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도 늘 작은 마음이 있어

 

 

1

 

왜 책을 읽느냐고 이젠 아무도 물어오지 않는다. 그런 질문도 어지간할 때 받는 건가 보다. 요즘도 책 많이 읽느냐고 이젠 아무도 물어오지 않는다. 요즘도 책 많이 읽지? 라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해주면, 몇 권쯤 읽느냐고 이젠 아무도 물어오지 않는다. 그냥 굉장히 배부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우린 한 권도 안 읽지만 너라도 읽어서 우리 그룹의 평균 독서량은 언제나 든든하구나야- 하는 표정 같다. 좋은 책 좀 추천해달라고 이젠 아무도 물어오지 않는다. 장르나 주제를 정하지 않은 채 포괄적으로 던지는 책 요청은 상당히 귀찮고, 번거롭고, 품이 많이 드는 일이라서 공짜로 해주기엔 너무 아깝다. 그래서 아예 저런 질문을 원천봉쇄하는 쪽이 현명하다. , 최근에 벤야민하고 아도르노 1928년부터 40년까지 주고받은 서간들을 모아 놓은 책이 한 권 나왔어. 나도 아직 읽어보진 않았는데, 꽤 흥미로울 것 같지 않아? 꽤 흥미로울 것 같지 않은 표정들이었다. 이야기는 재빨리 주택청약 가점과 관련된 주제로 전환되었다. syo는 유유히 커피를 마시며 속웃음을 지었다. 그게 지난 8월이었다. 석 달 가까이 되어 다시 만난 친구들은 더는 책 추천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차피 뭘 불러줘도 너희는 읽지 않을 것이고, 뭘 불러줘도 그 이상을 나는 읽을 것이다.

 

꽤 오랫동안, 이렇게 얄팍한 방식으로 자존심을 세워가며 친구들을 만나 왔다. 나도 뭐 하나 남다른 구석이 있어. 자본이 그것에다 가격은 매겨주지 않지만, 헛살지 않았음을 증명할 뭔가를 나도 하나쯤 쥐고 있어.

 

생각해보면 참 좋은 애들이다. 어차피 진짜로 책에 관심이 있어서 저렇게 물어오는 게 아니라 그저 가진 것도 잘하는 것도 없는 나 기죽지 말라고, 어깨 펴라고, 당당하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잘난 척 한 번 시원하게 때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임을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안다. 내 친구들은 이렇게 어른이다. 나만 얼른 어른이 되면 된다.

 

 

나의 일기장이 사랑의 기록이 되었으면 좋겠다내가 사랑하는 것들나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세계내가 생각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만 일기에 적고 싶다나의 열망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여름과 가을을 향해 가지만아직은 따뜻한 태양과 봄기운 밖에는 느끼지 못하는 새싹과 같다비록 지금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으나 나는 무언가가 되기 위해 여물고 있는 나 자신을 느낀다그러나 느끼고만 있을 뿐 그 정체를 알 수는 없다단지 땅이 기름지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다지금이 나에게는 파종기다이제 싹을 틔어도 좋을만큼 충분히 오래 땅속에 묻혀 있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소로의 일기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대체 우리가 어디를 향해 걷는지가 왜 중요하지 않겠는가다만 길의 끝에서 나부끼는 깃발종착지에 대한 거창한 소문들이 지금의 걸음걸이를 얼마나 망쳐 놓았는지 알 것 같다급작스레 찾아온 노안처럼 먼 데를 보다가 정작 가까운 곳이 보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먼 데 소문에 귀를 기울이느라 옆에서 소매를 붙들고 말 건네는 존재가 있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병권묵묵

 

 

 

 

2

 

사랑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면 사랑이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한 진실을 말하여 준다. 그러나 그 진실을 궁금해 하는 것이 오직 나뿐일 때, 터진 사랑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건 빠를수록 좋다. 사랑의 말은 파괴의 말이다. 어쨌든 사랑이 말을 시작하면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관계는 한 번은 반드시 부서진다. 내 사랑이 말로 당신을 겨냥하는 순간 우리는 즉시 지금의 우리와는 다르게 된다. 우주의 에너지는 반드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관계는 머지않아 반드시 이것 혹은 저것이 되고 만다. 사랑의 주인이 젊고 노련하지 못할수록 사랑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랑의 일을 사랑에게 내맡기는 것은 대개 실패 쪽으로 길을 잡는 일이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묶어 말이라고 하자. 말과 말을 둘러싼 정탐, 실험, 정교한 예측이 필요하다. 말과 사랑의 변증법이 이렇다. 사랑 없는 말은 빈약하거나 사기다. 말 없는 사랑은 섣부르거나 위험하다. 사랑 없는 말은 해선 안 되는 거짓말을 하게 만들고, 말 없는 사랑은 하면 안 될 때 멍청한 말을 하게 만든다. 어느 쪽이나 실패다. 단지 유예되는지 즉시 도착하는지 하는 차이가 있을 뿐. 사랑이 할 말이 없을 때, 말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싶을 때, 말로 하여금 사랑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너무 무리한 약속을 하고 온 것 같다

그때 사랑에 빠져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미친 약속을 해버렸다

문정희미친 약속〉 부분 

 

 

3



자꾸만 실수를 한다자꾸만 잊어버린다재윤이 정확히 어떤 곳에 있는지를너는 저쪽이니까너를 응원한다고 애써 선의로 건넨 것이앞질러버린다잘못 짚어서오히려 건드려버리고 만다재윤은 이제 달라졌으니까 어떤 건 겪지 않아도 될 거라고 나는 자꾸 생각해버렸지만그렇지 않았다재윤은 '달라지는 중'이었고거기에는 이쪽과 저쪽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나는 어떤 것들이 재윤에게 괜찮고 어떤 것들이 괜찮지 않은지 여전히 어이없을 정도로 잘 몰랐다.

윤이형마흔셋

 

다른 것들, 모르는 것들을 집요하게 그러나 소란스럽지 않게 두드리려는 태도, 그 열심, 단단한 의지 같은 것들이 빛난다. 소설 쓰기는 어쩌면 이름 모를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호명하는 데 의미가 있는 작업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쓰는 이들은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는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자기 손끝에서 만들어 자기가 가지는 혜택을 부여받은 사람들 같다. 쓰기 전의 윤이형과 쓰고 난 후의 윤이형은 얼마나 다른 사람일까. 나는 끝내 그것을 잘 모를 것이다. 어이없을 정도로 잘 모를 것이다.

 

 

 

--- 읽은 ---

+ 소로의 일기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258 ~ 400

+ 지적 생활의 설계 / 호리 마사타케 : ~ 255

+ 사서 / 옌롄커 : 383 ~ 538

+ 마르크스 철학 연습 / 한형식 : 82 ~ 163

+ Do it! 점프 투 파이썬 / 박응용 : 215 ~ 356

 

 

--- 읽는 ---

- 조관희 교수의 중국현대사 / 조관희 : ~ 79

- 개념과 논쟁으로 배우는 통계학 / 심규박 외 : ~ 169

- 타자와 욕망 / 문성원 : ~ 77

- 비트겐슈타인 철학에의 초대 / 박병철 : ~ 152

- 작은마음동호회 / 윤이형 : 130 ~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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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5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25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25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25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10-25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다 비밀댓글 뿐일까요?

syo 2019-10-25 23:4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개인적으로 비댓이 스타일이신 분과, 비행기를 너무 쎄게 태우려다보니 민망해서 비댓으로 돌리신 분이 계세요. 비밀이지만 아름다운 댓글들입니다. ㅎㅎㅎ

다락방 2019-10-25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술 마셨게요 안마셨게요?

syo 2019-10-25 23:51   좋아요 0 | URL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있었어요?? ㅎ

stella.K 2019-10-26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만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전 이제 누구한테 책 선물하는 게
좀 어색하더라구요.
내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읽기를 강요하는 건 아닐까.
좋아할까, 시간 뺏는 건 아닐까, 이미 아는데 또 선물하는 건 아닐까 등등으로 해서.
하긴 남한테 하는 선물은 항상 고민스럽더군요.

syo 2019-10-27 21:48   좋아요 0 | URL
저는 책 선물 하는 일 자체가 잘 없지만,
할 때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하는 편입니다.
어차피 상대가 이 책을 읽을 거라는 기대 같은 걸 하지 않거든요.
읽은들, 제가 좋을 일도 아니고 남아도 읽는 사람한테 남는 건데요.
팔자소관이지요......

2019-10-29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1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