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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방향으로 편지를 보내고 싶은 저녁을 맞아 나는 창문을 닫고 윙윙거리는 마음에 이름 몇 개 들려주며 다독다독 안녕 밤의 골목아 눅눅한 반지하 단칸방아 처음 안았던 호수야 신호가 긴 사거리야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과 이야기들아 잘 있니 잘 지내니 나는 내일 일터에 가려고 다음 주는 금요일에 쉬려고 여름이 끝나기 전에 시끄럽지 않은 바다에 가려고 밤에도 낮만큼 분주한 한 해를 보내려고 저축 말고 김연수의 신작이나 스피노자 같은 것을 생각하려고 미래 말고 연말까지 턱걸이며 윗몸 일으키기 같은 간단한 동작들을 몇 개까지 해낼 수 있게 될지나 생각하려고 나 자신에게 아무것도 다른 누구를 위한 그 무엇도 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려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 보면 어제 같은 오늘에도 오늘 같은 내일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출근길 마을 버스 정류장에 피어 있는 지나치게 붉은 장미처럼 선명하고 무용하게 누군가의 눈길이나 손길이 닿을 때까지 잔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가며 버티고 서 있을 줄 알게 되지 않을까 방충망의 구멍을 메우고 주기적으로 세탁기 청소를 하고 거울의 얼룩을 깨끗이 닦아내는 법을 검색하고 치킨을 먹은 다음 날이면 체중계에 올라갔다가 콩콩 제 머리에 꿀밤을 먹이기도 하는 사람으로 무탈하고 무해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낮에 머리를 했어 밤에 검은 마스크를 하고 노란 꽃이 더 노랗게 보이는 가로등 아랫길을 걸어 마을을 한 바퀴 휘감고 도는 산책을 다녀왔어 동생 생일이라고 50만 원을 부쳐줬는데 엄마가 고맙대 엄마가 고마울 일이냐고 하니까 내 자식이 내 자식한테 해준 거라서 둘 다 내 자식이라서 엄마가 고맙대 엄마는 고마운 것도 참 많지 내가 미안한 것이 참 많은 것처럼 가끔 누군가에게 고마운 사람이 되는 것도 좋지 낮에 머리를 하러 가는 길에 왜 모임에 나오지 않았냐고 우리 지금 다 모여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고 목소리 듣고 싶은 사람 있으면 바꿔주겠다고 동기들이 전화해 줘서 미안한 나는 고마웠어 잊히지 않는다는 것은 참 좋지 잊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이지 내가 잊지 않을 테니 너는 잊히지 않으렴 훨씬 더 나은 일을 네가 맡으렴 모든 방향으로 편지를 보내고 싶은 저녁에 나는 짧게 자른 머리를 하고 슬리퍼를 끌고 동네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는데 잊을 것과 잊지 않을 것을 나누어 보려고 나선 그 길에 아무것도 내려놓지 않고 그대로 돌아왔구나




 나무로 길을 재던 시절은 이제 없지

 오리나무들은 산에나 가야 겨우 만날 수 있지

 그래도 오리나무와 오리나무 사이의

 간격쯤이면 좋겠네

 영 볼 수 없는 당신과 나 사이에도

 오리나무를 심었으면 좋겠네

 아무리 먼 길도 오리면 된다고,

 오 리면 오리라고

손택수오리나무의 측량술을 빌려서」 부분


그런 밤이 있었다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우리는 남은 차를 마저 마시고 가방을 든다구원이니 벌이니 천국이니 지옥이니하물며 사랑이니 하는 이야기는 더는 입에 올리지 않은 채로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각자의 우산을 쓰고 작별 인사를 나누고 뒤돌아 걸어간다그렇게 걸어간다.

최은영고백


현명한 사람도 미욱한 사랑으로 자신의 거짓 영리함과 마주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사랑은 어차피 이상하고 적나라하게 자기 함정에 빠지는 일에 불과하지 않은가그 함정을 미담으로 치환해가는 두 사람이 최종적으로 남을 때비로소 사랑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김소연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 읽은 ---

 


61. / 장 그르니에

 

섬들 사이에 사람이 있다

그 사람에게 가고 싶다

 

 


62. 최한기가 들려주는 기학 이야기 / 이종한

 

애들 책이라 애들애들 하다. 어릴 적에 이런 동화를 좀 더 많이 읽었으면 고민거리도 적고 눈 앞에 닥친 일들을 뚝딱뚝딱 해치울 수 있는 건실한 어른이 되었을까.

 

 


63. 겨울 여행 어제 여행 / 조르주 페렉

 

보페페 : 보르헤스, 페소아, 페렉.

 

 


64. 당신에게 베토벤을 선물합니다 / 임현정

 

기껏 받은 선물도 듣지 않으면 발이 달려 도망친다.

 

 

 

--- 읽는 ---

만화로 보는 경제학의 거의 모든 것 / 마이클 굿윈 : 112 ~ 208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 도제희 : ~90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가타오카 이치타케 : ~ 105

빨강머리 앤 / 루시 모드 몽고메리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이현우 : 69 ~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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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6-14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은영을 얼른 읽어봐야겠어요. 너무 미루어두었어요, 너무 귀한 사람이라...
다음 syo님 페이퍼에서는 ‘걸 클래식 컬렉션 1‘의 감상을 읽고 싶네요^^

syo 2020-06-15 07:23   좋아요 1 | URL
앤 졸귀.... 재밌던데요? ㅎㅎㅎ

2020-06-16 0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20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Angela 2020-06-16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이 이렇게 서정적이시라니 몰랐어요.

syo 2020-06-20 11:2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 중2병은 불치입니다.

2020-06-18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20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