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1

 

올해 여름은 두 걸음 다가왔다가 한 걸음 물러나는 식으로 오려나 보다. 비 그치고 새 소리 들리는 가운데 사뭇 쌀쌀하다.

 

 

 

2

 

일은 일이고 삶은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때 세상은 지금보다 간단했다.

 

 

 

3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특산종 관목의 이름과 같은 표기의 이름을 가진 사람을 오래 사랑했었는데, 식물 책을 읽다가 그 나무를 만나면 끝없이 아련해진다. 1속에 1종밖에 없다는 진귀한 그 나무에서는 개나리를 많이 닮은 꽃이 핀다. 나는 그 꽃의 꽃말보다 아름다운 꽃말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벌써 아득해졌지만, 그 사람과 같이 있는 순간은 늘 그 꽃말과 같은 순간이었다. 이제 와 그립다 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생각한다.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떤 꽃말이었는지를.



학명 Abeliophyllum distichum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하지만 오늘은 그 숲에 대해 쓸 것이므로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겨울이 오면 그 숲에 '아침의 병듦이 낯설지 않다' '아이들은 손이 자주 베인다'라는 말도 도착할 것입니다 그 말들은 서로의 머리를 털어줄 것입니다 그러다 겨울의 답서처럼 다시 봄이 오고 ''이나 '우리'나 '엄마같은 몇 개의 다정한 말들이 숲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 먼 발길에 볕과 몇 개의 바람이 섞여 들었을 것이나 여전히 그 숲에는 아무도 없으므로 아무도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박준」 부분 


  

 

4



인종, 젠더, 계급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흑인 여성의 위치가 지니는 특수성이 있고,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란 그 특수성 위에서 발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이 있(어야 했). 언어는 권력의 도구이므로 권력의 중추에서 멀리 서 있을수록 자신의 위치를 설명할 도구는 빈곤하다. 송곳으로 나사를 돌릴 수는 없기에, 그들은 송곳을 내던지고 드라이버를 만들거나, 심지어는 송곳으로 박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나사를 발명해야 한다. 발명의 어머니는 필요라서, 필요는 자기와 닮은 모양의 발명을 낳는다. 그렇게 발명된 언어는 자신의 어머니인 필요와 닮을 뿐더러, 거슬러 올라가 그 필요의 어머니인 억압, 결핍, 박해 등과 닮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다른 사상과 완전하게 닮을 수도, 완벽하게 호환될 수도 없다. 그럴 수 있었다면 도리어 이 책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언뜻, 흑인 여성이 압도적으로 적은 이 사회에 사는 우리가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 관한 독서를 통해 과연 무엇을 얼마나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 의심하게 한다.

 

어느 나라의 법도 모든 특수한 상황을 상정하지는 못한다. 조문의 유추 적용과 유사판례를 통해 특수성에 대응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어떤 특수성을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다른 특수성을 위한 혜안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치면 세상 모든 텍스트가 유추와 적용의 양분이 된다. 굳이 이 책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이 책의 가치는(아직 절반도 못 읽었으나), 그러니까 흑인 페미니즘 사상과 상당히 멀리 서 있는 한국인-남성으로서 이 책을 읽어 볼 명분은,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세한 균열을 조율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을 확인해보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경험상 그 조율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고, 늘 망했다.

 

흑인 여성과 한국 여성이 겪는 억압의 닮은 모습에 집중하여 여성 일반이 겪는 고통에 대한 결론으로 나아가게 되면, 어쩌면 그것은 반쪽짜리 독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면, 이 책을 흑인 여성이 겪는 경험의 특수성에 대한 증언으로만 인식하고 오늘날-우리 사회를 위해 변용할 만한 여지가 그다지 없는 책으로 치부하며 몇 개의 밑줄만 건지고 돌아선다면 당연히 그것도 온전한 읽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줄을 잘 타야 한다.

 

요는, 이 책은 읽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껏 우리가 읽어왔던 다른 책들에 비해 학문적으로 난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얘들은/도 이래?” 양쪽 모두가 위태로울 수 있어서.

 

 

 

 

--- 읽은 ---



42. 더 저널리스트: 카를 마르크스 / 카를 마르크스 : 98 ~ 190

 

평전을 읽어보면, 마르크스는 거의 모든 장르의 글쓰기에 한 번쯤은 도전해본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문학 쪽으로는 그다지 큰 소질이 없었다는 평이 있긴 한데, 읽어보진 않았지만 글쎄, 수제비 맛집에서 평균 이하의 칼국수를 먹기는 힘든 법이니까. 어쨌든 마르크스는 정말 글을 잘 쓴다. 솔직히 syo가 마르크스에 흠뻑 빠진 것은 그의 사상보다 문장에 두들겨 맞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다. 마르크스의 저널리즘은, 아니 저널리즘 속의 마르크스는 당연히 철학서나 정치 팸플릿 속의 마르크스보다 담백하고 직선적이다. 그것은 저널리즘이 어떤 장르인지(어떤 장르여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훌륭한 검객이라면 찌르는 칼로도 벨 수는 있겠으나, 강한 적을 맞닥뜨리면 찌르는 칼로 찌르고 베는 칼로 베어야 이긴다.

 

 

 

43. 쓰레기책 / 이동학 : 138 ~ 273

 

어마어마한 추천에 비해 어마어마한 통찰이 있지는 않다. 문제의식은 뚜렷하나 한칼이 없다. 저자는 눈을 뜬 사람이지만 다른 이들의 눈을 뜨게 할 힘은 조금 부족하다. 훌륭한 운동가가 될 수는 있겠지만 매혹적인 선동가가 되기까지는, 앞서 나갈 수는 있겠으나 끌고 나갈 수는. 좋은 책이지만 매력적인 책일 수는.

 

 


 44. 대도시의 사랑법 / 박상영 : 181 ~ 341

 

syo의 사랑은 대부분 대도시에서 시작해 대도시에서 끝나거나 작다고 해봐야 광역시 규모에서 끝나거나 했다. 대도시에서 사랑한다고 대도시의 사랑법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모양.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다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닌 모양. 특정한 모양의 사랑이 대도시의 사랑법을 혼자 독점하거나 전유를 주장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대도시에서 시작하는 사랑과 대도시에서 끝나는 사랑들, 특히 끝나는 모든 사랑들을 찬찬 들여다보면서, 어쩌면 끝나기 위해서 시작하는 것이 대도시의 사랑이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해보면서, 어떻게든 대도시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대도시의 사랑법이 진짜 있는지는 몰라도, 사랑법의 대도시는 저기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내 머리맡에 앉은 저 대도시에는 정말 사랑도 사랑법도 너무 많다. 이러니 내가 저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 읽는 ---

식물의 책 / 이소영 : ~ 154

로쟈의 한국 현대문학 수업 / 이현우 : ~ 115

인생이 왜 짧은가 / 세네카 : ~ 130

대량살상 수학무기 / 캐시 오닐 : 123 ~ 236

흑인 페미니즘 사상 / 패트리샤 힐 콜린스 : 89 ~ 177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 정희진 : ~ 92

스피노자 / 스티븐 내들러 : ~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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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0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1 0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0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1 0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0-05-10 16: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에서 삶으로 회복하는 시간을 만들기 어려운 요즘이네요. 왜 이렇게까지 간단치가 않은 건지. 이 어려운 걸 간단하게 풀고/혹은 풀지않은 채로 고단히 살아가는 인류는 어때먹은 종족인 건지. 가끔 눈물나요 ㅠㅠ..

syo 2020-05-11 07:24   좋아요 0 | URL
울지 마... 울지 마... ㅜ_ㅡ

또 봄. 2020-05-19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말을 알고 나무이름을 보니 달리 느껴지네요.
syo님 글은 마음을 간지럽게 하는 뭔가가 있어요.
멋지심!

syo 2020-05-20 18:36   좋아요 0 | URL
또봄님 오랜만입니다.
저도 자주 못 들락날락하느라 더 뜸했네요. 시국은 이래도 봄은 좋응 봄이지요?? 건강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