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정경湖畔情景 3
1
슬픔이라는 덩치 크고 멍청한 단어를 조리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내어놓는 일은 늘 탐탁치가 않지만, 빈곤한 역량은 언제나 나를 탐탁찮은 길 위에 세운다.
2
두 종류의 슬픔과 알고 지냈다. 일부러 드러내지 않아도 눈치껏 알아주었으면 싶은 슬픔과 무심코 드러내도 눈치껏 모른 척 해주었으면 싶은 슬픔.
3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정이고, 친절한 친구일수록 마음 구석에 뭉쳐둔 눅눅한 슬픔까지 발견하여 다정하고 온유한 말로 닦아줄 가능성이 높다. 타인의 슬픔을 성분 분석하는 일은 과학보다는 미학이 맡은 재주라서, 내 젖은 슬픔과 비슷하게 생긴 타인의 슬픔이 그에게는 부서질 듯 건조한 슬픔일 수가 있다. 위로받고 싶은 슬픔을 무시하는 일은 위험하고, 무시되고 싶은 슬픔을 위로하는 일은 위태롭다. 어쩌면 슬픈 이의 취약한 마음에 내 무딘 지문을 불붙은 인두처럼 뜨겁게 눌러 찍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타인의 슬픔을 만지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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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좋은 마음으로, 그러나 명백히 섣부르게 타인의 슬픔을 건드리고 만다. 마치 조금이라도 빨리 그 불길을 잡지 않으면 내 정원도, 내가 공들여 길러놓은 여린 꽃들과 달콤한 열매들도 잿더미가 되어 버릴까 두려워 조바심치는 이웃사람처럼. 슬픔을 역병처럼 다루는 태도가 역병처럼 번져 있다. 감기, 수두, 홍역, 페스트.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합리의 영역에 가져다 놓아도 괜찮다고 주장하는 매정한 병명들.
한 마음의 매운 기침 몇 번에 그를 둘러싼 모든 마음이 금세 각자의 기침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면 슬픔의 전염성을 성토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자주 슬픈 사람은 그 장면을 조금 더 깊은 눈으로 들여다보고 싶다.
5
너로부터 옮은 바로 그 감기를 내가 앓아도 네 기침 소리와 내 기침 소리가 같지 않듯이, 나의 슬픔이 너를 슬프게 하여도 우리의 슬픔은 같지가 않다.
6
그리고 그것이 그대로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우리가 마주 앉았으나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을 때, 혹은 바라보았으나 눈동자 뒤에 숨었을 무언가를 억지로 꺼낸다든지 짐작하려들지 않았을 때, 나의 슬픔이 나의 슬픔으로 온전하고 너의 슬픔이 너의 슬픔 그대로 드러나 서로의 슬픔이 맞닿되 섞이지 않았을 때, 그런 일이 있었지, 참 슬펐어, 딱 거기까지만 이야기해 주었을 때 가장 힘이 되었다고 일러주고 싶다. 나의 슬픔이 누군가 이미 극복하고 정복한 슬픔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는 사실이 나약하다고 비난받는 기분을 느끼지 않게 해주었고, 그럼에도 언제나 어디서나 누군가 슬픔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퍽 든든했다고 고백하고 싶다. 아무리 도망쳐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는 싸움을 하고 있는 이가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진실을 조용하고 은밀하게 너는 전해주었다. 감추고 싶은 슬픔을 감추는 일이 내 몫이라면 만지고 싶은 슬픔을 만지는 일은 너의 몫이라서 내가 해변처럼 조개를 감추는 동안 너는 성큼 밀물로 왔다가 썰물로 그저 돌아갔다. 아무것도 두고 가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네가 내게 그런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선잠 / 박준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는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습니다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_ 박준, 「선잠」 전문
고통이여, 너는 왜 나를 귀찮게 따라다니는가? 무엇 때문에 늘 나보다 한 발 앞서서 방에 들어가고, 너 아니면 기쁨과 안식이 기다릴 침대에 선수쳐 눕는가? 무엇 때문에 내 손길이 닿는 모든 것에서, 목을 축이려는 유리컵과 가까이 다가가는 입술 어디에서나 너의 자취가 느껴지는가? 고통이여, 나는 너를 가슴에 품고 애지중지하지 않는다. 너를 부둥켜안지도 않고 네 그림자를 숭상하지도 않는다. 울부짖으며 너를 부정하고, 활력을 불어넣어 스스로를 잊게 하는 기쁨을 소리쳐 부른다. 아름답고 고매한 수식어로 너를 꾸미지도 않으며, 네가 정의라고 믿지도 않는다. 다만 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너를 혐오할 뿐이다.
_ 산도르 마라이, 『하늘과 땅』
저는 인간을 좋아합니다. 이곳저곳 항구를 떠돌며, 인간의 열기 속에서, 눈 내리는 날 강아지처럼 천진난만하게 구르고 싶습니다. 언제 제 생이 다할지 알 수 없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 소박하고 순수하게 작업에 정진하고 싶습니다.
_ 하야시 후미코, 「저는 인간을 좋아합니다」
--- 읽은 ---


새로운 엘리트의 탄생 / 임미진 외 4인 지음
하늘과 땅 / 산도르 마라이 지음 / 김인순 옮김
--- 읽는 ---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 니콜라이 고골 지음 / 조주관 옮김
슬픈 인간 / 정수윤 엮고 옮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박준 지음
숙련자를 위한 고전노트 / 이수은 지음
책 쓰자면 맞춤법 / 박태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