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생태계의 꼬마 요정

 

 

1

 

편견이니 부조리니 하는 커다란 것들과 시시때때로 싸움 붙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모든 훌륭한 사람의 인생행로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아픔으로 부대끼는 법이라니까, 몸이건 마음이건 아픈 게 참 싫은 나는 되도록 무시할 수 있을 만큼의 아픔만 감당하며 살고 싶다. 평범하지만 재미있고, 작지만 육즙이 옹골찬 삶을 살 거야. 명절날 알록달록한 산적꼬치 옆에 놓인 자그마한 동그랑땡처럼. 운이 좋다면 계란 발린 동그랑땡으로는 살다갈 수도 있겠지만, 한 입에 다 못 집어넣는 거대한 맛이 되려고 아등바등하지는 말아야지.

 

 

 

2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가로수 잎사귀 위에 눈동자로 시를 써 넣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다. 덜컹 덜컹 밤 속으로 네 시간을 달리던 무궁화 호 창가 자리, 유리창 너머로 천천히 지나가는 주황색 가로등 불빛을 손가락으로 이어가며 아름다운 말을 고르던 그때가 사무치게 그리운 것도 아니다. 두고 온 것들은 두고 온 것들의 자리에 두고 사는 게 딱히 애틋할 일도 아니다. 그런 것들에 꿈이라는 허망한 이름을 붙인다고 좋을 일이 뭐 있을까마는, 뭉그러진 꿈도 꿈이었다 우긴다고 따뜻해질 마음이 있겠는가마는, 그냥 그런 꿈들이 있었고 그런 꿈들과 나란히 내가 있었다는 사실까지 내게 감추며 살겠다고 욕심 낼 일도 아니다.

 

바람은 흔들고 창은 흔들린다. 커피가 식었다. 나는 가난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어리석고 어리숙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불안한 것도 아니고, 후회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 나는 그냥, 내가 있는 공간에 있다. 내가 읽는 책을 읽고, 내가 쓰는 글을 쓰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작은 공간은 그것만 잘해도 얼른 꽉 찬다. 내가 내쉰 숨을 들이마신다. 내가 말하고, 그 말이 흩어지기 전에 내가 듣는다.

 

무언가가 되고 싶지 않다. 되고 싶다면 그저, 무언가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지금 여기가 나쁘지 않다. 이렇게 사는 것은 그저 그렇지만 이렇게 사는 나는 좋다. 이것도 하나의 완성이다. 어딘가로 가고 있는 길이 아니라, 여기가 하나의 목적지라고 믿는 중이다.

 



'불행해지지만 말자.'

나는 다짐했다그것이 무슨 일이든 상관없다어떤 선택으로 어떤 상황에 처하건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무엇이건 상관없다중요한 것은 내가 불행한가 그렇지 않은가뿐이다사실 '불행해지지만 말자'라는 말만으로는 좀 부족하다불행하다는 것은 어떤 과정의 결과로 나타나는 상태이기 때문에그렇게 되지 말자고 해서 안 되는 게 아니다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관한 것이 아니다돌아보면 '미래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고통은 참아야 한다'라는 생각이 내 모든 불행의 원천이었다미래에 진짜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뜬구름 같은 행복을 위해 나는 분명히 실재하는 오늘의 고통과 슬픔을 무수히 감내해야만 했다.

김보통아직불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괜찮다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들에 대해 생각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이야기는 계속되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자주 만났다가 헤어지며 그리워도 하겠지만 끝내 서로를 다 이해하지는 못할 거라고하지만 그렇게 거듭되는 재회와 헤어짐 속에서도 당신들이 처음 내 마음속에 들어와 헤이라고 스스로의 존재를 각인시켰던 그 눈부신 순간에 대한 감각은 잃지 않을 것이다그것은 떠난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차마 가져가지 못하는누군가를 사랑하고 다정함을 주었던 사람이면 마땅히 차지해야 할 오롯한 빛이니까.

김금희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고금(古今역시 눈을 크게 깜빡이거나 숨을 크게 내쉴 정도로 짧은 순간이다또한 눈 한 번 깜짝하거나 숨 한 번 쉴 만큼 짧은 순간도 조그만 고금이다눈을 깜빡이고 숨을 내쉬는 짧은 순간이 쌓이면 고금이 되는 것이다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수레바퀴처럼 끝없이 번갈아 돌아가지만 늘 새롭고 다시 새로울 뿐이다이 가운데서 태어나고 이 가운데서 늙어 간다그러므로 군자는 이 '삼 일', 즉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유념한다.

이덕무선귤당농소

 

 

 

3

 


  사랑은 여성적인 것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다여성적인 것은 신비와 매혹을 지닌다여성적인 것은 이론적인 인식을 통해 접근될 수 없는 타자성의 특성을 지닌다이 타자성이 여성적인 것의 본질이다여성은 스스로 감추고어떤 지배로부터도 벗어난다바로 이 가운데서 여성적인 것이 지닌 상처 입을 가능성이해 불가능성이 여성의 특징으로 드러난다그러나 여성은 성애를 통해 다른 어떤 것과도 비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한다성 관계를 통하여 여성적인 것은 감추어진 것전적으로 타자적인 것을 경험하게 만든다.

  레비나스는 이 감추어진 것을 찾는 몸짓을 에로스라고 본다에로스는 구체적으로 애무로 나타난다애무는 손에 잡으려 하지만 계속 미끄러지는 어떤 것을 만지는 행위이다성 관계에서 이 행위는 더욱더 고조된다. '감추어진 것그것은 무엇인가놀랍게도 레비나스는 이 감추어진 것전적으로 타자적인 것의 발견은 아이의 출산을 통해서 실현된다고 본다감추어진 것은 이제 그 익명성에서 해방되어 이름이 주어지고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다그리고 아이의 출산으로 나와 타자 사이에 일어난 분리와 결합의 끊임없는 운동이 멈추게 된다아이는 '타자가 된 나'이다나는 아버지가 됨으로써 나의 이기주의나에게로의 영원한 회귀로부터 해방된다자아는 이제 타자와 타자의 미래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초월한다레비나스는 이러한 미래와의 관계를 '출산성'이라 부른다.

강영안타인의 얼굴, 39


잘 읽다가도 이런 대목을 만나면 당이 훅 떨어져서 급하게 달달한 다른 책을 찾는다.

 

저런 생각 속에 특별히 위험천만한 여성혐오가 도사리고 있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적잖이 안타까운 이유는, 다른 누구도 아니라 레비나스가 그랬다는 것 때문이다.

 

syo가 아는 바, 레비나스가 무엇보다 경계하는 것은 동일자적 규정이다. 하이데거의 것은 물론, 니체의 존재론까지 비판한 레비나스는, 존재론이라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어떤 동일한 것, 존재자라면 모두 지니고 있는 어떤 특성 따위를 전제하고 전개되는 사고다 보니, 그 공통의 특성이 과연 무엇인가는 뒷전, 실제로는 조금 다른 것들은 같게 만들고 많이 다른 것들은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본다. 동일자적 사고의 투박한 예시겠지만, 나치즘은 아리아인을 개인적 차이가 무시되는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 속에 집어삼켰고, 유대인을 차이만 드러나는 전혀 다른 존재로 만들어 동일자의 울타리 밖으로 집어던졌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보다는 윤리에 기반을 둔 철학을 이룩해야 한다. 이게 레비나스의 사고가 지니는 매력 포인트다.

 

그런 레비나스조차,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는 데 동일자적 사고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 씁쓸하다. ‘여성적인 것을 신비로운 것, 이론적 인식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것, 상처 입을 가능성, 이해불가능성, 전적으로 타자적인 것, 따위로 정의하는 눈은 남성의 눈이다. 여성은 여성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저 말이, 남성의 눈으로 보든 여성의 눈으로 보든 여성은 타자적이라는 뜻이라면 그것은 혐오발언이다. 이성은 반대 성을 가진 이의 눈으로 봤을 때 타자적이라는 뜻이라면 그것은 여성을 을 가진 동물에서 배재했다는 의미에서 혐오적이거나, 어차피 서로가 서로에게 타자인데 그 타자성을 남성성이 아닌 여성성이라고 이름붙일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무책임하다. 특별한 의도가 없었더라도, 하여튼 레비나스는 곤란한 상황이다.

 

장르를 불문, 모든 사상의 역사에서 남성은 해석을 독점한 거대한 동일자였다. 그들이 깔아놓은 많은 전제들은 보편적 진리임을 의심받지 않으며 오랜 시간 굳건했다. 자신의 비유가, 온갖 종류의 편견과 억견이 차례차례 무너져 온 역사의 긴 궤도 위에서도 꿋꿋이 버티며 이제껏 한 번도 권력을 놓친 적이 없는 거대한 동일자 집단의 사고에 동기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레비나스는 왜 몰랐을까?

 

이렇게 씁쓸한 마음에 못 이겨(syo는 레비나스 할아버지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다정한 할아버지 레비나스 할아버지.....) 책을 덮어놓고, 잠깐 다른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서 문성원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대목이 있다.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무렵까지의 저작에서는 나를 맞아들이는 집의 안온함을 여성성이라고 풀이하고 있다이 여성성의 주된 의미가 생물학적인 특징에 있는 것은 아니나이와 같은 설명에는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다이후로 레비나스는 여성성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나의 동일성이 타자에 의해 형성된다는 데 더 강조점을 맞추어나간다.

문성원타자와 욕망, 37


syo같은 잡놈은 구구절절 너저분하게 쓰는 말, 그리고 그 이상을, 단 세 문장으로 깔끔하게 정리해버리신다. 역시, 이것이 고수의 글인갑소.

 

조금씩 읽고 있는데, 레비나스는 확실히 매력이 있다. 저런 대목은, 그 레비나스조차 피해가기 어려운 가부장적 사고방식의 촘촘한 그물망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면 그 뿐, 레비나스 사상의 선량함이나 예쁨(정말 예쁨)을 무시하거나 그를 통째로 내다버리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너무 아깝거든. 이렇게 다정하고 착하고 예쁜데.

 



--- 읽은 ---

다가오는 말들 은유 : 158 ~ 343

레비나스그는 누구인가 박남희 : 102 ~ 176

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 정철훈 : 5 ~ 97

+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2 / 이정모 : 117 ~ 304

단숨에 읽는 그림 보는 법 수전 우드포드 : 98 ~ 175

여성전적으로 권력에 관한 메리 비어드 : 58 ~ 141

+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 야마구치 슈 : 109 ~ 335

 


--- 읽는 ---

- 타인의 얼굴 / 강영안 : ~ 57

- 타자와 욕망 / 문성원 : ~ 38

- 세월 / 아니 에르노 : 39 ~ 188

과학책은 처음입니다만 / 이정모 : ~ 155

- 있지도 않은 자유를 있다고 느끼게 하는 거짓자유 엄윤진 : ~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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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3 09: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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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3 13: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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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3 15: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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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3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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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3 16: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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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3 16: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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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5 05: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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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5 08: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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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5 08: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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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5 08: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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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5 09: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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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9-06-30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대 훌륭한 독서가 :)

syo 2019-06-30 12:01   좋아요 1 | URL
쟝쟝님 오랜만입니다ㅎㅎㅎㅎ

봄밤 2019-06-30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이 배우네요 :)

syo 2019-06-30 12:01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ㅎㅎㅎ
Heeheeee님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