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대를 갓 제대하고 4명의 친구들과 지리산의 천황봉에 오른 적이 있었다. 우린 쌍계사 코스로 올라갔는데, 정상의 기념비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부부인지 연세 많은 연인인지 알 수 없었으나 60대로 보이는 두 분이 사진을 찍어 우편으로 보내달라며 정중히 부탁하셨다. 정상까지 오른 그 분들의 모습이 좋게 보여 기껍게 승낙하고 두 장의 사진을 찍었다. 나는 주소도 직접 받아 적었었다...
달리는 사람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은 몰랐었다. 벚꽃이 화려하지만 최선을 다해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견줄 바가 돼질 않았다. 처녀 출전인 나에게 모든 것이 가슴 벅찬 감동으로 몰려왔다. 함께 달린 친구라도 있었으면 감격을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결승점에 골인하고 주최측으로부터 물을 받아 마시고, 완주 메달과 간식 그리고 나의 겉옷인 물품을 찾으며 나는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이 감격의 순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영업중인 사진사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바나나를 먹으며 10여 분을 두리번거리다 필름 파는 노점상에게 물어 보았다. 노점 상인은 사진사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낙담도 잠시, 이제는 응원 나온 다른 가족들의 손에 들린 디카와 필름 카메라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땀은 식어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하고 몸도 마음도 지쳐 몸은 집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진을 찍지 않고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갈등이, 피곤으로 인해 짜증스럽게까지 느껴졌다. 바로 그 때, 모녀지간으로 보이는 세분의 여자 분들이 디카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선해 보이시는 그분들은 가족의 누군가가 결승점에 골인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디카를 들고 계시는, 가장 나이 어려 보이고, 여대생으로 보이는 분께 나는 무슨 용기에서인지 사진을 한 장 찍어 이메일로 보내 달라고 부탁을 했다. 흔쾌히 찍어 주시고 본인의 휴대폰에 나의 이메일 주소를 받아 적어 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것은,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돌아서 오던, 나 자신이었다. 피곤이 밀려 온 탓도 있지만 내 호주머니에는 돈도 한 푼 없었다. 10km를 달려 왔지만, 정작 400여 미터 떨어져 세워둔 차에 가서 지갑을 가져 올 여력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어떻게 사례를 해야 하나를 망설이다 얼떨결에 돌아서 온 것 같다.
오늘, 집에서 쉬며 여러 차례 이메일을 확인했었다. 그리고 7, 8년 전 지리산에서 만난 두 분 생각도 났었다. 그 분들은 얼마나 나의 편지를 기다렸을까? 그 분들을 찍은 사진을 볼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리다 몇 해 전, 나는 그 사진들을 소각 해 버린 기억도 났다. 그 분들은 나를 믿으며 며칠을, 몇 주를, 몇 달을 기다리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비록 전혀 모르는 분들의 부탁이라 할지라도 나에 대한 믿음을 져버린 것은 나의 큰 실수라고 생각했다. 똑같은 상황에 놓인, 디카로 나를 찍어 주신 분이 오후에 사진을 보내 오셨다. 사진을 보고 기쁨도 말할 수 없이 컸지만, 지난날의 추억으로 부끄러움 또한 너무나 컸다.
사진을 멋지게 찍어 보내 주신 김 경리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제가 용기를 내어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드릴 수 있었던 것은 님의 선하신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그 모습 영원히 간직하시고, 행복하세요. ^^
저도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 선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