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양의 모양 2


 

 

생은 슬픈 것인지도 모른다회한모든 후회는 결국 존재의 후회로 귀결된다.

전혜린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칫솔을 버렸다. 모가 다 누워서 더 쓸 수가 없었다. 버려도 진작 버릴 것을 오래도 썼다. 미련하게도. 아무리 J라도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미련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모퉁이를 만난 것이다. 끼고 돌면 아무것도 간단히 버릴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길모퉁이를. 빛이 떨어지면 창틀 아래로 잎 그림자만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그건 움켜쥘 수도 없었다. 나타샤 벤자민이라고, 고무나무 종류래. M이 창틀에 화분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J도 웃었다. 웃음 역시 움켜쥘 수 없는 것이었다. 태어나는 순간 지나가 버리는 것들 속에서 우리는 늘 허우적댄다. 창문을 닫고 자는 계절이 왔고, 바람이 불 때면 J의 머리칼은 사정없이 흔들린다. 그새 많이 자랐다.

 

가을엔 이미 죽고 없는 사람들의 노래를 듣고 있어. Y의 가느다란 검지가 머그잔 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저러면 제 손가락 빠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J가 생각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그러고 있더라구, 언제부턴가. 말을 마친 Y가 잔을 입에 가져갔다. 커피가 Y의 입술을 지나 입안으로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저 쓰디쓴 검은 물을 좋다고 들이켜는 사람들이 J는 늘 신기했다. 언젠가 Y가 이렇게 물었다. 쓴 건 술도 마찬가지잖아. 넌 술은 잘 마시면서 커피는 왜 못 마셔? 그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지나간 것들하고 언젠가는 만나야 하잖아. Y가 말을 이어갔다. 가을에는 지나간 것들이 다시 지나가도, 오래 부대끼지 않고 수월하게 통과한다는 느낌이야. 말을 할 때마다 커피 묻은 Y의 입술이 번들거려서 자꾸만 시선이 갔다. 바람이 불고 이파리들이 가루가 되고 그래서 모든 게 쉬워지는 걸까? 이럴 때 저 입술을 훔쳐야만 한다는 일종의 확신이 데자뷔처럼 갑작스레 J의 심장을 덮쳐왔다. 가을은 짧으니까. 다가갈까? 이러다 가을이 없어지면. 테이블에 왼쪽 팔꿈치를 대고, 왼쪽 어깨를 살짝 밀고, 고개는 오른쪽으로 살짝 꺾으면, 닿을 텐데? 죽은 사람들 노래도 다 죽어버리면. 첫 키스로 너무 괜찮은 그림일 텐데? 그럼 너무 슬프잖아.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할 텐데? 그들이 있던 시간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지면 말야. J의 왼손이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아니었다. 다시 기억해보니, 왜 커피를 못 마시느냐고 물어온 것은 Y가 아니었다. 그건 M이었다.

 

J는 누구보다 출근이 빨랐다. 카드키를 단말기에 접촉하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것은 J의 일이었다. J의 일이 되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퇴근이 늦었다. 열린 문을 다시 닫는 것도 J가 하는 일이 되었다. 일은 많았다. 팀장은 J의 설계가 탐탁지 않았고 고객은 불가능한 UI를 요구하며 떼를 썼다. 그런 것들이 그대로 J의 일이 되었다. J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했고 충분히 그럴 여유가 있었다. 성실하지 않을 여유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싱크대에 던져놨던 커피잔을 씻고 거기에 다시 커피를 내려 마셨다. 술을 끊었다. 쓴맛의 총량은 유지된다. 그건 줄어드는 것이 아니어서 대신 J가 줄어들었다. 통장에 돈은 자꾸만 쌓였다. Y와는 아직 자지 않았는데 요즘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Y와 입을 맞춘 것과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 중 뭐가 먼저였을까. J는 요즘 중요하지 않은 질문들을 찾아 묻고, 중요하지 않은 기억들을 떠올리는 습관이 생겼다. 피부가 부쩍 푸석해졌고, 수면의 질은 나빴다. 집 안의 모든 불을 끄고, 핸드폰 충전기와 TV 셋톱박스에서 나오는 작은 빛까지 모조리 지우고, J는 거실 한복판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틀어막아도 빛은 들었다. 그것으로부터는 도망칠 수가 없었다. 희붐한 어둠 속에서 J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 라고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그런 게 뭔지, 뭐가 상관이 없는지 자기도 알지 못했다. 그런 건 아무도 몰라, 라고 소리 내어 말해보기도 했다. 그런 게 뭔지 생각하다가, 아무도에 누가 들어가는지 세어보기 시작했다. 어떤 이름은 겨냥했고 또 어떤 이름은 에둘렀다. 어떤 이름은 누르고 어떤 이름은 찾았다. 그러다 마침내 그 모든 이름들이 다 같은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고 J는 몸서리쳤다. 제발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지 좀 마. J는 아무렇게나 꿰어 입고 거리로 나선다. 모자 자꾸 쓰면 두피 망가지고 머리 다 빠진대. J는 모자챙을 꾹 눌러 이마를 가린다. 양손 다 주머니에 꽂고 걸으면 양아치 같아서 보기 싫어. J는 주머니 속 두 주먹을 꽉 움켜쥔다. 또 담배 피면 키스 없다. 마지막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다. ! 또 쓰레기 함부로! 빈 담뱃갑을 구겨서 길에 던진다.

 

너 어디까지 가려고 나한테 이래.

 

J는 건널목 한가운데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하여 손톱에 박힌 가시와 수많은 잔소리들이별 직후의 쓰라림이 왜 풀벌레 소리를 내는지 이유를 조금 알게 되었을 뿐가을밤의 풀벌레가 불도 켜지 않고 왜 모두 다른 빛깔로 우는지 아직은 알지 못한다

안도현, <가을밤의 풀벌레 소리부분

 

 

--- 읽은 ---

 


151. 스트로베리 나이트

혼다 데쓰야 지음 / 이로미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

 

표지가 예뻐서 읽어 보았는데 첫 장부터 자식의 똥구멍에서 똥을 긁어내 아내를 먹이거나 제가 쳐먹는 약쟁이 아버지 새끼가 등장해서 기분을 잡쳤다. , 이런 새끼는 제발 얼른 죽었으면 싶었는데 다음 페이지 쯤 바로 죽어서 그나마 나았다. 커터칼로 경동맥이 잘려 피를 콸콸콸 쏟으면서 죽었다. , 바로 읽을 맛이 나는구만? 1살인마 1독자 탄생의 순간.

 

넌 그냥 촌뜨기에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는 촌스러운 계집애라고. 그런 촌뜨기는 말이지, 저 시골 공원 화장실 뒤에서 몸이나 파는 게 딱…….” 이라는 대사를 동료 경찰에게 치는 경찰이 등장하는데, 거의 모든 대사와 행동이 근본적으로 여혐에 쩔어있는 그 캐릭터를 보고 있자면, 혹시 작가가 도리어 남자를 혐오하고 있지 않나 싶을 정도다. 이 바닥 국룰에 따라 마지막에는 츤데레 모습을 보여주지만, 늦었어요.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남자 경찰이 틈만 나면 시전하는 성희롱의 대향연을 관전하는 것도 역시 포인트. 이게 재밌다고 생각하는 걸까?

 

주인공으로 설정된 히메카와 레이코 경위는 번뜩거리는 데가 있으면서도 어딘가 허술하여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면서 어떻게 바뀌어나갈지 알 수 없지만, 그 시리즈를 내가 따라가며 읽을는지도 역시 알 수가 없다. 그냥 혹은 저냥이다.

 

 


 

152. 복자에게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

 

너무 한낮의 연애를 세상에 내놓은 순간부터, 김금희는 향후 10년 동안 syo의 무조건적 별 다섯개를 확보했다. 나는 그녀가 한글로 뭔가를 쓴다면 거기에 가나다라마바사 아자차카타파하 헤헤 으헤으헤으허허라고 쓰였더라도 물개박수를 치며 별 다섯을 줄 준비태세가 확립된 편파적 인간인 것이다. 그런데 늘 그런 우대권이 의미가 없다. 제값 내고 타셔도 늘 오성급이셔요.

 


 

 

153. 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

 

그래서 이런 몇 가지 난제가 발생한다. 설터 할배가 좋아 금희 누나가 좋아? 그런 걸 묻다니 용기가 있구나 그러나 싸대기는 조심해라! 설터 할배가 이겨 금희 누나가 이겨? 조용해라, 짓이겨버릴라니까. 설터 할배랑 금희 누나 책이 한 권씩 있는데, 그중 한 권을 지금 버려야 돼. 뭘 버릴래? 바로 너의 그 요망한 세 치 혀를…….

 

 

 

 

--- 읽는 ---

강철왕국 프로이센 / 크리스토퍼 클라크

괴물이라 불린 남자 / 데이비드 발다치

사브리나 / 닉 드르나소

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 / 김성민

모든 것의 처음 / 스튜어트 로스

왜 칸트인가? / 김상환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 / 인티 차베즈 페레즈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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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9-25 0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미소설가는 설터, 한국소설가는 김금희가 좋아 하면 되죠ㅎㅎ저도 둘다 무척 아주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마음을 부사 나열로 밖에 못 키우는 부족함...날씨가 좋아 그런지 읽는 책이 어째 무럭무럭 늘어나시네요ㅎㅎㅎ

syo 2020-09-27 14:52   좋아요 3 | URL
날씨 요즘 너무 좋네요. 바깥에 자꾸 나다니고 싶어집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날씨한테 외주줬나봐요. 숙주 유혹....

반유행열반인 2020-09-27 15:42   좋아요 0 | URL
연휴 때 가까운 동네 산책 살살 다니셔요. 산성도 거닐어 보시고...

scott 2020-09-25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설터 할배가 더 좋아요. 전혜린으로 시작해서 복자와 설터 할배까지 소요님 페이퍼는 끝까지 읽게 만드네요.^.^

syo 2020-09-27 14:5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설터 할배 좋아요. 전 너무 좋아서 호불호가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별로라고 여기는 분들도 많아서 깜짝 놀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