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없어지는 달걀 두 개 - 위공만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여천공단에서 일을 하던 때였다. 집을 지키느라 가끔 심심해하시는 어머니에게 닭을 키워보는 게 어떠냐고 提案을 하셨고 아버지의 권유대로 닭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어머니 얼굴은 환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新作路에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보다 時間마다 닭장에 들어가 달걀을 빼들고 나오는 일에 더 즐거움을 느끼시는 듯했다.

  처음에는 세 마리였던 닭이 다섯 마리, 열 마리, 스무 마리까지 늘어갔다. 글쎄, 닭 때문에 우리 가족이 누리는 幸福의 양이 늘어난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우리는 어느 아이들보다 풍족하게 달걀 飮食을 먹을 수가 있었고 어머니 대신 닭장에 들어가 아직도 溫氣가 남아있는 알을 두 손으로 소중히 받쳐 안고 나오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모은 달걀을 들고 市場에 나가 팔기도 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우리 옷과 책가방, 學用品 들을 사는 데 보탰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는 우리 두 兄弟를 모아놓고 重大한 선언을 했다. 내 卒業式이 끝날 때까지는 달걀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동생은 울상이 된 얼굴로 까닭을 물었고, 어머니는 “형 卒業式 날 좋은 옷 한 벌을 해주기 위해서”하고 말했다. 卒業式은 한 달쯤 남아 있었고, 그 卒業式에서 나는 전교생 대표로 상을 받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느그 형은 좋은 옷이 없잖니? 그 날마저 허술한 옷을 입게 둘 수는 없잖아?” 어머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이해시키셨지만 그 설명을 듣는 두 동생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나는 마음이 아팠다 동생들을 섭섭하게 하면서까지 새 옷을 입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엄마가 내 옷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면 차라리 나는 卒業할 때 어떤 상도 받지 않겠다고 하겠어요.” 듣고 있던 막내 동생이 말했다. “아니야. 엄마는 형이 큰 상을 받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셔. 상을 받으러 아들과 함께 연단에 올라갈 그 날만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시는 걸.” 그러고 보니 내가 상을 받을 때 어머니도 함께 단상에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 뒤 한 주가 지나서였다. 어머니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나를 불렀다. “달걀이 두 개씩 없어지는구나.” 닭 중에서 날마다 꼬박꼬박 알을 낳는 닭은 열다섯 마리인데 달걀은 날마다 열 세 개씩 밖에 모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처음 하루 이틀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한 주 내내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너희들이 學校에 가면 주로 닭장 문 근처에서만 왔다갔다하거든.” 어머니 말씀대로 닭장은 마당 한 귀퉁이에 있었고 大門에서도 한참이나 안쪽으로 들어와야 되기 때문에 쉽게 도둑맞을 걱정도 없었다. 설사 도둑이 들었다 해도 왜 하필 두 개만 들고 간단 말인가? 아버지께 알려 그 문제를 풀어보자고 했지만 해결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밤마다 大門을 빈틈없이 잠그고 大門 옆에 개를 묶어 두는 방법까지 동원했지만 도둑을 잡지는 못했다.

  그 일이 계속되는 가운데 卒業式 날이 다가왔다. 약속대로 어머니는 그 전날 순천 장에 가서 내 옷을 사가지고 왔다. 붉은 색 체크무늬 남방과 감색 재킷이었다. “바지는 입던 것을 그냥 입어야겠구나. 달걀이 없어지지만 않았더라면 바지도 하나 살 수 있는 건데 그랬다.” 어머니는 새 옷을 내놓으면서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아버지께 당신의 감격을 숨기지 못하셨다.  “여보, 난 정말 너무 기뻐서 연단에 올라가 울 것만 같아요.”

  마침내 卒業式 날이 되어 아끼고 아끼던 한복을 입고 나서는 어머니. 그때 우리 모두는 늑장부리는 막내 동생을 기다리기 위해 한참이나 마당에 서 있어야만 했다. 막내 동생은 아버지가 어서 나오라고 두 번이나 말한 다음에서야 房門을 열고 나왔다. “형들 준비할 때 뭐했니? 어서들 가자.” 아버지 말씀을 듣고 나서 우리 모두 막 몇 걸음을 떼었을 때였다. 제일 뒤에 처져 있던 막내 동생이 수줍은 듯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우리 모두 뒤돌아보았을 때 막내 동생은 손에 하얀 고무신 한 켤레를 소중히 들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한복 치마 밑으로 코를 비죽 내밀고 있는 어머니의 낡은 고무신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올래 신었던 것인지 색이 바래 흰색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웠다. 막내 동생은 고무신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엄마한테 주려고 샀어요. 하지만 너무 야단치지는 마세요. 달걀 두 개는 어디까지나 제 몫이었으니까요.”

  그 날 어머니는 내 卒業式장 연단에 서기도 전에 눈물을 펑펑 쏟아 몇 년 만에 한 화장을 다시 해야 했다. 내 손을 잡고 연단에 올라가면서도 어머니 눈길은 막내가 내놓은 하얀 고무신 코에 머물러 있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우리에겐 달걀이 단지 반찬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의 다리 역할을 해주던 시절이었다.

  지난 5월 20일 날은 우리 어머니 忌日이었다. 아버지를 포함해 우리 가족 모두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를, 즐거움이 담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은책 2003년 3월호 14~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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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힘들게 하는 한국인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 마리오 파구이칸『작은책』


비가 몹시 심하게 내리고 있다. 날씨 탓인지 온몸이 다 아프다. 이렇게 비가 오고 몸이 아픈 날에는 두고 온 사람들 생각이 더 많이 난다. 그렇지만 그리운 故鄕 사람들 얼굴을 떠올릴 새도 없이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내가 쉬면 다른 동료들이 더 힘들어지니까. 아니, 그것보다 쉴 틈이 조금도 없는 직장에서 일하는 것에 익숙해졌으니까. 그래도 오랫동안 얼굴도 못 본 家族들, 아내와 두 아들, 두 딸, 특히 아기였던 막내딸이 생각이 많이 나서 조금 슬프다. 막내가 벌써 學校에 들어갔다니 진짜 보고 싶다.

 

우리나라 필리핀은 넓이가 40만 평방미터 조금 안 되고 人口 千萬이 넘는 아름다운 나라이다. 필리핀은 7천여 섬으로 이뤄져 있으나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은 천 곳도 못 된다. 루손 섬, 민다나오 섬이 크고, 두 섬 사이에 있는 비사얀 제도에 섬이 일곱 개 있는데 그 가운데 세부 섬은 한국 관광객이 많이 다녀가는 섬이다.

 

1994년에 韓國에 와서 이 나라 사람들이 필리핀을 너무 모른다는 것에 놀랐다. 필리핀도 日本처럼 火山이 많고 지진이 잦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도 韓國을 너무 모른 채 이곳에 왔다. 日本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빼어난 경제 기적을 이룬 나라, 平和를 사랑하고 침략을 싫어하는 선비 文化를 가지고 있어서 外國人이 살기에 좋은 나라, 이것이 내가 아는 韓國이었다. 필리핀에서는 英語와 타갈로그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는데, 英語를 쉽게 쓰는 사람들이 절반쯤 된다. 나도 英語를 자유롭게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멀리 韓國까지 일하러 올 수 있었다.

 

내가 일하는 곳 社長님은 英語를 모르기 때문에 내가 英語로 이야기할 일은 거의 없다. 보통 韓國말을 듣고 말한다. 언젠가 성당에서 만난 韓國 친구에게 내가 아는 韓國말을 해 준 적이 있다. 처음에는 웃더니 나중에는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마침내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내가 아는 몇 마디 韓國말은 ‘안녕하세요’와 같은 기본 인사말과 작업을 재촉하는 소리, ‘있다’ ‘없다’ ‘아니다’ ‘맞다’ ‘때리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미안합니다’쯤이다.

 

釜山 신평에 있는 어떤 工場에서 일할 때는 온갖 욕설을 들어야했다. 처음에는 뜻을 몰랐지만 거기서 일하던 우리 필리핀 노동자 다섯 사람도 나중에는 욕이란 걸 알고 화가 많이 났다. 도대체 왜 그렇게 욕하고 화를 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필리핀에도 나쁜 사람은 많이 있지만 韓國에서처럼 남한테 함부로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1994년에 왔으니 이제 나에게도 韓國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그 친구들과 한국말로 얘기하고 싶지만 쉽지가 않다. 배우고 싶어도 직장에서 일을 하는 時間이 너무 길어 배울 형편이 못 되기 때문에 실력이 늘지 않는다. 따로 배울 시간이 없으니 나와 말을 주고받는 한국 사람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데 내가 날마다 만나는 집주인, 공장 윗사람과 동료들이 쓰는 한국말이 얼마나 질이 떨어지는지는 눈치로도 안다. 그 사람들에게 배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韓國에서 여덟 해나 살면서도 나는 한국말을 잘 모른다.

 

필리핀 社會는 두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다. 몇몇 잘 먹고 잘 사는 상류층이 있고 나머지는 가난한 하층민, 농민, 노동자 계급이다. 中間 계층이 없다. 몇몇 부유층은 옛날 식민지 때부터 外國人 지배자와 관계를 맺어 엄청난 財産을 모았다. 그 사람들은 자기 것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을 때만 가진 자의 너그러움을 베풀 뿐이다. 나와 같은 가난한 사람들도 그 사람들과 같은 교회에 다닌다. 진짜 놀라운 일이다. 교회에서 하느님의 아들딸로 있을 때에는 그 사람들은 우리의 兄弟가 된다. 이것도 진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누리는 삶과 우리 家族이 누리는 삶이 너무 달라서 나는 자주자주 화가 났다. 자식들에게는 나와 같은 가난한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번듯한 교육을 시키고 중류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집안 살림을 닦아주면 대대로 이어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韓國땅에서 오랜 세월 불법 노동자로 힘들게 살아가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도 불법 체류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불법 체류자로 살기…, 어느 나라에서나 그렇겠지만 죽도록 힘들다. 나 말고도 주위에 많은 친구들이 있기에, 그리고 우리 아들, 딸에게 사람다운 삶을 살게 해 줄 거라는 꿈이 있기에 나는 지금도 참고 살아간다.

 

그러나 정작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성당에 가려고 일요일에 버스를 타면 거의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우리에게 온다. 좋게 보는 사람이 눈꼽만큼도 없다. 가끔씩 호의를 베풀며 말을 거는 남자들은 한결같이 반말이다. 반말! 한국말이 서툰 우리도 반말로 대꾸하지만 기분은 진짜 좋지 않다.

 

이미 우리는 격식을 갖춘 한국말이 어떤 것인지 알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예의를 갖춘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 특히 東南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을 더 심하게 업신여긴다. 그 까닭이 뭔지 잘은 모르지만 우리의 태도와 관계가 있지 않나 짐작만 하고 있다. 필리핀 사람들은 대체로 웃는 얼굴로 산다. 그것은 결코 힘없는 나라 출신이 느끼는 열등감이나 불법 체류자가 느끼는 죄책감 때문이 아니고 여느 때 우리 모습이 그렇다. 그런데 韓國 사람들은 웃는 얼굴에 사정없이 욕을 하고 화를 낸다. 英語라도 써서 무엇 때문인지 말해 주면 좋으련만…. 너무 힘들다. 영문도 모르고 당할 때가 많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은 차츰 웃음을 잃고 눈치만 살피게 된다. 달라진 친구들을 보면 너무 슬프다.

 

며칠 전에 釜山 카톨릭 센터에서 ‘필리핀 文化의 밤’을 가졌다. 카톨릭 신자인 우리 친구들이 바쁜 틈에도 쉬지 않고 연습해서 마련한 무대였다. 우리의 서툰 연기와 춤과 노래를 보면서 가장 신난 것은 우리 자신들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와서 함께 손뼉까지 치며 즐거워했다.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얘기하면서 가까워진 어는 韓國 사람은 그날 밤 눈물을 흘렸다. 내가 왜 우는가 물었더니, “너희 필리피노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야. 이렇게 밟게 웃으며 사는 사람들에게 왜 우리는 웃음을 뺏고 있지? 나는 그게 슬퍼.” 하고 대답했다. 내 주위에는 이런 소중한 친구들도 있다. 성당에서 만난 내 소중한 친구들이다. 그이들은 높은 자리에서 무언가를 베풀려고 하지 않고 친구로서 필요한 도움을 주려고 애쓴다. 내가 어려운 韓國 생활을 견딜 수 있는 것도 그 친구들 덕분인지 모른다.

 

내 친구 ‘베네딕트 안달’이 일하다 다쳐서 죽었을 때도 그이들은 큰 힘이 되었다. 장림에 있는 그 工場은 그런 데로 환경이 괜찮은 편이었는데 내 친구가 일하다가 그만 많이 다쳤다. 會社에서 조금만 빨리 가까운 병원으로 옮기고 손을 썼더라면 안달은 살았을지 모른다. 우리는 회사 태도에 너무 화가 났지만 제대로 항의할 수도 없었다. 그때 한국인 친구들이 회사와 대화하고 죽은 친구 곁을 몇 날 몇 밤 동안 계속해서 지켜 주었다. 회사에 나가서 일해야 하니까 퇴근하고 밤에 모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대신해 주었다. 그 사람들 덕분에 안달의 家族들은 살아서 버는 돈보다 더 많은 돈으로 보상받았지만 한 사람 목숨을 돈하고 바꿀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우리 가운데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던 그 친구가 지금도 가끔 그립다.

 

지금 여기서 내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한국말로 옮겨 주고 있는 친구는 나를 많이 사랑한다. 그 친구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나는 느낄 수 있다.

 

한국과 한국 사람은 나를 많이 힘들게 하고 화나게 하지만 우리 家族을 먹여 살리고 공부시킬 수 있게 해 준다. 나를 힘들게 하는 한국 사람들, 어쩌면 그이들도 나만큼 世上 사는 것이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래서 나는 성당에 가면 그이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十字가까지 지셨으니까. 나는 그분의 크신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 그분이 바라시는 대로 살아야 한다.

 

바라건대 내 오랜 친구 韓國이 많이 잘 살게 되어서 우리와 같은 外國 사람에게 더 너그러워지고 서로 사랑하게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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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도 메일 보내야지 보내야지 하면서 이제야 뒤늦게 보냅니다.

사실 이제는 쫌 살만 해요 ㅋㅋ

 이런 애기 잘 안하는 성격이라 ,, 오랫동안 지내온 친구들한테도 자세히 애기 하지 않앗는데 ..   어떨때는 누군가가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말을 어떻게 먼저 꺼내야할지 ,, 그리고 애기한다고 해서 나아지는건 없다는 생각에  이렇게 비밀을 지켜오다 선생님한테 처음으로 털어놓는거 같네요  솔직히 말하면 아무한테도 이런 애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끄럽다기 보다는 혹시나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 놓인 친구도 있는데 제가 괜히 엄살부리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기때문입니다.  물론 선생님께 다 말씀드릴수는 없지만 제가 정말 힘들어서 방황 하게 될때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털어놓고 선생님의 도움을 받겠습니다.

  아빠때문에 엄마가 많이 힘드셨습니다. 그런걸 어렸을떄부터 보고 자라서 제 마음속에는 아빠는  항상 미운 존재였고 엄마는 불쌍하기만 한 존재였습니다. 그렇게 항상 생각하고 커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빠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아빠편을 조금씩 들게 되고 아빠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떄부터 저만 항상 믿고 기대오던 엄마가 많이 섭섭하셨나봅니다. 그렇게 아빠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는데 .. 얼마전에 아빠가 쫌 큰 잘못을 하셔서 엄마가 속상하셧는지 먹지도 못하는 술도 드시고 그러더니 이번 여름방학에 수술을 하셨습니다. 매일 집에만 들어오면 싸우고 계시는 엄마아빠가 싫어서 친구집에서 몇일씩 자고 집에도 자주 안들어가고 그랬는데 엄마가 수술하는 날에도 저는 친구들이랑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신이 얼마나 밉던지 마취에서 아직 덜깨어 병상에 누워있는 엄마를 보닌깐 진짜 눈물이 자꾸 나와서 참을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나쁜짓을 하고 다녀도 항상 웃으시고 밝은 모습만 보여주는 그런 든든하고 강한 엄마였는데 그렇게 곤히 잠든 모습을 보니 한없이 약한 존재구나 하는 생각에 엄마한테 그동안 너무 미안하고 제가 큰 잘못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가 수술을 하고 난뒤부터 아빠의 태도는 조금 변화가 찾아오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쫌 편합니다. 지금은 많이 건강해지셔서 괜찮다고 하는데 솔직히 저도 걱정은 많이 됩니다. 제가 잘 삐뚤어져나가고 그러니깐 혹시나 상처받아서 또 나쁜쪽으로 갈까바 힘든일이 있으셔도 잘 애기 안합니다.

선생님 음... 가끔은 이런 환경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 음 막말로 죽고 싶을떄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래도 이렇게라도 자랄수 있는거도 다행이고 고맙고 그래도 고등학생이라고 환경같은건 원망안하게 됐습니다. 저 걱정해주시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애기한다고 해서 선생님께서 저를 대하는 태도가  변화가 없었으면 합니다.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봐달라는 겁니다.  눈물이 많고 마음이 약해서 그렇지 이정도는 잘 젼딜수 있습니다. 항상 그래 왔기때문에 적응력도 뛰어나서 혼자 잘해낼껍니다. 저는 그래도 우리 가족은 한곳에 모여산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정말 많으닌까요 ㅇ ㅏ 마음은 후련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걸 쓰면서도  또 눈물이 흐르네요  아 이제는 공부에 쫌더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아 ! 그리고 선생님 그 언니하고 수진이 한테 준 편지 죄송하지만 저도 봤습니다. 이말 꼭 해주고 싶었습니다. 진짜 멋있어요 ~ ♡ 그날 우리 모두 울었다는거 선생님 모르시죠 ? ㅋㅋ 항상 그런일 있을때마다 혼내시거나 때리시지 선생님 같은분은 처음이었거든요 수진이랑 언니랑 그 편지보고 감동받아서 담배만 보면 구역질 나올꺼 같다고 끊는다고 얼마나 다짐을 하던지 선생님 작전 성공하셨습니다. ㅋㅋ 학교에서는 문제아로 찍히고 그런 아이들도 알고보면 더 착하다는거 아시죠 ? 선생님은 왠지 아실듯 싶습니다. 우리반 아이들 정말 하나도 빠짐없이 제 기억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같습니다. 정말 보면 볼수록 좋은 아이들이 많거든요 ㅋㅋ

 아 너무 많이 쓴거같다 ㅋㅋ 저 말고도 아마 지금쯤 혼자 고민하고 힘든 상황에 놓인 아이들이 많을 꺼에요 그런 아이들 아마 선생님 보면서 먼가 깨달을 껍니다. 저도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 받거든요 ㅋㅋ 그럼 이만  써야겠네요 이빨도 아프고 ,, ㅋㅋ 내일 학교에서 뵙겠습니다. 

             -  제자 ㅈㅎ이가 마음이 따뜻한 선생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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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17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고 긴 니 편지 받고 맘도 아프고 행복하기도 하고... 그래서 눈물이 났어. 이런 생각을 했지. "아! 역시 아이들은 결국은 알아주는구나." 당연하지. 너희들이 더 순수하니까..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나보다 더!

고백하자면 하루에도 몇번씩 믿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한단다. 그래도 역시 믿는 쪽을 선택하게 돼. 언젠가는 내 맘을 알아줄거니까. 모르면 모르는데로 알면 아는데로... 그렇게 너희들 본성 믿고 기다리는 것. 그것말고 내가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있을까?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나와의 관계 말고, 너희들끼리의 관계, 친한 너희들끼리만 말고 우리반 아이들 모두, 우리반 아이들만 말고 더 많은 너희들끼리 맘 열고 힘든 일 함께 나누고 그렇게 서로 도닥이며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거야. 내가 좀 손해보더라도, 너무 계산하지 말고...조금은 바보스럽게... 우습지? 사실 어른들이 더 못하는 부분이야. 어른들은 항상 저희들은 편하게, 약게 살려고 하면서 너희들에게는 성실하게 살아라, 바르게 살아라 이러지? 미안해. ^^ (모든 어른들이 다 그런건 아니야. 내가 아는 어른 샘들은 안그런 사람들이 훨씬 많아)

ㅈㅎ이 참 예쁘게 자랐구나. 혼자서 뭐든 알아서 잘해서 그냥 저냥 평범한 가정에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니 뭔 걱정 있을까 생각했네. 지금이라도 니 고민, 니 상처, 아픔 알게되어서 다행이야. 사실 나도 모르게 순간순간 툭툭 던지는 생각없는 말에 너희들이 상처받을 수도 있는데... 가끔 내가 그렇게 실수할 때가 있거든. 너희들 상처, 알고 있으면 조심스러워서 함부로 쉽게 이야기하지 않게 돼. 그러니 너희들이 알려줘야지. 고마워 진심으로.

엊그제 조례시간에 잠깐 얘기했었지? 우리 반 아이들 알게 모르게 상처가 많아. (사실 다른 반 아이들도 마찬가지지. 아무 걱정 근심 없이 공주처럼 자란 아이들이 몇이나 될까?) 어떤 아이들은 '엄마', '아빠'라는 단어만 나와도 가슴에 찬 바람이 일고, 또 어떤 아이들은 성적이나 점수 때문에, 건강 때문에... 여러가지 아픔들이 있단다. 그래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어떤 친구들은 하기도 하지. 그렇다고 너무 밀쳐내지 말았으면... 앞으로 살면서도..그렇게 먼저 다가서는 사람이 되었으면..! ㅈㅎ이에게 많이 칭찬해주고 싶은데 어렵고 힘든 숙제만 내주고 있네.. 쯧쯧...

아픔이 있는 사람이 남의 아픔에 훨씬 민감하단다. 더 용감하게 다가서고 보듬어주지. 그래서 세상은 여전히 살만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의 아픔은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기도 해. '늘 행복한 줄 알았던 저 사람도 저런 아픔이 있구나. 나만 힘들고 불행한 건 아니구나. 나도 힘을 내야지. 그리고 다독여줘야지, 이해해줘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 가끔~ 아주 가끔 내가 나의 아픔을 너희에게 이야기 하는 것, 내게도 정말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너희들이 이해해줄것을 믿기에 털어놓을 수 있단다.

당근,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너를 대할거야. 티를 냈다면 벌써 다른 아이들 아픔에 내가 반응하는 모습을 보였을걸.. 잘못하면 야단치고, 잘하면 칭찬하고 이제껏 해온 것처럼 쭉~ 그렇게 갈거야. 그렇지만 너무 힘들면, 그래서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면 나도 기억해주기를 바래. 묵묵히 주변을 서성이고 있을께. 너무 혼자서 속이로만 삭이면 더 힘들 수도 있어. 털어내고 풀어내면 가벼워지기도 하거든. 사실 혼자만의 방에서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한 발만 걸어나와서 보면 그렇게 심각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단다.

ㅇㅅ와 ㅇㄴ이에게 쓴 편지... 둘 다 비슷하게 썼는데 부끄럽네... 비교해봤냐? --;
가끔은 진심을 전하는 게 야단과 벌보다 더 큰 반성을 가져온단다. 내 말이 맞지? 작전 성공!! (눈치챘구나.)

세상에 사람보다, 그 사람의 진심보다 소중한 것이 있을까? 그래서 흘리는 눈물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너도 한 번 울고, 니 편지에 나도 한 번 울었으니 우린 모두 아름다운 사람이네. ^^

푹 자고 내일부터 다시 너의 꿈(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사랑하는 일)을 위해 한 걸음 내딛자.

이빨은 어때? 피 많이 났어? 나을때까지 밥도 제대로 못먹을텐데.. 쯧쯧 살 더 빠지겠네.


2004. 9. 16. 밤 12시 사랑하는 ㅎ이에게.

심상이최고야 2004-09-16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제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집니다. 정말 존경스러워요. 아이들 때문에 상처받고 힘든 점도 많았을 텐데 '사랑'의 힘으로 아이들 감싸 주시는게 엄마 같아요. 아이들 아픔 감싸주시는 따듯한 마음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네요. 오늘 아침 진한 감동을 받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선생님 같은 분과 함께 교단에 있다는게 자랑스럽습니다. 고마워요^^

해콩 2004-09-16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실명이 오르기도 하는 이런 개인적인 편지를 인터넷에 올려도 될까 많이 망설였어요. 제 일기장처럼 비공개로 할까.. 이렇게... 그런데 아이들 이름은 살짝 살짝 지우고 그냥 두려고요. 사실 많이 부끄러워요. 못난 부분이 더 많은 담임이거든요. 말만 뺀지리~ 하지 뒤에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씹고... 그런 담임이예요 제가. 아시잖아요. 그런데 이런 편지 한 번씩 받으면 힘이 되기도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역시 아이들 끝까지 믿기로 한 건 잘한 것 같죠? 같이 울어주시다니.. 세월이 갈수록 눈에서 물이 많이 나오는걸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아닌가 봐요. 가슴이 촉촉한 사람이 눈도 늘 촉촉한 듯. 고마워요, 샘 (근데 엄마같다는 표현은 쫌.. --; 그냥 언니같다고 해주지... 흠흠)

2004-09-17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난 관상술()  / 이규보『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20.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관상쟁이가 있었다. 그는 관상서(觀相書)도 읽지 않고 관상법(觀相法)도 따르지 않고서 이상한 술법으로 관상을 보았으므로 사람들이 ‘별난 관상쟁이’라고 불렀다.

  고관대작(高官大爵), 남녀노소 모두가 다투어 찾아가고 모셔다가 관상을 보았는데, 부귀하고 뚱뚱한 사람의 관상을 보고는

  “당신은 몸이 매우 여위었으니 당신만큼 천한 이가 없겠소.”

하였고, 빈천하고 파리한 사람의 관상을 보고는

  “당신은 몸이 살쪘으니 당신만큼 귀한 이는 드물겠소.”

하였다. 또 장님을 보고는 밝다고 하고, 민첩하고 잘 달리는 사람을 보고는 절어서 걸음을 못 걷는다고 하고, 얼굴이 예쁜 부인을 보고는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다고 하고, 세상 사람들이 너그럽고 어질다고 하는 사람을 보고는 만인을 해치는 사람이라 하고, 매우 잔혹한 사람을 보고는 만인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가 관상을 보는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는데,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제대로 말하지 못할 뿐 아니라, 용모와 행동거지를 살핌이 모두 반대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사기꾼이라고 떠들어대며 잡아다가 거짓말한 죄를 다스리려고 하기에 내가 만류하기를

  “말이란 처음에는 어긋나지만 나중에 가서 맞는 것이 있고, 겉으로는 가깝지만 속으로는 먼 것이 있다. 그 사람도 눈이 있는데 어찌 살진 자, 여윈 자, 눈이 먼 자를 몰라보고서 살진 자를 여위었다고 하고, 여윈 자를 살쪘다고 하고, 눈이 먼 자를 밝다고 했겠는가. 이 사람은 기이한 관상쟁이임이 분명하다.”

하고, 목욕재계하고 단정한 차림으로 관상쟁이가 묵고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다른 사람들을 내보내고는

  “그대가 아무아무의 관상을 보고 어떠어떠하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고 물으니, 그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대개 부귀하면 교만하고 남을 능멸하는 마음이 자라나 죄가 쌓일 것이니 하늘이 반드시 뒤엎을 것이요, 그렇게 되면 죽도 제대로 못 먹게 될 것이므로 여위었다고 하였고, 장차 몰락하여 보잘것없는 필부(匹夫)가 되겠으므로 천해지겠다고 하였습니다.

  빈천하면 뜻을 겸손히 하고 자기를 낮추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닦고 반성하게 되니 고진감래(苦盡甘來)라, 이는 배불리 먹을 조짐이 있으므로 살쪘다고 하였으며, 장차 만석(萬石 : 만 가마니의 쌀)과 십륜(十輪 : 열 대의 수레)의 부귀를 누리겠기에 귀해지겠다고 하였습니다.

  요염한 자태와 아름다운 얼굴을 엿보아 가까이하고 진기한 것과 완호지물(玩好之物 : 노리개와 같이 귀한 물건)탐내며 사람을 변화시켜 혹하게 만들고 사곡(邪曲 : 마음이 바르지 아니함)되게 하는 것이 눈인데, 이로 말미암아 헤아릴 수 없는 오욕에 이르게 되니, 이는 바로 어두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눈먼 사람만은 담박하여 욕심이 없고 감촉이 없어 ‘욕’을 멀리하므로 어진 이와 깨달은 이보다 나으니, 그래서 밝다고 하였습니다.

  민첩하면 용맹을 숭상하고 용맹하면 뭇사람들을 능멸하니 마침내는 자객(刺客)이나 간당(奸黨 : 간사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가 붙잡혀 발에는 차꼬를 차고 목에는 칼을 쓰는 신세가 될 것이니 아무리 도망하고자 한들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절어서 걸음을 못 걷는다고 하였습니다.

  미색(美色)이란 음탐하고 사치하며 교만한 자가 보면 옥구슬처럼 예쁜 것이지만, 방정하고 순박한 사람이 보면 진흙덩이와 같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어진 사람은 그가 죽을 때 어리석은 백성들이 마치 어머니를 잃은 아이처럼 사모하는 마음으로 울고불고하므로 만인을 해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잔혹한 사람은 그가 죽을 때, 거리마다 기뻐서 노래하며 양을 잡고 술을 마시며 웃느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자도 있고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는 자도 있을 것이므로 만인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일어나

  “과연 내 말대로이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짜 관상쟁이로구나. 그이 말은 명심(銘心)해둘 만하다. 어찌 겉모습에 따라 귀한 상을 말할 때는 ‘거북 무늬에 무소뿔’이라하고 나쁜 상을 말할 때는 ‘벌의 눈에 승냥이 소리’라 하여 사곡한 데 얽매이고 상례(常例)를 따르며 저 잘난 체하는 무리들에게 비하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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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5 22: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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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16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폰에는 없는 번호인걸요. 아! 현옥샘이 샘 번호 알려달라네요. 현옥샘 폰번호... 문자로 넣어드릴께요.
 

 자득의 묘  / 강희맹 [도자설]『사숙제집』


  도둑질을 業으로 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자신의 솜씨를 모두 가르쳐주었다. 아들은 자신의 재능을 자부하여 자기가 아비보다도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도둑질을 나갈 때에는 언제나 반드시 아들이 먼저 들어가고 나중에 나오며 가벼운 것은 아비에게 맡기고 무거운 것을 들고 나왔다. 게다가 먼 곳에서 나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고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서 도둑들 간에 기림의 대상이 되었다.

  하루는 아비에게 자랑 삼아서

“내가 아버지의 솜씨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고, 억센 힘은 오히려 나으니 이대로 나간다면 무엇은 못하겠습니까?”

하니, 아비 도둑이

“아직 멀었다. 지혜란 배워서 이르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어서 스스로 터득함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아직 멀었다.”

하였다. 아들 도둑이

“도둑이란 재물을 많이 얻는 것이 제일인데, 나는 아버지에 비해 소득이 항상 배나 되고 나이도 아직 젊으니 아버지의 연배가 되면 틀림없이 특별한 재주를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아비 도둑이 다시

“그렇지 않다. 나의 방법을 그대로 행하기만 해도 겹겹의 城에도 들어갈 수 있고 깊이 감춘 물건도 찾아낼 수는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禍가 따른다.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고 臨機應變하여 거침이 없는 그런 수준은 自得의 妙를 터득한 者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너는 아직 멀었다.”

하였지만 아들은 건성으로 들어 넘겼다.

  다음날 밤 아비 도둑은 아들을 데리고 어느 부잣집에 들어갔다. 아들을 보물 창고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는 아들이 보물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을 때쯤 밖에서 문을 닫고 자물쇠를 건 다음 자물통을 흔들어 주인이 듣게 하였다. 주인이 달려와 쫓아가다가 돌아보니 창고의 자물쇠는 잠긴 채였다. 주인은 방으로 되돌아갔고 아들 도둑은 창고 속에 갇힌 채 빠져 나올 길이 없었다. 그래서 손톱을 박박 쥐가 문짝을 긁는 소리를 냈다. 주인이 소리를 듣고

“창고 속에 쥐가 들었군. 물건을 망치겠다. 쫓아버려야지.”

하고는 등불을 들고 나와 자물쇠를 열고 살펴보려는 순간, 아들 도둑이 쏜살같이 빠져 달아났다. 주인집 식구들이 모두 뛰어나와 쫓았다. 아들 도둑은 더욱 다급해져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는 연못가를 돌아 달아나다가 큰 돌을 들어 못으로 던졌다. 뒤쫓던 사람들이

“도둑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고는 못 가에 빙 둘러서서 찾았다. 아들 도둑은 그 사이에 빠져 나갔다. 집으로 돌아와 아비에게

“새나 짐승도 제 새끼를 보호할 줄 아는데, 제가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욕을 보이십니까?”

하며 원망하였다. 아비 도둑이

“이제 너는 천하의 독보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사람의 기술이란 남에게서 배운 것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지만 스스로 터득한 것은 그 응용이 무궁한 법이다. 더구나 곤궁하고 어려운 일은 사람의 心志를 굳게 하고 솜씨를 원숙하게 만드는 법이다. 내가 너를 궁지로 몬 것은 너를 안전하게 만드는 법이다. 네가 창고에 갇히고 다급하게 쫓기는 일을 당하지 아니하였던들 어떻게 쥐가 긁는 시늉과 돌을 던지는 기발한 꾀를 냈겠느냐. 너는 곤경을 겪으면서 지혜가 성숙해졌고 다급한 일을 당하면서 기발한 꾀를 냈다. 이제 지혜의 샘이 한번 트였으니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천하의 獨步的인 존재가 될 것이다.”

하였다. 그 후에 과연 그는 천하제일의 도둑이 되었다.

  도둑질처럼 악한 일도 반드시 스스로 묘법을 터득한 뒤에야 비로소 천하제일이 될 수 있었다. 하물며 道德과 功名에 뜻을 둔 선비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대대로 벼슬하여 國祿을 누리는 집 자식들은 仁義를 행하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지, 학문을 연마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는 모른 채 顯達하고 나면, “선대의 功業을 능가할 수 있다”고 함부로 말하는데, 이는 바로 아들 도둑이 아비에게 자랑하는 꼴이다. 만약 높은 것을 사양하고 낮은 데를 택하며 호방한 것을 버리고 담박한 것을 좋아하며 자신을 굽히고 학문에 뜻을 두어 性理學의 연구에 마음을 쏟아서 習俗에 휩쓸리지 아니할 수 있다면 능히 남들과 대등해질 수도 있고, 功名도 이룰 수 있으며, 등용되면 자신의 경륜을 행하고 등용되지 아니하면 자신의 길을 지켜서 어떤 경우라도 합당하지 않음이 없게 되리니, 이는 바로 아들 도둑이 곤경을 겪으면서 지혜가 성숙해졌고 마침내는 천하의 獨步的인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너도 또한 이 경우와 비슷하다. 도둑이 창고에 갇히고 다급하게 쫓기던 그와 같은 곤경을 겪는 어려움을 피하지 말아서 마음속에서 自得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 말을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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