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여름이 있었다
1
열대야가 물러가고 있다. 복숭아도 함께 물러가겠지. 시원하고 섭섭하다. 여름을 보내는 마음이 늘 그렇다. 지옥으로 좀 꺼졌으면 싶다가도 막상 밤이 서늘해지고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방 안으로 들어서면 먹먹해지기도 한다. 하루가 멀다고 다투던 친구가 전학가고 나면 일상이 지나치게 조용해져 가끔 그 친구와의 시끄러웠던 시간이 그리운 것처럼, 여름의 몸통과 부대끼며 흘렸던 땀의 양만큼 떠나가는 여름의 뒤통수를 보는 눈이 아련해진다. 이제 얼음을 얼리지 않을 것이다.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긴바지를 입을 것이다. 노동의 강도가 낮아진 선풍기가 한숨 돌릴 것이다. 밤은 조금씩 빨리 찾아와 한소끔씩 오래 머물다 돌아갈 것이다.
여름은 무엇을 하기에도 적당한 계절이 아니었다. 선선히 강변을 걷기에도, 열 권 넘는 책을 가방에 넣고 이곳저곳의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뿌리기에도, 그리고 사랑을 나누기에도. 뜨거운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뜨거워지는 일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여름은 뜨거움의 과잉이어서 도리어 상성이 좋지 않았던 것일까. 사막에 숨겨놓은 폭탄처럼, 용광로 옆에 둔 선인장 화분처럼, 더위를 탓하며 하려던 무언가를 하지 않기로 결정할 때마다 오히려 나는 내가 더운 인간이었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그런 인간은 가을과 겨울에 힘을 낸다. 이 여름이 끝나면 아마도 나는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 같다. 아침이면 출근이라는 것을 하고, 일터에선 집을 생각하며 하루를 버티겠지. 고단한 하루의 증인처럼 구겨진 옷을 의자 등받이에 걸어놓고 앉아 혼자서 맥주 한두 캔을 마시며 테이블 위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이 책들은 언제 다 읽을 수 있을지를 잠깐 걱정하다가 이내 밀린 빨래를 하겠지. 달력을 보고 재활용 쓰레기, 음식물 쓰레기를 내놓는 날을 가늠하겠지.
삶의 2막이랄까, 후반전이랄까. 어떤 의미에서 이번 여름은 마지막 여름이겠다. 사실 모든 여름은 저마다 마지막 여름이지만. 모든 여름이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여름이지만.
비가 많이 나린다. 여름의 끝자락이 녹아난다.



정말 원하지 않는 일이지만 저녁에는 보통 늘 혼자 지내. 베를린에 가면 물론 네게 편지할게. 지금은 그 일과 나에 대해서 어떤 것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계제가 아니구나. 나는 말하는 것과 달리 쓰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말하고, 생각해야 할 것과 달리 생각하고, 그러다 보면 끝을 모르는 어둠으로 한없이 빠져들게 돼.
_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의 엽서』
우리가 어떤 시점을, 명확히 구별되면서도 특별한 순간에 일어난 일과 같은, 자신의 존재 속으로 파고드는 돌파구로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어쩌면 그 기억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순간이나, 우리 자신도 언젠가는 죽게 될 거라는 통찰의 순간, 눈에 대한 사랑은 실제로는 어떤 급작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항상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절대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_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어떤 경우에도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모습을 바꿀 뿐이다. 현실 속에 자기 집을 짓지 못하거나 집을 지을 수 없게 된 사람은 허구 속에라도 자기 집을 지어야 한다. 적응하라, 그렇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 그 체제에서 기회가 없어진 사람은 다른 체제를 찾는다. 희망이 없으므로 희망하는 것이다. 허구, 이야기, 그 이야기의 형식인 책들에 대한 탐닉.
_ 이승우, 『소설을 살다』
2
새벽 두 시, 주방 식탁에 앉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을 때 어머니가 실크 소재의 잠옷을 입고 슬리퍼를 신은 채 대리석 바닥에 소리 나지 않게 조심조심 걸으며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어머니는 잠에서 덜 깨 반은 감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안 자니? 차 한 잔 마실래?"
"네, 고마워요." 나는 계속 자판을 두드리며 말했다.
어머니는 쿵쾅거리면서 물 부은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려놓고 비스킷을 찾느라 선반을 뒤졌다. 주전자의 물이 끓기 시작하자 정적을 뚫고 삑삑 소리가 났다. 어머니는 찻잔 두 개를 들고 내 옆에 앉았다. 어머니는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실비아가 안됐구나." 어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네?" 내가 건성으로 물었다.
"기껏 가족끼리 연휴를 즐기러 왔는데 엄마는 코빼기도 못 보잖니." 어머니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식탁에 놓여 있는 신문을 뒤적거렸다.
나는 자판 두드리던 것을 멈추고 피로로 따끔거리는 눈을 비볐다. 엄마가 농담을 하는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내게 그런 말을 하다니? 갑자기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무슨 뜻이에요?" 나는 위험할 정도로 낮게 으르렁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실비아가 안됐잖아. 별 뜻은 없어." 대답하는 어머니의 눈은 여전히 신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실비아가 널 그리워하는 게 느껴지더구나."
어머니에게 비수 꽂을 말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전투적인 마음이 싹 가셨다. 우리 대화가 사실은 실비아에 대한 것이 아닌 나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함께 해 주지 못한 시간들을 간접적으로 사과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홀짝이며 말했다. "나도 자길 그리워한다는 걸 실비아도 알아요." 어머니는 내가 기사를 마무리할 때까지 조용히 신문을 읽으며 옆에 있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위층으로 올라가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250-251)
_ 스테파니 슈탈, 『빨래하는 페미니즘』
가족은 짐이라고 생각한 시간이 남들보다 길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시켜주지 않은 아버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동시에 아무 말도 통하지 않는 어머니. 그런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 불가능하게 박살났을 때쯤 겨우 말이라는 걸 하기 시작할 만큼 나와는 터울이 많이 져서 동생인 동시에 딸이었던 여동생. 그리고 태생이 고집 세고 잔정도 없으며 가족이건 결혼이건 사람을 한 공간에 묶어두는 모든 제도가 감정의 결핍이나 과잉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 것들인지 오래 보고 자란 나. 스무 해 넘게 쌓아놓은 사회적 기반을 깡그리 잃고 시골에 은거한 아버지와, 완치 판정이 내려진다는 수술 후 5년의 기간을 아직 다 못 채운 어머니와, 이제 겨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동생을 다 버려둔 채 대학에 간답시고 혼자 서울로 올라갈 때, 솔직히 홀가분했다. 어차피 내가 돈을 벌어 줬던 것도 살림을 했던 것도 아닌데, 나 없어도 알아서 잘 굴러 가겠지.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새로 만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새로 만난 과목들을 공부하고, 책을 읽었다. 시를 쓰고, 연애를 했다. 꿈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했다. 집에는 아주 가끔 전화를 했다.
이제 아버지는 없고, 동생은 혼자서도 잘 자라 나보다 훨씬 훌륭한 어른이 되었다. 가족에 대해서라면 멍청한 아이로 태어나 멍청하게 자랐으며 그 멍청함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나는, 여전히 가족이 서툴다. 특히 엄마가. 우리는 늘 서로의 대화에서 어떤 행간도 읽어내지 못한다. 엄마에게로 가는 내 말의 표면은 유난히 거칠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하고 싶은 욕심과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싶은 욕심 사이에서 내가 늘 갈팡질팡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이게 내 탓임을 느낀다. 배우지 않았고 배우려 하지 않아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다정하고 한 사람에게만 모질다면, 거기엔 다른 이유가 없다. 태만과 성급함. 다정하기를 태만하고 성급하게 모질기. 그게 다다. 나는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질 때만 기다린다면 그건 얼마나 형편없는 짓인가.



멸치 상자에서 작은 새우를 몇 개 골라낸 일로 기뻐했다 팬에 기름을 두르지 않고 약한 불로 볶아내면 비린내가 가신다 거처를 뒤집을 때마다 나는 영원이라는 말을 떠올렸지만 연민과 자생과 녘이라는 말을 자주 골랐다 천식약을 늘 챙겨 먹던 당신은 이가 무를 것이고 내일은 온종일 바닷바람을 맞다 방으로 돌아오겠다 잔기침이 나오려 할 때마다 목을 가다듬어 당신이 내던 기침 소리를 흉내 내보면 곧 돌아올 메아리가 반갑기도 할 것이다
_ 박준, 「멸치」 전문
시간은 흐르는데 더 나은 인간이 되기는커녕 예전보다 못한 내가 될까 봐 겁난다. 그래서 느리게라도 계속해서 읽고 생각하고 듣고 보고 쓴다. 일단 멈춘다면 예전보다 못한 내가 될 게 뻔하니까. 시간은 순환한다는 말은 위로일 분이다. 시간은 앞으로 간다. 우리는 분명히 지금보다 늙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이 시간을 명백히 살아내야 한다. 나는 나답게 당신은 당신답게.
_ 조경란, 『소설가의 사물』
그녀는 언젠가 내게,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어떻게 마음을 다독이며, 매일 그런 슬픔 곁에서 지낼 수 있느냐고. "당신은 그것 때문에 우울해지지 않아?" 그녀가 언젠가 내게 물었다.
"아뇨." 나는 말했다. "오히려 반대예요. 그건 나를 행복하게 하지요."
_ 앤드루 포터, 「머킨」
--- 읽은 ---

+ 빨래하는 페미니즘 / 스테파니 슈탈 : 276 ~ 442
--- 읽는 ---



= 마르크스 자본주의의 비밀을 밝히다 / 조셉 추나라 : ~ 105
= 이별의 푸가 / 김진영 : ~ 116
= 정신현상학 / 김은주 : ~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