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가의 탄생

그레그 스타인메츠 지음 / 노승영 옮김 / 부키 / 2018

 

농담. 자본가를 식별할 수 있는 21세기적 방법 : 당신은 자본가가 훌륭하다고 생각하세요? 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변한 사람 가운데 진심인 사람.

 

자본가의 이미지를 둘러싼 전투는 그친 적이 없다. 자본은 정말 가치를 생산하는가? 그들은 노동자의 고혈을 빨아 먹는가? 그들은 정말 그런 어마어마한 대접을 받을 만한 생산성과 창의성을 갖추었는가? 그렇지만 자본가를 옹호하건 비난하건 간에, 그들이 비윤리적 수단 없이 순수한 노력으로 자신의 부를 유지한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이 아직 남아 있을까? 그 부가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혐의는 짙다. 이게 다 자본가에 대한 음모라고? 자본가에 대한 경험이겠지. 그리고 그런 경험은 600년 전에도 가능했다고 이 책은 말한다.

 

야코프 푸거라는 거물이 있었다. 쌓아올린 부와 그 부를 헐어 쌓은(혹은 무너뜨린) 것들의 스케일에 비해 덜 알려진 인물인 푸거는, 자본가의 아들로 태어나 자본가로 살다 자본가인 조카에게 자본을 물려주고 자본의 성전에 자본가의 표본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아주 명쾌한 사람이었다. 돈으로 가는 길에 늘 해답이 있었다. 광산? 독점하면 되지. 파업? 자르거나 억압하면 되지. 고리대? 성서해석 바꾸게 하면 되지, 돈으로. 황제? 교황? 만들면 되지, 돈으로. 종교개혁? 아니 그럼 어떡해, 대주교 하나 만드는데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데. 루턴가 루튼가 하는 수도사 나부랭이가 그걸 아냔 말이야. 투자금 회수할 수 있게 된다는데 교회가 면죄부를 팔든 면사포를 팔든 내가 알 바냐고 지금.

 

어쩌면 역사의 계보에 신의 시대, 인간의 시대, 과학의 시대 같은 건 사실 찾아온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돈이 인간과 인간의 사이를 매개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지어진 모든 시대가 돈의 시대였던 걸까. “The Richest Man Who Ever Lived”라는 원제를 버리고 자본가의 탄생이라는 제목을 선택한 한국어판의 과감성은, 야코프 푸거를 어느 한 시대의 숨은 주역으로 보기보다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자본가라는 이미지의 원형으로 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게 아닐까 한다. 15-16세기를 살던 어느 아우크스부르크의 돈 많은 남자 이야기를 오늘날에도 읽어 볼만한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중세 유럽의 왕위 계승 방식, 용맹공, 미남왕, 대머리왕, 광녀(…….) 등등의 별명으로 겨우 구분 가능한 루이, 샤를(카를), 필리프 몇 세 몇 세, 뭐 그런 인간들 때문에 복잡하게 꼬인 영국,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지도층의 막장드라마 급 가정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다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알려진 역사의 이면 같은 걸 다룬 책이니까요. , 대항해시대나 종교 개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든 알면 좋죠. 그렇다고 필수는 아닙니다. 몰라도 잘 읽힙니다. 기본적으로 이야기책이거든요.

 


 

모스에서 잡스까지 

동흔 지음 / 뜨인돌 / 2018

 

전화기를 발명한 벨은 사실 전화로 메시지보다는 노래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한다. 가수가 송화기에 대고 노래를 부르면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관객이 수화기에 귀를 대고 그 노래를 듣는 것, 그것이 벨이 생각한 자기 발명품의 참된 쓰임새였다. 반면 에디슨은 자신이 발명한 축음기를 음악 듣는데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에디슨은 축음기를 음성 편지를 보내는 물건으로 계획했다. 그러니까 LP판 같은데 하고 싶은 말을 담아서 택배로 보내면 받는 이가 그걸 턴테이블에 올리고……. 오늘날 전화기와 축음기의 후예들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벨이나 에디슨이나 참 재미있는 양반들이 아닐 수 없다.

 

철학책을 읽다 보면, 특히 전공자가 자기가 전공한 철학자의 사상을 개설하는 책 속에서 자주 만나는 주장이 있다. 이 철학자가 등장함으로써 역사는 그 물길을 틀었다, 이 철학자 이후는 결코 그 이전과 같을 수가 없다, 이 철학자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우리 삶의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운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썩 납득이 쉬운 것도 아니다. 물론 곰이 쑥과 마늘을 먹으며 100일을 버티지 않았으면 단군할아버지가 없었겠고, 그럼 갤럭시s10도 없었겠지. 그렇다고 갤럭시를 쑥과 마늘로 만든 건 아니잖아, 뭐 이런 심정이 되곤 했으니. 하지만 과학이나 기술의 역사를 다룬 책들 속에서, 과학이나 기술은 자기네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정말 압도적인 설득력으로 설명한다. 보통의 독자 입장에서는 어차피 철학이나 과학이나 남의 나라 말 같긴 매한가지고, 그렇다면 피부에 와 닿는 결과물을 들이미는 쪽이 더 재미난 것이다.

 

모쓰에서 잡쓰까지, 쩌는 라임의 제목을 단 이 책은 전신에서 시작해 스마트폰까지 이어지는 20-21세기 통신혁명의 역사를 개괄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통신이라는 말이 너무 좁은 것 같아서 백스페이스를 자꾸 기웃거릴 정도로, 통신혁명은 곧 생활과 인간의 혁명이다. 그 혁명의 기본토대는 어쩔 수 없이 딱딱하고 건조한 과학기술이겠지만, 표면이 우리의 생활과 직접 맞닿아 있기 때문에 그리 먼 이야기로만 느껴지진 않았다. , 이런 장르의 책을 읽겠다고 손을 내밀면 이상하게 N극과 N극처럼 자꾸 미끄러지는 분들께 희소식, 저자 신동흔 선생님은 문과입니다…….

 

파동과 전자기파에 관한 첫 페이지 급 기초지식이 있으면 수월합니다.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대항해시대의 탄생

송동훈 지음 / 시공사 / 2019

 

삼국지를 이미 읽은 syo에게 진짜 삼국지를 가르쳐준 것은 게임 삼국지였다. 일목요연하게도 가르쳤다. 마찬가지로 대항해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제대로 가르쳐준 것은 책이 아니라 게임 대항해시대였다. 방향타를 돌리는 대신 키보드와 마우스를 돌린 것인 만큼 소소하고 쬐끄만 짝퉁스케일이었지만, 어쨌든 제 발로 희망봉을 돌아보고 신대륙을 발견하는 희열을 느꼈다. 동남아에서 후추를 잔뜩 실어와 유럽의 항구에 내다팔며, 옛다 고기에 후추 처먹어라 미개한 르네상스 유럽 것들아, syo 없으면 대체 어쩌려고 그러니 늬들은, 하며 내면으로 위세 부릴 수도 있었다. 모니터 속 2D syo는 거친 파도를 헤치며 지도의 빈 공간을 채워나가는 위대한 항해사였다. 각 대륙 주요 항구의 경도와 위도를 반자동으로 외우고, 지역 특산품의 시세를 간파하여 무역로를 짜고, 삼각돛과 사각돛의 차이를 몸으로 이해했다. 이건, 책은 줄 수 없는 배움이다.

 

그렇지만 책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어쨌든 게임은 게임이고, 예전에 나온 게임일수록 고증이 약한 법. 무엇보다 syo라는 놈이 종횡무진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그런 세상은 실제로 없었잖아.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뭔가 많이 배웠는가? 하면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고 말해야겠다.

 

주제가 대항해시대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미시사라고까지 할 것은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거시 세계사에 비해 더 세세한 내용과 정밀한 관점을 기대하게 된다. 그런 특별한 것은 없었다. 저 시기 유럽사를 다루는 두꺼운 책들에 비해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까 왜 이 책이어야 하는지를 이 책 스스로가 설득해내지 못하고 있다.

 

머리말에서 이 책은 스스로의 필요성을 이렇게 설정하고 있다.

 

대항해시대는 왜 중요할까대항해시대를 왜 알아야 할까그 시대가 낳은 결과가 너무나 심대했고아직까지 진행형이기 때문이다이때 역사의 주도권을 차지한 서구 국가들과 그 후예 국가들이 여전히 선진국으로 인류의 문명을 이끌고 있다그들의 도전과 욕망에 희생된 문명들은 대부분 중후진국에 머물고 있다더 중요한 사실은 지금2의 대항해시대가 시작됐다는 것이다대상은 우주다바다와는 비교가 무의미한 광활한 공간이다인류의 미래다.

 

뒤이어, 미국과 중국, 일본, 인도의 우주개발 진도와, 유명 기업가들의 우주관련 사업 전개를 설명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이 나라 현실이 안타깝다며 개탄한다. 현실이야 현실의 몫이고, 이 책의 구실, 대항해시대를 알아야 하는 이유에 우주를 갖다 댄 것은 허망할 정도로 옹색하다. 작가 선생님도 그걸 아는지 우주는 바다와 비교가 무의미하다는 말을 스스로 하고 있긴 하다……. 다 인정하고, 대항해시대의 역사가 우주를 개발해나가는 과정에 지침이 된다고 치자. 그럼에도 이 책은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이 콜럼버스의 업적을 설명하는 부분은 그야말로 찬사 일색이다. 선견지명, 추진력, 리더십……. 말년에 망한 것은 총독으로서의 역량 부족으로 치부하고 이내 콜럼버스와 이사벨 여왕과의 만남이 인간의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 영원히 회자될 것이라 말하며 꼭지를 닫는다. 그런데 다른 책을 통해 콜럼버스의 개인사를 들여다보면 정말 본받을 데 하나가 없다. 대서양 항로를 예측하기 위해 끊임없이 책을 뒤져보기는 했는데, 일단 된다는 결론을 정해놓고 그걸 옹호하는 데 유리한 자료들만 연구하고 주석을 달았다. 반대의 경우는 스킵. 전형적으로 제 생각에 갇혀 남의 말 듣지 않는 스타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계산이 완전 틀려서, 죽기 직전에 운 좋게 아메리카를 발견해서 겨우 목숨 부지할 수 있었다. 원래 아시아 가려고 출발했던 거니까 우연히(?) 거기에 아메리카가 없었으면 우리 역사는 쪼다의 긴 목록에 또 한 명을 더 추가할 뻔. 갔다 오고 나서는 대놓고 욕망에 불을 켠다. 자기 자리는 물론 지인의 인사까지 청탁. 근데 에스파냐는 얘가 욕심만 많고 깜냥 안 되는 걸 벌써 캐치하고 팽. 그렇게 그의 말년은 허망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가 원주민과 조우하는 대목이다. 그는 원주민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언어가 없다고 단정한다. 그들의 행색이나 천진함을 보고 그들은 유럽으로 데려가 일을 시키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결론. 새로 발견한 이 땅의 이 인간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동물들은 노예. 그리고 그 놀라운 추진력으로 자신의 생각을 현실화시킨다.

 

우리는 대항해시대의 신민이 아니고 우리가 열어나가야 할 우주도 15세기의 우주가 아니다. 우리가 그 미지의 공간에서 무엇을 발견하든, 그것에 대해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는 15세기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건 상식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속도가 무진장에 이른 지금 우리가 콜럼버스의 행적에서 배워야 할 게 있다면 추진력이랄지 모험심이랄지 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콜럼버스가 하지 않은 것들, 콜럼버스가 해서는 안 되었던 것들에 대한 공부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것들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우주시대를 말하면서, 19~20세기의 제국주의적 시각을 차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더 말하지 않겠다.

 

 


로버트 파우저의 도시 탐구기

로버트 파우저 지음 / 혜화1117 / 2019

 

도시란 무엇인가? 시골의 반대말. 그러면 시골은 뭔데? ……도시의 반대말.

 

, 저러면 이제 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참 망하기 쉽다. 내가 사는 공간은 마치 공기 같아서, 매일 보는 거리, 매일 걷는 산책로, 매일 사는 물건들,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가득한 이 도시를, 이 도시의 매일 매일을 나는 잘 모르기 십상이다. 오래 살았다고 저절로 알게 되는 것도 아니다. 도시는 다채롭고 중층적인 자신의 단면을 아무에게나 드러내지 않는다. 좋은 눈, 지치지 않는 다리, 그리고 약간의 사랑이 필요하다. 로버트 파우저 선생님이 가진 그것들이.

 

눈과 다리, 사랑 말고 도시를 알아채기 위해 그가 더 가진 것은 무엇인가. 없다. 이 책이 뜻깊은 이유다. 저자 로버트 파우저는 도시 전문가가 아니다. 그저 도시에서 생활을 이어나가는 사람일 뿐. 이 책 역시 도시정책이나 기술적, 경제적 문제를 다루는 마음 아프고 골치 아픈 책이 아니다. 그저 에세이일 뿐이다(이 책에 나오는 모든 도시가 젠트리피케이션을 앓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긴 한다). 그렇다면 저마다 도시생활자인 우리도 꿇릴 게 없다! ,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두리번, 밖으로 나가보자구요. 그리고 돌아와 알라딘 서재에다 쓰자구요. 내가 사는 이 도시는 말입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도합 25년을 넘게 살아도 나는 아직 대구를 잘 모른다. 게다가 오래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모를 수밖에 없는 것들도 있다. 그럴 때도 역시 이 책이 필요하다. syo는 대구가 이렇게 가능성으로 충만한 곳인지 처음 알았다. 읽고도 믿기지 않는다. 그냥 그런가봉가 하는 중이다…….

 

 


새로운 세상을 공부하는 시간

손승현 지음 / 더난출판사 / 2019

 

들어본 만큼 알게 되어 있다면 온 국민이 그에 관한 세세한 것 하나하나까지 줄줄 꿰고 있어야 마땅한 것이 4차 산업혁명이다. 그런데, 그게 뭔지 아시는 분?

 

그런 분이 있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사실 그게 몇 차인지조차 합의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명망 떠르르한 사람들은 아직도 싸운다. 그 싸움 속에서 뭔가 생긴다면 그것은 그들의 점점 높아지는 명망뿐, 구름 아래 사는 우리들은 여전히 4차 산업혁명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 뭔지도 모를 것들이 떼로 밀려와 내 일자리를 쓸어갈 것만 같아서 불안하기만 하다. 언론 놈들도 뭔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어느 기사를 보면 법조인이 제일 빨리 없어질 직업 탑 5안에 들었는데, 다른 기사에는 죽어도 안 없어질 5대 직업 안에 그게 들어 있다. 뭐지, 이 혼란의 구렁텅이는?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렇게 되지? 젠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난 당최 뭘 해야 하지?

 

일단 긴장을 풀라고 이 책은 말한다. 4차 산업혁명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빅 데이터는 굉장히 4차 산업혁명적이다. 그래서 저자는 4차 산업혁명의 실체를 4차 산업혁명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구글 트렌드 빅 데이터를 이용한다. 그 결과, 한국인들이 ‘4차 산업혁명92번 검색하는 동안 영국인들은 8, 캐나다인들은 6, 미국인들은 고작 5번 검색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뭐야, 얘 우리나라에서만 핫해? 실체 없어?

 

그렇지도 않다. 저자는 이번에 아마존과 교보문고를 검색해 관련 도서가 얼마나 출간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우선 4차 산업혁명(아마존에선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을 때려 넣으니 교보에서 657권의 책이, 아마존에서는 꼴랑 22권의 책이 검색되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점점 얘가 한국에서만 뜨겁다는 혐의가 짙어진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로 꼽히는 기술들을 검색창에 때려 넣은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 빅데이터(Big Data)를 검색하자 아마존에서는 3000, 교보에서는 673권이 찾아진다. 인공지능의 경우 아마존에서 2만 권이 잡히는 동안 교보에서는 645권의 책만 찾아볼 수 있다. 로봇은 3000 486, 사물인터넷은 610 321, 3D 프린팅은 557 120이라는 검색결과를 보인다. 즉 우리나라는 이놈의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 자체가 붐을 일으키자 벌떼같이 책을 내놓은 반면, 그 기반기술에 대한 정보축적량은 현저할 정도로 적다는 이야기다. 이쯤 되면 이 주제는 자기계발서, 힐링 도서를 뒤이은 출판시장의 새로운 먹거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4차 산업혁명 시대라는 말의 거품을 걷어낸 다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이 책이 드디어 말하기 시작한다. 그게 뭐냐면 바로…….

 

- 끝 -

 

끝이래놓고 덧붙이는 잔잔한 오류. 166쪽에서 18세기 말 19세기 중반의 산업혁명 시대의 인클로저를 이야기하며, 토머스 모어가 양은 온순한 동물이지만 영국에서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로 당시의 상황을 개탄했다고 언급합니다. 그렇지만 토머스 모어는 16세기 사람입니다. 인클로저는 역사를 통틀어 한두 번 띡 벌어지고 끝난 일은 아니었지만, 크게는 두 번으로 보는 듯합니다. 그 중 첫 번째가 토머스 모어가 저 말을 하던 시대였고, 두 번째가 산업혁명 시절이지요. ‘당시의 상황은 마르크스가 지탄할 수는 있어도 토머스 모어가 개탄할 수는 없었겠네요.

 

 


길 위의 독서

전성원 지음 / 뜨란 / 2018

 

진부한 것들은 멸종이 답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것 같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식상함은 한없이 죄악에 가까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하나의 길로 비유하는 오래된 클리셰가 여전히 생명력을 뽐내는 것은, 길과 인생 사이에 진부함이 도저히 오염시킬 수 없는 거대한 유사성이 있기 때문일까?

 

그렇지만 정말로 이라는 표현을 붙이기가 적합하지 않은 정박의 인생만 살아온 사람도 있다. syo가 그렇다. 인생길이라는 말은 습관적으로 쓰지만, 사실 내가 있는 곳은 늘 거기서 거기였다. 세상이 흔들 때 인생을 걸고 충분히 흔들려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세상이 부를 때 응답하면 좋았겠지만 역시 그러지 못했다. 결국 길 위에서 무엇을 만나왔고 무엇이 되어 왔는지를 상상해보면, , 이 빈곤함. 차라리 나는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니라고, 한자리에 가만히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더 낫지 않은가 싶다. 그 빈곤함 속에서도 적지 않은 책들을 읽어왔지만, 나는 내가 길 위의 독서를 했다고 우길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내가 부러운 것은 저자의 독서보다 그가 걸은 길이다. 나도 읽었고 그도 읽었다. 하지만 그것이 길 위의 독서임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자격은 독서가 아니라 삶에 달렸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책을 읽어도 같은 독서를 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이 책의 가치가 있다. 설령 그가 읽고 설명하는 책이 이미 내게 익숙한 책이더라도, 내 길 위의 책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읽은 책과 다른 책이다. 독서 뿐 아니라 쓰기에서도 그렇다. 생의 밀도가 옅은 사람이 읽다가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묵직한 글들이 이 책 안에 있다. 그 무게는 표현이 아니라 저자가 걸어온 길이 증명한다.

 

문장의 질량이 발원하는 곳과 독서의 깊이가 발원하는 곳이 같다. 이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해답을 준다. 살아내라. 삶에 집중하라. 그러나 이것은 알아도 답안지에 옮겨 쓰기가 쉽지 않은 답이다.

 



가끔은 주목받는 이고 싶다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

 

나는 내가 조망하고 싶은 것들을 다 풀어헤친다. 그게 그대로 시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는다. 그게 그대로 시다.

나는 내 말을 내 뜻대로 조탁한다. 그 말과 뜻이 그대로 시다.

나는 시가 뻗어나갈 수 있는 모든 방향으로 형식적 외연을 확장해나가는 실험을 한다. 그러면 그대로 시다.


나는 오규원이다. 시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9

 

구조는 무섭다. 아무것도 안한다고 그냥 내버려두는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라서 더욱 그렇다. 구조 아래에서는 숨만 쉬어도 구조에 복무하는 일이 벌어질 수가 있다. 우리의 들숨이 누군가에겐 이데올로기고 우리의 날숨이 또 누군가에겐 억압일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일단 그걸 알아야 한다. 지구는 돈다. 태양 주위를. 엄청난 스피드로. 초속 30km. 전력을 다해 달려도 시속 15km가 나오는 인간의 7200배 스피드. 그러나 우리는 모른다. 구조가 그렇다. 러닝머신처럼, 구조의 반대 방향으로 계속 달리지 않는다면 구조가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간다. 그 끝에서 아마도 넘어지겠지.

 

제목에 달린 감수라는 말은 부족하다.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할 뿐더러, ‘용인한다. 알게 모르게 그렇게 한다. 이 책은 그 알게 모르게 가운데 모르게알게로 바꾸는 일을 한다. 알면서 감수하거나 용인하는 것은 윤리의 문제다. 진선미 가운데 책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 바로 이다. 책은 윤리에 대해선 수적으로 많을 하지 못한다. 적은 수의 인간을 질적으로 크게 바꿀지는 몰라도. 그러나 자신의 역할이 이라면 책은 당당히 어깨를 편다. 그래서 이 책이 당당하다. 세상을 바꾸는 건 사람의 몫이고, 그 사람을 위해 책이 할일을 한다.

 

우리가 불평등을 용인하는 것은 몇 가지 전제들을 증명도 의심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깔고 가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신자유주의가 봉헌한 그 네 가지 신비로운 공리는 다음과 같다. 하나, 경제성장이 세계의 진보를 보장한다. , 소비가 인간의 행복을 보장한다. , 경쟁은 반드시 필요하며 인류의 발전을 보장한다. , 그 결과 불평등은 피할 수 없으며 피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저자는 이 신성불가침의 도그마에 한 발 한 발 총알을 박아 넣는다.

 

모든 가치관은 중립적이지 않다. 저자는 저 네 가지 전제가 필수적이지도 않고 옳지도 않다고 말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저 중 한두 가지, 많게는 저 모두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도 있다. 가치관은 살아온 궤적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인 동시에 궤적 그 자체이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 없이 한 권의 책을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가치관이 급선회하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이미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고 있던 사람들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 이상의 영역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이(그게 무엇이건 간에) 아무도 괴롭히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달콤한 착각일 뿐이라는 사실만이라도 눈치 챌 수 있다면, 이 얇은 책은 충분히 제 할 몫을 다한 것 같다. 다음 스텝을 기다리는 책은 많고, 현실은 더욱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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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07-22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한 권도 못 읽고 있는 동안 8권이나 읽고 이렇게 논리정연하고 비평다운 비평을 쓰시다니. 게다가 한 권만 시집이고 대부분 비문학 신간 골고루 분야 지식 서적...이 더운날 독서력 무엇...
개돌이 중돌이 syo말고 한 명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똑돌이(똑똑똑똑똑똑한 syo돌이) 출동한 덕에 통찰력 샘솟는 글로 한 주를 시작하네요.
길 위의 독서는 아니라 하셔도 syo님이 열심히 읽고 글로 나누는 독서의 길은 갈래도 무궁무진하고 같이 걷는 사람들도 편히 걷도록 잘 다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도 그 길 좇아 게으름 그만 피우고 독서에 정진하겠습니다.ㅎㅎ

syo 2019-07-22 16:23   좋아요 1 | URL
무슨 댓글을 syo에 대한 리뷰처럼 쓰셨어요. 그것도 주례사리뷰.....

시간 있는 사람은 읽고 바쁜 사람은 바쁘고 뭐 그런 것이지요. 인생이란.... 이번 주에는 제가 바빠 볼 테니 열반인님께서 팍팍 읽고 퍽퍽 써주세요^-^

반유행열반인 2019-07-22 16:52   좋아요 1 | URL
무플방지위원회 입금 들어왔나보죠... 바람 잡는데 너무 알바 티났나보다..아무도 후속 댓글을 안 달아...다음에는 분량 조절해 보겠습니다. (여기까지 보니 입금 안 들어와서 원수 갚는 듯...)

독서괭 2019-07-24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수는 줄었지만(?) 길고 세세해진 감상평!! 좋아요 좋아~^^

syo 2019-07-24 21:43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이것이 새로 추구하는 방향성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