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읽고 난 멋쩍어졌다.

난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작품을 작품 자체로 평가할만한 능력이 안된다. 그저 화자의 생각과 경험에 나의 경험과 생각을 견주어 볼 뿐이다.

난 독학자가 비판하는 대상과 같은 모습이었다. (간단히 줄거리를 말하면, 이 소설 속의 독학자는 공부하지 않는 80년대 대학을 비판하고 이에 저항하다가 끝내 자퇴를 결심한다. 그는 40세까지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노동만을 하면서 목적없이 읽고 사유하겠노라 결심한다. 정신의 진보를 쟁취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이고도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다시, 난 독학자가 비판하는 부류의 '학'생이었다. 대학에 들어오면서 난 공부와 담을 쌓았다. (물론 그 이전의 행위들도 공부는 아니었지만) 난 오로지 떼거지 속에서만 나의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있었던 양, 선후배 동기들과 낮이고 밤이고 우르르 몰려 다녔다. 이틀에 한번씩 술 마시느라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수업을 빼먹는 것은 예사였다. 전공서적도 제대로 산 적이 없어서 선배로부터 물려 받았으며, 컨닝을 대학 낭만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특정 교수의 수업을 보이콧한 기억은 없었기 때문에 그 집단 행동에서 빠져나간 학생들을 비난하진 않았지만, 등록금투쟁에 동참하지 않는 도서관 학우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라고 이 찬 노천바닥에 앉아 이러고 싶은 줄 아냐?'라며 항변을 했겠지만, 기실 난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다.

그나마 내 생에 '정신적 진보를 위한 투쟁'이랄만한 행위는 초등학교에서 끝이 났다. 밖에 나가 놀지 않는다고 애늙은이라 불렸는데, 엄마가 계몽사 외판원 아저씨의 입심에 넘어가 사들인 세계명작동화, 위인전집, 백과사전, 한국사 전집류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중학교에 들어가며 딸의 수준을 과대평가한 어머니가 세계고전전집을 사주셨지만, 작은 글씨 난해한 내용에 질려 버렸다. 어린왕자, O 헨리 단편집 - 이렇게 딱 두 권만을 읽고 나의 독서 인생은 중단된 것이다.

그후로 난 '독학자'였던 적이 없다. 내 정신적 진보를 위해 친구와 의절한 적이 없다. 강의의 질을 두고 교수에게 항의한 적도 없다. 내 정신 세계의 독립보다는 타인의 교양과 수준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뿐이다.

그 스무살 청년이 실제로 자퇴서를 냈는지,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엔 읽기를 계속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난 한번도 내 정신의 진보를 위해 무엇인가를 걸어본 적이 없다는 대목에서 멋쩍음을 넘어 잠시 슬퍼진다. 자유롭고 선명한 존재를 꿈꾸는 그의 투쟁이 부디 승리하길 바래보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의미없는 생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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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2004-10-0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물류만 열심히 해도 정신의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나요?
힘들겠지요? ㅎㅎ

sunnyside 2004-10-01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가능하지 않을까요? 물류로 도달한 정신적 경지라면... 뇌의 모든 정보가 센터의 로케이션을 기준으로 정렬되고 투입된 정보가 소팅 머신의 속도로 각 로케이션에 자동으로 꽂히는.. 뭐 그런 걸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