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정경湖畔情景 4
1
누군가가 당신과 내가 만든 시간을 노래로 듣는다면, 약속은 그 노래의 지루한 후렴이겠습니다.
2
약속은 거짓말보다 값비쌉니다. 이루지 못한 약속이 상한 표정으로 도착하는 곳이 대체로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3
닿지 않는 슬픔임을 알면서도 그게 당신의 것이라면 나는 끝내 만지고 싶습니다. 오늘에 와서 보면 결국은 거짓말로 죽어버린 많은 약속들이 있었습니다. 당신의 슬픔을 만날 때면 그것들이 다시 와 어른거려 나는 자꾸만 말수가 줄어듭니다. 자동차 앞 유리에 붙어 빗물을 훔치는 가냘픈 막대기처럼, 나는 당신의 등에서 읽을 수도 없을 뭔가를 자꾸만 닦아냅니다.
4
우는 사람이 우는 것밖에 못할 정도로 울음 속으로 깊이 잠겨들면, 그 울음을 보는 사람은 일순간에 보는 것밖에 못하는 불구가 되나 봅니다. 울음인지 울림인지 모를 소리가 아득히 굽이치는 좁은 공간에서, 내 손이 당신의 등을 어루만지는 동안 당신의 눈물 역시 내 어깨를 어루만졌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한 덩이 별자리처럼, 우리는 두 몸을 포개어 만드는 그 동작이 익숙합니다. 그 울음의 더께를 털고, 껍질을 까고, 안으로 깊이 더 깊이 밑바닥까지 들어가다 보면 결국엔 나를 발견하게 될까봐, 오늘의 나처럼 내일도 나는 미안할 모양입니다.
5
슬픔의 시험이라면 남부럽지 않을 만큼 치러왔는데도 새로운 문제는 늘 풀지 못하는군요. 슬픔의 기출문제집은 언제나 무용합니다.
6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해 말하면 또다시 죄 거짓말이 되고 말까봐, 언제부턴가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해서만 말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 안에 든 것이라고는 별 볼일 없는 한낱 진실이나 진심 따위일 뿐이겠으나, 그 말이 당신에게 작게나마 힘이 되면 좋겠습니다. 욕심입니다.
알코올 / 홍일표
남몰래 흐느낀다 너는
입도 입술도 없이
보이지 않아서 더 아픈 때가 있다
아무 말 못하고 혼자 숨어 우는
사람이 있다
자작나무의 얼굴로
물안개의 젖은 숨결로
밤이 깊어 너의 입술에 도달한 차갑고 뜨거운 속엣말들이 치자꽃처럼 핀다
흰 달빛의 표정으로
어디에도 없는 너는
얼굴을 지우고 머리칼을 지우고
말의 가장 먼 바깥에서 은밀히 휘발하는 비애처럼
소리를 죽이고
마음의 색깔도 지우고
이제는 다 놓아버린 물의 감정들
오직 투명함으로 너는 조용히 일어서서 걸어간다
이슬의 어깨가 파르르 떨고
공기의 입술에 얹어놓은 이름이 휘파람처럼 사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곳
물 밖의 어디 먼 곳에 물의 신전이라도 있는 듯
맑고 가벼운 날개, 파아란 눈빛 하나로 찾아가는
아스라이 먼
모든 슬픔의 정결한 성지
가슴 한쪽 없는 이들이 그림자를 끌고 혼령처럼 찾아가는
--- 읽은 ---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 김신회 지음
--- 읽는 ---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 헤르츠티어 지음
Lo-fi / 강성은 지음
말랑하고 정의로운 영혼을 위한 헌법 수업 / 신주영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