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 산격동

 

 

1


 

  나는 길을 벗어나기를 좋아하고내가 아는 것 너머로 나가보기를 좋아하고아마 몇 킬로미터쯤 더 걸어야 하겠지만 다른 길을 통해서지도와 다투는 나침반에 의지하여도중에 만난 낯선 사람들이 알려준 천차만별의 방향 지시에 의지하여 돌아오기를 좋아한다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서부의 외딴 마을에서내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는 채 홀로 모텔에서 보내는 밤들괴상한 그림과 꽃무늬 이불과 케이블 텔레비전과 함께하기에 나 자신의 인생으로부터 잠시 벗어나는 시간이 되어주는 그 밤들베냐민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스스로 어디 있는지 알기는 해도 사실 길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는 그 시간들걸어서 혹은 차로 어떤 산마루를 넘거나 어떤 굽이를 돌자마자 '여기는 난생 처음 보는 장소인걸.' 하는 혼잣말이 튀어나오는 순간들어째서인지 그동안 내 눈길을 벗어났던 건축의 어떤 세부적인 면이나 어떤 경관이 문득 내게 말을 걸어와서그동안 내가 집에 있기는 했어도 사실 내가 있는 곳을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알려주는 순간들낯익은 것을 낯설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들이를테면 내가 사는 곳에서 지금은 사라진 풍경과 사라진 묘지와 사라진 동식물을 알려주는 이야기들대화하는 사람들만을 남긴 채 주변의 다른 모든 것을 사라지게끔 만드는 대화들온 종일 잊고 있다가 늦게서야 그날 나의 모든 느낌과 행동에 영향을 미쳤음을 깨닫게 되는 간밤의 꿈들...... 이런 길 잃기들은 원래의 길이나 아예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시작이다이 밖에도 물론 다른 길 잃기의 방법들이 무수히 더 많지만.

리베카 솔닛길 잃기 안내서, 28-29

 

어느새 밤이었다. 아이들은 하나둘 걱정을 시작했다. 만화 하기 전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거라며. 제일 작은 아이가 울먹거렸다. 앞서 걷는 아이는 아무런 말도 없이 걸었다. 마른 흙과 바스라지는 돌멩이들이 잔뜩 깔린 길은 짐승의 길인지 사람의 길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좁았다. 계속 내려가 보자. 내리막길로만 가면 곧 산이 끝나고 집들이 나올 거야. 키 큰 아이의 위로하는 목소리조차 나뭇가지에 걸려 멀리 퍼져나가지 못하는 어두운 숲이었다. 내리막이 다른 오르막으로 이어지진 않을지, 그 끝에 마을은 나올지, 그 마을이 엄마 아빠가 기다리는 우리 마을일지, 누구도 확신이 없었다. 소풍 때 와 봤던 산이라며, 좋은 곳이 있다며 함께 오르기를 종용했던 아이를 원망하는 마음으로, 다른 아이들은 묵묵히 뒤따랐다. 앞서 걷는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지금 제일 보고 싶은 것들을 떠올렸다. 벌써 퇴근하여 집에 돌아왔을 아빠와, 저녁상을 보고 기다릴 엄마와, 어제 엄마가 시장에서 사 와 냉장고에 넣어 놓은 소시지와, 칠이 다 벗겨져 녹슨 대문과, 주말에는 대문에 페인트를 칠해야겠다던 아빠의 말이 생각났다. 집에 가고 싶어요. 제발 집에만 가게 해 주세요. 그렇게만 해 주시면 페인트도 마실 수 있어요. 제가 누구를 찾는지도 모르고 아이는 누군가를 찾았고 빌었다. 그러다 금방 빨강색 페인트는 딸기 맛, 녹색 페인트는 메론 맛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딸기 맛이면 좋겠어. 유독 빨강색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매일 보던 도시의 밤은 푸른색이었지만 산의 밤은 검정색이었다. 검은 산 속에 일렬로 걷는 아이들의 발소리만 저벅거리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아이들은 앞뒤로 손을 잡고 걸었다. 불편했지만 불안보다는 불편을 선택하고 걸어 나갔다. 앞서 걷는 아이는 한 손이나마 자유로웠지만 누구보다 자유롭지 않은 마음이었다. 키 큰 아이가 만화주제가를 흥얼거렸다. 선택하지 않은 불안이지만 불안은 선택하지 않아도 스며드는 것이어서 키 큰 아이는 노래를 선택했다. 노래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남은 선택지는 울음이었을 것이다. 울음 같기도 하고 불안 같기도 한 노래가 금방 끝났다. 산에는 다시 아이들의 지친 발이 내리막을 지치는 소리, 양손이 다 잡힌 아이가 세게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 초여름이 밤을 몸에 발라 열 식히는 소리만 낮게 울렸다. 그 흔한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형아, 만화 동산 친구들 불러 줘. 작은 아이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키 큰 아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노래를 시작했다. 우리 모두 친구, 만화 동산 친구, 만화는 신나는 우리들의 세상, 다른 아이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친구, 만화 동산 친구. 작은 아이도 뒤질세라 따라 불렀다. 만화는 신나는 우리들의 세상. 앞서 걷는 아이는 갑자기 이 모든 게 만화 같고, 이 무서운 산이 동산 같았다. 밤과 친구가 된 것만 같았고, 밤과 친구가 된 세상은 신나는 우리들의 세상만 같았다. 우리 모두 친구! 만화 동산 친구! 아이들은 모두 만화동산 친구가 되어 외쳤다. 산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왁자지껄한 소리로 떠들썩해졌다.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의 눈에 나무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 높은 나무들이 아니었다. 귀에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 조용한 밤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 친구! 만화 동산 친구! 만화는 신나는 우리들의 세상!

 

몇 개의 합창이 끝났다. 아이들이 걸은 내리막은 오르막으로 바뀌지 않는 순하고 착한 내리막이었다. 길이 점차 넓어지다 콘크리트로 거칠게 마감한 길과 맞붙었다. 가로등이 환했다. 도착한 곳은 아이들이 사는 동네는 아니었지만 앞서 걷는 아이가 잘 아는 동네였다. 아이들은 노래를 그치고, 손을 놓고, 자신 있게 콘크리트 내리막을 걸어 내려갔다. 더러 웃는 소리도 들렸다. 앞서 걷는 아이는 나란히 걷는 아이 중 하나가 되었다. 높은 산동네 가파른 내리막이라 정면에 하늘이 있었다. 살짝만 고개를 들어도 별이 보였다. 그제야 하늘도 별도 보였다. 나란히 걷는 아이는 집에 돌아가 아빠에게 혼날 생각을 했다. 회초리가 없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빨강 페인트도 없었으면 좋겠어. 페인트는 맛이 없을 텐데.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지만 딸기는 먹고 싶었다. 소시지도 먹고 싶었다.

 

 

 

2



한국인은 왜 이렇게 '틀리다'와 '다르다'를 혼용할까요이 두 단어를 동의어로 여기기 때문입니다이는 언어적 오용을 넘어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언어가 인간의 사고와 존재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습니다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사고하고 존재합니다언어를 잘못 쓰면 잘못된 사고를 할 수 있지요즉 '틀리다'와 '다르다'를 동의어로 사용하면 차이를 다양성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틀린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자신과 피부색이나 종교가 다른 사람을 틀린 사람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장한업차별의 언어 


이 대목에 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먼저, 고민 없이 남발하는 예쁜 말이 고민을 없앤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라는 주장은 너무 옳고, 자신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인간임을, 다양성을 깨친 인간임을 어필하는데 쓰면 상당히 적은 비용으로 괜찮은 효과를 볼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비용에 비해 편익이 큰 말이다 보니 누구나 기꺼이 사용하고, 결국 실제로는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의 입에서도 저 말은 어렵지 않게 나온다. 마치 공유지의 비극을 맞이한 것처럼, 저 말은 마침내 껍데기가 되었다. 이런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안다. 다른 게 틀린 게 아니라는 걸. 근데 저건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거다.

 

중요한 것은 뭐가 다르고 뭐가 틀린지에 대한 각자의 견해가 다르거나 틀리다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틀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동성애는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라는 주장하는 이에게 동성애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되돌려주는 것은 당신의 주장이 틀렸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 주장(동성애는 틀렸다)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라는 역습을 만나면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만 기대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다. 각자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린 것인지 아닌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확실히 안다. 각자가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요는 말싸움이 아니라 힘싸움이다. 어떤 가치를 신봉하는 이들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힘이 반대편을 압도할 때, 그들의 가치가 정의도 되고 상식도 되는 것이다. 그런 싸움에서는 전선을 잘 긋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예쁘고 헛된 말은 밀고 나가는 힘이 없다. 그 말과 반대로 행동하는 스스로를 속이는 데 쓰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자위도구로 쓰일 뿐이다.

 

두 번째로, 저 말 자체가 남발되면 멍청한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점이다. 요즘은 대구 사람들도 다르다는 말을 의식적으로 쓰지만, syo보다 어른들이 쓰는 대구 사투리에는 다르다가 없다시피 하다. 대구 어르신들은 다른 것도 틀리다고 하고 틀린 것도 틀리다고 한다. ‘다른은 있다. 보통 ’으로 쓴다. 하지만 다르다는 여지없이 틀리다가 대신한다. syo는 스무 살이 되어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단 한번도 쟤는 너와 다르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만약 대구 사투리의 어휘 체계에 다르다가 존재하지 않고, 그러므로 대구에서만큼은 더는 틀리다다르다의 오용이 아니게 되었다면, 어휘 체계에 다르다를 갖춘 말이 표준어라는 이유만으로 대구 사람들의 어휘 사용은 비난받아야 할까? 사투리는 틀린 것이 아니라, 표준어와 다른 것이다. 표준어 구사자에게 다르다는 말을 써야 할 곳이라는 이유로 대구 사투리 구사자에게도 틀리다대신 다르다는 말을 쓰라고 종용하는 일은,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는 말을 이용해 다른 것을 틀리다고 주장하는 셈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건 어디건 구분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르다틀리다를 구분하여 쓰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은 틀린 데가 없다는 것이다. 언어는 변하는 것이고,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 안에 차별이나 혐오를 품지 않는 방향으로 변해가야 한다. 멍청하게 있다가 저도 모르게 무의식이 시키는 대로 빻은 말을 내뱉는 꼴을 보면 말은 무의식의 호구인가 싶지만, 그 무의식을 형성하는 것 역시 말, 남의 입에서 나와서 내 귀가 듣는 말, 내 입에서 나와서 내가 듣는 말, 듣는 말이다. 한 번 뱉고 마는 말은 힘이 없지만, 백 번 반복되는 말은 사람을 움직이고, 만 번 반복되는 말은 산을 옮긴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할 줄 아는 마음은 사실 소통의 기본기고, 모두가 무의식에 그 기본기를 장착하는 날이면 더 이상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당연하고 약한 말은 새삼스러워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니까.

 

 


3



안타깝게도 우리는 지칠 줄 모르고 타인을 이해하려 든다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을 대하는 데 어느 정도의 마조히즘즉 자학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우리의 관심을 끌고우리가 어떤 이유에서든 매력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만큼 우리를 좌절시킬 수도 있다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그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든 아니면 우리를 무시하거나 감정을 상하게 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계속 매달린다우리를 끊임없이 똑같은 인간관계의 함정과 궁지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인간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려는 희망과 좌절 사이의 경계 지점인지 모른다.

외른 회프너카트 읽는 남자, 20-21 


내가 방금 한 말만으로 나를 다 알 수는 없는 거라고 대꾸하는 목소리가 거셀수록, 역설적으로 그 말이야말로 나에 대해 정말 많이 알려주는 말이라는 걸 거세게 자백하는 꼴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건 내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로 사과한 일이 실은 제일 크게 미안해야할 일이었고, 부끄러움으로 오래 남는 일이었다. 반면, 나를 알려주기 위해 내가 건넨 말들을 모아보면 지금의 내가 아니라 되고 싶은 나를 가리키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건 세상에 없는 나였다. 나의 이데아 같은 것.

 

나를 알려주는 일은 이렇게 어렵고 부끄럽고 빗나가는 일이서, 다른 사람을 아는 일은 좀 수월할까 했지만, 세상엔 쉬운 일이 하나 없다.

 

사람에 대해 많이 알고 싶은 욕심은 끊을 수가 없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사랑하는 사람을 알고 싶고 미움이 크면 클수록 미운 사람을 알고 싶다. 내게 주어진 파편들을 그러모으고 지성이니 상상력 같은 것들을 접착제로 사용해 나는 그 사람을 내 안에 만든다. 매우 조잡하게. 내 안의 그 사람은 내 밖의 그 사람과 만나면 여지없이 깨어지고 그러면 나는 다시 파편을 주워 모아야 한다. 그 사람이 그대로 내 안에 퐁당 들어오면 좋겠지만 그것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일찌감치 포기하고, 나는 또 모자이크를 시작한다. 다시 박살날 조각을 맞춘다.

 

이 과정에 너무 지쳐서 사람을 알고 싶은 마음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늙는 일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이제는 큰 덩어리만 대충 모으고, 대충 밑그림을 그리고, 언제 부서져도 상처 나지 않도록 모서리가 둥글둥글한 사람들만 만들어 마음 안에 들여놓고 싶다. 그러면 피곤할 일이 없겠다.

 

그렇지만 늙는 일은 곧바로 죽는 일은 아니라서, 아무리 지치고 속상해도 온전한 전부를 마음에 들여놓고 싶은 사람은 생기게 되어 있다. 그 사람의 지나는 말 한마디를 그저 지나지 못하고, 뿌리는 눈빛 한 줌을 그저 뿌리치지 못하고, 흘리는 웃음 한 조각을 그저 흘려보내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인간이 마음을 채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아니라 남으로 채우는 것이므로, 그 피곤하고 날카로운 일을 인간은 끝없이 반복할 밖에.

 

 

 

 -- 읽은 --



한강 외, 작별

강민선,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도서관 사서 실무

장한업, 차별의 언어

강준만, 글쓰기가 뭐라고

시사IN 편집국, 시사IN 588

 

 

-- 읽는 --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외른 회프너, 카트 읽는 남자

김영민, 동무론

데니스 C. 라스무센, 무신론자와 교수

오선영, 모두의 내력

김신현경, 이토록 두려운 사랑

서영은, 보담,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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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28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다 타인에 대해 퍼즐맞추기를 하나 봅니다 나도 쇼님에 대해 퍼즐 맞추고 모자이크 만든다오~ㅎ

syo 2018-12-28 18:30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 만나면 한 방에 다 허물어질 부질없는 모자이크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12-28 18:39   좋아요 0 | URL
다 똑같지요 ㅎ

2018-12-29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9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8-12-29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트 읽는 남자』의 인용문을 읽고 느낌 :
타인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기보다 저 자신을 통해 인간을 이해할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타인보다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게 될 때가 더 많고요. 뭐 이건 작가의 솜씨, 통찰력에 기인한 것이겠지만요.
저 자신도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은데 내가 누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식의 속마음도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ㅋ
좋은 밤 되시길...

syo 2018-12-29 19:30   좋아요 0 | URL
음, 저는 저를 통해서는 저밖에 모르겠더라구요 ㅎㅎㅎㅎ 이런 저밖에 모르는 놈.....
타인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것도 사실은 포기했어요. 타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세상에 ‘인간‘이라는 것이 사실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인간이라는 게 있다면 참 편할 텐데, 그거 알면 되게 많이 아는 거니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역시 저밖에 모르는 놈 ㅋㅋㅋㅋ

페크님도 따뜻한 밤 보내시기를. 날이 많이 춥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