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장 살인사건 밀리언셀러 클럽 9
딕 프랜시스 지음, 이순영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화요추리클럽의 장경현 님이 언급하신대로 '홈런왕은 아니지만 타율왕'인 딕 프랜시스의 데뷔작. 작품의 수와 평균 수준을 비교하자면, 크리스티 여사와 함께 유이무삼한 존재가 아닐까 한다. 에드 멕베인도 여기에 포함해야 하겠지만, 사실 국내에 번역된 후기작들은 썩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원제는 Dead Cert이다. 이 제목의 원제는, 화요추리클럽의 김항균님의 소개를 인용한다.

Dead Cert란 말은 dead (아주, 매우)란 말과 certain (확실한)이 합쳐진 속어로서 “극히 확실한 일”, 그리고 경마계에서는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라는 뜻으로 쓰인다. 프랜시스는 가장 앞서 달리던 확실한 우승후보 (dead cert)가 죽었다 (dead)는 점에서 이중적 의미를 제목에 붙인 듯 하다. 

다른 분도 언급하셨지만, 딕 프랜시스의 작품의 번역 제목들은 정말 성의가 없다. 경마용어라서 번역이 어려우면 <흥분>처럼 의역을 멋지게 하던가. (그나마 이 의역도 일본의 제목의 중역이다.) <낌새>, <끗발>, <컴퓨터 살인사건>은 정말 -_-;;;, 그나마 직역이 가능한 <고독한 은행가>나 <채찍을 든 오른손>이 얼마나 대단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경마장 살인사건>이니 <경마장의 비밀>이니 하는 제목은 딕 프랜시스의 어느 작품에다가 써도 되는 제목 아닌가? 딕 프랜시스 선집이 나온다면, 후후 경주마 살인사건, 기수 살인 사건, 조교사 살인사건....이런 식으로 나가려나? -_-;

외적인 투덜거림은 그만하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역시 대가는 데뷔작부터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딕 프랜시스의 작품은 속도감이 넘친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일단 잡으면 끝까지 읽어야 직성이 풀린다. 수십년의 세월을 경마 하나에만 매진했음에도 모든 작품이 독자적인 재미와 개성들로 충만한 것은 탁월한 구성과 스피디한 문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매 장마다 경마장에 직접 있는 듯한 생생함이 느껴진다. 특히 후반부의 추격씬은 웬만한 액션영화를 능가하는 짜릿함을 전해준다. (구체적인 언급은 생략...)

황금가지의 번역이 특별히 뛰어난 것이 아닌데도 잘 읽히는 이유는 아마도 데뷔작이다 보니 딕 프랜시스의 후기작에 비해 현장에 대한 묘사가 더 생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기수로, 또 경마지 기자로 활동하던 경험이 축적되어 갓 나온 산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이 생생함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그리고 딕 프랜시스의 소설 답게, 사나이들간의 우정, 영웅적인 행동, 미인과의 사랑이 양념처럼 각 장마다 뿌려진다.

그러나 조금 아쉬웠던 점은 주인공의 처지였다. 너무 완벽한게 탈이었다. 당췌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딕 프랜시스 소설의 매력은 주인공의 인정욕구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딕 프랜시스의 소설의 주인공은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다. 그것이 사회에서의 명성일 수도 있고(고독한 은행가) 부모나 가족(흥분, 낌새)일 수도 있고, 신체의 일부(오른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주인공은 겉으로는 의뢰한 일을 하는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결핍으로 인한 정신적 물질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 사람의 인정받는 성인이 되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그 가운데 유사부모와 같은 존재가 그를 늘 도와주고...아직 아버지 세대가 아닌 아들 세대에 속하는, 어쩌면 통과의례의 끝에 와있는 나로써는 주인공의 그런 모습에 감정적인 몰입이 크게 되는 편인데, 이 작품의 주인공은 너무 뛰어나서 오히려 거리감이 느껴졌다. 다른 작가의 작품이었다면 크게 아쉽지는 않았을텐데, 딕 프랜시스의 교묘한 설정에 늘 감탄하던 나로써는 아쉬움이 남았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다른 작품에 비해 주인공의 고난이나 심리적 좌절도 적은 편이었고...

그렇지만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는 법. 내가 하는 투정은 다른 작품을 읽어본 독자의 투덜거림이라고 치부해도 좋다. 충분히 재미있는 책이다. 그리고 데뷔작이라고 생각하면 더없이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딕 프랜시스가 안내하는 경마장의 열기 속이라면 언제든지 동참할 준비가 되어있다. 직접 경마장에 가서 마권을 구입하지 않아도 될만큼의 넉넉한 간접경험을 맛볼 수 있다.

추신) 딕 프랜시스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올해 신작이 나올 예정인 현재 진행형의 작가다. 그의 지치지 않는 열정에 존경을 보낸다. 예전에 현존하는 고령작가를 대충 찾아본 적이 있는데, 미스테리작가인가라는 논란이 생길만한 시드니 셀던을 제외하면 PD 제임스와 함께 최고령이시다. ^^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만두 2006-08-23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많이 출판 안되는 작가죠 ㅡㅡ;;;

비연 2006-08-23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뷔작으론 괜챦은 작품이었죠^^

상복의랑데뷰 2006-08-23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TA반대물만두 / 그래도 딕프랜시스의 작품을은 <컴퓨터 살인사건>만 제외하면 그래도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 좋죠 ^^;

비연 / 옙,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딕 프랜시스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좀 아쉽더라구요~

물만두 2006-08-23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컴퓨터를 추적하라 와 같은 책 아닌가요? 컴퓨터 살인사건이요.

상복의랑데뷰 2006-08-23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 저는 컴퓨터를 추적하라를 본 적이 없어서;;;; 물만두님이 더 잘 아실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