무언가를 떠오르게 하거나 한다. 아무것도 쫓아오지 않을 때(혹은 잠시쯤 그렇게 착각해도 될만한 여유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하늘이 하늘로 보인다.

 

하루에 한 번, 볕이 제일 따뜻할 때 옥상에 올라 하늘을 올려다보며 노래 열 곡쯤 듣는다.


  "잘 들어봐새소리가 들리지 않아저쪽 어딘가에서."

  나는 재진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나무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나는 귀를 기울였다잠시 후내 귀에도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들리네."

  "난 새소리를 아주 잘 들어아주 어렸을 때는 새들이 많은 시골에서 자랐나 봐새소리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

  재진의 말을 듣고 보니 살아오면서 내가 새소리를 들어보려고 귀를 기울인 건 많아야 서너 번뿐인 것 같았다스무 해 동안서너 번뿐이라니그때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우리가 언제나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새소리를 들으려면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걸.

김연수스무 살

 

 

 

2

 

딱 하나 아는 가을방학의 노래 가사에 이별하고 난 후의 일상을 그린 이런 대목이 있다.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도 만나고사랑 하나 끝내고 난 뒤에 하는 일들치고는 일상적이기 그지없다. 사랑하는 중에도, 지난 사랑을 그리워하는 중에도, 혹은 사랑을 하면서도 어쩐지 지난 사랑이 그립다 싶은 날에도 역시,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렇게 살지 않나, 사람이라는 게. 이렇게 보면 이별이라는 게 뭐 그리 큰 변화를 수반하는 사건은 아닌 것처럼도 보이고.

 

크고 작은 모든 불행은 글쓰기의 씨앗이고, syo 역시 연애가 안 좋을 때나 이별한 후에 감정에 절어 눅진눅진한 글들을 잔뜩 써댔다. 써댔다와 싸댔다 사이의 오묘한 포지션. 꺼내서 널어 말려야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걸 글자로 집어 빨랫줄에 너는 일에는 아주 속전속결이었다. 그러니까 저 가사가 더 싱겁고 성에 안 찰밖에. syo가 가사를 쓴다면 이런 식이지 않을까. 너가 떠나고 나는 쓰고 쓰고 또 쓰고, 할 말도 쓰고 못할 말도 쓰고, 네가 봐도 쓰고 네가 안 봐도 쓰고, 쓰고 쓰고 또 쓰다 보니 심지어 지금 이 노래 가사까지 쓰고 앉았잖니, 훠우워어 베이베 라랄랄라……. , 가사에 묻어나는 이 곡진함 좀 보소. 눈물 젖은 라랄랄라는 또 어떻고…….

 

가장 최근의 이별 후에 특별히 글이 늘지 않았다. 당시에 코로나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지켜내기 위한 방법을 고안하느라 아등바등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고, 또 나머지 시간은 이놈의 구청을 때려칠까 말까를 고민하는데 소진하다 보니, 글이고 나발이고 시간 자체가 태부족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어쩐지 이별 감수성 자체가 예전같지 않았다. 그건 그 직전의 10년짜리 연애가 깨졌을 때도 느꼈던 변화였다. 확실하다. 나는 낡아가고 있다. 절차대로.

 


땅바닥이 옴폭옴폭 파인 곳마다 물이 말라붙어서 소금 결정이 되어 있었다어떤 결정은 장미 융단 같았고어떤 결정은 볏짚더미 같았고어떤 결정은 눈송이가 쌓인 것 같았고모두 소금 진흙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내가 연갈색 장미등를 조금 가져가려고 한 덩이를 작게 떼어냈더니가 갑자기 장미들이 덜 아름다워 보였다세상의 어떤 것은 영영 잃어버린 상태일 때만 우리가 가질 수 있고또 어떤 것은 멀리 있는 한 우리가 영영 잃지 않는다.

리베카 솔닛길 잃기 안내서

 

  너에게 아주 오래된 거울 하나를 쥐여줄까 당하그 거울 속으로 들어가 석삼년 녹슬면서 기다릴 거라고 말할까 당하내처 달릴까 당하,

  물까치들이 울음소리를 찍어 바르던 풀숲 가에서 따라 울던 바람

 

  우리는 서로를 통과할 수 없는 바깥이라는 걸 그때는 알지 못하였다

 

  쉽게 내릴 수 없어서

  아무것도 몰라도 다 아는 것 같아서

 

  한가운데가 아니고 내가 너의 변두리쯤이어서 들어가지 못해서 좋았던 당하

안도현, <당하부분

 

 

 

3

 

이별 후는 아니고, 사랑이 있긴 있는데 사랑같지 않은지 영 허한 일상을 언급하는 노래로, 위의 것보다 훨씬 더 유명한 곡이 하나 있다. 그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운도옹을 하아고오.”

 

탈락. ‘운동나오는 순간 그 즉시 남의 노래.

 

 

 

--- 읽은 ---


203. ‘장판에서 푸코 읽기

박정수 지음 / 오월의봄 / 2020

 

철학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잘 정리해 머릿속에 차곡차곡 넣어놓은 철핚 개념은 그 자체로는 옷장 속에서 영영 꺼내지 않는 옷처럼 무의미한 지식인 것은 아닐까? 어떤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철학을 꺼내와 그 문제에다 비비는 것, 그 접점에서 조흔색처럼 생겨나는 개념틀과, 좌표와 방향성을 갖춘 움직이는 개념들이 유일하게 진짜 의미 있는 철학이라면? 이 책은 철학의 에 관해 선명하게 알려준다. 푸코는 거들 뿐이다. 그래서 좋았다. 그렇지만 독자가 겨냥하는 것이 장애라는 사회적 개념이 아니라 푸코의 철학 개념 그 자체라면, 다른 입문서를 권합니다.

 

 

 

--- 읽는 ---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 / 사라 밀스

/ 나쓰메 소세키

진실에 복무하다 / 권태선

쓰기의 감각 / 앤 라모트

고전잡담 / 장희창

판타스틱 과학클럽 / 최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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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11-05 2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철핚 하니까 뭔가 끄하핚 하고 애쓰며 읽는 듯한 느낌인데 단칼에 응 내가 읽었는데 철핚 개념 볼라면 딴 거 봐 하고 쿨하게 짤라주시니 좋네요. 잃은 게 클수록 더 절절한 뭔가가 나오고 별 거 아닐 수록 시답잖고 안 써지는 게 아닐까 지레짐작해봅니다. 저는 뭘 좀 잃고 난 뒤에야 오래 쉰 쓰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던 한 해였습니다.

syo 2020-11-05 20:19   좋아요 2 | URL
한 해가 어느덧 다 끝나가고 있군요. 여기나 거기나, 이런저런 일이 많았던 2020이었나 보네요.

어떨 땐 도리어 너무 큰 걸 잃고나면 그 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직후에 바로 몰아치면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상실감이기 때문에 몸이 알아서 일단 미뤄놓고 차차 곶감처럼 빼먹는달까요. 아무렇지도 않다가 시간이 지난 어느 훗날 영화보다 갑자기 꺼이꺼이 울어제끼는 그런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반유행열반인 2020-11-05 20:33   좋아요 1 | URL
남은 한 해도 다가올 해들도 울 일 적고 웃을 일 많으시길 언제나 빕니다. 나도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뭔가 신돈 짤 같은 거 붙여야 할 것 같은 ㅋㅋㅋㅋ)

2020-11-05 2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7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0-11-07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역싀 .. 장판 저도 챕터 1다 읽고 이건 좋은 책이지만 원하는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다른 푸코 입문서 찾고 있었는 데 다음 글에 올려 두셔서 그거 부터 보려고요. 근데 장판 추천한 거 쇼님임 😑

syo 2020-11-08 11:2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다시 말하지만, 쉽긴 장판이 쉽다! 그리고 장판은 좋은 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