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몽
고을주 지음 / 연인(연인M&B)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읽은 한국미스테리입니다. 장편으로만 한정한다면 꽤 오랜만이네요. 무엇보다도 현직에 계시는 분이 쓰셨다는 광고글을 보고 그닥 좋아하지 않는 팩션이나 '자칭' 프로작가들의 어설픈 작품들 보다는 날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읽었습니다. 한국미스테리의 발전에 미스테리 시장의 확대의 '최고의 원동력이자 결정판'이라고 믿는 편이기에 현직에 계신 분이 썼다는 작품을 그냥 지나치기는 아쉬웠습니다. 읽고난 느낌은, 뭐랄까 독특하네요. 나쁜 의미의 '한국'미스테리와는 다른 위치에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전문적인 비평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이라고 함부로 말은 못하겠습니다. 또한 이 작품의 독특함이 독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지도 궁금하구요. 

제 경험상, 최근에 한국미스테리를 읽는 것은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단 팩션을 제외한다면 매우 거칠게 말해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존작가들의 작품입니다. 구체적으로 지목하자면 몇페이지마다 등장하는 기계적인 섹스신, 전무하다 싶은 트릭을 문체로 커버하려는 듯한 태도를 접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추리소설가 지망생들의 단편들입니다. 추리소설의 본령인 트릭에 충실하긴 하고, 기성작가와는 다른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지만-요즘은 이런 작품도 드물더군요.-문체, 특히 인물묘사나 사건전개에 있어서 아마추어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전형적이거나 세련되지 못한 느낌입니다. 당연히 어느 쪽이던 만족스럽지는 못한데다가 이 두 개의 카테고리를 벗어나는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적어도 이러한 전형성에서는 조금은 벗어나 있습니다. 이유를 추측하자면, 이 분의 두 가지 특징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직 경찰이라는 점-제 기억으로는 남도에서 나온 이형우씨의 <더거리 형사> 이후로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이 작품은 실화에 가깝죠.-과 글쓰기 특히 고전에 관심이 많다는 점입니다. 전자는 서술 방식과 관련이 있고, 후자는 문체와 관련이 있다고 추측해 봅니다. 

가장 특이했던 것은 문체였습니다. 독특한 옛날투의 문체를 구사하시더군요. 약력을 보면 가정교육의 지침서 <훈도목 선생>이라는 저서도 쓰셨더군요. '훈도목'이라는 표현에서부터 고전에 관심이 많고, 이러한 관심이 문체에 투영되었다는 짐작이 듭니다. 특히 작가의 말은 추리소설을 읽는 것인지 무협소설이나 대하소설을 읽는지 헷갈릴 정도였습니다.

저자가 '백일몽(白日夢)'을 구상할 때가 2년 전 봄이었는데 벌써 해가 두 번이나 바뀌어 불볕더위를 쫓아내는 가을의 전령사들이 섬돌 밑에서 노래를 하고 있다.
모든 이들이 반겨 맞는 만산홍엽(滿山紅葉)의 계절이다.
일상에 찌든 때를 미련 없이 벗어던지고, 바람을 길동무 삼아 피곤에 지친 영육(靈肉)을 이끌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독자들의 심금(心琴)을 울려줄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아서 …… .

 
이 부분만 보면 완전 무협소설이죠. 본문에서는 서문보다는 덜하지만 요즘 보기 힘든 표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했다.'를 모두 '-하였다.'로 풀어서 표기한다거나  '-명하였다.', '치하하였다.' 등의 예전에 주로 쓰던 한자어 위주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신선하기도 하고 약간 닭살이 돋기도 했는데, 최근에 읽은 다른 작품들과는 분명히 다른 독특한 느낌이 있습니다. 게다가 특유의 문체 때문에 노형사가 끈질기게 사건을 추적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전체의 분위기는 달관한듯한 나른한 분위기로 흘러갑니다. 사건의 진행과 문체가 충돌하면서 묘한 효과를 내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그 덕분에 <끝없는 추적>류의 긴박한 느낌이나 주인공의 의지가 잘 느껴지지 않는 단점도 있긴 합니다.   
 
그리고 서술 방식, 이 작품은 특별한 묘사 없이 대부분 서사만으로만 이루어져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배경이니 배경묘사가 장황할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이 작품은 유독 배경묘사와 심리묘사에 인색합니다. 300페이지가 안되는 소설이지만, 초반부의 사건 발생장소의 묘사와 범인의 심리묘사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주인공 고 형사의 집념어린 수사과정을 건조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과장섞어서 말하면 어디 갔다. 누구 만났다. 질문했다. 이동했다. 끼니를 때웠다의 반복이라고 해야할까요. 전통적인 하드보일드, 특히 챈들러나 맥도날드 같이 멋진 배경묘사나 심리묘사가 가득한 작품들을 읽다가 이 작품을 읽으면 추운 겨울에 여름옷 입고 나온 국민약골 이윤석이 떠오를 정도로 앙상한 느낌을 주긴 합니다. 물론 특유의 차분한 옛날 문체 때문이기도 하죠. 그러나 읽으면서 든 느낌은 어쩌면 실제 형사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건수사는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더군요. 현직에 오래계신 분의 암묵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디 가면서 책 몇페이지 분량의 생각을 한다거나 주변 환경을 꼼꼼히 살핀다는 것은 경찰소설에서나 가능할 일일지도 모릅니다. 사건 배정받으면 별 사명감없이 수첩들고 다니면서 질문하고 의심이 들면 더 돌아다니면서 질문하고, 그러면서 진실에 접근하는 것이 우리네 경찰의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특히 주먹을 불끈 쥐고 '널 잡겠어'라고 외치거나, 위악적으로 주먹을 휘두르거나 욕설을 퍼붓는 등의 전형적이고 작위적인 모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비슷한 사람을 찾자면 마쓰모토 세이초의 <모래그릇>에 등장하는 노형사님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호의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몰입감은 의외로 괜찮습니다. 풍성하지는 않지만 잠깐잠깐 등장하는 경찰관의 일상이나 생활들도 양념거리구요. 빈약하긴 하지만 뒤집어서 보면 엉뚱한대로 새지도 않습니다.

트릭 이야기도 해야할 것 같은데, 경찰소설 치고는 의외로 밀실트릭입니다.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스타일의 구식트릭이고, CSI를 한참 본 저로써는 '과연 이 트릭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아무리 봐도 허술한 구석이 있기는 한데 현직에 계신 분이 2년 동안 고민했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런 구식트릭이 작품의 전체적인 옛스러운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서 크게 문제삼지 않았구요. 쓰면서 생각해 보니 이 작품의 구성도 옛스럽습니다. 산장의 밀실에서 시체가 발견되고, 용의자는 극소수이며, 그나마 범인으로 짐작가능한 사람은 초반부에 등장하는데, 트릭을 짜맞추는 과정이 나머지 전부라는 점에서요. 그리고 경찰소설 답지 않은 결말도 괜찮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위에서 언급한 이유들 때문에 이 작품은 독특하다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기도 하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선뜻 대단하다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작품은 긴장감이 없습니다. 범인을 초반부에 너무 빨리 노출시켰습니다. 가뜩이나 이 작품은 긴장감이 약한데 초반부에 범인이 노골적으로 등장함으로써 긴장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물론 용의자가 극소수라 범인이 초반부에 등장할 수 밖에 없긴 합니다. 게다가 어차피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이 소설의 주된 목적은 아니었고, 나름 트릭을 짜맞추는 과정에 작품의 2/3을 할애했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맛은 있긴 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실책은 범인의 어설픈 심리묘사를 삽입했다는 점입니다. 그래도 초반부는 이해하겠는데, 결말부의 심리묘사는 최악입니다. 덕분에 결말부의 의외성이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두번의 심리묘사로 인해서 가뜩이나 평탄했던 작품이 완전히 평탄로가 되어버렸습니다.  

차라리 1인칭 시점, 최소한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하는 것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어차피 이 작품은 1인칭 주인공 시점에 가까울 정도로 주인공 고 형사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범인의 심리나 수사를 막기 위한 노력 등을 전혀 모르는 채로 이 작품을 끌어갔다면 훨씬 긴장감이 있고, 최소한 결말부분의 의외성은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책을 만든 것이나 보도자료로 내놓은 것을 보면-트릭에 중요한 단서가 언급된 부분을 '책속에서'에 버젓히 인용해놔서 깜짝 놀라서 알라딘에 그 부분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했을 정도입니다. 참고로 지금은 삭제되어 있습니다.-해당 출판사가 그리 관심이 많아 보이지는 않던데, 추리소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분이 편집자였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시점에 대한 아쉬움이 드는 이유는 저자가 주인공과의 거리두기에 어느정도 실패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었다면 차라리 이해가 될법한 서술도 3인칭 시점이 되니까 상당히 어색하고 아마추어 같습니다. 주인공보다 어린 여성이라지만, 수사때문에 만난 여성에게 성도 부르지 않고 이름만 호칭한다거나, 나이어린 여성이 주인공에게 '수고를 치하하였다.'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입니다. 1인칭이었다면 '이 아저씨 특이하네.'하고 웃어넘길 부분들이 3인칭이 되면서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런 거리두기의 실패가 서술 전반에 걸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못내 아쉽더군요. 어차피 주인공(과 범인)외에는 심리묘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1인칭 시점에서 서술하는 것이 나았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주인공을 제외하면 작품 전반적으로 구성이나 심리묘사 등이 어설픈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경찰이시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한 통찰은 부족한 느낌도 듭니다. 제가 호의적이라서 그렇지, 냉정하게 보시는 분들이라면 늙은 고참형사의 애환도 별거 없는데다가, 3류 사회파 수준의 심리묘사와 행동-역시 이것도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만-에 놀라실 수도 있습니다. 저도 심히 안타깝더군요. 엉뚱하게도 기존의 작품을 읽을 때 못 느꼈던 부분들이 툭툭 튀어나오더군요. 

간만에 두서없이 길게 썼는데, 위에서 언급한 여러 이유들 때문에 '독특한 수작내지는 범작'이상의 평가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300페이지도 안되는 얇은 두께에 만원이라는 가격은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쏟아지는 일본미스테리를 생각하면 감히 일독을 권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읽어보시면 의외의 재미를 맛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미스테리의 전형성에 질리셨다면-솔직히 전형성을 경험하신 추리독자도 이젠 없다고 봐야죠.-그리고 작가가 아닌 현직경찰이 썼다는 느낌을 맛보고 싶으시다면 감히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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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주 2007-11-23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소름끼치도록 통렬하게 비판을 하셨군요. 저도 간과한 부분을 예리한 통찰력으로 찾아서 비전을 제시해 주니 고맙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자는 전문적으로 글 쓰기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저 글 쓰는 것이 좋아서 일과후 습작을 하는 정도이며 또한 작품을 사장시키기에는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발간을 하였습니다. 책 가격은 출판사에서 책정을 한 것인데 저자도 8천원 정도로 하였으면 적정하지 않나 생각은 하였지만 뭐라고 말을 못하였습니다.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07.11.23

상복의랑데뷰 2007-11-26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길기만 한 리뷰에 댓글까지 달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제가 잘 모르고 쓴 글에 기분이 상하지 않으셨을까 걱정도 되네요 ^^; 뭐, 저같은 평범한 독자와 대화를 나누시는게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영광이죠. ^^

이동규 2013-05-06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잘 읽었습니다.내용중에 <더거리형사>에 대한 언급 감사드립니다. 저의 돌아가신 할아버지시거든요. 그 책을 읽어보셨다는데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