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추억, 실패의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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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보니, 작년 연휴는 길었고,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책을(페이지로 8000페이지가 넘었던 것 같다) 읽으려 깝죽거리다 아, 정말 처절하게 실패했다. 가끔 나도 내 미친 배짱에 놀랄 때가 있다. 그러나 실패라는 결과에는 전혀 놀라지 않는다. 그것은 그야말로 늘상 있는 일이니까. 매일이 실패고, 실패하지 않는 거라곤 오로지 ‘실패하기’ 밖에 없는 듯하다.....
올해는 연휴도 짧고, 욕심 없이 평소에 좋아하고, 때론 그만 좀 읽고 원전 보라고 눈치도 받던 ‘입문서나부랭이’나 잔뜩 읽으며 빡세게 보내고 싶다. 그리고 실패의 긴 목록에 또 하나의 기록이 추가되겠지.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ㅠ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 손기태
정치철학 / 스티븐 스미스
리바이어던 / 김용환
흄의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 입문 / A. 베일리, D. 오브리언
칸트 철학에의 초대 / 한자경
오늘 자본을 읽다 / 강신준
인생 교과서 헤겔 / 최신한, 권대중
존재의 제자리 찾기 / 박영규
집 읽은 개 1 / 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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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마음에 공감하고 나면, 완전하게 솔직한 문장을 쓸 수는 없게 된다. '솔직하다'라는 의미 역시 달라지고 만다. 글을 쓴다는 것은 '최초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_ 김중혁, 『무엇이든 쓰게 된다』
‘내 마음’이라는 것은 다 만들어진 옷에 붙은 태그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옷을 만들고 이름 붙이는 일은 이런 식일 수 있다. 양털은 스위스 어딘가에서 왔고, 마섬유는 중국 남부 어딘가에서 가져왔을 테고, 그 두 재료가 적절히 섞인 하나의 옷감을 만드는 기술은 남미에 사는 어느 기술자의 손끝에서 빌려왔다. 그 옷감은 다시 동남아시아의 어느 공장으로 운송되었고, 그 공장에는 일본의 어떤 디자이너의 머릿속에서 나온 모양대로 옷감을 이래저래 끼워 맞추는 수천 수백 개의 손들이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것들과 수많은 이들의 흔적이 이런저런 비율로 뒤섞여 만들어진 한 벌의 옷에 마지막으로 상표가 새겨진 태그를 붙인다. 그러면 사람들은 태그를 읽어 그 옷의 이름을 부른다. 태그에 적힌 이름은 그 옷의 가장 강력한 정체성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옷을 이루는 구성 요소들 중 가장 손쉽게 내버려질 수 있는 취약한 껍데기에 불과일 수도 있다. 이름이 없어도 옷은 있지만, 이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들은, 심지어 옷을 포장하는 한 겹 얇고 투명한 비닐조차도, 옷을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때로 나는 내 생각이 ‘나의 것’이라는 사실에 집착한다. 많은 책들, 많은 사람들을 통과해오며 물들고 스몄음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그래서 그게 ‘나’라는 태그를 붙이는 데는 주저하지 않는다. ‘나’가 없으면 불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날 이때까지 살면서 ‘나’ 하나 똑바로 못 만들었다는 인상을 주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은 성과주체로서의 삶을 강요받는 오늘날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게 모르게 마음 밑바닥에 깔아 놓은 바늘 카펫이다. 일단 ‘나’를 만들면 ‘나’를 지키고 싶다. 흔들리는 것은 취약함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한껏 열려 있지만 동시에 중심에는 굳은 기둥을 지닌, 훌륭하고 흠 잡을 데 없는 인간이고 싶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욕심이, 열리지 말아야 할 것들을 향해 마음을 열고 지키지 말아야 할 것들을 고집스레 움켜쥐고 있게 만든다. 딱 한 걸음만 더 가까이 다가가면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열어젖힐 수 있는데, 그 마지막 한 발짝 내딛는 일을 껄끄럽게 만든다. 열릴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이 딱 한 발이 모자라 수없이 닫혔다. 닫힌 문 앞에서 망연자실함을 감추고 우리는 서 있다. 당황하지 않은 척, 아쉽지 않은 척하며. 수많은 손들이 함께 만든 옷은 이미 연기처럼 녹아 날아갔고, 나는 그저 ‘나’라는 이름이 적힌 태그만 덩그러니 손에 쥔 채 발가벗고 서서 바람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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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왜 대학에 남아 로고스의 기술을 연마하는가? 타자에 대한 환대를 방해하는 모든 거짓된 담론을 비판에 부칠 힘을 기르기 위해서, 그리고 로고스 차원에서, 그러므로 ‘이해’와 ‘대화’ 저편에서 찾아오는 타자를 영접할 때 로고스란 전혀 불필요하다는, 이성의 겸손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닐까? 대학에서 이성을 훈련하는 일은 전적으로 고귀한 일이다. 그러나 이 훈련하는 자 자신이 고귀한 자일 수 있다면 그 까닭은, 그가 이성적 존재여서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환대는 이성과 그것이 낳은 수많은 합리적인 담론 저편의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명민한 이성을 낮출 줄 알기 때문일 것이다.
_ 서동욱, 『생활의 사상』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성은,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단순히 이성만을 위한 이성이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감성의 잠재력을 폭넓게 수용하는 이성이어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이성은, 흔히 말하듯이, 감성과 이성을 종합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해소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더 넓은 지평으로 열리는 것이어야 한다.
_ 문광훈, 『스스로 생각하기의 전통』
세상에는 데카르트가 너무 많다. 특히 술자리에 많다. 그런데 이 무수한 데카르트님들이 대부분 실제로는 데카르트 한 번 읽은 적 없는 데카르트들이라는 게 신비롭다. 제일 유명한 한 마디를 외우거나, 조금 더 나아가 모든 것을 의심한다는 태도 정도만 접하고는 바로 데카르트 신내림이라도 받은 것 마냥 이성거리며 감정을 씹어돌린다.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모든 것들을 배제하여 완벽한 지식을 찾아내겠다던 그 ‘방법’을 가지고 데카르트가 내린 결론이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라는 사실을 알까? 그 ‘방법’을 만든 사람도 저럴진대, 그 방법의 존재만 아는 걸로 마치 이성과 진리의 화신이라도 된 것처럼 굴면 쪽팔림만 낳을 뿐이다. 17세기에 만들어진 그 ‘감성을 때려잡는 이성’, 그거 유통기한 지난 지 벌써 100년 다 되간다. 업데이트 좀 하자, 이 17세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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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가 철학책을 대하는 태도는 간단하다. 재미없다 싶은 순간 아 이걸 어따 써, 하며 바로 내동댕이치는 것. 내가 이걸로 밥 벌어 먹고 살 것도 아닌데, 알고 싶은 만큼만 알 거야, 하는 것. 정말 졸렬하고 불공정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런 태도가 오랫동안 철학책을 읽어올 수 있게 만든 동력이 되었다. 결국 syo의 안에 남은 철학적 지식이나 지혜는 똥만큼이지만, 읽기 싫은 철학책은 syo에겐 똥보다 못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는 참 쉽고 재미있다. 에티카가 어렵지 스피노자는 어렵지 않다. 물론 잘 모르는 놈이 하는 소리다. 어렵자고 들면 무엇이든 한없이 어렵다. 1+1=2 라는 걸 증명하는 일도 몹시 어렵다. 하지만 철학에 관심을 가지는 친구들에게, 시작하려면 스피노자에서 시작하라는 충고를 계속 해대는 것은 분명히 스피노자의 철학이 쉬우면서도 희한하게 모던하다는 데 이유가 있다. 뭐, 그래도 결국에는 안 읽더라만.....
R.
김중혁의 『무엇이든 쓰게 된다』, 서동욱의 『생활의 사상』, 데이비드 에드먼즈와 존 에이디노의 『루소의 개』, 손기태의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개러스 사우스웰의 『마르크스라면 어떻게 할까?』, 이언 스튜어트의 『보통 사람을 위한 현대 수학』, 알베르토 망겔의 『서재를 떠나보내며』, 서머싯 몸의 『서밍 업』을 읽었고, 읽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