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이면異面
1
이제는 없는 밤이 오늘은 있다. 수도꼭지를 열면 불이 콸콸 쏟아질 것만 같은 밤이 호수 주위로 겨울을 빙 두르고 있다. 사랑이 늘 그렇듯이 사랑의 추억 역시 아차 하는 사이에 마음을 데우고 태우고 얼른 재가 되었으나, 사람이 늘 그렇듯이 사람의 사랑 역시 그 재를 뒤지고 빚어 겨울처럼 밝고 하얗게 도시를 세운다. 새하얀 도시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날의 첫 키스를 영원히 반복한다. 46억 번, 137억 번의 첫 키스가 끝나면 도시는 다시 재로 무너질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귀를 파 주거나 새치를 뽑아주러 방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날의 달뜬 고백이 달로 뜬 하늘을 뒤로하고 그림자 따라 아늑하고 슬픈 성냥갑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서로의 머리를 부딪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두 개비의 성냥으로 나란히 누울 것이고, 불이 쏟아지는 수도꼭지를 잠가 둘 것이다. 밤으로 녹을 것이다. 인화될 것이다. 재 될 것이다. 무한히 되돌아오는 겨울을 기다릴 것이다. 호수가 함께 기다려 줄 것이다.



"좋아." 슈쿠마가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을 때, 그 포르투갈 식당 말이야, 난 웨이터에게 팁 주는 걸 잊어버렸어.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다시 그곳으로 가서는 그 웨이터의 이름을 알아내서 지배인에게 팁을 맡겼어."
"단지 웨이터에게 팁을 주려고 서머빌까지 그 먼 길을 다시 갔단 말이야?"
"택시를 타고 갔어."
"웨이터에게 팁 주는 걸 왜 잊어버렸는데?"
생일 양초는 다 타버렸지만, 그는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또렷이 그릴 수 있었다. 약간 기울어진 커다란 눈, 도톰한 포돗빛 입술, 두 살 때 높은 의자에서 떨어져 턱에 생긴, 아직도 눈에 띄는 쉼표 모양의 상처. 슈쿠마는 한때 자신을 압도했던 그녀의 아름다움이 나날이 시들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전에는 불필요하게 보였던 화장품이 이제는 필요했다. 용모를 개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든 그녀를 또렷이 드러내려면.
"식사가 끝날 무렵, 당신과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묘한 느낌이 들었어." 그는 그녀에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처음으로 인정하는 말을 했다. "그게 내 정신을 산만하게 한 것 같아."
_ 줌파 라히리, 「일시적인 문제」, 『축복받은 집』
한 편의 그림을 이해한다는 건 우리가 그 그림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 공간이 오히려 먼저 아주 특정하고도 다양한 곳들에서 돌진해 나오는 것이다. 이 공간은 우리가 아주 중요한 과거의 경험들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각도와 구석에서 자신을 열어 보인다. 말하자면 무언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_ 발터 벤야민, 『모스크바 일기』
연애 9년, 결혼 후 1년. 우리 부부는 많은 부분을 양보했고, 타협했고, 조정했다. '바깥세상'에 기대어 현실을 외면하지 않아도 된다. 결혼을 정말 잘했구나, 싶은 순간이 있는데 그건 저녁을 먹고 가볍게 동네를 한 바퀴 돌 때이다. 두 손을 마주 잡고,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같이 바람을 맞고, 나눠 마시는 한 잔의 물.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여서 다행이다. 새벽 3시에 나는 다른 이유로 깨어 있다. 피가 도는 사람이 옆에서 잠들고, 나는 책을 읽다 잠든다.
_ 조안나, 『당신을 만난 다음 페이지』
2
교토대학의 중세철학 연구실에서는 일주일에 두 번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읽습니다. 라틴어로 쓰인 책인데, 그 내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방대합니다.
“다 읽으려면 이백 년 정도 걸리겠지.”
그렇게 말했던 교수님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도 연구실에서는 그 책을 읽고 있을 겁니다. 정신이 아득해질 듯한 이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것은 눈앞에 있는 한 행 한 행과 마주하는 시간이고 거기서 얻은 것들입니다. 다 읽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_ 기시미 이치로, 『마흔에게』
‘뭣이 중헌디’는 인생의 화두 급 명언이 틀림없다. 인간은, 아니다, 인간이라고 하면 안 될 것 같고, 그러니까 syo는 가만히 있을 때도 뭣이 중헌지를 모르고 가만히 있지 않을 때는 더더욱 모른다. 질문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질문의 의미가 아니라 질문이라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순간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하는 것, 지금 품고 있는 생각을 계속 품는 것, 지금 쥐고 있는 권리나 권위를 계속 쥐고 있는 것이 뭐가 중요하냐고 물어보는 순간이 자주 필요하다. 물어보는 순간 흩어지는 것들은 흩어지게 두어야 하고, 내가 중히 여긴 모든 것들이 결국 다 흩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무엇인가를 꾸준히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지우고, 지우고, 또 지워나가다, 결국 중요한지 아닌지 판단하는 일 자체가 중요하지 않게 되는 순간.
3
“지금은 말이야, 거기 어른들이 많이 힘드실 수 있지 않을까. 힘드신데 너희들을 보면 강이 생각이 더 많이 날 수도 있어.”
도우는 우유를 마시지는 않고 손가락 끝으로 컵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그러니까 나중에 가는 게 좋겠어.”
세영의 말이 끝나자, 도우가 있는 힘껏 컵을 잡았다.
“나중에...... 언제요? 엄마, 시간이 없어요.”
_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
오늘의 어려운 일을 내일의 어려운 일로 만들 수 있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을 속이곤 한다. 오늘 전해져야 했던 말, 오늘 나누어주어야 했던 체온, 오늘 지켜주어야 했던 마음, 오늘, 오늘, 오늘, 그 수많은 오늘들은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곳으로 가 외로이 죽고, 우리에겐 내일만이 남는다. 결코 오지 않는 내일만이.
사실 누구나 안다. 내일의 우리는 여전히 오늘의 우리일 것이고, 우리가 오늘 외면한 모든 것들은 내일도 외면 받을 것이며, 오늘의 내일은 내일의 내일로 한없이 지연될 뿐, 오늘을 대신할 내일 같은 것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일은, 내일 온다.
그리고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한 오늘들의 공백은, 점점 더 무거운 질량으로 쌓이고 덩치를 키워나가다 마침내 폭발하여 날카로운 파편처럼 우리의 일상을 찢어놓곤 한다.
그러니까 늦지 말자. 늦추지 말자. 놓지 말고 놓치지 말자.
-- 읽은 --





조홍식, 『문명의 그물』
데이브 레비턴, 『과학 같은 소리 하네』
김정운, 『에디톨로지』
기시미 이치로, 『마흔에게』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
-- 읽는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읽거나 말거나』
월터 앨버레즈, 『이 모든 것을 만든 기막힌 우연들』
유상균, 『시민의 물리학』
카롤린 엠케, 『혐오 사회』
정기문, 『역사는 재미난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역사책』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