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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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같이 보자


 

민족성은 참 애매한 단어이다. 한국인하면 김치 없으면 밥을 못 먹는 민족, 한의 정서를 품고 있는 민족, 성질 급한 민족 등 다양한 수식어를 떠올릴 수 있지만 사실상 이것들은 만들어진경향이 크다. 게다가 민족주의가 과열될 경우 나치즘과 같은 배타적이고 살상적(?)인 괴물로 변모할 가능성도 다분하다. ‘민족’, ‘국가등은 공통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뭉뚱그려 거대한 덩어리로 만든 후 이들은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돌진하도록 밀어붙이기 좋은 단어들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민족성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데에 반감이 있으며 국가의 중요성에 목 매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문학을 읽을 때에는 어김없이 민족국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많지 않은 독서량이지만 각기 다른 문화권에 속한 소설들을 읽을 때마다 글자들 사이에서 다름’을 느낄 수 있다. 똑같이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임에도 불구하고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 숨결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독특함을 띤다. 나쓰메 소세키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주인공들은 너무나도 일본적이다. 고유한 정체성이 곳곳에 깃들어 있다. 저번에 산시로를 읽을 때에도 그랬지만, 이번에 그 후를 읽을 때에도 , 이게 일본이구나.”가 무의식적으로 머리 속에 떠올랐다. 물론 지금의 일본은 아니고, 근대의 일본. 그렇다고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서 일본의 국민성 운운을 끌어내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에 민족성이나 국가성과 같은 단어는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이다. 차분한 풍속화에 시뻘건 페인트로 여기저기 별표를 하고 밑줄 쫙쫙 긋는 느낌이랄까. 그냥,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닌 인물들이 조금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정도로 말하고 싶다. 어쨌든 소설은 달라도 소설이다. 이해할 수 있기에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를 지라도 우리는 모두 인간이므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그 후의 주인공인 다이스케는 묘한 인물이다. 이해가 안 가면서도 이해가 된다. 나와 닮았으면서 닮지 않았다. 다이스케는 특유의 예민한 통찰력으로 주위를 살피고 분석한다. 그에게는 가족 역시 분석 대상이다. 자신을 옭아 매는 관습에 둔해지지 못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며 이를 거부한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고 진심과 가식을 구분한다. 그 자체가 목적인 자연만이 그에게는 가치가 있으며 문명이 이룩한 갖은 위악은 열등한 것이다. 사람이 다이아몬드를 버리고 감자를 택하는 순간, 그 순간을 다이스케는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다. 위악에 대한 비판은 산시로에서도 등장한다.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수단으로서 행동을 하는 것은 모던하지 않으며 자연스럽지 못하다.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법칙 중 더 고차원적이고 궁극적인 것은 자연의 법칙이므로, 인간이 만약 사회의 법칙을 따른다면 그것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거스르는 행위가 된다.


다이스케와 하라오카의 대립은 자연과 사회(문명)의 대립이다. 다이스케는 로맨티스트라서가 아니라, 사회를 거부하기에 하라오카를 배신한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현실을 거부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의 허구성은 다이스케의 죄의식에서 조금 더 드러난다. 그에게 사회적인 제재는 로써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다이스케가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느끼고 벌을 받을 때는 오직 자신의 양심이 가책을 느낄 때뿐이다. 다이스케가 죄의식을 느낄 때마다 그는 붉은 색으로 고통 받는다. 사회적 잣대가 아닌 자신의 양심을 기준으로 했을 때 비로소 그는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며 그 때만이 진정한 벌을 받는 때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위치에 처하는 것마저도 그는 벌로써 느끼지 않는다. 그의 벌은 그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위치에 처함으로써 미치요를 보살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를 부정하고 자기자신에 매몰되어 있는 인간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냐는 질문에 답을 하기란 어렵다. 소설 속 다이스케도 마냥 긍정적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독자로서 우리는 그의 나태함, 경제적 무능력을 비난할 여지가 충분하다. 다이스케와 상반되는 또 다른 인물로 데라오가 있다. 데라오는 분명 문학을 즐기고 문학 자체를 위해 글을 쓰고 읽고 싶어하는 인물이지만 생활고로 인해 출판업에 매달려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하는 인물이다. 그는 진지해지고 싶지만 경제 형편으로 인해 진지해질 수 없다. 사회의 굴레는 그렇게 강하고 거칠다. 개인의 힘과 의지만으로 극복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는 것이다. 다이스케가 본가로부터 생활비를 받지 못하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도 데라오이다. 평소에는 데라오를 무시하고 그에게 핀잔을 주던 다이스케였지만 막상 사회의 제재로 인해 어려움에 처하자 그는 데라오만큼의 의지도, 그만큼의 능력도 보이지 못한다다이스케의 이론이 부잣집 도련님의 속좋은 세상 타령처럼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다이스케의 관점에서 시종일관 진행되면서도 다이스케의 장단점이 선명히 드러나는 것은 나쓰메 소세키 특유의 문체 때문인 듯하다. 우리는 다이스케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다양한 인물 군상의 등장과 세밀한 묘사를 통해 다층적인 시선을 가지게 된다. 다이스케의 편을 드는 듯 하면서 갑자기 한 발짝 물러서 다이스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묘한 서술이 바로 나쓰메 소세키의 책을 두 번 세 번 읽게 하는 묘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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