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 멕베인이 1968년에 발표한 87분서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공식 사이트에서 확인한 바로는 21번째 작품입니다. 68년에 21번째니 정말 정력적으로 집필활동을 하셨군요 -_-;;;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것만으로 따지면 10+1과 <찢겨진 사진>의 사이에 출간된 작품입니다. 우연히 숨어있는 책에서 구입하고 2주간 끙끙대면서 읽었습니다.

(제 영어 실력상 오독의 여지가 있고, 10+1에 대한 일부 언급이 있습니다. 스포일러까지는 아닙니다.)   

이 작품은 두 가지 사건을 바탕으로 진행됩니다. 첫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 사무실에 불청객이 앉아 있습니다. 사장도 여비서도 왜, 누구 때문에 찾아왔는지 모릅니다. 용기를 내어 물어본 여비서는 험한 소리를 듣고, 이에 겁을 먹은 여비서는 사장에게 보고합니다. 사장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예삿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밖으로 나가서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경찰 입회 하에서 용건을 묻자 어떤 사람을 찾아왔다고 합니다만, 그 사람은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에 옥신각신하다가 경찰이 개입하려하자, 이 불청객은 경찰을 개패듯이 패고, 비명을 지르는 비서를 남기고 사라지게 됩니다.

이에 87분서의 히죽남 버트 클링이 출동합니다. 사건을 조사하러 간 클링은 당황하게 되는데, 그 불청객이 만나려고 했던 여자가 10+1에서 자신과 한바탕 소동을 벌였던 신시아 포레스트였던 것입니다. 신시아는 10+1에서 벌어진 사건 이후에, 전공을 심리학으로 바꾸어서 현재 인사팀에서 면접 보조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2년 반이 흘렀지만, 그녀녀는 버트 클링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남아있었습니다. 노골적으로 카렐라가 친절하다는 등의 구박을 해댑니다. 부담감을 느낀 클링은 보고서를 작성하고 번즈 경감에게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을 배치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번즈 경감은 살인자는 처형되었지만, 유족을 노리는 다른 테러일지 모른다면서 그녀를 계속 따라다닐 것을 명령합니다. 그녀를 보호함과 동시에 굴에 연기를 피워 토끼를 굴 밖으로 내쫓으려는 생각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클링과 포레스트는 원치 않는 보호관계에 들어서게 되면서 티격티격 대지만, 그 불청객은 클링이 경찰이라는 것을 알고 더 무서운 행동에 들어서게 되는데......

다른 한편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TV쇼 진행자에 관련된 이야기 입니다. Stan Gifford라는 인기있는 쇼진행자가 있습니다. 그가 진행하는 쇼는 2천만 가구의 4천만 명의 8천만 눈동자가 시청하는 인기 쇼입니다. (이 표현은 소설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제목의 유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격무에 시달리느라 TV 볼 시간이 없는 스티브 카렐라 형사도 이 쇼를 즐겨 봅니다. (참고로 테디는 말을 들을 수 없어서 판토마임만 본다는 군요.) 어느 날 이 쇼를 보고 있는데, 방송 중에 그만 Stan Gifford가 사망합니다.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해 난장판이 된 스튜디오에 마이어 마이어와 카렐라 콤비가 출동하고, 부검결과 독살로 밝혀집니다. 

정황상 사망 직전의 광고시간 전후로 독이 든 캡슐을 삼킨 것으로 추정한 두 콤비는 그 때 의상실에서 그와 함께 있었던 스태프와 그의 부인, 그리고 주치의를 수사합니다. 각각의 스태프에게서는 석연찮은 점이 발견됩니다. 의상담당은 죽은 진행자가 해고를 프로듀서에게 건의한 상태였고, 보조작가는 자신이 쓴 대본에 대한 악평 때문에 언쟁이 있었고....이런 혐의점와 더불어 서로의 진술이 엇갈리기 시작합니다. 또한 그의 부인은 첫 조사에서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합니다. 그러나 알리바이 검증과와 대질심문을 통해 일단 모두에게 혐의가 없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범인일까요? 두 형사는 사건이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에 못지 않게 마이어의 감기도 점점 심해지는 것을 깨닫게 되구요.)

87분서는 각 작품별의 재미와 전체 시리즈 속에서의 이어지는 재미가 어우러지는 것이 묘미인 셈인데, 특히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었던 10+1의 뒷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두찬이에 따르면 버트 클링의 두 번째 애인인 신시아 포레스트와 맺어지는 계기가 되는 작품인 셈이죠. 역시 에드 멕베인 옹의 필력은 대단합니다. 영어로 읽었기 때문에 번역된 것보다 더 집중해서 읽은 탓도 있지만, 2주 정도 걸쳐 띄엄띄엄 읽으면서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내용상 트릭의 독창성이나 범인찾기의 어려움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게 되는 것은 멕베인 옹의 필력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87분서를 읽으면서 이런 부분을 기대하지는 않겠지만요. 많이 읽어보지 못해서 말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만, 확실히 초기의 멕베인 옹의 필력은 소박한 느낌입니다. 문장의 길이가 짧고, 대화가 많고, 단어의 폭이 적은 대신에 상대적으로 특정 어휘의 사용빈도가 높습니다. 이에 비교하면 후반기 작품, 얼추 1980년대 이후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각 문장의 길이도 길어지고, 내용도 길어지면서 읽기가 훨씬 어렵더군요.(써놓고 보니 21번째 작품이니 초기작이라고 하기도 어색하네요. ^^)

그렇지만, 그 단순함 속에 순간순간 스쳐지나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스크루볼 코메디에 가까운 버트 클링과 신시아 포레스트의 욱신각신하면서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 과정이나 다른 작품에서도 멋진 개그 콤비였던 카렐라-마이어의 수사 상에서 주고받는 개그는 그야말로 명불허전입니다. 특히 마이어의 활약은 대단합니다. <살의의 쐐기>에서의 활약으로 우중충한 허무개그의 달인으로 각인된 마이어 마이어는 이번 작품에서는 10월이 배경인 관계로 감기가 걸립채 등장합니다. 그래서 카렐라가 진지하게 수사하고 있으면, 옆에서 코를 훌쩍거리거나 기침하는 등 온갖 꾸리한 상황을 연출합니다. 그리고 마이어 특유의 썰렁한 한 마디 던지기까지...보고 있자니 웃음과 함께 안쓰러운 생각이 동시에 들더군요. 어느 작품에서 마이어가 과연 멋지게 나올 것인지 궁금하기까지 하더군요. 그리고 멕베인 특유의 짧지만 강렬한 단편적인 묘사도 여전히 돋보입니다. 첫 번째 사건의 불청객이 저지르는 폭행들의 묘사는 마치 액션영화를 보는 듯 강렬하며, 카렐라가 진행자 Stan의 죽음을 목격하기 전까지 묘사되는 쇼의 전개는 저의 영어실력이 부족함이 아쉬울 정도로 좋았습니다. 특히 판토마임을 묘사하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영어로 읽은 것이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스산한 10월 거리를 묘사하는 장면이나, 버트 클링이 수사를 위해 방문한 부둣가의 풍경묘사도 맥베인 답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멕베인 특유의 여성들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인들이 육감적이죠.-도 여전합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맥베인 옹의 구성방식에도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됩니다. 내용상 두 가지의 이야기가 병렬로 진행되는 형태입니다. 그런데 이 두 이야기가 서로 맞물리면서 묘한 재미를 줍니다. 예를 들어 초반부에 클링-포레스트 라인은 심각하다가 러브러브라인으로 빠지게 되는데, 반대로 카렐라-마이어 라인은 재미있는 쇼의 묘사가 지나고 나면 점점 수가가 미궁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이야기가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막아줍니다. 마치 두 묶음의 카드를 들고 있는 상대와 포커를 치는 기분이랄가요. 카렐라-마이어가 사건이 안 풀리고 경찰의 애환을 다루고 나면-간만에 집에 들어와서 애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데, 전화가 걸려서 카렐라는 다시 나가야만 하죠-둘이서 티격티격대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또한 불청객으로 인해 클링-포레스트 라인이 심각해지면, 카렐라-마이어가 본격적으로 개그를 하고 사건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물론 주된 이야기는 카렐라와 마이어가 수사하는 이야기입니다만, 클링과 포레스트의 연애담도 비중에 비해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뭐랄까 1+1=3,4,5,...를 만들어 내는 느낌이랄까요? 맥베인의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평범한 일상들 사이에서 엮이면서 발생하는 재미나, 단편처럼 등장하는 삶의 여러 모습들이 주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면 사건이 해결되는데, 사건이 해결되는 것 자체는 이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요건 자세히 말씀드리면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조심스럽습니다만, 결말부분의 다양한 결말들은 결국 에드 멕베인이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사랑'이 아닐까라고 추측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일부 있었습니다. 우선 제목과는 다르게 쇼 비지니스의 내부를 들여다볼 정도의 내용이 없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유명 진행자가 생방송 중에 죽었다라면 기대할법한 내용이 의외로 적습니다. Eighty Million Eyes라는 제목과 초기 도입부를 보고 쇼 비지니스의 추악한 면을 수사 과정에서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는데, 아쉽지만 소재 차원에서 그치고 맙니다. 물론 반드시 쇼 비지니스를 보여줘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아쉬운 마음이 드네요. 멕베인 옹의 필력이라면 날카롭게 파헤칠 법도 한데 말이죠. 그리고 중심축이 되는 이야기의 범인과 트릭이 평이하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결말 부분에 카렐라의 설명을 들으면서, '이건 초반에 확인하면 알 수 있는 거잖아!'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경천동지할 트릭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의 트릭과 해결방법은 비슷한 구조를 가진 <살의의 쐐기>랑 비교하면 확실히 부족한 느낌입니다.

에드 멕베인은 늘 그렇듯이 실망을 주지 않는 작가입니다. 특히 초기작은 그렇습니다. 후기작은 번역탓도 있겠지만, 조금 실망스러운 면도 있었죠. 매년 한두작품씩 내면서, 그리고 다른 일도 병행하면서 꾸준하게 수준작을 낸다는 것은 대단하죠. 이러쿵 저러쿵 써놓고 보니, 이 작품만의 감상을 썼다기 보다는 다른 작품에서도 느낄 수 있는 에드 멕베인의 장점을 이제야 발견한 듯 쓴 것 같은 느낌이네요. 오랫만에 영미작가의 수작을 읽어서 흡족한 느낌입니다.

추신1) 작품 중간에 버트 클링이 신시아 포레스트에게 새로 나온 히치콕 영화를 보자고 합니다. 작품출간년도가 1968년이니 이론상으로는 1967년이나 1968년 영화겠죠? 시기가 비슷한 히치콕 영화는 1966년에 개봉된 폴 뉴먼와 줄리 앤드류스가 주연의 <찢겨진 커튼(Torn Curtain)>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새로 나온 히치콕 영화는 전 작품인 <마니(Marnie)>가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에드 맥베인은 1963년에 개봉한 <새(The Birds)>의 극본으로 아카데미를 수상합니다. 하지만 에드 맥베인은 이전에 57~59년 사이에 Alfred Hitchcock Presents에 세 개의 에피소드를 각색합니다만, 그 때는 히치콕을 만나서 작업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을유문화사의 <히치콕>을 읽어보면, 뒤 모리에의 원작을 각색할 사람으로 히치콕은 에드 맥베인을 고용하고, 히치콕 특유의 완벽주의로 맥베인의 각색을 다 고쳐서 영화를 찍습니다. 당연히 맥베인 옹이 상당히 불쾌해했다고 합니다. 결말이나 중요한 부분등을 다 고쳤으니 기분 나쁠만도 하죠.그러나 히치콕은 맥베인이 마음에 들었는지, 차기작인 <마니(Marnie)>의 각색도 맡깁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주인공이 XX당한다는 설정 등에 대한 이견 차이로 맥베인이 쓴 초고는 기각되고, 히치콕은 에이전트에게 해고를 통보합니다. 이래저래 맥베인 옹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겠죠. 나중에 <나와 히치(Me and Hitch)>라는 회고록까지 쓴 걸 보면 화가 상당히 났던 모양입니다. <히치콕>에서 읽은, <나와 히치(Me and Hitch)>에서 인용된 에드 멕베인의 이야기들이 그리 고운 표현들이 아니었습니다. 하긴 그정도 곤조 없이 작가를 할 수 없겠죠. 그래서 새 히치콕 영화를 굳이 보자고 하는건 내가 쓴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썼나 보자라는 식의 곤조가 느껴집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상상입니다...^^ 

제가 길게 쓴 이유는 이 작품의 초반에 등장하는 TV 프로듀서는 히치콕을 모델로 쓴 티가 나기 때문입니다. 히치콕의 악명높은 명언인 배우를 가축처럼 다루어야 한다는 표현도 직설적으로 등장하고, 히치콕의 음담패설성 농담도 그대로 재현됩니다. 여자의 특정부위를 운운하면서 자기과시적인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음흉함은 히치콕의 그것과 유사하죠. 솔직히 이렇게까지 말하면 안되겠지만, 추레한 히치콕과는 정 반대의 외모를 가지신 분을 설정한 것 자체가 의심스럽긴 합니다.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어느 독자의 망상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

추신2) 다음 작품이 Fuzz군요. 이번에 뜬금없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87분서는 정말 순서대로 읽는 것이 좋겠다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았습니다. 이 책을 헌책방에서 본 것 같은데, 사서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추신3) 방금 집에 와서 책을 확인해보니, 출간일자가 66년이네요. 공식 홈피에 68년으로 되어있어서 그렇게 추정했는데, 아마 페이퍼백 기준인 모양입니다. 하드커버 초판은 66년에 나왔나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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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1-14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부러워요 ㅜ.ㅜ

상복의랑데뷰 2006-11-14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물만두님이 더 부러운데요 ^^;

2007-03-15 1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희대제 1 - 탈궁
이월하 지음, 한미화 옮김 / 산수야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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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청나라는 그다지 관심있는 왕조가 아닌데, 아무래도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우리로써는 곱게 봐주기도 힘들 뿐더러, 정복왕조라는 한계 때문인지 의도적으로 잘 다루지 않는 측면도 잇는 것 같다. 다만 박노자 교수님의 저작 때문에 청의 말기와 조선의 말기가 겹친 대원군-고종 시대의 범아시아적 지식인의 활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는 있으나, 관련 서적을 읽기란 쉽지도 않고 해서 관심으로만 묵혀두고 있었다.
 
요즘 정독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관계로, 권수의 부담 때문에 미루었던 이월하의 제왕삼부곡의 첫 편인 강희대제를 읽엇다. 청나라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최전성기의 기틀을 닦은 강희대제, 엄격한 태도로 수성에 성공했던 옹정대제, 그리고 중흥과 쇠퇴를 동시에 가져온 건륭대제. 각각의 매력을 어떻게 구현하는지 보고 싶었다.

책에 따르면, 강희대제는 부왕이었던 순치제의 갑작스런 출가로 8세에 보위에 올랐다. 어린 나이에 권신 오베의 횡포에 시달리다가, 15(!)세에 오베를 축출하고, 23(!)세에 오삼계를 위시한 삼번의 난을 진압했으며, 정성공 부자가 항거하던 대만, 몽골, 러시아를 평정하여 최후로 통일왕조를 이룩한 위대한 황제였다. 또한 강남을 안정시키고, 명조의 유신들을 적극적으로 통합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60여년간의 긴 치세로 인해 후반부에는 권신들의 난립 등의 부작용이 심햇으며, 특히 말년에는 황자들의 난으로 인해 편안히 눈을 감지 못했다. 오현제 시대의 트라야누스와 같은 황제라고 할 수 있겠다. 공평무사와 관용을 중시했다는 점은 상당히 유사하다. 다만 트라야누스는 무인 출신이고, 강희 대제는 문인 출신이라는 차이가 있다는 점과 전자는 아들이 없어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후계자로 고를 수 있었다는 점이 다르다. 그 점이 강희대체 후반부의 난맥상을 야기하기도 했다.

강희대제를 보면서, 칼로 흥한자 칼로 망한자라는 속담이 생각났다. '칼'을 어떤 단어로 치환하여도 성립할 수 있을 것 같다. 자기의 장점이 결국에는 단점이 되는 인간세계의 진리를 엿본 느낌이랄까? 강희의 수많은 장점과 치세가 후반부의 난맥을 야기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강희의 포용정책은 신하들의 방종을 가져왔고, 신하들의 중용은, 권신들의 등장을 야기했다. 또한 지나치게 똑똑하고 신중했던 강희로 인해 황자들의 비극이 시작된 것을 보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성하면 망하는 것이 진리지만, 떨치고 싶은 욕망이 있고, 그럴수록 더 업보에 빠져들게 되는 우리네의 삶. 

다른 단점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인 강희대제의 삶 자체가 흥미진진하기 때문인지 재미있게 읽었다. 조선왕조실록류처럼 60년 모두를 다룬 것이 아니라 중요한 내용들 위주로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 지루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번역상태를 볼 때, 작가로써 상당한 필력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번역이 이상하다는 이야기...)

다만 몇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삼국지> 등의 장엄한 고어체 혹은 문어체 형식을 선호하는 나로써는 지나친 구어체 위주의 서술 방식이 맞지 않았다. (솔출판사에서 새로 번역한 <서유기>를 읽으면서도 느꼈던 문제다.) 마치 저잣거리에서 일어나는 시시비비를 보는 느낌이랄까. 초반부에 황궁 외부에서 자신의 손발이 될 인재들을 구하는 과정이야 당연히 궁 외부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야겠지만, 이런 경향이 계속 보이는 것은 문제다. 전체적으로 경박스럽다고 할까.

또한, 전체적으로 등장인물의 수준이 떨어진다. 오삼계는 거의 바보에 가깝고,-실제로도 바보에 가까웠다는 이야기가 잇지만-오베는 동탁의 마이너 버전이었으며, 기타 등장인물도 썩 뛰어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마치 패치 후에 능력치 조절에 실패하듯이, 1부의 뛰어난 신하가 2부 가면 병신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이런 등장인물이 퇴장할 때는 별다른 족적도 없이 사라진다. 초반부의 충신이 중반부에 권신이 되어, 반역을 꾀하거나 다른 마음을 먹다가 제거되는 과정이야말로 강희 용인술의 백미인데, 초반부에 엄청난 포스를 가지고 등장햇던 인물들의 퇴장에 너무 무신경하다. 특히 소니 재상의 아들로 등장하는 소어투는 그야말로 안습 수준이었다. 그 이야기가 제일 재밌을 법한 이야기였는데, 그걸 몇 줄의 서술로 넘겨버리는 것은 아쉬웠다.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어서 재미있게 읽었지만, 기대를 뛰어넘지 못해서 아쉬웠다. 옹정과 건륭까지 읽을까 말까 고민중이긴 한데, 시작을 했으니 끝을 봐야지 싶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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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dai2000 2006-10-30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기를 다룬 게 바로 <녹정기>라죠. 저도 읽다가 흥이 떨어져 던져 버렸는데 꾸준히 다 보셨군요. ^^

상복의랑데뷰 2006-10-30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그냥 버리기는 좀 아깝네요. 지금은 옹정황제를 읽고 있습니다. ^^
 
시소게임 ㅣ 작가의 발견 1
아토다 다카시 지음, 유은경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에서 읽었던, 유명한 아토다 다카시의 단편집. 1980년에 나왔다고 한다. 호러와 미스터리 부분에서 상당한 명성을 누리고 있는 작가인 만큼 기대가 컸다. 그러나 몇몇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 외에는 찾아보기 힘든 작가라서 과감히 출간해준 행복한책읽기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예전 해난터에서 나온 가 있긴 하지만, 희귀본이니까...

이 단편집에 대한 소개는 책 뒷편에 있는 임지호님이 워낙 깔끔하게 정리해주셔서, 적절한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부끄럽지만 그냥 인용한다.

'호러와 미스터리의 경계를 넘나들며 일상 속에 숨은 악의를 적나라하면서도 섬뜩하게 그린 걸작 단편집'

굳이 토를 달자면, 호러와 미스터리의 경계를 넘나들긴 하지만 이 단편집은 호러의 색채가 강하다. 물론 호러나 미스터리가 이종교배의 잦고, 순수한 의미의 미스터리들도 일부 존재하긴 하지만, 이 단편집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둡고 음산한 호러물에 가깝다. 미스터리 단편이 존재하지만, 미스터리 단편에서 맛볼 수 있는 도락은 그다지 즐겁게 다가오지 않는 편이다.

이 단편집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어두운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편집의 세계는 지극히 어둡다. 그러나 순수하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욕망을 깨닫고, 이를 긍정하고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욕망에 대해서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이 될 수 없듯이 욕망에 순수해질수록 현실의 삶이 붕괴되는 기묘한 아이러니에 봉착하게 된다. 일종의 자기파멸극이라고 할까.
자신의 욕망을 깨닫고 굴복하는 과정, 그리고 타인의 악의를 깨다는 과정, 그리고 업보처럼 욕망을 실현시켰을 때 벌어지는 삶의 아이러니들. 스피디함은 없지만, 정중동의 강렬한 심리적 서스펜스가 가득하다. 비유를 하자면, 살의를 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발한발 접근하는 암살자를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 대상이 나인 상황을 말이다. 아니면 내 목위로 천천히 내려오는 차가운 나이프를 상상해도 좋고. 난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이런 상황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되었다.

또한 다카시는 속된 말로 세이브투수다. 매듭을 잘 짖는 재주가 있다. 그것이 반전이던, 어떤 거든 간에. 마지막까지 몰아가는 과정도 물론 재미있지만, 막판에 벌어지는 반전 내지 아이러니한 결말로 봉합하는 힘이 다카시의 다른 매력이다. 요코하마 히데오 류의 용두사미파와는 다른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각 단편에 대한 이야기는 읽으실 분들을 위해 언급을 피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망진단서>, <시소게임>이 가장 재미있었다. 그리고 다른 작품의 수준도 고른 편이다. 다만 <자살균>이나<과거를 운반하는 다리>같은 범작도 일부 존재한다는 점은 아쉽지만, 25년이 지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책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줄이고, 책의 만듬새에 대한 언급을 하자면, 표제를 바꾼 행복한 책읽기의 센스가 돋보였다, 이 단편집의 원제는 <과거를 운반하는 다리>인데, 표제작으로는 함량미달이 아닌가 싶다. <시소 게임>의 흥미진진한 심리묘사에 비하면 지나친 우연과 어설픈 감동이 주는 범작이다. 또한 이 단편집의 성격과도 잘 어울리는 제목인 것 같고. 그리고 기본적인 요소들-교열이나 편집 상태도 꼼꼼한 편이다.(아마 이 분량의 밀리언 셀러 클럽이라면 분권이 되지 않았을까 -_-;;) 또한 무사사노 지로의 해설도 깔금하고, 북스피어의 편집자이신 임지호님의 추천사는 뒷편이 아니라 길게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단편집의 주제를 잘 요약하고,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다만 아쉬운 것은 어떤 종이의 재질을 사용했는지 모르겠는데,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 책은 직접 서점에서 구매했는데, 물에 젖은 책들을 말린 듯이 울퉁불퉁한 모습을 띤 책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 덜 울퉁불퉁한 것을 고르는데 꽤나 힘들었다. 이 점을 신경스다보니 정작 책 옆면에 생채기가 난 책을 샀다. -_-; 하드커버가 아니기 때문에 더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모던도서관'과 같이 일본어를 직역한 듯한 부분이 눈에 종종 보이는 것 역시 아쉽다. 번역이 어려운 부분까지 억지로 의역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번역이 가능한 부분을 그냥 지나치는 것도 문제가 아닐까. 특히 북스피어, 시공사 등과 함께 책의 만듬새의 기대치가 높은 행복한 책읽기의 책이라면 더욱 아쉽다.

그래도 좋은 작품이 좋은 출판사를 통해 나왔다는 점이 만족스럽다. 단편집의 내용상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 나오는 것이 나을 법도 했는데,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추운 날 먹는 빙수처럼 뽀드득뽀드득 맛있게 그리고 서늘하게 읽혔다. 작가의 발견 1이라고 되어있는 것을 보아 연작으로 나올 것 같다. 이름이나 아토다 다카시가 첫 주자인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고 있는-장르 문학 전체가 유독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SF를 제외한 장르문학작가군을 소개할 것 같은 느낌이다.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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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0-29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읽으셨군요. 저는 짬이 안나네요 ㅜ.ㅜ

상복의랑데뷰 2006-10-30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 님이야 워낙 읽으시는 책이 많으시니 ^^; 기회되시면 읽어보세요. 괜찮습니다~
 
이프 ㅣ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5
이종호 지음 / 황금가지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원래도 편식이 심한 편이지만 최근에는 추리소설 내지는 일본소설만 읽는 것 같아서, 이종호의 이프를 읽었다. 이종호는 한국공포문학계의 선두주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준높은 작품을을 꾸준히 발표하는 작가로 알고 있다. 이영도와 같은 위상이라고 해야할까?

이 작품 이프는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소시민들의 그릇된 그러나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딸에게 벌어진 사건 때문에 가슴 속 깊숙히 상처를 안고 있는 신문기자 도엽이 우연한 기회에 목격하게 된 자살사건에 의혹을 품고 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물론 공포소설을 표방한 작품인 만큼, 그 진실은...

무엇보다도 이 작품을 읽으면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장르문학 내에서 간만에 '프로 작가'의 냄새가 나는 작품을 읽었다는 것이었다. 다른 리뷰를 보면 뻔하다, 실망스럽다라는 의견도 상당수 있는데, 나도 상당 부분 동의한다. 그렇지만, 다 인정하더라도 이 점만큼은 정말 높이 사고 싶다. 양적인 성장에 비해 질적인 성장이 더뎌지는 듯한 한국무협이나, 양적인 성장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한국추리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아쉬운 부분들을 이 작품은 채워주고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종호가 차용하고 있는 구조나 트릭은 다른 리뷰어들이 언급한, 몇 편의 영화의 그것들을 재구축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창적인 내용을 어설프게 그려내는 작품이 독창성 때문에 최소한의 인정을 받는다면, 반대로 상투적인 내용을 설득력있게 그려내는 것도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바로 이프가 그러하다. 이종호는 주제의 상투성을 일정 수준 극복하고 있다. 초반부의 난삽함을 극복한다면, 서스펜스의 본령에 충실한 듯한 전개와 다듬어진 문체, 그리고 재미 모두에서 말이다. 그리고 작가가 우리의 삶에 대해 가지는 문제의식이 결코 작다고 할 수는 없는데, 김진명처럼 소설 따로 개똥철학 따로의 장광설도 없다. 비교적 충실하게 사전 조사도 한 것 같고. 이를 바탕으로 작가 고유의 주제의식을 내용과 겉돌지 않게 소화해낸 솜씨는 감탄할만하다.

한편으로는 상당히 서글픈 이야기이다. 작가라면 갖추어야 할 당연한 것들을 갖추지 못한 졸작이나 습작류가 버젓히 출간되는 상황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프로페셔널리즘을 보여줬다는 것 자체가 칭찬의 대상이 되는 것 자체가 말이다. 마치 배우가 특정한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서, 엄청 고생했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할까.

또한 이 작품은 반복되는 소재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서술구조의 배치와 계단을 올라가듯 증폭되는 공포와 밝혀지는 진실로 인한 재미가 쏠쏠하다.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사연. 현대사회의 병폐를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슬프게 묘사하고 있다. 물론 그들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니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는 진정성의 힘이 있다. 읽는 분들의 재미를 위해 구체적인 예를 들기는 어렵지만, 사연 하나하나가 가슴에 깊이 와 닿았다. 각각의 사연마다 나랑 연관이 있었지만, 특히 인혜의 사연이 가장 가슴아팠다. 다른 사연에 비해 인혜의 경우는 선택을 강요당한 측면이 많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극복할 여지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으나, 인혜의 경우는 극단적인 경우라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막다른 골목으로 달려갔고, 결국 벽에서...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이들과 비슷한 나의 어두운 욕망에, 그리고 그 욕망을 긍정적으로 바꾸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한 불만이 생기면서도, 한편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내 자신의 좋은 면과 주위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나도 이들과 같은 상황이라면 이들과 같은 길을 택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다듬어진 글솜씨를 바탕으로 한 세련미라고 할 수 있겠다. 경천동지할 반전이나 독창성을 기대하고 읽으시려는 분께는 권해드리고 싶지 않다. 아 작품은 결코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 센스>가 아니다. 세련된 기성품이다. 여름이 지나고 스산해지는 가을에 이프를 읽는다면 내 주변, 아니 내 자신 속에 있는 이프에 대한 욕망을 느끼며, 이를 어둡고 맛깔나게 풀어낸 이종호의 솜씨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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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10-26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또 질러야 하나...ㅜ.ㅜ

상복의랑데뷰 2006-10-27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비연님 오랫만에 뵙습니다. ^^ 뚜렷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에 못지 않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 감히 추천드리고 싶네요.
 
J 미스터리 걸작선 3
정태원 옮김 / 태동출판사 / 1999년 10월
평점 :
절판


열화와 같은 성원;;;은 없었지만, 무사히 다 읽었습니다. 현대로 오니 낯익은 작가들이 눈에 띄더군요. 하지만, 저에게는 좋지 않은 인상만 남긴 작가들이 대부분이라, 기대치가 낮아지는 것을 느꼈고,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1, 2권에 비해 몰입도는 떨어지더군요. 전반적으로 수준이 제일 떨어집니다. 계속 같은 책을 읽어서 후반부에는 집중력의 저하를 가져온 것도 있구요.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장르와 형식, 그리고 한 작가의 (소개되지 않은) 한 작품씩만으로도 3권의 단편집을 꾸려낸 그들의 저력에 다시한번 감탄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 태동출판사에서 나온 것처럼 멋진 단편집이 조만간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1. 삼층의 마녀, 야마자키 요코
주인공 마코토의 옆집에 인질범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인질범의 요구는 엉뚱하게도 자기와 같이 죽어달라는 것인데...저는 서두의 도입부를 보고 나스타냐 핸스트리지가 등장한 영화를 예상했는데, 발상이 특이하더군요. 어느순간 탐정의 기지를 발휘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조금 뜬금없어 보입니다만, 신선한 발상, 꼼꼼한 전개, 엔딩까지 괜찮습니다.

2. 꿀과 독, 구사카 게이스케
꿀과 독을 통해 주인공 유코와 게이코 간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가는 도서추리단편입니다. 꿀과 독이 단서가 되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집니다. 도입부의 사연과 해결부분의  잔잔한 감동이 괜찮더군요. 그러면서도 쓸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3. 지나치게 소문을 모은 사나이, 이시자와 에이타로
아무에게도 원한을 살 일이 없는 모범생같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용의자는 사건 발생시에 있었던 모든 사람입니다. 하지만 동기가 없어보입니다. 과연 누가 왜 죽였을까요? <삼층의 마녀>처럼 발상이 특이하고, 사건의 해결방법도 현실에서 차용할 법한 방법이였습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죠. 너무 입이 가벼워도 문제지만, 너무 입이 무거워도 문제라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4. 복수는 그녀에게, 고이즈미 키미코
임신부들의 대결. 이라고 밖에 말하기 힘드네요. 심심한 단편이었습니다.

5. 기억, 사사자와 사호
가미야마 경부보는 교코라는 용의자의 살해동기를 밝혀내기 위해 심문을 시작합니다. 밑의 야마무라 미사와 함께 정사, 악녀, 불륜이라는 키워드로 기억되는 사사자와 사호의 단편입니다. 역시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역시 실망했습니다.

6. 악마는 악마, 츠츠키 미치오
구로가와 앞에 악마가 나타나서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는데...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가 많은 단편을 읽지 못해서 이런 발상이 상투적일 수도 있겠다 생각은 듭니다만, 신선한 발상과 결말부의 반전이 마음에 들더군요.

7. 변신, 야마무라 미사
요코는 우연히 옛날에 쓰던 화장품을 발견하고 화장을 합니다. 외출을 하니 자신이 20대의 얼굴로 돌아간 기분을 느끼는데, 기분만 그런걸까요? 정사, 악녀, 불륜으로 기억되는 야마무라 미사의 단편입니다. 이미 10여년 전에 고인이 되셨더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하지만 역시 이 작품도 별로였습니다. 헛된 꿈을 꾼 댓가라는 건지, 결말부의 쌩뚱맞음이 영 마음에 안 들더군요.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악녀버전 같습니다.

8. 밀폐도, 모리무라 세이이치
선상에서 실수로 떨어진 아이를 구해준 남자. 그 남자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이 배를 탔는데....읽는 순간 모리무라 세이이치 같은데, 그럼 결말도 이렇겠군. 이라고 생각했는데, 정확해서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이 단편의 초반부에 건조하게 배를 묘사하는 실력을 발휘했으면 좋겠는데, 늘 감상주의로 빠지시는군요. <야성의 증명>보다는 <인간의 증명>을 선호하시는 것 같아요. 그게 제 취향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만. 그리고 톱니바퀴 증후군이라도 있으신지, 결말부에 다 톱니바퀴 돌듯이 맞춰야 직성이 풀리시는 것 같아서 그것도 불만이고. 증명 시리즈를 빼고는 만족스러웠던 기억이 전혀 없네요.

9. 좋은 이름, 도요타 아리츠네
이름에 불만이 많은 주인공이 외계에 갑니다. 라는 내용의 단편입니다. 자신의 이름에서 착상한 게 아닐까 싶네요. 하지만 솔직히 습작 수준입니다. 이 것만 보고는 어떻게 sf작가클럽회장을 하셨는지 궁금해지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초코가베 곤타자에몬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주인공의 심리를 알텐데 말이죠;;;;

10. 기괴한 창조, 조 미사유키
주인공이 헌책방에서 잡지를 사는데, 그 뒤에는 다른 책이 숨겨있었으니. 이건 전형적인 무협소설의 구성인데. 일종의 메타추리소설 같은 면이 있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독자의 마음을 집어내는 반전이 놀랍습니다.

11. 거미집, 이쿠시마 지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젊은여자과 결혼한 노신사, 하지만 그녀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는데...역시 전설의 아이템인 <끝없는 추적>의 아쿠시마 지로의 작품입니다. 하드보일드풍의 문체가 좋긴 한데, 내용은 영 심심합니다. 결말부의 반전도 너무 쉽게 짐작이 가능하구요. 평범한 단편이었습니다.

12. 거짓말, 와타나베 온
이부카의 이상한 경험담을 다룬 단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기괴한 창조>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이 분은 요절하셨더군요. 역시 천재는 요절을;;;

13. 퀸 감옥, 기타 모리오
퀸섬에 괴도가 온다는 소식에 주인공은 체포의 결의를 다지는데, 가볍게 쓴 일종의 패러디 물입니다. 홈즈의 추리방법을 흉내내는 주인공의 모습이 귀엽다. 이상의 재미는 없었습니다. ^^; 결말의 엉뚱함은 좀 허탈하더군요. 이건 웃자고 쓴 단편인 것 같습니다.

14. 붉은 꽃, 미나카미 츠토무
식물을 연구하는 주인공이 시골에 내려가서...음...삼중당에서도 귀한 편인 <죽음의 유역>을 쓰신 미나카미 츠토무의 작품입니다. 소재로 등장하는 끈끈이주걱이 상징하는 탐욕을 묘사하는 분위기가 좋지만,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15. 어느 부인의 프로필, 미즈타니 준
남편을 살해한 부인의 살해동기를 알기 위해 변호사가 한 화가를 찾아옵니다. 부인의 고귀한 사랑이 느껴진다 외에는 별로 드릴 말씀이 없는 범작입니다.

16. 골초는 빨리 죽는다. 이자와 모토히코
애연가와 혐연가 간의 대화만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단편입니다. 아마 경현 형님도 언급하신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대화만으로 이 정도의 긴장감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데, 애연과와 혐연가의 논리가 설득력있게 전개되고, 중반 이후의 급작스런 전개가 주는 쾌감이 있습니다. 전 혐연가라 혐연가의 주장에 1000% 공감. 피우는 건 좋은데, 세상이 모두 흡연자들의 공간인 것처럼 무례하게 피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단편집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17. 절벽에서의 비명, 나즈키 시즈코
주인공에게 옛 동창의 부인이 찾아와 도와달라고 합니다. 사고로 인해 시력을 잃은 실의에 빠진 예술가 동창을 도우러 간 그는 이상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나즈키 시즈코의 단편은 이상하게 심심합니다. 위의 야마무라 미사나 사사자와 사호같이 싫은건 아닌데, 그렇다고 딱히 좋다고 할만한 요소도 없습니다. <한 마디에 대한 벌>같은 예외도 있긴 하지만요. 그냥 무난하게 읽었습니다.

18. 어느 선량한 청년의 출납부, 니시가와 기노유키
제목 그대로입니다. 실험치고는 괜찮았습니다. 마무리 하는 작품으로는 괜찮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만 추리소설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봐야만 한다는 아쉬움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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