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으로 다가선 화엄사
국정브리핑|기사입력 2006-06-23 14:46 |최종수정2006-06-23 14:46
정확한 시간에 차는 빗속을 달리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출발해서 전라남도 구례의 화엄사까지 직행하는 화엄사 답사여행에 나섰다.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날씨는 그리 심한 비가 아니었지만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면서 길을 나선 나그네의 마음을 포근히 적셔주었다. 화엄사에 도착한 것은 11시 40분 경이었다. 예정보다 20분 정도 빨리 도착을 하였기에 식당에서 미처 준비를 해놓지 못해서 한바탕 소란이 일기도 하였다.
이런 곳에 오면 어른들도 빨리 달라는 소리가 튀어나오고 식당에서는 정신없이 서두르는 광경을 보면서 누구나 별로 다르지 않구나 싶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서 우리 일행은 휴식 시간도 없이 화엄사를 향해 올라갔다. 안내자는 일주문에서부터 우리들에게 자세한 설명과 아울러 여러 가지 일화까지 상세히 설명해 줌으로써 우리들은 즐거움 속에서 문화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넓혀주는 계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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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엄사 일주문. |
일주문은 일주(一柱)로 이루어진 건물로 특히 중요한 것이 중심을 잘 잡는 것이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문의 뜻이 승려의 세계와 속세를 경계짓는 표시이며, 이 화엄사는 유달리 일주문의 양 옆으로 담을 쌓아서 경계를 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일주문이 서있는 자리가 평지로 옆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일주문을 통행케 하고 경계를 분명히 알리기 위한 것일 거라는 말로 그 이유를 알려주기까지 했다.
가람의 배치는 대개가 시내를 끼고 있어서 이 시내를 건너는 다리에서부터 절간의 경내로 들어서는 것으로 치지만, 들어가면서 세 개의 문이 있는데 첫째가 일주문이고, 두 번째에 금강문, 다음이 천왕문(혹은 사천왕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은 대부분이 계단식으로 점점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계단식 배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산지 가람의 모습이라고 한다.
금강문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있고 또 다른 두 개의 금강역사상이 있는데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 하나는 다물고 있는데, 이것은 인도의 고어인 산스크리스트어에서 첫 글자는 '아'이고, 끝 글자는 '흠'이니 그리스어의 '알파'와 '오메가'는 이 세상 진리의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뜻을 지녔듯이 아마도 불교 진리의 처음에서 끝까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수 십년을 절에 드나들면서도 몰랐던 것들을 듣게 돼 이번 답사에 온 것이 참 다행이다 싶었다.
한편 천왕문에 서있는 네 개의 천왕은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수호하는 수호신으로 절간 안에 들어오는 잡신들을 경계하는 역할을 한다면서 이 사천왕이 부처님을 돕게 된 기원까지 설명을 해주었다.
원래 힌두교에서 숭상하는 3,000여 신들 중에서 소문이 난 악신인 이 사천왕들은 부처님을 괴롭히다가 부처님의 깨우침이 뛰어나고 아무리 괴롭히려 해도 넘어가지 않는 부처님에게 잘못을 고백하고서 부처님이 계시는 수미산의 네 귀퉁이(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지구는 4각형이었고, 이 네 모서리를 지키면 모든 곳을 지킨다는 생각한 듯)를 지키겠다고 약속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특히 모든 사람들이 이 문을 통과할 적에 사람들이 이 곳을 드나들만한 자격이 있나를 심사하는데,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준 적이 있는가 △길 잃은 자에게 길을 알려준 적이 있는가 △위험에 처한 사람을 내 몸을 바쳐 구해준 적이 있는가 등을 물었다고 하니 아무래도 나는 이 사천왕문을 통과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옆길로 돌아가면서 자신을 반성해보는 시간으로 삼았다.
화엄사 앞 마당은 다른 절과는 달리 상당히 낮은 위치에 있어서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결정되었고, 신분이 낮은 사람은 아래 마당에서나마 부처님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의 산물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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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앞뜰에서. |
우리 조상들은 비록 신분사회에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분명히 존재하였지만, 절간에서만은 조금이라도 그들을 배려하는 노력을 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유교의 정치철학적인 지배계급의 논리에 비해서는 훨씬 더 인간적이고 서민이나 천민들까지 감싸 안은 것이 불교였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절이나 대부분이 마당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에 눈에 띄는 것이 탑이고, 당간지주를 세웠던 자리였다. 화엄사도 탑이 동탑과 서탑이 두 개 있었으나 탑의 배치 방향을 보면 같은 시대에 세운 것이 아니지 않은가 싶다는 설명을 듣고 정확히 각을 잡아보니 서탑이 상당히 뒤로 나 앉아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설명을 마치고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교수님을 따르면서도 나는 중학시절에 수학여행을 와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는 공양간이 자꾸만 바라다 보였다. 철없던 시절에 우리집에서는 가장 큰 방이라야 열 명이 들어가면 발을 뻗을 곳이 없을 정도였던 작은 시골 초가집였는데 수학여행온 130여 명이 한 방에서 서로 발을 맞대고 누워서 잠을 이루었던 추억의 자리였다.
그날 스님이 우리에게 들려준 얘기가 생각난다.
어느 겨울날 눈이 소복하게 쌓인 산길을 걸어가던 두 스님이 마주치게 되었다. 화엄사에서 가던 스님이
"스님은 어느 절에서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하고 묻자 반대쪽 스님이 "저는 합천 해인사에서 구례 화엄사로 가는 길이옵니다만 스님은 어디로 가시는 길이십니까?"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은 들은 화엄사 스님이 "그래요. 정말 인연이구려. 소승은 지금 합천 해인사를 향해 가던 길입니다. 사실 해인사 해우소가 하도 깊다는 얘길 듣고 도무지 얼마나 깊기에 이런 소문이 여기까지 나는가 싶어서 소승이 직접 확인을 해볼까 해서 나선 길이옵니다" 하고 답했다.
이에 해인사 스님이 말씀하시길 "그렇습니까? 아주 잘 되었군요. 저도 화엄사의 가마솥이 하도 크다는 소문을 듣고 소문을 확인차 나선 길이옵니다" 하고 대답을 하더라는 것이다.
다시 화엄사 스님이 "스님 정말 화엄사의 가마솥을 보시렵니까? 제가 엊그제 화엄사를 떠나 지금 여기까지 오는 길인데 마침 동지가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동지죽을 쑤고 있는데 가마가 얼마나 큰 지 저을 수가 없어서 가마솥가에 올라서서 죽을 젓던 공양주가 그만 발을 헛디뎌 가마솥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스님들이 배를 타고 공양주를 찾ㅏ 나섰는데 지금쯤은 찾았는지 모르겠군요."
이말을 들은 해인사의 스님은 능청스럽게 "스님의 얘길 듣고 보니 화엄사의 가마솥이 어지간히 크긴 하는가 싶습니다 그려. 그렇지만 해인사의 해우소 만큼 대단하지는 않는 것 같군요. 제가 엊그제 아침에 해우소에 들러서 일을 보고 나섰는데, 아마 지금쯤은 그것이 땅에 떨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렇게 궁금증을 서로 풀게 된 스님들은 각자의 절로 돌아가서 이 얘기를 전했으니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가마솥이 구례 화엄사의 것이며, 가장 깊은 해우소가 합천 해인사의 것이라는 우스개 소리였다.
사실 수학여행 당시 아주 인상 깊게 본 것이 있었다. 그 무렵(1959년)에는 우리 나라 어느 집이나 절간에서도 모두 나무를 때서 밥을 짓던 시절이었다. 우리가 잠을 자려던 화엄사에서 저녁 밥(공양)을 먹는데 어쩌다 부엌을 내다보니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있는 불목하니가 아궁이에 나무를 밀어 넣는 모습을 본 나는 그만 질리고 말았다.
보통 가정집에서는 부잣집이라야 겨우 장작을 때는 정도이고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풀이나 나무 순들을 베어서 말려 그것을 땔감으로 쓰거나 삭정이를 주어다 때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화엄사의 아궁이에는 우리들의 아름드리가 될만한 커다란 통나무를 그대로 아궁이에 밀어 넣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물론 2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먹을 밥을 짓는 가마솥의 크기도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스님의 얘기가 거짓말이지만 정말 우리가 본 가장 큰 솥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계속된 안내자의 탑돌이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사실적이고 정말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듬뿍 담긴 이야기였다. 우리 조상들은 남녀가 만날 수 있는 시간이나 장소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절에서는 연등행사나 부처님 오신 날과 같은 행사때 탑돌이를 통해 여러 사람이 한 곳에서 한 가지 일을 하게 하므로서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의 배필이 될만한 사람을 찾아 볼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뜻을 지닌 탑돌이는 반드시 시계방향으로 4바퀴 이상을 돌게 되는데 소원을 한 가지만 빌고 또 빌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당 한 켠에 있는 당간지주와 같은 것이 여러 개 있는 것은 이 곳에 커다란 탱화를 걸고 법회를 열게 되는데, 이런 행사를 준비하게 되면 지금처럼 여러 가지 시설이 있는 시기도 아닌 때에 무대 만들랴, 앉을 자리 마련하랴 구경하는 사람들이나, 천민들에게도 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등의 준비가 보통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이런 일들이 아주 짧은 순간에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어서 무척 소란스럽고 분주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법회의 이름이 '야단법석'이었지만,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한 것"을 일컬어 '야단법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말의 전래도 새삼스럽게 되새기게 되었다.
한편 대웅전은 반드시 부처님을 모시는 곳인데 이곳에 모셔져 있는 불상은 부처님이 아닌 비로자나불인데 만약 이렇게 비로자나불을 모신 곳은 반드시 대웅전이 아닌 '광' 자가 붙은 '대광적전' 같이 부르게 된다는데 여긴 이상하게 대웅전이라 붙였다는 것이다.
대웅전의 오른쪽에 배치된 명부전에 가서는 이곳에 모셔진 '지장보살'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절에서 모시는 것은 부처인데 오직 한 분 지장보살만은 보살을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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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탑과 명부전. |
부처란 '깨우친 분'이고, 보살은 '깨우치기 위해 수행을 하는 사람'인데 절간에서 부처가 아닌 보살을 보신이유는 이 '지장보살'이란 분은 깨우침을 얻어 부처가 되어야 하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마지막 한 사람까지라도 연옥에서 부처님을 부르는 중생이라면 모두 구하겠다고 한사코 부처가 되기를 거부하고만 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분께 비는 것이 가장 소원을 잘 들어주는 분이라고 한다. 또한 이 지장보살 곁에는 10분의 하늘나라 심판관들이 자리를 같이 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무서운 분이 머리에 책을 이고 있는 모습을 한 염라대왕님이시고, 자신이 한 일을 이르라고 하다가 거짓말을 하면 손에 들고 계시는 요지경을 돌리면 자기가 평생에 한 일들이 차례로 나타나서 만약에 거짓말을 한 사람은 '달설지옥'으로 보내게 된다. 이 달설지옥은 정말 무서운 곳으로 혀를 뚫어서 줄을 꿰어 그 줄에 쟁기를 달아서 밭을 갈게 한다는 무서운 지옥이란다.
이렇게 저 세상을 가기 위해서 재판을 받는데 이것이 7일만에 한번씩 재판이 열리며, 이런 재판이 일곱번 끝나면 그 죄에 따라 벌을 받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7×7 = 49해서 49제가 열리게 되고, 아이가 태어나면 금줄을 치고 잡인의 출입을 금지하다가 7번째 이레(7일)을 새면 (7×7 = 49일) 이제 가장 조심을 할 기간이 다 지난 것으로 여기고 금줄을 거두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재판을 받아서 그 사람의 죄 값에 따라 윤회를 하는데 그 정도에 따라 나누기를 6단계가 있으니 이를 6도 윤회라고 한다.
△ 죄가 가장 많은 사람은 6번째의 윤회로 '뱀'이 된다고 한다. 이 사람은 수전노와 같이 지나친 욕심을 가진 사람으로 인연을 끊지 못하여 자신의 살아온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부근을 배회하는 뱀이 되는 벌을 받은 것이다.
△ 다음으로 죄가 많은 사람은 '축생'으로 태어나서 네 발을 가지고 땅 위를 기면서 높은 세상을 보지 못해서 헤매는 신세가 된다.
△ 그 보다 조금 나은 사람은 '아수라'의 윤회를 받고 태어나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번뇌하는 속에서 살다가 다음 생을 맞아야 하는 신세가 된다.
△ 비교적 상급에 속하는 3단계로 '아귀'로 태어난 사람이다. 이 사람은 평생 먹을 것만 찾아서 계속 먹어야만 하는 굶주린 귀신으로 태어난다. 이 사람은 목구멍이 바늘구멍만큼 밖에 안 되는데 그 목구멍으로 배가 부르게 먹으려니까 끊임없이 먹어대도 배는 부리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먹을 것이라는 것이 자신이 전생에 수채 구멍으로 흘려 보낸 버린 음식을 먹어야 한다니 정말 사람이 먹을 것을 귀중하게 생각하라는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 그 보다 조금 나은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난다니 우리 인간은 비교적 우수한 성적을 거둔 전생을 살아온 셈이다. 그러나 이 생에 더욱 좋은 일을 하고 나쁜 짓을 하지 않아야 더 높은 단계로 윤회하여 다음 생을 살 수 있는 것이다.
△ 가장 높은 단계를 '천'이라 하여 이제는 승천, 극락을 가기 직전의 단계이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노력을 하면 해탈을 하여서 극락에 갈 수 있는 단계이다.
이런 단계에서 늘 힘이 되어 주는 분이 바로 다름 아닌 관세음보살이시다. 원통전에 모셔져 있으며, '천수천안'을 가지고 모든 중생에게 손을 내밀고 그 손에는 눈이 있어서 모든 중생의 소원이나 기도를 다 들어주는 은혜가 온 세상에 퍼지는 분이 바로 이 관세음보살이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의 소원을 다 들어 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가장 인자하고 우리에게 도움을 많이 주는 분인 것이다.
각황전은 본래 '장육전'이라 하여서 부처님의 키가 1장 6척이므로 어마어마하게 큰 키에다가 그 큰 부처를 모시기 위해 지은 전각인데, 이 집의 특징이 안에서는 한 층이지만 밖에서 보면 2층으로 보이게 만들어서 키가 큰 부처님을 먼저 모시고 집을 지으면서 단층으로 하기에는 너무 큰 목재를 구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일을 할 수가 없어서 2층을 하되 2층의 창으로 빛이 들어와서 부처님의 얼굴을 밝게 비출 수 있게 지은 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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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황전(장육전). |
임진왜란때 전라도 지방의 모든 사찰들을 불질러서 식량과 승병들의 근거지를 없애려는 일본의 전략에 의해 모두 불타고 없어진 절을 다시 세웠으나, 이 장육전만은 다시 세우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세울 수행자로 자신 제자들 중에서 가장 말이 없고 못난 제자에게 물려주고 돌아가고 말았단다.
그래서 그 제자가 몹시 걱정을 하고 있을 때 꿈에 나타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서 이튿날 아침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부탁하라고 하여 꿈을 깨고 절간 앞을 지키고 있을 때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 절간의 스님들 식사 일을 도와주는 가난한 공양주 노파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못 본 것으로 한다고 한사코 시선을 피했지만, 기어이 쫓아와서 아는 척을 하므로 어쩔 수 없이 꿈 이야기를 하면서 도와 달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하자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서는 시내에 뛰어 들어서 죽고 말았단다.
스님은 각황전을 걱정이 되어서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 다니면서 시주를 구하고 돌아다니다가 서울에 이르러 궁전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궁정 문을 나서는 어린 공주를 앞세운 궁궐 안이 여인들의 행차와 마주치게 되었다. 스님은 얼른 자리를 피하려고 하였지만, 아직 어린 공주가 스님을 보고 달려오면서
"스님 정말 오랜만이옵니다. 제가 바로 스님께 약속을 했던 공양주 아무개 입니다. 이제는 소원을 풀게 되었습니다" 하고 임금님께 말씀을 드려서 나라의 지원을 받아 각황전을 짓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이 각황전에는 남다른 추억거리가 있다. 62년 겨울방학 동안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의 신분으로 청소년적십자단원(JRC- 지금은 RCY)의 한사람이 되어서 이웃 광의면 수월리 한천마을에서 일주일 동안 농촌계몽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 행사의 마지막 날은 이 화엄사에 들러서 관광을 하고 떠나게 되어 있었다. 구례군 내 4개 면에서 활동을 하던 친구들이 모두 모이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화엄사와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활동을 한 관계로 다른 대원들보다 먼저 도착을 하였다.
각황전을 둘러보는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들은 젊은 스님이 우리를 안내해서 데리고 간 곳은 부처님의 뒤쪽의 기둥을 타고 지붕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스님은 "여기 이 곳으로 조심해서 올라가면 저 지붕의 용머리 한 가운데에 청기와가 있다. 그런데 지금 올라가면 그 기와를 만져 볼 수 있으니 한 번 가봐라"하시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스님이 그런 일을 하게 만든 것이 불가사의할 정도의 이상한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 네 사람은 그 스님이 가르쳐준 대로 지붕을 향해서 기어오르기 시작하였고, 맨 앞장을 선 나는 드디어 청기와에 다다라서 내 손으로 청기와를 만질 수 있었다.
1962년 1월초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손은 얼었지만, 그래도 그 찬란한 청기와를 만져보았다는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곧 이어 주지스님의 벽력같은 호령이 있었고 조심해서 내려오지 않으면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당부까지 받으면서 내려와서 스님께 호된 꾸중을 듣고만 사건이었다.
이제 나이 60이 넘어 아내의 손을 잡고 지난날의 이야기를 하면서 청기와를 다시 바라보았다.
다음으로 각황전의 곁을 지나 언덕 위에 있는 국보 35호의 4사자석탑을 가보기로 하였다. 우리 나라 탑 중에서 가장 특별한 탑 중의 하나이다. 네 마리의 사자가 4귀퉁이를 받치고 앉아 있고, 그 가운데에는 스님이 한 분 가운데를 받들어 이고 있는 형상을 새긴 탑으로 앞에는 공양을 하는 공양주가 이 탑을 마주보고 있어서 아주 특이한 관계를 가진 두 탑신이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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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양주의 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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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사자 석탑. |
그런데 이렇게 귀중한 보물들을 어떤 못된 인간들이 모두 도굴하기 위해서 넘어뜨리고 뒤져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같은 탑은 물론이고 전국 어느 절에서나 볼 수 있는 부도들까지 단 하나도 남긴 것이 없이 모두 도굴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4사자 석탑도 역시 도굴을 당하여서 다시 복원 공사를 하면서 잘 못한 것인지 탑신이 밑에 있는 기단 부분이 한쪽이 상당히 깨어져 기울 가능성이 많아 보여 매우 안타까웠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62년 초 각황전 사건이 있기 전에 절로 올라오다가 냇가의 부도전에서 수많은 부도가 넘어져 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달려들어서 세워 주기도 하고 윗 부분의 갓을 들어올리기도 하였던 일을 생각하니 아마도 그 때도 그렇게 도굴범이 다 뒤져간 것을 우리가 뒷처리를 해주었던 모양이었다.
사실 1973년에 교사의 신분으로 직원 여행길에 들른 이 화엄사는 삼문의 바로 코 앞인 다리 건너에도 여관과 술집이 즐비하고 밤이 늦도록 술을 마시고, 고성방가를 하는 소리에 절에서 두들기는 목탁소리가 묻혀버리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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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주문 밖-음식점들이 사라져 절다워졌다. |
나는 너무 한심한 절 모양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화엄사유감'이라는 글을 써서 지방 신문에 기고를 해 지역주민의 관심을 일깨우기도 하여 보았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 때만하여도 아직은 문화재에 대한 인식도 거의 없었고, 오직 먹고살기 위해 산업을 일으키고 새마을 운동으로 잘살아 보자는 것에만 온 정신을 쏟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말끔하기 치워지고 삼문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상가가 조성되어서 절다운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이 퍽 다행이다 싶었다.
이번 답사여행길에 해설을 맡으신 교수님의 너무나 해박한 지식을 총 동원하여서 설명을 해주고 즐겁게 해주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언제 저렇게 멋진 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 게 솔직한 나의 마음이었다.
┃국정넷포터 김선태 (ksuntae@empal.com)
<김선태님>은 고양시 원중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끝으로 43년간 교직에 몸담아 오시다 지난 2월 정년퇴직하셨습니다. 한겨레신문('김선태교장선생님의 학교이야기')을 비롯해 서울신문, 한국일보, 오마이뉴스 등 다양한 매체에 교육칼럼을 쓰셨습니다. [약력] 한국아동문학회 부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저서] <빨간 마스크의 공포(한국파스퇴르)>외 10여권의 동화집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