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마음
낮에는 거리에 나가 넘쳐나는 눈빛을 수집하였다. 밤이 찾아오자, 모아 놓은 눈빛들을 혼자 있는 어두운 방에다 풀어놓았다. 눈빛들은 초점을 잃고 산란하여 사그라졌다. 그리고 어둠. 방은 눈빛들로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침묵이 얇게 진동했고, 그는 밤이 자신을 통과하고 있음을, 관통하고 있음을 느꼈다. 어젯밤도 그랬다. 그제도.
서걱서걱 자정을 지치며 어딘가에 있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발목들을 세노라면 되뇌게 된다. 이 길고 무거운 밤도 내가 지나왔고 지나갈 수없이 많은 다른 밤들과 하나 다를 게 없는 그저 하룻밤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 모든 밤들만큼 소중하고 어여쁘지만, 역시 꼭 그만큼 별 것 아니기도 한 시간의 묶음일 뿐이라고 말하며, 그가 그를 안아준다. 내일 아침이 기다리고 있기에 오늘밤이 아름다울 수는 있지만, 내일 아침만 기다리고 있으면 오늘밤이 아름다울 수가 없겠지, 다 낡았지만 아직 쓸 만한 위로를 그에게 그가 건넨다. 달빛이 부드럽게 발목에 감긴다.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는 울지 않아도 되겠다. 일단 오늘밤만큼은.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희어 보인다.
어렴풋한 빛이 어둠 속으로 새어들어올 때, 그리 희지 않던 것들까지도 창백하게 빛을 발한다.
_ 한강, 『흰』
불이 타서 텅 비어버린 강낭콩 모양의 폐허와 그을린 주변 집들을 천천히 구경했다. 납작하고 조그만 콘크리트 집들이 몰려 있었다. 하나같이 창살 없는 큰 창이 앞을 향해 뻥 뜷려 있었고 경사가 완만한 살구색, 레몬색, 라임색 지붕을 이고 있었다. 철판으로 만든 울타리나 나무 한두 그루를 심은 자그마한 땅을 가진 집도 보였다. 거기에 그렇게 생긴 집들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뭐가 보여?" 석이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타고 재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_ 우다영, 「밤의 징조와 연인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운명이 어찌 될지 모릅니다. 속 마디를 지은 운명이 있습니다. 끊을 수 없는 운명의 쇠사들이외다. 그러나 너무 비참한 운명은 왕왕 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반역케 합니다. 나는 거의 재기할 기분이 없을 만치 때리고 욕하고 저주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필경은 같은 운명의 줄에 얽히어 없어질지라도 필사의 쟁투에 끌리고 애태우고 괴로워하면서 재기하려 합니다.
_ 나혜석,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단어들을 다시 적는 것만으로 사실로 여기던 것들이 변한다.
이것들에 어떻게 질서를 부여해야 할지 난 모른다. 질서라는 걸 애초에 부여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인지조차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게 정확히 뭔지 난 모른다.
내가 정확히 무얼 쓰려는 건지 난 모른다.
_ 조애나 월시, 『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