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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개의 테마로 읽는 페미니즘 도서목록 - 증보판
말과활 아카데미 엮음 / 일곱번째숲 / 2019년 4월
평점 :
품절
1
『슬픈 열대를 읽다』에서 양자오는 리스트가 양도할 수 없는 동시에 양도하지 않는 독보적인 역할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의 베트남전 기념비다. 이 기념비는 어떤 기념비인가? 상단에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미국 군인의 이름이 가득 새겨진 커다란 돌비석이다.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미국 군인'은 이 돌비석이 기념하는 대상이자 그들의 공통점에 대한 묘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를 통해 그들이 살아 숨 쉬던 개체였다는 사실은 축소되고, 그들은 더 이상 진정한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게 된다. 하나의 묘사, 하나의 거대한 분류 속에서 그들은 저마다의 개별성을 잃어버린다. 이에 대한 저항감에서 사람들은 개개인의 이름, 수십만 개의 이름으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리스트를 커다란 돌판에 새긴 것이다.
이는 리스트의 특수한 의의이자 작용이다. 그것은 개체와 차이를 보존하는 동시에 두드러지게 한다.
_ 양자오, 『슬픈 열대를 읽다』, 178쪽
2
syo는 리스트 만들기를 좋아하는 아이에서 역시 그런 어른으로 자라났다. 스케치북 한 장을 북 찢어 방바닥에 내려놓고 그 앞에 엎드린 어린 syo는 시에 담으면 좋을 것 같은 예쁜 낱말들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하늘, 별, 앵두, 모래, 도랑, 아기, 강아지풀, 순돌이(진돗개)……. 대학에 가면 하고 싶은 일들의 리스트를 만들던 고등학생 syo도 있었다. 뜻밖에 공책 한 바닥도 다 채우지 못했던 그 리스트는 평범하고 무난한 희망사항들로 가득한 색채 없는 청소년 인생의 단면이었다. 밤이 내리면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들판이 늘어선 고장에서 경계를 서던 군인 syo는, 남몰래 총구를 내리고 사랑하는 작가들의 리스트를 만들기도 했다. 주욱 늘어놓은 그들의 이름은 별빛을 받으면 그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처럼 빛났다. 별 하나에 김연수와, 별 하나에 쿤데라. 별 하나에 문태준과, 별 하나에 장 그르니에. 그리고 그 긴 리스트의 끝자락에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석 자.
3
취향과 생각을 드러내는데 리스트만큼 직접적인 장르가 있을까. 리스트를 만들면서 거짓말을 하기란 정말로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리스트에는 ‘약간의 거짓’을 ‘아직 달성되지 않았을 뿐인 진실’로 바꾸어주는 착한 힘이 있다. 좋아하는 작가의 리스트를 보여 달라는 말에 신이 나서 베르나르 베르베르, 기욤 뮈소, 히가시노 게이고와 같은 이름들을 적어나가다, 문득 좀 있어 보이고 싶은 욕심이 들어 아직 읽어보지도 못한 보르헤스를 슬쩍 덧붙였을 때, 그것은 귀여운 거짓말인 동시에 마음의 짐이 되어 보르헤스를 향해 나를 한 걸음이나마 옮겨놓기도 한다. 아무리 폼 나더라도, 죽는 날까지 평생 읽어보지 않기로 작정한 작가의 이름을 굳이 골라 써넣는 일이 있을까?
이미 지나온 것들과 앞으로 지나가야 한다고 믿는 것들의 경계선이 부드럽게 녹아 있는 한 잔의 커피. 세상의 모든 리스트는 영수증이면서 계산서인 셈이다.
4
그리고 어떤 리스트를 만났을 때 내가 그것을 사랑할 수 있다면, 높은 확률로 그 리스트의 주인 역시 사랑할 수 있다고 syo는 믿는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리스트가 지니는 가장 매력적인 기능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일단 명함을 교환한 다음(누구누구입니다, 무슨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다), 즉시 무수한 리스트를 교환하기 시작한다(쉬는 날엔 뭐하세요, 영화 좋아하세요, 무슨 커피 드실래요, 패션 센스가 있으시네요….) 그렇게 서로의 리스트를 맞대어보다 덜컥 교집합이 발견되는 순간 대화의 봇물이 터지고 호감의 홍수가 밀려든다.
리스트의 교환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미묘한 부분까지 조금 더 상세하게 작성된 리스트를 서로에게 조심스레 내민다(그러면 호퍼 그림도 좋아하시겠네요, 그 가사 전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솔직히 그 부분만큼은 혐오 정서가 은근히 깔려 있는 것 같아요, 여전히 대단하지만 어쩐지 하루키의 불꽃은 점점 사그라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어떻게 그 대목에서 유채영의 <emotion>을 집어넣을 생각을 했을까요! 완전 대단하지 않아요?) 이즈음에서 우리는 서로의 교집합이 아니라 차집합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신기한 만큼,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도 신기하다. 그건 결국 모든 게 신기하다는 뜻이다. 즉시 이 순간이 신비해진다. 이 사람과 내가 앞으로 어떻게 만나 무엇을 함께할지는 확실한 게 없지만, 최소한 서로의 리스트를 열어젖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충만하다.
5
직접 리스트를 만드는 것이 즐거운 만큼, 타인이 만들어 놓은 리스트를 정성스레 옮겨 적는 일 역시 사랑할만하다. 두 시간에 걸쳐 찬찬히 옮겨 적어보니, 이 리스트는 12개의 테마와 부록까지 포함해 247권의 ‘도서목록’과 402권의 ‘함께 읽어보면 좋은 책들 목록’을 제공하고 있었다. 10권 남짓의 중복이 있었다. 옮기기만 해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그러나 리스트를 열어준 이를 위해 가장 알맞은 보답은 이쪽의 리스트를 열어주는 것이다. 내가 연 리스트는 아직 공백으로만 가득하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우리의 행복한 시간을 위해 모든 리스트는 끝없이 채워져야 한다.
연필로 그대로 옮겨 적은 리스트 속 이름들을 지울 수 없는 볼펜으로 하나하나 덧칠하는 일이 기다린다. 그렇게 내가 리스트를 제대로 만드는 동안 아마 새로운 책들은 또 나오고, 어쩌면 새로운 리스트가 다시 등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새로이 스케치북을 찢어 방바닥에 놓고 엎드려 새로운 책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겠다. 아름다움이 될 낱말들을 고르느라 행복한 고민에 빠진 아이처럼.
아마도 이런 지난한 순환이 끝도 없이 이어지지 않을까. 리스트는 늘 열려있으므로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일은 독서의 본성이다. 끝내 물은 고이지 않겠지만, 항아리 주변에 깔린 잔뿌리들이 몰래 그 물을 받아 마실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작은 꽃대가 올라오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잠깐 꽃이 피었다 가기도 하고, 그러지 않을까. 늘 그럴 수는 없더라도, 신비롭고 충만한 순간을 가끔씩은 만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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