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힘들게 하는 한국인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 마리오 파구이칸『작은책』
비가 몹시 심하게 내리고 있다. 날씨 탓인지 온몸이 다 아프다. 이렇게 비가 오고 몸이 아픈 날에는 두고 온 사람들 생각이 더 많이 난다. 그렇지만 그리운 故鄕 사람들 얼굴을 떠올릴 새도 없이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내가 쉬면 다른 동료들이 더 힘들어지니까. 아니, 그것보다 쉴 틈이 조금도 없는 직장에서 일하는 것에 익숙해졌으니까. 그래도 오랫동안 얼굴도 못 본 家族들, 아내와 두 아들, 두 딸, 특히 아기였던 막내딸이 생각이 많이 나서 조금 슬프다. 막내가 벌써 學校에 들어갔다니 진짜 보고 싶다.
우리나라 필리핀은 넓이가 40만 평방미터 조금 안 되고 人口 千萬이 넘는 아름다운 나라이다. 필리핀은 7천여 섬으로 이뤄져 있으나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은 천 곳도 못 된다. 루손 섬, 민다나오 섬이 크고, 두 섬 사이에 있는 비사얀 제도에 섬이 일곱 개 있는데 그 가운데 세부 섬은 한국 관광객이 많이 다녀가는 섬이다.
1994년에 韓國에 와서 이 나라 사람들이 필리핀을 너무 모른다는 것에 놀랐다. 필리핀도 日本처럼 火山이 많고 지진이 잦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도 韓國을 너무 모른 채 이곳에 왔다. 日本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빼어난 경제 기적을 이룬 나라, 平和를 사랑하고 침략을 싫어하는 선비 文化를 가지고 있어서 外國人이 살기에 좋은 나라, 이것이 내가 아는 韓國이었다. 필리핀에서는 英語와 타갈로그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는데, 英語를 쉽게 쓰는 사람들이 절반쯤 된다. 나도 英語를 자유롭게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멀리 韓國까지 일하러 올 수 있었다.
내가 일하는 곳 社長님은 英語를 모르기 때문에 내가 英語로 이야기할 일은 거의 없다. 보통 韓國말을 듣고 말한다. 언젠가 성당에서 만난 韓國 친구에게 내가 아는 韓國말을 해 준 적이 있다. 처음에는 웃더니 나중에는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마침내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내가 아는 몇 마디 韓國말은 ‘안녕하세요’와 같은 기본 인사말과 작업을 재촉하는 소리, ‘있다’ ‘없다’ ‘아니다’ ‘맞다’ ‘때리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미안합니다’쯤이다.
釜山 신평에 있는 어떤 工場에서 일할 때는 온갖 욕설을 들어야했다. 처음에는 뜻을 몰랐지만 거기서 일하던 우리 필리핀 노동자 다섯 사람도 나중에는 욕이란 걸 알고 화가 많이 났다. 도대체 왜 그렇게 욕하고 화를 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필리핀에도 나쁜 사람은 많이 있지만 韓國에서처럼 남한테 함부로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1994년에 왔으니 이제 나에게도 韓國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그 친구들과 한국말로 얘기하고 싶지만 쉽지가 않다. 배우고 싶어도 직장에서 일을 하는 時間이 너무 길어 배울 형편이 못 되기 때문에 실력이 늘지 않는다. 따로 배울 시간이 없으니 나와 말을 주고받는 한국 사람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데 내가 날마다 만나는 집주인, 공장 윗사람과 동료들이 쓰는 한국말이 얼마나 질이 떨어지는지는 눈치로도 안다. 그 사람들에게 배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韓國에서 여덟 해나 살면서도 나는 한국말을 잘 모른다.
필리핀 社會는 두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다. 몇몇 잘 먹고 잘 사는 상류층이 있고 나머지는 가난한 하층민, 농민, 노동자 계급이다. 中間 계층이 없다. 몇몇 부유층은 옛날 식민지 때부터 外國人 지배자와 관계를 맺어 엄청난 財産을 모았다. 그 사람들은 자기 것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을 때만 가진 자의 너그러움을 베풀 뿐이다. 나와 같은 가난한 사람들도 그 사람들과 같은 교회에 다닌다. 진짜 놀라운 일이다. 교회에서 하느님의 아들딸로 있을 때에는 그 사람들은 우리의 兄弟가 된다. 이것도 진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누리는 삶과 우리 家族이 누리는 삶이 너무 달라서 나는 자주자주 화가 났다. 자식들에게는 나와 같은 가난한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번듯한 교육을 시키고 중류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집안 살림을 닦아주면 대대로 이어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韓國땅에서 오랜 세월 불법 노동자로 힘들게 살아가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도 불법 체류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불법 체류자로 살기…, 어느 나라에서나 그렇겠지만 죽도록 힘들다. 나 말고도 주위에 많은 친구들이 있기에, 그리고 우리 아들, 딸에게 사람다운 삶을 살게 해 줄 거라는 꿈이 있기에 나는 지금도 참고 살아간다.
그러나 정작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성당에 가려고 일요일에 버스를 타면 거의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우리에게 온다. 좋게 보는 사람이 눈꼽만큼도 없다. 가끔씩 호의를 베풀며 말을 거는 남자들은 한결같이 반말이다. 반말! 한국말이 서툰 우리도 반말로 대꾸하지만 기분은 진짜 좋지 않다.
이미 우리는 격식을 갖춘 한국말이 어떤 것인지 알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예의를 갖춘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 특히 東南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을 더 심하게 업신여긴다. 그 까닭이 뭔지 잘은 모르지만 우리의 태도와 관계가 있지 않나 짐작만 하고 있다. 필리핀 사람들은 대체로 웃는 얼굴로 산다. 그것은 결코 힘없는 나라 출신이 느끼는 열등감이나 불법 체류자가 느끼는 죄책감 때문이 아니고 여느 때 우리 모습이 그렇다. 그런데 韓國 사람들은 웃는 얼굴에 사정없이 욕을 하고 화를 낸다. 英語라도 써서 무엇 때문인지 말해 주면 좋으련만…. 너무 힘들다. 영문도 모르고 당할 때가 많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은 차츰 웃음을 잃고 눈치만 살피게 된다. 달라진 친구들을 보면 너무 슬프다.
며칠 전에 釜山 카톨릭 센터에서 ‘필리핀 文化의 밤’을 가졌다. 카톨릭 신자인 우리 친구들이 바쁜 틈에도 쉬지 않고 연습해서 마련한 무대였다. 우리의 서툰 연기와 춤과 노래를 보면서 가장 신난 것은 우리 자신들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와서 함께 손뼉까지 치며 즐거워했다.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얘기하면서 가까워진 어는 韓國 사람은 그날 밤 눈물을 흘렸다. 내가 왜 우는가 물었더니, “너희 필리피노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야. 이렇게 밟게 웃으며 사는 사람들에게 왜 우리는 웃음을 뺏고 있지? 나는 그게 슬퍼.” 하고 대답했다. 내 주위에는 이런 소중한 친구들도 있다. 성당에서 만난 내 소중한 친구들이다. 그이들은 높은 자리에서 무언가를 베풀려고 하지 않고 친구로서 필요한 도움을 주려고 애쓴다. 내가 어려운 韓國 생활을 견딜 수 있는 것도 그 친구들 덕분인지 모른다.
내 친구 ‘베네딕트 안달’이 일하다 다쳐서 죽었을 때도 그이들은 큰 힘이 되었다. 장림에 있는 그 工場은 그런 데로 환경이 괜찮은 편이었는데 내 친구가 일하다가 그만 많이 다쳤다. 會社에서 조금만 빨리 가까운 병원으로 옮기고 손을 썼더라면 안달은 살았을지 모른다. 우리는 회사 태도에 너무 화가 났지만 제대로 항의할 수도 없었다. 그때 한국인 친구들이 회사와 대화하고 죽은 친구 곁을 몇 날 몇 밤 동안 계속해서 지켜 주었다. 회사에 나가서 일해야 하니까 퇴근하고 밤에 모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대신해 주었다. 그 사람들 덕분에 안달의 家族들은 살아서 버는 돈보다 더 많은 돈으로 보상받았지만 한 사람 목숨을 돈하고 바꿀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우리 가운데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던 그 친구가 지금도 가끔 그립다.
지금 여기서 내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한국말로 옮겨 주고 있는 친구는 나를 많이 사랑한다. 그 친구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나는 느낄 수 있다.
한국과 한국 사람은 나를 많이 힘들게 하고 화나게 하지만 우리 家族을 먹여 살리고 공부시킬 수 있게 해 준다. 나를 힘들게 하는 한국 사람들, 어쩌면 그이들도 나만큼 世上 사는 것이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래서 나는 성당에 가면 그이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十字가까지 지셨으니까. 나는 그분의 크신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 그분이 바라시는 대로 살아야 한다.
바라건대 내 오랜 친구 韓國이 많이 잘 살게 되어서 우리와 같은 外國 사람에게 더 너그러워지고 서로 사랑하게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