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빛나래 하동 순천 문화유적 도전 골든벨 20



1. 『토지』의 주배경이 되는 평사리 앞에 펼쳐진 들판에서는 하동에서 가장 많은 양의 보리가 생산된다. 이 들판의 이름은?

2. 박경리는 악양에 사는 친구와 함께 평사리 일대를 샅샅이 돌아본 후 『토지』를 썼다. 따라서 평사리 최참판댁은 원래 있었던 것을 근래 복원한 것이다. ㅇx

3. 서희의 아버지는 사랑채 뒤편의 산기슭 초가에서 귀녀와 평산에 의해 교살(목졸려죽음)당한다. 최서희의 아버지의 이름은?

4. ‘읍성’을 한자로 쓰세요.


5. 낙안읍성에는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폐쇄하였다고 전해 온다. 북문이 폐쇄된 이유는?

 

6. 큰 성문을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밖에 쌓은 항아리 모양의 작은 성으로 경기도 수원 화성의 이것이 유명하며 물론 낙안읍성에도 있다. 이러한 성을 무엇이라 부를까?

 

7. 낙안읍성의 성곽을 따라가면 凸형의 성곽이 있는데 당초 6곳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4곳만 남아 있다. 이것은 초소(망루) 역할을 했던 곳으로 좌우로 침입하는 적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고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축조된 것이다. 이것의 이름은?

 

8. 광복이후 우익과 좌익 인사들이 희생을 당한 현장으로 벌교 주민들은 흔히 ‘소화다리’라고 부른다. 『태백산맥』의 새끼 무당인 소화(素花)와 연관이 있는 게 아니라, 일본 왕 히로히또(昭和) 6년인 1931년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여순사건 때는 여기서 우익인사와 지주 등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반란군이 진압되었을 때는 반대로 좌익 인사들의 피로 물들었다. 이렇게 비극적 역사를 가진 소화다리의 원래 이름은? (안동 하회마을 강 건너 앞산의 이름과 같으며 ‘연꽃’이라는 뜻)

 

9. 현재 벌교(筏橋)라는 지명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10. 옛날 뗏목다리가 있던 자리에 1729년(영조 5)에 선암사의 초안선사에 의하여 석교(石橋)가 건립되었고, 1737년(영조 13) 다리를 다시 고치면서 3칸의 홍교가 만들어졌다. 홍교는 순우리말로는 무엇이라 할까?

11. 홍교 밑 천장 한 가운데 마다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돌출되어 아래를 향하도록 하였는데 다른 동물 말고 하필 용을 조각한 이유는?

12. 선종(禪宗)·교종(敎宗) 양파의 대표적 가람으로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송광사(松廣寺)와 쌍벽을 이루었던 순천시 승주읍의 수련도량(修鍊道場)은?

 

13. 선암사의 부도(浮屠)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시냇물을 건너야 되는데 그 건널목에는  아치형(둥근 반원형) 다리가 놓여있다. 선녀(관음보살)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는 이 다리의 이름은?

 

14.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전각의 이름으로 인도의 옛말 마하비라를 한역한 것이다.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위대한 영웅’이라 일컬은 데서 유래한 이 전각의 이름은?

 

15.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화장실로 손꼽히는 두 곳은?

16. 선암사는 여러 번 화재를 겪었다. 이에 대한 방책으로 심검당 다락 한 구석에 광창(光窓)을 내면서 한자를 새겨두었다. 이 두 가지 한자는?

17. 원통전은 고무래(丁) 모양으로 된 건물인데 조선조 23대 임금 때 왕실 원당으로 설치되었다. 앞쪽 현판에 쓰인 大福田도 이 임금이 내린 것이다. 정조(이산)가 후사가 없어 치성을 드려 관세음보살의 법력으로 낳았다는 이 임금은?

 

18. 순천만에 서식하고 있는 철새의 종류, 한 가지만 말해보셔요~

19. 일반적으로 조류(潮流)로 운반되는 모래나 점토의 미세입자가 파도가 잔잔한 해역에 오랫동안 쌓여 생기는 평탄한 지형을 말한다. 하천과 해수의 정화, 홍수 조절, 생태적 가치 등이 밝혀지면서 최근 보전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이것은?

20. 순천만 갈대밭의 총 면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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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으로 다가선 화엄사


국정브리핑|기사입력 2006-06-23 14:46 |최종수정2006-06-23 14:46

정확한 시간에 차는 빗속을 달리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출발해서 전라남도 구례의 화엄사까지 직행하는 화엄사 답사여행에 나섰다.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날씨는 그리 심한 비가 아니었지만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면서 길을 나선 나그네의 마음을 포근히 적셔주었다. 화엄사에 도착한 것은 11시 40분 경이었다. 예정보다 20분 정도 빨리 도착을 하였기에 식당에서 미처 준비를 해놓지 못해서 한바탕 소란이 일기도 하였다.

이런 곳에 오면 어른들도 빨리 달라는 소리가 튀어나오고 식당에서는 정신없이 서두르는 광경을 보면서 누구나 별로 다르지 않구나 싶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서 우리 일행은 휴식 시간도 없이 화엄사를 향해 올라갔다. 안내자는 일주문에서부터 우리들에게 자세한 설명과 아울러 여러 가지 일화까지 상세히 설명해 줌으로써 우리들은 즐거움 속에서 문화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넓혀주는 계기가 있었다.


     
   
     
화엄사 일주문.

일주문은 일주(一柱)로 이루어진 건물로 특히 중요한 것이 중심을 잘 잡는 것이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문의 뜻이 승려의 세계와 속세를 경계짓는 표시이며, 이 화엄사는 유달리 일주문의 양 옆으로 담을 쌓아서 경계를 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일주문이 서있는 자리가 평지로 옆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일주문을 통행케 하고 경계를 분명히 알리기 위한 것일 거라는 말로 그 이유를 알려주기까지 했다.

가람의 배치는 대개가 시내를 끼고 있어서 이 시내를 건너는 다리에서부터 절간의 경내로 들어서는 것으로 치지만, 들어가면서 세 개의 문이 있는데 첫째가 일주문이고, 두 번째에 금강문, 다음이 천왕문(혹은 사천왕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은 대부분이 계단식으로 점점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계단식 배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산지 가람의 모습이라고 한다.

금강문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있고 또 다른 두 개의 금강역사상이 있는데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 하나는 다물고 있는데, 이것은 인도의 고어인 산스크리스트어에서 첫 글자는 '아'이고, 끝 글자는 '흠'이니 그리스어의 '알파'와 '오메가'는 이 세상 진리의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뜻을 지녔듯이 아마도 불교 진리의 처음에서 끝까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수 십년을 절에 드나들면서도 몰랐던 것들을 듣게 돼 이번 답사에 온 것이 참 다행이다 싶었다.

한편 천왕문에 서있는 네 개의 천왕은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수호하는 수호신으로 절간 안에 들어오는 잡신들을 경계하는 역할을 한다면서 이 사천왕이 부처님을 돕게 된 기원까지 설명을 해주었다.

원래 힌두교에서 숭상하는 3,000여 신들 중에서 소문이 난 악신인 이 사천왕들은 부처님을 괴롭히다가 부처님의 깨우침이 뛰어나고 아무리 괴롭히려 해도 넘어가지 않는 부처님에게 잘못을 고백하고서 부처님이 계시는 수미산의 네 귀퉁이(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지구는 4각형이었고, 이 네 모서리를 지키면 모든 곳을 지킨다는 생각한 듯)를 지키겠다고 약속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특히 모든 사람들이 이 문을 통과할 적에 사람들이 이 곳을 드나들만한 자격이 있나를 심사하는데,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준 적이 있는가 △길 잃은 자에게 길을 알려준 적이 있는가 △위험에 처한 사람을 내 몸을 바쳐 구해준 적이 있는가 등을 물었다고 하니 아무래도 나는 이 사천왕문을 통과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옆길로 돌아가면서 자신을 반성해보는 시간으로 삼았다.  

화엄사 앞 마당은 다른 절과는 달리 상당히 낮은 위치에 있어서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결정되었고, 신분이 낮은 사람은 아래 마당에서나마 부처님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의 산물이라고 전했다.


     
   
     
대웅전 앞뜰에서.

우리 조상들은 비록 신분사회에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분명히 존재하였지만, 절간에서만은 조금이라도 그들을 배려하는 노력을 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유교의 정치철학적인 지배계급의 논리에 비해서는 훨씬 더 인간적이고 서민이나 천민들까지 감싸 안은 것이 불교였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절이나 대부분이 마당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에 눈에 띄는 것이 탑이고, 당간지주를 세웠던 자리였다. 화엄사도 탑이 동탑과 서탑이 두 개 있었으나 탑의 배치 방향을 보면 같은 시대에 세운 것이 아니지 않은가 싶다는 설명을 듣고 정확히 각을 잡아보니 서탑이 상당히 뒤로 나 앉아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설명을 마치고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교수님을 따르면서도 나는 중학시절에 수학여행을 와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는 공양간이 자꾸만 바라다 보였다. 철없던 시절에 우리집에서는 가장 큰 방이라야 열 명이 들어가면 발을 뻗을 곳이 없을 정도였던 작은 시골 초가집였는데 수학여행온 130여 명이 한 방에서 서로 발을 맞대고 누워서 잠을 이루었던 추억의 자리였다.

그날 스님이 우리에게 들려준 얘기가 생각난다.  
 
어느 겨울날 눈이 소복하게 쌓인 산길을 걸어가던 두 스님이 마주치게 되었다. 화엄사에서 가던 스님이
"스님은 어느 절에서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하고 묻자 반대쪽 스님이  "저는 합천 해인사에서 구례 화엄사로 가는 길이옵니다만 스님은 어디로 가시는 길이십니까?"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은 들은 화엄사 스님이 "그래요. 정말 인연이구려. 소승은 지금 합천 해인사를 향해 가던 길입니다. 사실 해인사 해우소가 하도 깊다는 얘길 듣고 도무지 얼마나 깊기에 이런 소문이 여기까지 나는가 싶어서 소승이 직접 확인을 해볼까 해서 나선 길이옵니다" 하고 답했다.

이에 해인사 스님이 말씀하시길 "그렇습니까? 아주 잘 되었군요. 저도 화엄사의 가마솥이 하도 크다는 소문을 듣고 소문을 확인차 나선 길이옵니다" 하고 대답을 하더라는 것이다.

다시 화엄사 스님이 "스님 정말 화엄사의 가마솥을 보시렵니까? 제가 엊그제 화엄사를 떠나 지금 여기까지 오는 길인데 마침 동지가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동지죽을 쑤고 있는데 가마가 얼마나 큰 지 저을 수가 없어서 가마솥가에 올라서서 죽을 젓던 공양주가 그만 발을 헛디뎌 가마솥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스님들이 배를 타고 공양주를 찾ㅏ 나섰는데 지금쯤은 찾았는지 모르겠군요."

이말을 들은 해인사의 스님은 능청스럽게 "스님의 얘길 듣고 보니 화엄사의 가마솥이 어지간히 크긴 하는가 싶습니다 그려. 그렇지만 해인사의 해우소 만큼 대단하지는 않는 것 같군요. 제가 엊그제 아침에 해우소에 들러서 일을 보고 나섰는데, 아마 지금쯤은 그것이 땅에 떨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렇게 궁금증을 서로 풀게 된 스님들은 각자의 절로 돌아가서 이 얘기를 전했으니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가마솥이 구례 화엄사의 것이며, 가장 깊은 해우소가 합천 해인사의 것이라는 우스개 소리였다.  

사실 수학여행 당시 아주 인상 깊게 본 것이 있었다. 그 무렵(1959년)에는 우리 나라 어느 집이나 절간에서도 모두 나무를 때서 밥을 짓던 시절이었다. 우리가 잠을 자려던 화엄사에서 저녁 밥(공양)을 먹는데 어쩌다 부엌을 내다보니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있는 불목하니가 아궁이에 나무를 밀어 넣는 모습을 본 나는 그만 질리고 말았다.  

보통 가정집에서는 부잣집이라야 겨우 장작을 때는 정도이고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풀이나 나무 순들을 베어서 말려 그것을 땔감으로 쓰거나 삭정이를 주어다 때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화엄사의 아궁이에는 우리들의 아름드리가 될만한 커다란 통나무를 그대로 아궁이에 밀어 넣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물론 2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먹을 밥을 짓는 가마솥의 크기도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스님의 얘기가 거짓말이지만 정말 우리가 본 가장 큰 솥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계속된 안내자의 탑돌이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사실적이고 정말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듬뿍 담긴 이야기였다. 우리 조상들은 남녀가 만날 수 있는 시간이나 장소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절에서는 연등행사나 부처님 오신 날과 같은 행사때 탑돌이를 통해 여러 사람이 한 곳에서 한 가지 일을 하게 하므로서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의 배필이 될만한 사람을 찾아 볼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뜻을 지닌 탑돌이는 반드시 시계방향으로 4바퀴 이상을 돌게 되는데 소원을 한 가지만 빌고 또 빌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당 한 켠에 있는 당간지주와 같은 것이 여러 개 있는 것은 이 곳에 커다란 탱화를 걸고 법회를 열게 되는데, 이런 행사를 준비하게 되면 지금처럼 여러 가지 시설이 있는 시기도 아닌 때에 무대 만들랴, 앉을 자리 마련하랴 구경하는 사람들이나, 천민들에게도 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등의 준비가 보통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이런 일들이 아주 짧은 순간에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어서 무척 소란스럽고 분주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법회의 이름이 '야단법석'이었지만,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한 것"을 일컬어 '야단법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말의 전래도 새삼스럽게 되새기게 되었다.

한편 대웅전은 반드시 부처님을 모시는 곳인데 이곳에 모셔져 있는 불상은 부처님이 아닌 비로자나불인데 만약 이렇게 비로자나불을 모신 곳은 반드시 대웅전이 아닌 '광' 자가 붙은 '대광적전' 같이 부르게 된다는데 여긴 이상하게 대웅전이라 붙였다는 것이다.

대웅전의 오른쪽에 배치된 명부전에 가서는 이곳에 모셔진 '지장보살'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절에서 모시는 것은 부처인데 오직 한 분 지장보살만은 보살을 모시고 있다.


     
   
     
동탑과 명부전.

부처란 '깨우친 분'이고, 보살은 '깨우치기 위해 수행을 하는 사람'인데 절간에서 부처가 아닌 보살을 보신이유는 이 '지장보살'이란 분은 깨우침을 얻어 부처가 되어야 하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마지막 한 사람까지라도 연옥에서 부처님을 부르는 중생이라면 모두 구하겠다고 한사코 부처가 되기를 거부하고만 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분께 비는 것이 가장 소원을 잘 들어주는 분이라고 한다. 또한 이 지장보살 곁에는 10분의 하늘나라 심판관들이 자리를 같이 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무서운 분이 머리에 책을 이고 있는 모습을 한 염라대왕님이시고, 자신이 한 일을 이르라고 하다가 거짓말을 하면 손에 들고 계시는 요지경을 돌리면 자기가 평생에 한 일들이 차례로 나타나서 만약에 거짓말을 한 사람은 '달설지옥'으로 보내게 된다. 이 달설지옥은 정말  무서운 곳으로 혀를 뚫어서 줄을 꿰어 그 줄에 쟁기를 달아서 밭을 갈게 한다는 무서운 지옥이란다.

이렇게 저 세상을 가기 위해서 재판을 받는데 이것이 7일만에 한번씩 재판이 열리며, 이런 재판이 일곱번 끝나면 그 죄에 따라 벌을 받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7×7 = 49해서 49제가 열리게 되고, 아이가 태어나면 금줄을 치고 잡인의 출입을 금지하다가 7번째 이레(7일)을 새면 (7×7 = 49일) 이제 가장 조심을 할 기간이 다 지난 것으로 여기고 금줄을 거두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재판을 받아서 그 사람의 죄 값에 따라 윤회를 하는데 그 정도에 따라 나누기를 6단계가 있으니 이를 6도 윤회라고 한다.

△ 죄가 가장 많은 사람은 6번째의 윤회로 '뱀'이 된다고 한다. 이 사람은 수전노와 같이 지나친 욕심을 가진 사람으로 인연을 끊지 못하여 자신의 살아온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부근을 배회하는 뱀이 되는 벌을 받은 것이다.

△ 다음으로 죄가 많은 사람은 '축생'으로 태어나서 네 발을 가지고 땅 위를 기면서 높은 세상을 보지 못해서 헤매는 신세가 된다.

△ 그 보다 조금 나은 사람은 '아수라'의 윤회를 받고 태어나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번뇌하는 속에서 살다가 다음 생을 맞아야 하는 신세가 된다.

△ 비교적 상급에 속하는 3단계로 '아귀'로 태어난 사람이다. 이 사람은 평생 먹을 것만 찾아서 계속 먹어야만 하는 굶주린 귀신으로 태어난다. 이 사람은 목구멍이 바늘구멍만큼 밖에 안 되는데 그 목구멍으로 배가 부르게 먹으려니까 끊임없이 먹어대도 배는 부리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먹을 것이라는 것이 자신이 전생에 수채 구멍으로 흘려 보낸 버린 음식을 먹어야 한다니 정말 사람이 먹을 것을 귀중하게 생각하라는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 그 보다 조금 나은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난다니 우리 인간은 비교적 우수한 성적을 거둔 전생을 살아온 셈이다. 그러나 이 생에 더욱 좋은 일을 하고 나쁜 짓을 하지 않아야 더 높은 단계로 윤회하여 다음 생을 살 수 있는 것이다.

△ 가장 높은 단계를 '천'이라 하여 이제는 승천, 극락을 가기 직전의 단계이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노력을 하면 해탈을 하여서 극락에 갈 수 있는 단계이다.

이런 단계에서 늘 힘이 되어 주는 분이 바로 다름 아닌 관세음보살이시다. 원통전에 모셔져 있으며, '천수천안'을 가지고 모든 중생에게 손을 내밀고 그 손에는 눈이 있어서 모든 중생의 소원이나 기도를 다 들어주는 은혜가 온 세상에 퍼지는 분이 바로 이 관세음보살이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의 소원을 다 들어 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가장 인자하고 우리에게 도움을 많이 주는 분인 것이다.

각황전은 본래 '장육전'이라 하여서 부처님의 키가 1장 6척이므로 어마어마하게 큰 키에다가 그 큰 부처를 모시기 위해 지은 전각인데, 이 집의 특징이 안에서는 한 층이지만 밖에서 보면 2층으로 보이게 만들어서 키가 큰 부처님을 먼저 모시고 집을 지으면서 단층으로 하기에는 너무 큰 목재를 구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일을 할 수가 없어서 2층을 하되 2층의 창으로 빛이 들어와서 부처님의 얼굴을 밝게 비출 수 있게 지은 집이라는 것이다.


     
   
     
각황전(장육전).

임진왜란때 전라도 지방의 모든 사찰들을 불질러서 식량과 승병들의 근거지를 없애려는 일본의 전략에 의해 모두 불타고 없어진 절을 다시 세웠으나, 이 장육전만은 다시 세우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세울 수행자로 자신 제자들 중에서 가장 말이 없고 못난 제자에게 물려주고 돌아가고 말았단다.

그래서 그 제자가 몹시 걱정을 하고 있을 때 꿈에 나타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서 이튿날 아침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부탁하라고 하여 꿈을 깨고 절간 앞을 지키고 있을 때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 절간의 스님들 식사 일을 도와주는 가난한 공양주 노파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못 본 것으로 한다고 한사코 시선을 피했지만, 기어이 쫓아와서 아는 척을 하므로 어쩔 수 없이 꿈 이야기를 하면서 도와 달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하자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서는 시내에 뛰어 들어서 죽고 말았단다.  

스님은 각황전을 걱정이 되어서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 다니면서 시주를 구하고 돌아다니다가 서울에 이르러 궁전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궁정 문을 나서는 어린 공주를 앞세운 궁궐 안이 여인들의 행차와 마주치게 되었다. 스님은 얼른 자리를 피하려고 하였지만, 아직 어린 공주가 스님을 보고 달려오면서
"스님 정말 오랜만이옵니다. 제가 바로 스님께 약속을 했던 공양주 아무개 입니다. 이제는 소원을 풀게 되었습니다" 하고 임금님께 말씀을 드려서 나라의 지원을 받아 각황전을 짓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이 각황전에는 남다른 추억거리가 있다. 62년 겨울방학 동안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의 신분으로 청소년적십자단원(JRC- 지금은 RCY)의 한사람이 되어서 이웃 광의면 수월리 한천마을에서 일주일 동안 농촌계몽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 행사의 마지막 날은 이 화엄사에 들러서 관광을 하고 떠나게 되어 있었다. 구례군 내 4개 면에서 활동을 하던 친구들이 모두 모이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화엄사와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활동을 한 관계로 다른 대원들보다 먼저 도착을 하였다.

각황전을 둘러보는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들은 젊은 스님이 우리를 안내해서 데리고 간 곳은 부처님의 뒤쪽의 기둥을 타고 지붕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스님은  "여기 이 곳으로 조심해서 올라가면 저 지붕의 용머리 한 가운데에 청기와가 있다. 그런데 지금 올라가면 그 기와를 만져 볼 수 있으니 한 번 가봐라"하시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스님이 그런 일을 하게 만든 것이 불가사의할 정도의 이상한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 네 사람은 그 스님이 가르쳐준 대로 지붕을 향해서 기어오르기 시작하였고, 맨 앞장을 선 나는 드디어 청기와에 다다라서 내 손으로 청기와를 만질 수 있었다.

1962년 1월초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손은 얼었지만, 그래도 그 찬란한 청기와를 만져보았다는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곧 이어 주지스님의 벽력같은 호령이 있었고 조심해서 내려오지 않으면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당부까지 받으면서 내려와서 스님께 호된 꾸중을 듣고만 사건이었다.

이제 나이 60이 넘어 아내의 손을 잡고 지난날의 이야기를 하면서 청기와를 다시 바라보았다.

다음으로 각황전의 곁을 지나 언덕 위에 있는 국보 35호의 4사자석탑을 가보기로 하였다. 우리 나라 탑 중에서 가장 특별한 탑 중의 하나이다. 네 마리의 사자가 4귀퉁이를 받치고 앉아 있고, 그 가운데에는 스님이 한 분 가운데를 받들어 이고 있는 형상을 새긴 탑으로 앞에는 공양을 하는 공양주가 이 탑을 마주보고 있어서 아주 특이한 관계를 가진 두 탑신이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


     
   
     
공양주의 상.


     
   
     
4사자 석탑.

그런데 이렇게 귀중한 보물들을 어떤 못된 인간들이 모두 도굴하기 위해서 넘어뜨리고 뒤져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같은 탑은 물론이고 전국 어느 절에서나 볼 수 있는 부도들까지 단 하나도 남긴 것이 없이 모두 도굴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4사자 석탑도 역시 도굴을 당하여서 다시 복원 공사를 하면서 잘 못한 것인지 탑신이 밑에 있는 기단 부분이 한쪽이 상당히 깨어져 기울 가능성이 많아 보여 매우 안타까웠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62년 초 각황전 사건이 있기 전에 절로 올라오다가 냇가의 부도전에서 수많은 부도가 넘어져 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달려들어서 세워 주기도 하고 윗 부분의 갓을 들어올리기도 하였던 일을 생각하니 아마도 그 때도 그렇게 도굴범이 다 뒤져간 것을 우리가 뒷처리를 해주었던 모양이었다.

사실 1973년에 교사의 신분으로 직원 여행길에 들른 이 화엄사는 삼문의 바로 코 앞인 다리 건너에도 여관과 술집이 즐비하고 밤이 늦도록 술을 마시고, 고성방가를 하는 소리에 절에서 두들기는 목탁소리가 묻혀버리곤 하였다.


     
   
     
일주문 밖-음식점들이 사라져 절다워졌다.

나는 너무 한심한 절 모양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화엄사유감'이라는 글을 써서 지방 신문에 기고를 해 지역주민의 관심을 일깨우기도 하여 보았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 때만하여도 아직은 문화재에 대한 인식도 거의 없었고, 오직 먹고살기 위해 산업을 일으키고 새마을 운동으로 잘살아 보자는 것에만 온 정신을 쏟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말끔하기 치워지고 삼문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상가가 조성되어서 절다운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이 퍽 다행이다 싶었다.

이번 답사여행길에 해설을 맡으신 교수님의 너무나 해박한 지식을 총 동원하여서 설명을 해주고 즐겁게 해주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언제 저렇게 멋진 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 게 솔직한 나의 마음이었다.

┃국정넷포터 김선태 (ksuntae@empal.com)


     
   
     
<김선태님>은 고양시 원중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끝으로 43년간 교직에 몸담아 오시다 지난 2월 정년퇴직하셨습니다. 한겨레신문('김선태교장선생님의 학교이야기')을 비롯해 서울신문, 한국일보, 오마이뉴스 등 다양한 매체에 교육칼럼을 쓰셨습니다. [약력] 한국아동문학회 부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저서] <빨간 마스크의 공포(한국파스퇴르)>외 10여권의 동화집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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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에 건축가를 대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을 열가지 선정한 일이 있다.

당연히 영주 부석사가 1위를 차지하였는데 의외로 조계산 선암사가 상위에 올랐다.

선암사는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불국사 석가탑 같은 빼어난 건축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건축물로 선정된 것은 어찌된 영문일까?

 

선암사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마도 나서지 않고 산속에 아담하게 옹기종기 모여있는 가람배치가 자연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근대에 들어 가람배치가 거의 변경되지 않고 원래 모습을 (19세기)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선암사를 처음 들어설 때, 작고 소담한 일주문을 마주보게 된다.

대부분의 고찰에서 만나게 되는 거대하고 위압적인 일주문에 비해 선암사의 일주문은

참배객에게 친근감을 주게된다.

하지만 일주문이 약간 높은 돌계단 위헤 서 있기 때문에 절집으로서 위엄은 잃지않고 있다

 



 

 

선암사의 특징은 소담하고 잘 짜여져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품격과 위엄을 잃지 않았으며 곳곳에 적절한 장엄이 보태어져 있다는 것이라고 본다.

 

대웅전의 경우에도 화려함보다는 절제됨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건물이다.

대웅전은 돌을 잘 깎아 만든 가구식 기단 위에 지어졌다.

가구식 기단은 통일신라시대 건축된 사찰에서 흔히 보이는 양식이다.

그러나 선암사 대웅전 기단은 돌이 심하게 떨어져 나간 흔적이 보이는데

돌이 강한 화기에 노출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 한다.

선암사가 수차례 대화재를 겪었다는 사실을 웅변하는 증거라 하겠다.

 

현재 대웅전은 19세기 초반에 중건된 3 칸 짜리 조선 후기의 건축물이지만

당시 다른 건축물에 비헤 칸살이 넓어 고대형 (백제형) 건물의 흔적이 남았다고 보아진다.

 

앞뒤로 만세루와 대웅전 그리고 죄우의 심검당과 설선당의 ㅁ자형 구조에

가운데 쌍탑을 배치한 것은 아주 모범적이고 전형적인 불전의 배치라 하겠다.

요즘 중창 불사를 거친 관광 사찰에 비하면 불전앞 마당이 횡하니 넓지 않고 균형감이 있어

참배객으로 하여금 긴장감과 숙연함을 느끼게 해준다.

선암사 가까이 있는 송광사 대웅전 앞의 황량함과 비교하면 그 느낌이 와닿을 것이다.

 



 

 

대웅전 내부의 천정 및 들보다.

두마리 용이 팔작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화려하지만 요란하지 않는 장식이다.

용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생물로써 그려진다 한다.

천장의 연화무늬, 대들보의 단청 그리고 정교한 공포가 눈에 띈다.

 

날씨가 더워 마침 법당문을 열어두어 망원으로 내부를 촬영하였다.

선암사에서 좋았던 것 중의 하나가 스님들이 너무 친철하여 오히려 미안할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대웅전 옆을 지나가는데 안에 계신던 스님이 한 보살님과 이야기하고 계시다

나를 보고는 황급히 일어서셔서 합장을 하는데

오히려 내가 당황하여 어떻게 답례를 해야하는지 몰라 허둥거리기까지 했다



 

 

중요한 건축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곳 중 하나가 화장실이라면?

우리나라에 화장실이 유명한 두 건축물이 있다. 첫째는 당연히 선암사다. 다음은 안동의 병산서원이다. 

요즘은 많은 사찰이 선암사 뒷간을 벤치마크하여 재래식 화장실을 지었다는 믿기지 않는 소문도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송광사 화장실이 어찌도 선암사 화장실을 닮았는지...

다만 조금 업그레이드하여주변에 연못에 연꽃을 심어둔 것을 제외하고는.



 

 

선암사 회장실 간판을 세가지로 읽는다. 첫쩨 뒷간, 둘째 깐뒤 그리고 셋째 싼뒤다.

개방적이라는 것이 선암사 "싼뒤"의 가장 큰 특징이다. 화장실 각 칸에 문이 없다.

다행인 것은 남녀 화장실은 좌우로 분리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어깨쯤 오는 칸막이가 있다.

그리고 화장실 외벽이 살창으로 되어있어 볼일을 보면서 밖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역시 다헹인 것은 낮에는 살창이 발과 같은 역할을 하여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

선암사에 가면 반드시 싼뒤에서 명상의 시간을 가져야 된다는 불문률이 있으며

뒷간에서 일을 보지 않으면 선암사를 본 것이 아니라는 옛말이 전해온다.

참고로 이 뒷간은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고(가장 오래된)의 화장실이다.

 

화장실의 뒷 모습이다. 뒷쪽 역시 살창으로 되어 있으며 이 뛰어난 자연 환기 장치 덕분에 화장실 내에도 밖에서도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심검당은 대웅전에서 동쪽에 있는 2층 다락이 있는 ㅁ자형 건물이다.

본래 심검당은 스님들이 수련을 하는 선원으로 외부인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다행이 스님의 양해를 구하고 후다닥 둘러 보고 나왔다.

선암사 심검당을 보고 느낀 점은 한마디로 낡았다는 것이다.

스님들이 이런 낡은 집에서 지낸다는 것이 조금 안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아직도 옛 고옥을 지키고 있는 많은 종가집이 있지만

심검당은 그 이상으로 낡았으면 낡았지 그 이하는 절대 아니다.

물론 많은 사찰에서 요사채를 번듯하게 그러나 어울리지 않게 새로 지은 것을 보고 속상해하기도 했지만

선암사 심검당을 보고는 그런 생각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심검당은 2층 다락이 크게 붙어 있는 독툭한 구조를 하고 있다.

건물 전체에 다락을 올린 건물은 드물게 보는 구조이며 

선암사의 경우 좁은 계곡에 절이 들어서 있어 공간의 활용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다락은 창고 대용으로 쓰였을 것이다 (일반 민간에서도 2층 다락은 보통 곡물의 저장 등의 용도로 쓰였다.)

지금은 거의 비어 있으며 잡동사니가 굴러다니고 빨래 건조실 용으로 쓰이고 있다.

심검당 구석에 있는 다락올라가는 계단이다.

너무 낡아 딛고 올라 갈 때 무너질까 조금 가슴이 떨렸다.

내 체중이 얼마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락 한 구석에 海와 水라고 투각되어 있는 광창이 보인다. 안에서 봐서 글자가 꺼꾸로다.

선암사가 여러번 화재를 겪어 일종의 비보책으로 곳곳에 바다 해자와 물 수자를 새긴 건물을 볼 수 있다.

화재가 빈발하여 한 때 조계산을 청량산(淸凉山)으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하였다 한다.

다락 천장이 꽤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바람이 통하라고 안 쪽으로는 벽이 없다.




 

 

대웅전 뒷 쪽으로는 장경각, 불조전 그리고 팔상전이 나란히 서 있다.

터가 좁아서 세 건물이 처마에 처마를 맞대고 서 있다.

불조전과 팔상전 사이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가면 원통전이 있다.

앞의 두 건물 배치상 원통전의 전경을 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김봉렬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원통전을 지은 이후에 불조전을 지었다고 하여

의도적으로 원통전을 외부의 시야를 차단할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원통전은 고무래(丁) 모양으로 된 건물이며 조선조 순조때 왕실 원당으로 설치되었다.

정조가 후사가 없어 치성을 드렸는데 관세음보살의 법력으로 순조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왕실 원당이 되어 주변 양반들의 수탈에서 벗어나고 왕실의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선암사가 다시 중흥의 길을 접어들게 된 것이다.

순조가 아니었으면 아마도 오늘날 선암사는 외로운 폐사지로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원통전의 입구 앞 튀어나온 포치(Porch)의 천정 장식이다.

연꼿과 학이 아름답게 그려져있다.



 

 

원통전 내부에는 캐노피 같이 기둥을 세우고 불단을 별도로 만든 다음 관음보살을 모셨다.

본래는 문이 달려 있어다 하니 내부에 분리된 공간을 설치한 독특한 구조라 하겠다.

앞쪽 현판에 쓰인 大福田은 순조가 내린 것으로 왕실 원당이라는 증거이다.

사찰의 불당에 불전함이라쓰인 상자가 있는데 간혹 대복전이라 쓴 경우도 있다.

아마 시주를 의미하는 말이라 추정되는데 사전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선암사 가장 뒤에 있는 건물이 응진전과 각황전이다.

응진전은 선방으로 외부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각황전은 본래 장육존상을 모셔야 하나 지금은 철불을 모시고 있다 한다.

불전이지만 외부인의 참관이 허용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불전 및 건축물의 구조는 그 절의 종파에 따른 불교 교리를 형상화 하는 것이다.

선암사는 선을 중시하여 두개의 선방을 두고 있으며 하선방은 심검당이며

상선방은 칠전선원이며 응진전이 그 중심이다.

응진전이 가람배치상 선암사의 가장 윗쪽에 위치한다.

 

칠전선원 앞에는 작은 문이 있으며 호남제일선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역시 여러단으로 된 계단 위에 있어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을 내비친다.

칠전선원은 옛부터 이름난 선원으로 많은 선사를 배출한 명문 선원이라한다.

그래서 호남제일선원이라는 자부심 가득찬 현판을 떳떳이 내걸 수 있으리라.




 

 

본래 응진전은 선원으로 출입금지 구역이지만 지금 보수공사중이라 출입제한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계단을 올라 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섰는데 마당한 구석에서 공사 인부가 볼일을 보고 있었다.

순간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그 인부는 젊은 사람으로 아마 보조인부같기는 했다.

하지만 절 한 구석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그리고 문화재인데 방뇨를 하는 사람이

어찌 문화재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있어 문화재 수리를 제대로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곳을 다녀보면 옛 건축물을 보수한 것이 오히려 망가뜨린 것인지 모를 경우를 많이 보았는데

그 이유가 어찌보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문화재를 보수한다는 것은 건설 공사가 하니라 우리의 집단 자아를 다시 확인하고

문화를 유지하는 것이데 이를 무시하고 보수를 하면 옛 건축물의 정신이 소실되는 것이리다.

 

아래 사진은 응진전 부엌 뒤 물확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석조물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다.

물확이 배치된 각도, 비례 그리고 모양의 자연스러움에 찬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우스게 소리 같지만 이 물확을 국보로 지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지하수는 차기 때문에 햇볕에 달구어 음기를 중화시키려는 지혜가 담긴 설계다.

고찰에 가면 이런 종류의 물확을 종종 볼 수 있으나 선암사의 물확만큼 균형잡힌 작품은 보기 어렵다.

지금은 공사장 인부들이  냉장고로 쓰시는지 음료수 통이 여럿 띄어져 있었으나

사진은 건져내고 찍었다.

 



 


 

선암사에는 설선당, 창파당과 같은 승방이 있으나 외부인 출입이 안되는 탓으로 관람이 불가능하였다.

이외에도 선암사 내에 아주 오래된 소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그 휘어진 모습이 장관이다.

- 쌔깜둥이 http://blog.yes24.com/chajutae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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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빛나래

 

금정여자고등학교

Ⅰ. 동아리 소개

  '두빛나래‘는 여러 장르를 망라하는 책읽기 활동을 기본으로, 독서 후에 감상문을 쓰는 것은 물론, 토론․문학답사․여행․영화관람․강연회참가․역할극 발표․시 짓기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독서동아리이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기본 텍스트의 이해를 심화함은 물론,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을 세우고, 문화적으로 새로운 경험을 쌓음으로써 삶의 질을 고양하고 궁극적으로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다져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모두 20번의 정기 모임을 가졌으며 교육청 주관 강연 외에도 두 차례의 강연참석과 아홉산 탐방, 단체영화 관람, 여름방학․겨울방학 문학 답사 등 다채로운 활동을 가졌다.

  ’두빛나래‘란 ‘두빛나래혜윰아라나르샤’의 약칭이다. ‘두 개의 빛나는 날개로 생각의 바다를 날자’라는 뜻으로, 동아리 아이들과 지도교사가 함께 고심하며 지은 이름이다. 동아리활동이 거의 끝나가는 지금, 지난 1년 동안 우리가 공유했던 경험들이  새로운 ‘두빛나래’로 아이들에게 돋아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젠 아이들 스스로 드넓은 생각의 바다를 훨훨 날아다닐 수 있도록…!

Ⅱ. 동아리 활동 목표

 

  우선 ‘독서’에 대한 편견을 버리도록 하는 것이다. 대입위주 교육정책의 일환인 ‘논술’ 열풍으로 독서 자체를 논술학습과 동일시하여 접근하는 것이 하나의 풍조가 된 듯하다. 이것은 독서에 대한 바른 관점이 아니다. 정직한 독서를 한다면 토론 및 논술능력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따라서 전체 삶을 윤택하게 하는 올바른 방법으로서의 책읽기가 아이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가도록 해야 한다.

  책읽기를 생활화․습관화 하는 것이 다음 목표이다. 학교 공부에 지나친 압박을 받는 아이들은 책읽기를 성적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여 도외시하거나 시간 없음을 이유로 책 자체를 멀리 하기 쉽다. 이런 때일수록 생각의 폭과 깊이에 도움을 주어 궁극적으로 삶을 살찌우게 하는 ‘참된 독서’를 생활화․습관화하고 나아가 독서를 그 자체로서 좋아하는 생활 자세를 길러야 한다.

  ‘좋은 책’에 관한 고민도 필요하다. 하루에도 수백 권의 새로운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도, 다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도 함께 기르는 것이 활동의 중요한 목표이다.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책의 내용을 자신의 삶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읽은 책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래야 책읽기에 재미와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며 생각하는 능력도 향상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럿이 함께 하는 책읽기와 다양한 독후활동을 통해 전인격의 함양을 모색한다. 독서 후 함께하는 토론을 통해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배우고, 역할극을 통해 易地思之의 관점을 배우며, 답사를 통해 책읽기의 의미를 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활동 후에는 당연히 서로에 대한 친밀감도 깊어질 것이다.


Ⅲ. 주요 활동 내용 및 성과


  1. 활동내용


일정


읽은 책


과제

3월29일(목)

오리엔테이션

 4월 6일(금)

강아지똥

1. 작가가 전하고자 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2.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이유는?

3. 가장 마음에 와 닿는 삽화는?

4월 20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1. 사형제도에 대한 입장(찬/반)을 세우고 토론

* 14일

교육청 토요 강연1 “21세기가 요구하는 인재”조벽 (미시간공대)

* 28일

교육청 토요 강연2 “이미지 시대의 삶과 예술” 이왕주 (부산대)

4월 문화행사

07일(토) ‘우리학교’ 남포동 국도극장 18:00 (김명준 감독과의 대화)

5월 11일

자연의 피리소리-장자

1. 책의 내용에 대해 질문하기

5월 23일

여자의 탄생

1.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자’이기를

   강요받은 순간이 언제인지 발표하기.

2. ‘여자’vs‘남자’ 경쟁관계? 공존, 상생 관계?

* 12일

교육청 토요 강연3 “수리논술의 방향” 박제남 (인하대)

* 26일

교육청 토요 강연4 “통합논술의 방향” 강방식 (동북고)

5월 문화행사

 03일(목) 아홉산 탐방

11일(금)『장자』강연 해강고등학교 도서실

26~27 5.18기념 광주역사탐방

6월 1일

거꾸로 읽는 세계사

1. 세계사 사건 한 꼭지씩 맡아 정리하고

   서로 설명&질문하기

6월 15일

과학콘서트

1. 일상생활 속에서 과학적 사고가 필요한 순간, 구체적으로 한 가지씩 찾아서 소개.
2. 책에 소개된 논문 읽어보거나 
   웹페이지 들어가 보고 내용 소개하기

* 9일

교육청 토요 강연5 “같음과 다름” 이미식 (부산교대)

* 23일

교육청 토요 강연6 “하나의 문을 닫으면 아홉 문이 열린다” 이수광 (이우학교)

7월 6일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1. 책의 내용 중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은?

2. 나의 여행기 ‘써서’ 발표하고 제출

3. 관광과는 다른 여행의 의미 생각해보기

7월 26일

한티재하늘 1,2

1. 생각해보면 가장 마음이 짠~해지는 사람(경험)과 그 이유 써보기. (풍성한 입말, 사투리를 살려서)

2. 권정생 선생님에 대해 알아보고 소개하기.

* 14일

교육청 동아리활동 성과발표회

7월 문화행사

7월 26일 영화 ‘화려한 휴가’ 단체관람

8월 12일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1.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내맘대로 best5

2.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인가? 생각해보기

3.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보기

8월 31일

어린 왕자

1. 나에게 있어 ‘장미’, ‘여우’와 같은 존재는?

2. 마음에 드는 장면 선택하여 역할극 발표하기

8월 문화행사

8월 12(일)~13(월)일 동아리 문학/문화 답사

9월 14일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1. 책의 내용에 관한 test

2. '환경보전'vs '경제개발’ 토론

9월 28일

내 인생의 영화

1.‘내 인생의 영화’는?

2.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실존에 관한 사유

* 8일

교육청 토요 강연7 “확률의 두 얼굴” 신현용 (한국교원대)

  

10월 12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 ‘○○(으)로부터의 사색’을 주제로 생활글 쓰기

2. ‘옥살이의 경험‘에 관한 다른 책과 지은이 조사

* 27일

교육청 토요 강연8 “파이팅 파브. 강점으로 미래를 설계하라” 신완선 (성균관대)

10월 문화행사

10월 12일(금) 부산대학교 인문주간 행사 - 신영복 강연 ‘고전과 21세기’ (밀양 예림서원)

11월 2일

십시일반

사이시옷

1. 자신이 받은 인권침해사례에 관한

   즉흥역할극 발표

2. ‘세계인권선언문’&‘학생인권선언문’ 읽어보기

11월 30일

전태일평전

1. 부모님 평전 써보기

2. ‘그 시대 전태일의 삶 VS 이 시대 우리들의 삶

* 10일

교육청 토요 강연9 “나, 그리고 에너지와 환경” 김무한 (포항공대)

* 24일

교육청 토요 강연10 “선택의 순간,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나?” 정재승 (KAIST0

11월 문화행사

동아리 활동 후 뒤풀이

12월 26일

버림받은 성적표

살아남은 자의 슬픔

1. 가장 좋아하는 시 낭송 대회

2. 나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시’ 써보기

3. 브레히트에 대해 조사 발표하기

* 22일

교육청 동아리활동 성과발표회

1월 11일

동정 없는 세상

1. 수능시험 후 가장 하고 싶은 일 세 가지는?

2.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이)다.

1월 문화행사

1월 29(화)~30(수)일 동아리 문학/문화 답사

2월 마무리

동아리 활동 마무리 및 문집(포트폴리오)작업




  2. 성과

  책읽기를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동아리 아이들은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 것은 물론 어느 정도 자존감과 자신감을 회복한 듯하다. 아울러 책읽기의 가치를 알게 되었으며 이러한 활동이 진정한 의미의 공부임을 깨달았다 한다.


Ⅳ. 활동소감

* 평소 책을 잘 안 읽던 나였기에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고, 책을 읽을 때마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을 수 있어서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김선주)

* ‘독서동아리’라고 독서만 했던 것은 아니다. 여행, 토론, 역할극, 영화관람, 강연, 시 짓기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선영)

* 부끄러움이 많아서 다른 사람 앞에서 내 의견을 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성격이 못 되는데 독서토론의 사회를 본 이후론 내 생각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동아리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모임의 사회를 보았으니 다른 친구들도 알게 모르게 자신감이 조금씩 자랐을 것이다. (조선아)

* 동아리에서 읽은 책은 모두 내 마음속에 담을 만큼 좋았고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다. 평소엔 책을 읽고 독후감을 따로 쓰는 일이 없었는데 동아리에서 읽은 책은 독후감을 써야하니 그 의미가 더 깊게 다가오는 듯하다. 게다가 토론을 통해 선생님과 친구들의 의견도 듣게 되니 글을 쓰는 데에 더 많은 도움이 되었다. (류은진)

* ‘생활나누기’를 통해 나의 고민을 털어놓고 친구들의 생활을 들으면서 내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서로 공감대를 쌓고 더욱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말하기 연습이 되기도 했다. (최은지)

* 지난 일 년 동안 즐겁게 토론하며 유익한 시간들을 보냈다. ‘두빛나래’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서 행복했고 소중하고 즐거운 추억들을 많이 만들었다. (최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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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6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콩 2008-01-27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워낙 문서에는 강합니다. ㅋㅋ
 

기업은 한국농업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대학원에서 '토양학'이라는 농업분야 연구를 하던 시절, 딱 두 차례 대기업 사원이 될 뻔한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당시 국내 넘버원이었던 H그룹 간척지 연구소. 물론 간척지 토양을 농경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연구한다는 공익적 의미가 있긴 했습니다만 문제는 연구자가 다뤄야 할 토양은 농민의 땅이 아니라 그룹 창업주가 간척한 H그룹의 땅만 다뤄야했다는 사실. 두번째 기회는 또 다른 Hs그룹의 '제지부산물 프로젝트'였습니다. 수입목재를 들여와 종이를 만드는 대기업의 골치거리는 엄청난 제지부산물인데, 이걸 어떻게 토양개량제로 재활용할 수 있을지 연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공익적 의미는 있었고 그 회사의 사내복지는 국내 탑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면..어쩌면 그 연구는 농업이나 환경문제 해결에 일익을 담당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환경을 망친다는 오명을 씻을 수 있을 정도'만큼만 연구하는 것일수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일까 대기업 식구가 되었던 관련 분야 선배 동료는 기업이 원하는 만큼을 충족시키자 쉼없는 '수익모델 개발' 스트레스에 휩싸였고 심한 경우 퇴사에 이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민간이 농업연구를 하는 데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삼성경제연구소'라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을 수 있지만, '삼성농업연구소', '현대농업연구소','엘지농촌연구소'라는 말은 들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기업의 CEO들이 부도덕한 사람들이어서, 농촌출신이 아닌 도시출신이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농촌을 사랑하는 CEO를 앉힌다 한들 한국 농업과 농촌이 처해있는 불확실성(농업분야 고유의 비탄력성 완전개방체제 영세소농 구조)에서는 농업농촌분야 R&D(연구개발)에 대해 한 푼도 제대로 투자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는 겁니다. 딱 하나..정부만 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나마 정부마저도 당선된 지 한 달만에 농업연구기능을 내팽개친다고 합니다. 이른바 '농촌진흥청의 정부출연연구소 전환'. 말이 좋아 정부출연연구기관으로의 전환이지 속내는 '더이상 나랏돈으로 농업연구 지원할 수 없으니 너희들 연구비는 너희가 알아서 챙기라'는 메시지입니다.

좋습니다. '작은 정부'를 위해, 그리고 시장경제와 수요자부담의 원칙에 따라 농업연구자들이 농가부채에 허덕이고 계신 농촌어르신들을 찾아가 '현장애로기술연구'를 위해 십시일반 연구비를 모아달라고 해야한다면 여러분 동의하시겠습니까? 낮은 재정자립도에 허덕이는 지자체 시장군수님들에게 연구자들이 매달려야한다면...연구비 자원을 찾다찾다 결국은 '카길'과 같은 다국적 기업에게 매달려 연구비를 타내야한다면 그 연구는 '우리 쌀'이나 '한우'를 위한 연구일수 있을까요? 앞으로 친환경 농산물 생산을 위한 연구비 발주를 위해서는 홈플러스나 이마트를 찾아가야할까요?

농업분야 연구개발업무는 '오해'가 아닌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우선 바로잡을 게 있습니다. 특히 방송 3사를 비롯한 기자님들, 그리고 정치인 여러분들, '농업진흥청'이 아니라 '농촌진흥청'입니다. 엊그제 정부 외청가운데 유일하게 없어진 외청의 명칭은 '농업진흥청'이 아니라 '농촌진흥청'이라는 겁니다. 언제 이름이 바뀌었냐고 물으신다면 정확하게 47년 전부터 그 이름이 쓰여져왔음을 말씀드립니다.

헷갈리신다고 말씀하신다면 '농촌진흥청'이란 이름을 전혀 헷갈리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분들의 명단을 말씀드립니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농업을 천직으로 여기는 분들, 남들 다 떠나는 고향농촌을 어떻게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분들, 그리고 도시를 벗어나 농촌에서 제 2의 삶을 개척하려는 귀농인들의 가슴속에는 헷갈릴 수도 간과할 수도 없는 단어가 바로 '농촌진흥청'이라는 다섯글자입니다.

일제 강점기 36년, 그들이 이 땅을 대륙침략을 위한 식량기지로 여기던 시절 '농촌진흥청'이란 단어는 없었습니다. 대신 조선총독부 산하 '농사시험장'만이 있었을 뿐. 한국전쟁이 끝나고 혼란을 넘어 1962년 그 지긋지긋한 '보릿고개'를 넘어서고자 대한민국의 농업과 농촌을 대한민국의 연구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기반시설통합이 이뤄졌을 때 비로소 '농촌진흥청'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70년대 통일벼를 비롯한 다수확 품종개발로 드디어 보릿고개를 넘어섰을 때, 80년대 추운 겨울에도 푸른 채소를 먹을 수 있는 비닐하우스 기술보급이 이뤄질 때 농촌진흥청이 있었습니다. 90년대 시장개방의 거센 파고 속에 누가 수입농산물에 맞서 '고품질 친환경농산물'을 내놓을 것인가라는 사회적 물음에 답할 수 있었던 몇 안되던 보루가 바로 농촌진흥청이었습니다.

'농진청이 한 게 뭐있냐'라고 물으신다면 이 부분을 검색해보시기 바랍니다.

옛추억으로나 잊혀져가던 누에농가와 뽕밭이 어떻게 해서 당뇨예방을 위한 건강식품 자원으로 될 수 있었는지. 우리 꽃 농가들이 외국 종자회사들의 거액 로열티 지불 요구에 걸려 허덕일 때 국산 장미와 국산 국화품종을 개발해 민간에 이양한 곳이 어디였는지 말입니다.

모두가 친환경 농법을 주창하며 값비싼 일제 미생물 제재를 앞다퉈 수입할 때 토종 미생물 연구와 천적농법 등 실질적인 친환경 농법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주도한 곳은 어디였을까요? 모두가 웰빙과 신토불이를 외칠 때 우리 소비자들이 먹는 고기가 진짜 한우가 맞는지 아니면 젖소인지 국적불명의 수입소인지를 DNA 검사를 통해 정확히 판별할 수 있도록 검증방식과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곳이 어디였는지, 그리고 제 2의 삶을 농촌에서 꿈꾸는 도시민들이 최신 농업기술 동향을 무료로 친절하게 접하고 안내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과연 어디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남북정상회담 끝난 직후 식량부족에 허덕이는 북한의 농업연구자를 만나 남과 북이 함께 하는 '통일농업시대'를 국가연구기관 차원에서 준비할 것을 합의하고 토양, 농자재, 품종개발, 농기계 등 종합적인 차원의 남북농업기술협력을 주도하는 연구기관이 과연 어디인지 말입니다.



이제는 정부연구기관도 바뀌어야 한다고 외치시는 분들께 묻겠습니다.

정부연구소 가운데 기업도 너나할 것 없이 뛰어드는 '돈되는 분야'에서 실적을 올리는 연구소와, 기업들은 뛰어들지 않지만 공익적 가치가 높은 분야에 뛰어들어 '돈이 될 수 있게 만드는' 연구소가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연구소가 진정한 정부연구소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돈안되는 분야에 뛰어들어 돈이 될수있도록 한 뒤 민간에게 이양하는 것이 정부연구소의 숙명일 것입니다. 때로는 돈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누군가는 국민을 위해 연구해야하는 분야를 짊어지는 것이 정부연구소의 숙명이기도 합니다. 농촌진흥청이라는 존재 자체가 국민들의 머리속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서가 아니라 '거위가 황금알을 낳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말없는 존재일 수 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농사꾼은 굶어죽더라도 종자를 베고 죽는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강제로 북간도로 보내지던 열차에서 우리 선조들은 극심한 식량난과 영양실조에 허덕이면서도 볍씨(종자)가 담긴 가마니만은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종자는 한 나절 끼니거리도 안되는 탄수화물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농민에게는 미래의 희망이고 가족이며 생명이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네 선조들은 굶어죽더라도 종자를 베고 죽었던 것입니다.

농업연구는 우리 농업 농촌에 있어 종자이자 희망입니다. 진정 우리 농업을 사랑하고 농촌의 중요성을 가슴에 담는 이들에게는 그 희망의 가치가 뚜렷이 보입니다. 비록 싹이 나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로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속이 꽉찬 열매로 보답하리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경제논리를 앞세워 우리네 농촌을 포기하고 농업을 내주는 게 효율적이라고 하는 분들 눈에는 그 종자가 그저 '돈먹는 하마'로 '2천여 철밥통들의 근거지'로만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 보기 좋자고, 공무원수 7천명 절감이란 수치놀음 맞추자고 종자를 통째로 삶아먹을 수는 없는 법, 농촌진흥청은 시장에 내버려질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존재를 보장하고 외부로부터의 개혁강요가 아닌 내부로부터의 혁신을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1. 농민이 피해를 봅니다 : 농민은 대한민국의 국민이자 생명산업을 담당하는 중소기업입니다. 그런 농민이 국가로부터 당연히 받아온 서비스를 받기 힘들게 됩니다. 이미 기업은 한국의 농산물이 아닌 수입농산물을 연구하고 있고, 대학은 소똥묻은 농민의 손보다는 새하얗고 두툼한 기업의 손을 일찌감치 잡았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 농촌진흥청마저 폐지될 경우 한국의 농민을 위한 연구개발 및 기술지도 서비스를 공적인 영역에서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국민이 피해를 봅니다 : 현대 농업연구의 흐름은 생산자인 농민 혹은 농기업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던 '파괴적 농업, 공업형 농업'으로부터 벗어나 이제는 소비의 주체인 도시 소비자의 관점을 반영한 '지속가능한 농업' '환경과 조화로운 농업'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추세에서 농업연구가 나랏돈이 아닌 민간자본으로 충당되어야 한다면 농약과 비료를 덜쓰는 저투입 농법 연구비를 농약회사가 부담하려하겠습니까 비료회사가 부담하려 하겠습니까?

3. 우리 후손들이 피해를 봅니다 : 이미 도시민들의 꿈은 노후를 공기좋고 물맑은 시골에서 보내는 것입니다. 아마도 환경오염과 과밀화가 더 심각해지는 우리 후손대에 가서는 그 비율이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공간인 '농촌'이 벌써부터 모두들 떠나버리고 다 파헤쳐지고 남은 것은 러브호텔과 땅투기꾼의 천국으로 변해버리며 농촌을 연구하던 사람들마저 뿔뿔히 흩어져야한다면 도대체 우리 아들 딸들에게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이미 20여년전부터 서유럽을 중심으로 OECD 선진국들의 정부연구기관들은 '농업중심 연구'로부터 벗어나 '농촌보존형 연구'로 중심축을 옮겨왔습니다. 농촌에 젊은 사람들이 이사를 가서 아이를 키울 수 있을 만큼 복지와 의료, 교육기반이 충실해야만 국토가 균형발전되고 환경보전을 싼값에 할 수 있으며 사람들의 진정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그들의 판단입니다.

4. 결국은 '경제를 망치는' 길입니다 : 경제전문가들은 올들어 국제적인 유행어로 떠오르고 있는 '농산물 펀드'라는 용어의 의미를 잘 알고 계실것입니다. 왜 우주선이 날아다니는 21세기에 농산물일까요? 지구온난화와 식량위기가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선진국일수록 자기 나라 농업과 농촌에 투자하고 국민소득이 높아질 수록 농업연구개발 투자가 늘어나는데, 어찌된 게 우리나라의 경우 선진국으로 향할 수록 농업을 포기하고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농업연구개발을 떼어내지 못해 안간힘을 쓰니 이것이 과연 선진국으로 가는 징조입니까 아니면 거품경제로 가는 징조입니까?

대통령직 인수위는 다시 한번 농촌진흥청의 폐지 결정을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하시길 촉구합니다.
굶어죽더라도 종자를 베고자던 우리 민족과 국민의 얼 앞에 '굶어죽지도 않으면서 종자만 먹어치웠다'는 오욕에 찬 비난을 받기 싫으시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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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8-01-22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촌진흥청] 직원이 딸에게 쓴 편지..


부끄러워 말아라 내 딸들아


진수,진아야 너희들 놀랐겠구나

얼마 전 인수위에서 발표한 정부조직 개편안에 아빠가 다니는 "농촌진흥청"이 정부조직 중에서 유일하게 폐지대상이 되었다는 보도에 상심이 크리라 생각한다. 너희들 비록 20평 밖에 안되는 지방의 낡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항상 자랑스러워 했던 것은 우리 아빠가 만든 벼 품종을 국민의 20% 정도가 먹고 산다는 점을. 내 자신이 너희들이 말귀를 알아들을때 부터 아빠가 다니는 직장은 나라에서도 가장 훌륭하고 가난한 농민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곳이라고 항상 말했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인수위에서는 우리가 속한 조직을 정부에서는 필요치 않은 존재로 분류하고, 인터넷에 올라온 어느 글을 보니 우리를 무능하고,농민의 등이나 쳐먹는 그런 집단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더구나.이것이 사실이면 아빠는 너희들에게 큰 거짖말쟁이가 되겠구나.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그 분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농촌진흥청은 과거에도 그랬고,지금도,앞으로도 국가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국가조직임이 분명하다.

왜 그런지 설명해 줄게.우리가 만든 벼 품종들은 언뜻 보기에 반도체 라든지 다른 공산품에 비해 하찮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그건 틀린 판단이야. 벼농사 짓는 농업인들께서 익히 알고 있는 "동진벼"를 예로 들면,그 이전의 품종들에 비해 암만 낮게 잡아도 10% 이상의 농가소득을 올려 주었지.품종이 육성되고 20 여년간 해마다 20~30만 ha 정도 재배되었으니 1년에2~3천억,20년간 합하면 5~6조원은 족히 되는데,단일품목으로 이런 부가가치를 창출한 공산품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이 업적으로 동진벼를 육성하신 선배님이 국가로 부터 받은 보상금이 얼마냐 하면 백만원 정도 될거야.그것도 팀동료들과 조금씩 나누면 10만원 남짓 되겠지.한번 계산해봐,그 선배님이 퇴직할때까지 받은 봉급을 모두 합해서 국가가 손익계산을 한다면 3000년 이상의 투자가치가 나오게 되지. 그러나 우리는 절대 불만을 말하지는 않아.왜냐하면 "농촌진흥청" 직원은 국가공무원 이기 때문이야.농업연구직 공무원은 모든 연구성과를 개인이 아닌 농민을 위해 바치고 그것을 긍지로 여기며 살아가지.

이제 알겠니? 아빠도 존경하는 선배님 보다는 못하지만 까마득히 펼쳐질 너희 후손들이 기억해 줄 자랑스런 업적을 쌓았다고.어느 분이 잘 모르고 말한 세금만 축내는 그런 삯군 직업인이 아니라고.아! 분하고 원통하여 눈물이 난다.

그런데 국가에서는 우리 조직이 공무원 신분이 아닌 무슨 출연연구기관으로 가서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능률적으로 잘 할거라고 하는데 그건 정말 잘 모르고 하는 소리지. 벼품종 하나 만들려면 10년 이상이 소요되는데,강산이 한번 변하는 기간 아니니? 알다시피 국가기관과 출연연구기관은 근본 부터 다르단다.국가기관에서는 공공적 성격을 띈 과제를 장기적 목표를 세우고 접근하는데 반해,민영화 된 출연연구기관에서는 눈앞의 단기적 목표와 성과를 중요시 하기 때문에 강산이 변해야 나오는 그런 연구과제에 투자를 하겠니?

결국 품종육성과 같은 장기적인 연구기간을 요하는 사업을 못하게 되면 그 피해는 가난한 농업인에게 돌아가고,외국 품종이 판을 치게 되면 국가 전체의 농업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에 선진국에서도 농업연구는 국가 주관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게 현실이지.

너무 긴 말을 하였구나.이제 너희들은 놀라지도 말고 부끄러워 하지도 말아라. 국가에서도 그렇게 현실성 없이 틀린 결정은 아니 내리리라고 확신한다. 끝으로 아빠는 언제나 너희들이 존경하는 그런 일을 계속하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