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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팡의 소식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한희선 옮김 / 비채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상하게 일본 소설 리뷰만 쓰게 되는 것 같다. 예전에는 영미권 추리소설을 더 좋아한다고 믿었고, 더 자주 읽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본 추리소설만 읽는 것 같다. 이러다가 취향마저 바뀌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엉뚱한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이 작품은 요코야마 히데오의 데뷔작이다. 다시 가필을 했다고 하니 엄밀한 의미의 데뷔작이라고 하긴 어렵겠지만, 데뷔작이라서 그런지 기존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이랑은 약간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좋았다. 다른 작품이 더 소개되어봐야 알겠지만 이 작품이 국내에 소개된 요코야마 히데오 작품의 최고작이라는 생각이다.
시효를 하루 앞두고 자살로 판명됐던 사건이 타살임을 알리는 제보가 갑작스레 들어온다. 그래서 15년 전에 고등학생이었던 세 명의 대포날-대학을 포기한 날나리들-이 잡혀와서 과거를 추궁당한다. 여기까지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스타일이다. 근데 내가 읽어왔던 요코야마 히데오의 스타일이라면 시효를 앞두고 사건관계자들이 조직적 개인적으로 충돌하면서 엄청난 긴장감을 몰아갈텐데, 이 소설은 흥미롭게도 고교시절 세명의 대포날들의 재미있는 일상으로 느슨하게 흘러간다. 그 재미있는 일상에 동참하면서 읽다보면 시효가 내일이면 끝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흥미롭다. 중간중간에 개입되는 현재의 모습도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의 고등학교 시절은 재미있다. (고등학교 시절 엉뚱한 녀석에다가 내신 성적이 나쁜 학생이었지만, 이들처럼 막가지 못해서인지 이런 대포날들의 이야기는 그냥 읽기만 해도 흥미진진하다. 대리만족이라고 해도 좋고 일탈의 욕구던 간에 편애하는 것은 사실이다.) <69>처럼 엉뚱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소설 특유의 가벼움과 간결함 때문에 대포날들의 삶이 심각하게 흘러가지도 않고 작위적으로 흘러들어가지 않으면서 사건이 진행된다. 세상이 몰아칠 듯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기존의 요코야마 히데오 스타일이라면, 흘러간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웃음짓게 만드는 것이 이 작품의 전반부랄까...
그런데, 시효는 가까워지고, 용의자들의 진술을 통해 진실에 점점 접근해 가면서 요코야마 히데오 아저씨의 후반부 모드인 '감동에의 질주'를 시작한다. <종신검시관>리뷰에도 썼듯이 내가 가장 실망하는 부분인데, 의외로 이 작품에서는 상당히 잘 먹힌다. 개개인의 설정이 약간은 작위적인 면이 없지는 않지만, 그 개개인들의 비밀이 맞물리면서 드러나는 진실의 모습은 슬프고도 아름답다. 15년 전의 그 사건이 바꿔놓은 용의자들의 삶의 달라진 모습, 특히 그 사건으로 고통스러워야 했던 다른 이들의 굴곡진 생활들을 그려내는 히데오의 서술은 역시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마지막의 반전에 이르러서는 나도 환호를 질렀다. 범인이 아닌 용의자들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작가를 다시 봐야 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인상깊었다. 기존의 작품들의 후반부에 보여주는 모습을 내가 과소평가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작품의 결말에 등장하는 감동에 공감하는 이유는 나도 이 시기를 이들과는 다른 모습이지만 지나쳤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감동적인 모습들도 혹시라도 내가 아직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과연 내가 그 무렵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런 일을 겪어나 보고 듣는다면 지금과는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또 한 가지. 확실히 히데오는 단카이 세대의 희생적이고 영웅적인 삶에 경도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직에 충성하며 자신과 가족을 희생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뤄낸 덴카이 세대의 삶을 회고하고 찬사를 바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늘 구도가 구세대의 신세대에 대한 훈계조로 접근하는 부분은 좀 불편하다 싶기도 하다. 반면에 맨날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내 성장환경과 맞물려서 묘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기도 하고...
쑥쓰럽지만 이 책에 나온 대포날들의 삶을 보면서 나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와 위기)가 있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지금은 내 삶에 있어서 큰 위기지만, 잘 헤쳐나갈 수 있어야 할텐데 하면서 용기를 얻게 된다. 웃긴 이야기지만 역시 남자의 일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아닐까. 별 차이 없어보이는 대포날들의 삶이 달라진 것은 우선은 본인의 의지탓이지만, 갱생의 의지를 부여한 것은 (스포일러일지도 모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여자를 만났느냐에 따라 달라진게 아닌가 싶다.최진실의 유명한 CF멘트처럼 역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인 셈인가...(물론 여자들의 잘못은 아니다. 오해없으시길)
정말 여러모로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단 하나 아쉬웠던 건 책 상태였다. 비채에서 나온 책 중에 가장 '덜' 정성스럽게 만들어졌다. 교열이 안된 티가 너무 난다. 편집자가 주의해야할 단어에 들어갈만한 실수들도 여럿 보이고.(어떤 분은 모방범 1쇄수준이라고까지 하시더라.) 그리고 광고문구에 '사회'미스터리라고 한건 지나치다 싶었고...
추신1) 모기치 선생의 별명으로 아르바이트와 하이드가 번갈아 쓰이는데 하이드가 맞다고 한다. 역자 분이 밝혀주신 내용이니 참고하시길...^^;
추신2) 이 소설이 <루팡의 소식>인 이유는 이 소설의 모티브가 뤼팽의 단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르센 뤼팽의 고백>의 첫 단편인 <거울놀이>이다. 이 작품을 읽고 다시 읽었는데 의외로 많은 부분 오마주를 바쳤음을 느꼈다. 가장 중요한 모티브인 금고 속의 미녀의 시체, 암호의 사용, 그리고 악당들의 심리상태 등등. 요코야마 히데오가 아르센 뤼팽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통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는 흐뭇한 광경이었다. 이 두 작품을 읽고 씁쓸한 기억을 떠올랐다. 한국추리작가협회모임에 우연찮게 갈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어느 작가분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처음으로 소개될 때였고, 곧이여 독자들을 설레게 하는 몇몇 작품들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A작가는 어떠냐, B작가는 (소개해 보는 것이) 어떠냐 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 작가분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A작가를 모르고 B작가를 몰라서 안 한것 같아요? 나도 다 읽어봤고 좋아해요. 이미 다 해본 거에요.'라고 딱 잘라버렸다. 무안해진 나는 곧 자리를 떴고 미안한 마음에 그 분의 작품을 찾아서 읽어봤다. 근데, 정말 죄송하게도 내 기준에서는 A,B...작가의 영향은 고사하고 범작도 없어보였다. '이러고도 나에게 해봤다고 할 수 있나.'라는 분노어린 생각이들면서 우리나라추리소설에 대한 관심이 식어버렸다.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라 씁쓸해졌다. 결국 지금의 일본(추리)소설 붐을 읽고 자란 세대가 좋은 추리소설을 쓸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것일까. 어디서 천재가 뚝 떨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