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문학사상사 / 1996년 6월
평점 :
절판


예전부터 꾸준하게 염두에 두고 있던, 무라카미 하루키&류의 책 읽기의 일환으로 읽은 에세이집. 덥고 짜증나는 일들이 많아서 부담없이 읽으려고 잡았다가 정신없이 읽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루끼의 반짝반짝 빛나는 감수성과 필력, 그리고 유머가 절묘하게 배합된 음식을 먹은 기분이었다.

에세이집의 내용의 폭이 워낙 넓어서, 하루키의 다방면에 대한 관심사를 엿볼 수 있기도 했지만, 에세이 전편에 흐르는 하루키의 삶의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적어도 이 에세이집에서 보여지는 인간 하루키의 태도에는 꾸준한 자기단련의 느낌이 강하다. <방망이 깎던 노인>과 비슷한 느낌이랄까...어떤 부분에서는 금욕주의자나 스토아 학파를 보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 자세가 매년 한 권 이상의 책을 쓰면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수작을 만들어내는 힘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나만 뒤늦게 깨달은 것 같은데, <상실의 시대>나 다른 작품의 스타일이나 소재는 일정 부분 트랜디한 면이나 자극적인 면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트랜드를 만들어 낸 것이겠지만...그러나 그 밑에 흐르는 근원적인 삶의 태도는 지극히 고전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고 단련하는 자세...장인정신이 듬뿍 배어나는 맛깔나는 글을 읽으면서 조금은 하루끼에게 다가간 느낌이었다. 오히려 무라까미 류가 훨씬 자극적이고, 탐미적이고, 변태스럽다는게 계속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점이다. 내 입장에서 하루키는 '내가 본받고 싶은 태도'라면 류는 '내가 무의식적으로 선호하는(?) 태도'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는 건강, 다음에 재능 운운하는 것을 보면, 겸손하다고 해야할지 가식적이라고 해야할지 난감하기도 하다. 추리소설 독자의 입장에서 <미스 블랜디시>의 초반부를 설명해 놓은 글이나, 로스 맥도날드를 추모하는 글을 읽고 있으면, 날카로운 통찰역에 감탄을 넘어서 좌절의 기분까지 들기도 한다. 짐 모리슨에 대한 독특한 고찰도 그렇고...이 에세이를 쓴 대략의 나이와 현재 나의 나이를 생각하니.......(생략)

세윌이 지나서 어떤 이야기들은 엉뚱한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바래지지 않는 하루끼의 매력을 맛본 좋은 경험이었다.친구가 <양을 쫓는 모험>을 돌려주면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 사이 류 아저씨의 책도 한 권 읽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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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장 살인사건 밀리언셀러 클럽 9
딕 프랜시스 지음, 이순영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화요추리클럽의 장경현 님이 언급하신대로 '홈런왕은 아니지만 타율왕'인 딕 프랜시스의 데뷔작. 작품의 수와 평균 수준을 비교하자면, 크리스티 여사와 함께 유이무삼한 존재가 아닐까 한다. 에드 멕베인도 여기에 포함해야 하겠지만, 사실 국내에 번역된 후기작들은 썩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원제는 Dead Cert이다. 이 제목의 원제는, 화요추리클럽의 김항균님의 소개를 인용한다.

Dead Cert란 말은 dead (아주, 매우)란 말과 certain (확실한)이 합쳐진 속어로서 “극히 확실한 일”, 그리고 경마계에서는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라는 뜻으로 쓰인다. 프랜시스는 가장 앞서 달리던 확실한 우승후보 (dead cert)가 죽었다 (dead)는 점에서 이중적 의미를 제목에 붙인 듯 하다. 

다른 분도 언급하셨지만, 딕 프랜시스의 작품의 번역 제목들은 정말 성의가 없다. 경마용어라서 번역이 어려우면 <흥분>처럼 의역을 멋지게 하던가. (그나마 이 의역도 일본의 제목의 중역이다.) <낌새>, <끗발>, <컴퓨터 살인사건>은 정말 -_-;;;, 그나마 직역이 가능한 <고독한 은행가>나 <채찍을 든 오른손>이 얼마나 대단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경마장 살인사건>이니 <경마장의 비밀>이니 하는 제목은 딕 프랜시스의 어느 작품에다가 써도 되는 제목 아닌가? 딕 프랜시스 선집이 나온다면, 후후 경주마 살인사건, 기수 살인 사건, 조교사 살인사건....이런 식으로 나가려나? -_-;

외적인 투덜거림은 그만하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역시 대가는 데뷔작부터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딕 프랜시스의 작품은 속도감이 넘친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일단 잡으면 끝까지 읽어야 직성이 풀린다. 수십년의 세월을 경마 하나에만 매진했음에도 모든 작품이 독자적인 재미와 개성들로 충만한 것은 탁월한 구성과 스피디한 문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매 장마다 경마장에 직접 있는 듯한 생생함이 느껴진다. 특히 후반부의 추격씬은 웬만한 액션영화를 능가하는 짜릿함을 전해준다. (구체적인 언급은 생략...)

황금가지의 번역이 특별히 뛰어난 것이 아닌데도 잘 읽히는 이유는 아마도 데뷔작이다 보니 딕 프랜시스의 후기작에 비해 현장에 대한 묘사가 더 생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기수로, 또 경마지 기자로 활동하던 경험이 축적되어 갓 나온 산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이 생생함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그리고 딕 프랜시스의 소설 답게, 사나이들간의 우정, 영웅적인 행동, 미인과의 사랑이 양념처럼 각 장마다 뿌려진다.

그러나 조금 아쉬웠던 점은 주인공의 처지였다. 너무 완벽한게 탈이었다. 당췌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딕 프랜시스 소설의 매력은 주인공의 인정욕구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딕 프랜시스의 소설의 주인공은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다. 그것이 사회에서의 명성일 수도 있고(고독한 은행가) 부모나 가족(흥분, 낌새)일 수도 있고, 신체의 일부(오른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주인공은 겉으로는 의뢰한 일을 하는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결핍으로 인한 정신적 물질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 사람의 인정받는 성인이 되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그 가운데 유사부모와 같은 존재가 그를 늘 도와주고...아직 아버지 세대가 아닌 아들 세대에 속하는, 어쩌면 통과의례의 끝에 와있는 나로써는 주인공의 그런 모습에 감정적인 몰입이 크게 되는 편인데, 이 작품의 주인공은 너무 뛰어나서 오히려 거리감이 느껴졌다. 다른 작가의 작품이었다면 크게 아쉽지는 않았을텐데, 딕 프랜시스의 교묘한 설정에 늘 감탄하던 나로써는 아쉬움이 남았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다른 작품에 비해 주인공의 고난이나 심리적 좌절도 적은 편이었고...

그렇지만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는 법. 내가 하는 투정은 다른 작품을 읽어본 독자의 투덜거림이라고 치부해도 좋다. 충분히 재미있는 책이다. 그리고 데뷔작이라고 생각하면 더없이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딕 프랜시스가 안내하는 경마장의 열기 속이라면 언제든지 동참할 준비가 되어있다. 직접 경마장에 가서 마권을 구입하지 않아도 될만큼의 넉넉한 간접경험을 맛볼 수 있다.

추신) 딕 프랜시스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올해 신작이 나올 예정인 현재 진행형의 작가다. 그의 지치지 않는 열정에 존경을 보낸다. 예전에 현존하는 고령작가를 대충 찾아본 적이 있는데, 미스테리작가인가라는 논란이 생길만한 시드니 셀던을 제외하면 PD 제임스와 함께 최고령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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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8-23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많이 출판 안되는 작가죠 ㅡㅡ;;;

비연 2006-08-23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뷔작으론 괜챦은 작품이었죠^^

상복의랑데뷰 2006-08-23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TA반대물만두 / 그래도 딕프랜시스의 작품을은 <컴퓨터 살인사건>만 제외하면 그래도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 좋죠 ^^;

비연 / 옙,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딕 프랜시스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좀 아쉽더라구요~

물만두 2006-08-23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컴퓨터를 추적하라 와 같은 책 아닌가요? 컴퓨터 살인사건이요.

상복의랑데뷰 2006-08-23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 저는 컴퓨터를 추적하라를 본 적이 없어서;;;; 물만두님이 더 잘 아실듯 합니다...
 
강력반 형사 빅토르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8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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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능력은 있지만 약간 뺀질대고 느물대는 듯한 강력반 형사 빅토르는 우연히 한 사건을 접하게 된다. 간단하게 여겼던 사건이 복잡해지면서 빅토르는 뤼팽의 그림자를 감지하게 된다. 모든 사건을 해결했다 여기는 순간, 뤼팽의 역습이 시작되고, 이에 빅토르는 모종의 결심을 한다. 

읽어보지 않은 1/3의 작품은 제외하고, 뤼팽 시리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자신있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뤼팽 시리즈의 특징 중에 하나는, 앞에도 언급했지만 단편은 고전기 단편의 느낌을 장편은 팩션의 셩격을 띤다는 점이다. 그것이 전설이던, 역사적 사실이건 간에 배경이 되는 이야기가 늘 존재한다. 그럼으로써 뤼팽은 비밀을 풀어나가는 탐정의 역할과 동시에 비밀을 풀었을 때 생기는 보물을 슬쩍하는 괴도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만은 배경이 없다. 오로지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긴박한 추격전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다른 것에 기대지 않은 순수한 추리소설로써의 재미는 이 작품이 감히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민완 형사 빅토르의 모습은 <프랜치 커넥션>, <불리트> 등에서 볼 수 있는 불독같은 형사의 모습이며, 빅토르에게 잡힐듯 말듯한 뤼팽의 모습은 이전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쫓는 자의 시선에서 그려지고 있기 때문에, 뤼팽의 신출귀몰함이 다른 작품에서처럼 엄청나다는 느낌보다는 잡지 못한 자의 안타까움이 절절히 다가온다. 그리고 신속하게 결말까지 이어지는 르블랑의 필력은 군더더기가 없고 스피디하다.

나는 이 작품이 하드보일드처럼 짜릿하게 읽혔다.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지만,-난 그게 의외였다.-충분한 재미를 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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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8-21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뤼팽 전집은 한작품 한작품 모두 재미있는것 같아요. 알려지지 않은 작품도요^^

상복의랑데뷰 2006-08-2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인판과 아동판이 많이 다른 작품 중에 하나인 듯 합니다. 책 만든 상태도 좋아서 구입시 선호하게 되는 것 같구요. 아직 다 못 읽었는데 이번 기회에 구입해서 더 보려고 생각중입니다. ^^
 
달밤 해방 전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방란장 주인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6
이태준.박태원 지음, 최원식 외 엮음 / 창비 / 2005년 7월
절판


"영월이?"
영월은 잠자코 현의 곁으로 온다.
"난 자넬 또 만날 줄은 몰랐네, 반갑네."
"저 같은 걸 누가 데려가야죠?"
"눈이 너머 높은 게지?"
"네?"
유성기 소리에 잘 들리지 않는다.
"눈이 너머 높은 게야?"
"천만에......그간 많이 상허섰에요."
"응?"
"많이 상허섰에요."
"나?"
"네."
"자네가 그리워서......"
"말씀만이라두......"
"허!"

최근에 읽은 가장 흡입력 있는 대화. 세월이 지났어도 순정 한 자락을 가슴에 품고 있던 남녀의 뒤늦은 재회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남자는 엉뚱한 소리로 시작했지만, 여자는 직설적으로 '많이 상허섰에요.'라고 고백하고 만다. 그리고 기쁘면서도 당황해버린 남자의 짧은 탄성 혹은 침묵.

이태준은 최서해같은 느낌일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단편이 참 애잔하고, 고즈넉하다. 오히려 박태원이 기대치만 못했다.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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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 파편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7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까치에서 나온 아르센 뤼팽 시리즈 7작. 이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이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핵심인 뤼팽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당연히 뤼팽일 거라고 생각했던 나로써는 좀 당황하면서 읽었다. 한편으로는 묘한 재미를 주었는데. 작품을 읽으면서 주인공 폴 들뢰즈는 과연 뤼팽일까? 아닐까? 나중에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궁금해하면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만족스러웠던 점은, 어렸을 때 읽었던 '괴도 신사'에 근접하는 모습을 폴 들뢰즈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성귀수 씨의 번역이 다 고색창연한 바로크 톤이긴 하지만, 늘 냉정한 괴도신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나에게, 뤼팽은 자기과시욕이 강한 전형적인 프랑스 스타일의 다혈질 신사였다. 그의 초인적인 능력은 그대로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주인공 폴 들뢰즈는 어린 시절 읽었던 뤼팽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얽힌 가슴 아픈 과거에 괴로워 하면서도, 전쟁에 참여한 애국심 불타는 군인으로써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말을 아끼는 모습, 그리고 <미션 임파서블>을 척척 해치워 내는 모습은 어렸을 때 내가 읽었던 뤼팽의 이미지와 가장 비슷해서 좋았다. 다만 독일(인)에 대한 강한 혐오감이나 강렬한 애국심-이 작품의 악당은 초인의 수준을 넘어서 비현실적이다. 뤼팽 시리즈의 캐릭터 답지 않게 단선적인 인물이 되어버렸다. 르블랑의 애국심이 너무 강렬해서 작품의 완결성을 약화시킨 경우다.-은 달리는 철도에서 툭툭 튀는 자갈처럼 몰입을 방해했다. 아무래도 전쟁터가 배경이고, 주인공이 군인이기 때문에 강조된 면이 없지않아 있지만, 좀 심하다. 만약 독일인이 본다면, 엄청난 반발감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 욕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라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이 작품은 선대의 범죄와 그로 인해 불행해진 두 남녀-정확히 말하면 남자-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대하로망소설에 가깝다. 주인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험과 사랑, 그리고 애국심. 손꼽을만할 걸작은 하지만 충분한 재미를 주는 수작임에는 분명하다. 팬이 아니더라도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추신) 뤼팽 시리즈는 조금씩 느낌이 다르다. 우선 장편이냐 단편이냐에 따라서 나눌 수 있는데, 단편은 <구석의 노인>류의 고전기의 단편집의 느낌이 강하며, 장편은 모험 소설 내지는 팩션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 작품과 <강력반 형사 빅토르>는 좀 남다른 느낌이다. 전자는 뤼팽이 나오지 않아서, 후자는 하드보일드의 느낌이 살짝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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