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뿐인 '학생회' 법제화로 제자리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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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일 부산시교육연구정보원 강당에서는 전교조, 참교육학부모회 등 교육·시민단체로 구성된 부산교육개혁연대 주최로 학생인권 대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학생인권 보호에 관한 조례 시안’을 놓고 참석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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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행복-인권이 첫걸음이다
4. 학생자치권
“12년 옥살이가 이제 거의 끝나 가요.” 수능시험을 마친 한 고3 학생의 말이다. 과연 학생들이 학교에서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나 될까? 공부, 동아리, 사회활동…. 안타깝게도 어느 것 하나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공부는 심야까지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을 억지로 해야 하고, 두발과 복장은 학생부장이 정해 준대로 ‘단정’하게 해야 한다. 학교생활규정에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 투성이다. 학생들이 동의한 바 없는 강압적 규정과 규율만이 정도 이상으로 강조된다.
이런 상황에서 무한한 잠재 능력을 발휘해 스스로 사고하고, 실험하고, 행동하는 창조적 인간 교육은 꿈꾸기 힘들다. 민주시민의 자질 함양이라는 교육목표는 온데간데없이 실종되고 만다. 강요되는 지배문화에 익숙해진 학생들은 무기력하게 순종할 뿐이다. 열악한 학생인권 상황은 이 때문에 만성화된다.
학생 자치권은 여기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학생들의 삶과 생활, 학습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무기력감과 수동성을 극복하고 기본적인 권리를 챙기기 위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치권”이라고 동양대 교육대학원 이수광 교수는 강조한다.
부산 고교생 89% 도 “학생회 별 의미없다”
'학생회 법제화 운동본부' 회칙 제·개정은 물론 예산 편성권등 요구
자치권은 일반적으로 ‘학생회’라고 불리는 학생자치조직을 통해서 실현된다. 다시 말해 학생회는 학교 안에서 학생들의 목소리를 유일하게 반영할 수 있는 통로가 되며, 학교 축제나 체육대회 등을 주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학생회가 자치조직으로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안타깝지만 열악한 학생인권 현실만큼 학생회 또한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많은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각종 활동에 대해 학교장의 사전승인을 받도록 하고 있다. 학생회는 법제화되지 않은 임의단체에 지나지 않으며, 학생회 대표가 학교 운영에 대해 의견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보장되지 않고 있다.
구로고 부학생회장 전누리(18·2년)군은 “학생들의 의견을 대변해야 할 학생회가 그저 선생님들이 시키는 행사의 준비나 진행에 전념하거나 수능 기원 떡값 걷기, 교문 앞 지각생 지도 등 온갖 잡일만 하고 있다”며 “‘자치기구’, ‘대표기구’로서의 성격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학생회의 유명무실화는 실태조사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박영관 부산시 교육위원이 최근 부산시내 고교생 83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9.3%가 학생회 활동 자체가 별 의미가 없거나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학교마다 갖고 있는 학생회칙을 들여다보면 더욱 놀랍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학생회의 기능과 권한에 대한 조항에 학생회의 활동은 교사들로 구성된 지도위원회의 지도뿐만 아니라 승인 또는 재가를 받아야 한다고 돼 있다. 또한 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예산의 편성권과 결산권, 각 반의 대의원들이 모이는 대의원회의의 개최권 및 안건 설정에 대한 권한, 학생회장 선거 결과에 대한 승인, 학생회 임원에 대한 임명권 등 자치활동의 중요한 권한 모두가 학생회가 아닌 학생회 지도위원회 즉 학교 당국에 위임되어 있다. 이와 함께 회칙에는 학교 행정사항에 대해 관여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어, 학생이 학교 운영의 주체로서 가질 수 있는 권리, 이를테면 학교운영위원회 참가 등을 모두 제한하고 있다. 심지어 학생회칙의 재정권과 개정권까지 지도위원회에 있다고 규정해 놓았다.
이런 현실에서 참다운 학생 자치활동이라는 목표를 이루어 낼 대안을 찾기란 쉽지 않다. 다만 최근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 전교조 학생청소년위원회, 21세기교육공동체 희망, 발전하는 학생회 가자, 고양시 학생회모임 등이 함께 꾸린 ‘학생회 법제화운동본부’의 움직임이 주목할 만하다. 이곳에서 하려는 가장 핵심적인 일은 초·중등교육법 제17조의 개정이다. ‘학생의 자치활동은 권장 보호된다’는 애매한 문구로 돼 있는 조항을 바꿔 학생회를 법적 공식기구로 규정하자는 것이다. 이와 함께 학생회칙 제정권과 개정권, 예산의 편성권과 결산권, 임원 임명권, 학생대표의 학교운영위 참가권 등도 법으로 규정해 학생 자치라는 목표를 이루어 내고자 한다.
서울외고 부학생회장 어유경(18·2년)양은 “학생회는 학생의 대표라는 이름에 걸맞게 당당한 자격으로서 학생의 권리를 주장할 것이고, 곧 학생 전체의 권리 또한 보호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회 법제화 효과에 대해서 중앙고 노년환 교사는 “쌍방통행식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이런 과정을 통해 학교규칙 제정에 학생들의 의사가 실질적으로 반영될 수 있다”고 말했다.
법제화운동본부를 주도하고 있는 민노당 구정인 청소년위원장은 “학생회의 자율적 운영, 학생 관련 의제의 설정 및 제출, 학생자치 규율의 제정, 정보 접근권의 행사, 학생축제의 자율적 기획·운영, 졸업앨범 제작 등에 대해 학생들이 의사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할 생각”이라며 “적극적인 홍보전과 서명운동 등을 벌여나가겠다”고 말했다.
아직 미성숙한 학생들이 자치활동을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 없다면, 그러한 능력을 키워 줄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학교 교육의 몫이다. 학생들이 자치활동을 통해 민주적 의사 결정 능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추어 나가야만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가 깊게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박창섭 기자 cool@hani.co.kr
학생 인권 조례안 제정 '꿈틀꿈틀'
부산시 교육위원회 추진 교육받을 권리등 7개항 적시
열악한 학생인권을 제도적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부산에서 처음으로 학생인권조례안을 만들려는 움직이 구체화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공교육정상화를 위한 부산교육개혁연대 주최로 7일 부산시교육연구정보원에서 열린 학생인권 대토론회에서 부산시 교육위원회는 최근 세 달 동안 학생, 학부모, 교사를 대상으로 벌인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부산광역시 학생인권 보호에 관한 조례 시안’을 마련해 공개했다. 이 시안은 교육 받을 권리, 자치에 관한 권리, 문화 및 복지에 관한 권리, 신체와 노동의 자유에 관한 권리, 사생활을 누릴 권리,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 적법한 절차를 누릴 권리 등 학생인권을 7개 세부영역으로 나눠 구체적으로 권리내용을 적시하고 보호방안을 명시하고 있다.
예컨대 ‘학교는 교육과정의 변칙적 운영이나 임의적 교내외 행사 등으로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학습권 조항과 ‘재활활동이나 선택과목 등에서 학생의 실질적인 선택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선택의 권리를 명문화했다. 또 ‘학생은 어떤 경우에도 처벌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해 ‘체벌금지’조항을 담고 있다. ‘징계의 기준과 사유는 합리적이고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하며, 학생을 징계에 회부할 때는 그 사유가 징계 규정에 따라 구체적으로 명시되어야 한다’는 조항을 두어 실체적 적법 절차도 규정하고 있다.
이 조례 시안에는 학생의 인권 보호 및 침해의 예방·치유를 위해 학생·학부모·교사로 구성되는 학생인권보호기구 설치·운영과 학교 내 인권교육과 연수 조항도 담고 있다.
시안 마련을 주도한 박영관 교육위원은 “갖가지 조약과 선언, 국가인권위 권고안 그리고 법률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 인권 등의 포괄적 개념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담았다”고 밝혔다. 박 위원은 몇차례의 공청회와 토론회를 더 거친 뒤 내년 하반기쯤 정식으로 조례안을 발의해 상정하겠다고 덧붙였다.
박창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