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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2004년 우리 반 문집 - 끼!살리고, 깡!으로 밀어부쳐, 꿈!을 깨사뿌자. 나!가!자!-가 나왔다.

나는 문집 늦게 내기로 '유명(엥?)'한 사람인데 이번에도 겨울방학 끝나고 착수해서 2월 등교일, 일주일 동안 아이들 글이랑 설문 등등 마련하고 봄방학 -정확하게 지난 일요일부터 오늘까지 딱 5일 동안-작업했다. ㅋㅋ 그래도 학기 중에 틈틈히 준비해 둔 것들이 있어서 '꺼리' 모으는데 힘이 들지는 않았다.

모두 110쪽에 개별 아이들을 위해 모아둔 반성문, 편지, 꿈봉투, 상장복사본 등등까지 모아서 재본했다. 그러니까 나랑 아이들 모두 세상에서 유일한 '나만의 문집'을 갖게 된 것이다.  내 것이 젤 두껍다. 이것 저것 보관하긴 곤란하고 버리기 아까운 것들도 몽땅 함께 제본했더니 엄청 두껍다.

제본 맡기러 3시쯤에 교대앞에 갔다. 안내양(?)이 계산을 뽑아주는데 2년전 만들 때보다 훨씬 비싸다. 그때는 권당 3000원 정도였던 것 같은데 이번 건 5000원 이란다. 50권이니까 250,000원. @@ 학급운영비로 150,000원을 신청해두었는데 100,000이나 더 나온 것이다. 행정실에 전화했더니 다른 예산 땡겨서 해줄 수 있으니 다시 학교로 와서 결재 받으란다. 울 교장샘 - '샘'에 괄호 치고 싶다. (샘) 이렇게. 아니면 완전히 삭제를 하등가. 이 분!이 의도적으로 올해 나를 담임에서 뺐다. 흥~이다. - 이 올해 다른 학교로 옮긴다고 오늘 결재를 받아야한다나 뭐라나.. 그래도 250,000원을 다 처리해준다기에 그 먼길을 되밟아 다시 학교로.... 발걸음도 가볍게...

3시에 맡겼는데 여섯시에 벌써 문집이 나온다고 했다. 와~ 세상 많이 좋아졌다. 다음번엔 더 천천히 만들어도 되겠다. 개인적인 일을 좀 보고 인쇄소 문 닫는다는 8시 반에 맞춰 갔더니 벌써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안에 불빛이 있길래 전화를 했다. 잠시 후 셔터가 열리고 일하는 아가씨가 조금, 아주 조금 투덜거리며 내 문집을 찾아주었다. 내 문집이 가장 두꺼워서 찾기 쉬웠다. 여분 한 권이랑 내 것 두권만 가지고 나왔다. 남은 건 학교로 배달해준단다. 잘 됐다. 차도 없는데...

늦은 저녁을 먹으며, 어제 그제까지의 밤샘 작업으로 인한 피로도 잊고 문집을 뒤적이고 있다. 특히 아이들에게 받은 편지들.. 사실 몇 통 안 된다. 그런데 그 몇통 안되는 편지를 다시 읽으니 잊었던 내용도 많고, 진심이었을 아이들 마음이 눈에 밟힌다. 올해는 담임도 짤렸는데.... 조금 서럽기도 하고. 내가 '열심히' 교사 노릇 하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열심히' 와는 너무 거리가 먼 것일까?

담임에서 배제된 이유... 교감샘의 횡설수설 가운데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들이었다. '담임들 간의 화합에 방해', '전교조에서 하는 청소년 축제에 아이들을 데리고 간 것', 부전공 연수 받느라 바쁠 나를 배려해서', '학교 외 활동에 바쁠테니까' 등등..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는 없다. 아무도 내가 담임에서 제외된 이유를 납득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들 서로 미루기만 하고...

솔직히 올 해 담임 노릇하는 것.. 나도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관리자와의 갈등, 동학년 담임샘들과의 부조화, 우리 반 아이들도 쉽진 않았다. 소진한 상태라 좀 쉬고 싶긴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내쳐지는 듯한 기분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그래도 오늘은 문집이 나온 날이고, 같이 근무할 천군만마의 샘들을 맞이한 날이고, 내일이면 또 2월 며칠간 작업했던 '학급운영안내자료집'도 나오는 날이다. 그래서 꿀꿀하지만은 않다.

문집이 나왔다고 아이들에게 기쁨의 문자를 날렸건만 이 녀석들은 답문도 없다. 엄아만 "문집이 다 달라요?"한다. 그리곤 3학년 담임 샘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어보기나 하고 --^ 아이들은 내 소유가 아니니깐 이 문집 주면서 이젠 그동안 쌓였던 감정의 찌꺼기들과 함께 훨훨 떠나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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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5-02-25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쌓였던 감정의 찌꺼기들을 훨훨 떠나보낼 수 있는 것 - 이런 것이 담임 하지 않을 때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것 아닐까 합니다. 학교에서 담임을 하지 않는 1년은 <축복>이라 생각해요. 짤린 것이 아니라, 신께서 해콩님께 주신 1년이란 선물로 받아들이시길... 저는 진심으로 부럽습니다. 담임 없는 1년이...
 

한 보름쯤 전엔가 과학적 성격검사의 한 유형 MBTI검사를 해볼 기회가 있었다. 나는 ISTJ인가~로 나왔는데 설명중에 교사가 적성에 맞지 않다는 말이 있었다. 자신의 생각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성격유형이라는 이유였다. 곰곰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똥고집이 좀 있어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상대방과 합의를 잘 못하는 편이니까!

 아이들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학교 규칙 규율은 내가 생각하는 적정한 선에서만 지도? 했다. 교칙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도과정에서 인격을 모독하거나 두발 복장 그 자체가 아이들보다 우선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에 나의 지도는 늘~ 다른 선생님들이 보시기엔  지도라고 할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다.(게다가 현재 학교의 교칙이라는 것들은 만드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의견은 거의 배제되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사실 담임인 나의 눈에는 아이들의 뽀글뽀글한 머리 , 줄여입은 치마, 악세사리 등이 눈에 잘 띄질 않는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서 더 그럴 것이다. 그 시간에 다른 문제를 상담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소한 것이라도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자기가 맡은 일에 책임을 지지 않을 때에는 따끔하게 야단을 치는 편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올해는 그마저도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맹숭맹숭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자율적인 공부습관, 자신을 조절하는 힘' 등을 길러주고 싶어서 공부는 스스로가 하는 것이며 자신의 인생도 스스로 책임지는 법을 배워야한다고 교탁을 부여잡고 열띤 논설을 늘어놓곤 했다. 따뜻하고 정답고 정의롭고... 그렇게 함께 즐거운 교실을 만들어 나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이들에 대한 나의 바램이었다. 그러나...

인문계... 늘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이 가장 힘들긴 하겠지만, 정말 나에겐 이 상황이 쉽질 않다. 모든 것이 입시위주로 돌아가는 시스템.. 아이들의 생각도 그렇고 샘들의 생각도 그러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두가지 잣대로 평가받는데 가끔은 기본적인 도덕성, 인간성의 부재로, 또 규율에 대한 느슨함으로 아주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지난 번 수능 부정사건도 이런 점에서만 접근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일상적으로는 등수와 성적으로 평가받는다. 공부를 잘하면 잘하는데로, 또 못하면 못하는 데로  평가를 받는 것 같다. 교사들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어른들은 이 두가지 잣대로 아주 혹독하게 아이들을 비판한다. "요즘 아이들은...." ,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성적과 인성! 두가지는 늘 상충하는 개념은 아니겠지만, 대입이 최대의 지상과제가 된 듯한 대한민국 학교교육-특히 고등학교 교육에서는 '성적향상'을 이유로 아이들에게 일상적으로  '인간성'을 포기하거나 연기하도록 교육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수능 부정 행위' 같은 사건을 맞닥드리면 무조건 아이들의 도덕성 부재가 모든 문제의 원인인 냥, 비판하고 비난한다.

내 경우는 좀 독특하다. 가치관과 성격상 학급 분위기를 공부하는 쪽으로 '잡아주지' 못한 미안함에 (이것이 미안해 해야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늘 마음 한 구석이 묵직했다. 아이들 역시 이율배반적이라서 늘 더 큰 '자유로움'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확실하게 '잡아줄 것' 또한 요구한다.) 물질적인 것들로 너무 많은 보상을 주려한 것 같다. 사실 그때그때 다 이유가 있는 보상들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아이들에게 '지나친 풍요로움'에 젖어들어 '결핍'을 모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기회를 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지나쳤다. 사탕도, 편지도, 관심도, 애정도.. 믿음도... 다 너무 지나쳤던 것 같다. 또다른 이유로  '성적이나 공부' 때문에 바른 인간성을 배울 기회를 주지 못했던 것같다!

내가 아이들을 믿었고, 또 사랑했다는 사실도 그것이 필요한 아이들에게는 의미가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아이들로 키우고 싶었는데...정의롭고 정직한 자아관을 키워가는 그런 아이들로 자랐으면 했는데.. 그러면서 학교에서 함께 즐겁게 숨쉬고 싶었는데...

희망이나 기대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나중에, 아이들이 이 절박한 상황에서 벗어나 어떤 계기로든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수치나 물질로 환산된 것들보다는 그래도 자신의 양심을 지켜내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며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고 인간적인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작년 한해, 우리가 함께 살았던 경험, 교탁 앞에서의 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아주 작은 씨앗이 될 수도 있다는 믿음, 그런 희망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나는 기소침해진 자신을 발견했다.

종업식을 했다. 문집을 만들고 있어서 별다른 준비없이 막대사탕과 컴퓨터용 싸인펜 40개씩,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들려줄 말을 준비해서 교실로 갔다. 마침 부반장 어머니께서 학교에 오셨다가 아이들 주라고 '쁘띠첼'을 사오셨길래 이것 저것 나눠 먹으며 '마지막 종례'를 했다.  그런데 그 '마지막'은 나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평소처럼 떠들고 즐겁고 딴짓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참고 참고 참고..  한해 두해 겪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많이 비워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이런 상황이 힘이 든다.

순식간에 아이들이 사라진 교실에서 아무렇게나 버려진 사탕봉지, 과자봉지를 주워담으며 씁쓸하고 우울하고 서운하고 또 시원했다. 물론 아무도 내게 특별한 인사를 건네오는 녀석도 없었다. 1년 내내 마음을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은 그 마음을 알기나 한 걸까? 부끄럽다. 역시 나는 좋은 교사는 되지 못할 성격유형인가? 눈물을 보이지는 않더라도 서로가 아쉬워하고 서운해하면서 헤어지는, 그런 종업식은 지나친 기대일까? (분명 그런 종업식을 한 선생님도 많으실텐데...)

어제 졸업식에서는 졸업생들이 차려입고 온 옷, 헤어스타일 등 겉모습에만 관심있어하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에 또 다른 절망을 맛봐야했는데.. 자본이 아이들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한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 또 이렇다.

아이들의 영혼을 깨끗하게 지키기 위해선 오히려 더 엄격한 모습으로  다가가야 하는걸까?

"이성으로 절망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그러나 낙관할 의지는 작지만 분명한 불빛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지.. 희망의 불빛!  이런 오늘이 쓸쓸하고 울적하고 또 시원하다. (이젠 아이들이랑 보충수업, 야간자율학습 도망가는 문제 때문에 다투지 않아도 되니까....마음을 전하려고 혼자 안달하지 않아도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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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보다 내 꿈이 더 커지지 않길”

 

언젠가 신문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에서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쳐 온 선생님이 하루는 사회적으로 저명한 선배를 찾아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왠지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이라고. 그래서 좀 더 큰 꿈을 갖기 위해 새로운 길을 찾고 싶다고. 그러자 그 선배는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보다는 지금 잇는 그 자리에서 자신을 업그레이드 해보라고 조언해줍니다.

그리하여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길을 찾아보라고. 몇 년 뒤, 선배의 조언에 힘입어 그 선생님은 신문지상에도 가끔씩 오르내리는 성공한 초등학교 교사의 한 표본이 되기에 이릅니다. 그때 그 선배는 자신의 충고가 적절했다고 생각하여 흐뭇한 마음에 그 사실을 알리고자 글을 썼습니다.

그 글을 읽고 저도 한 사람 독자로서 두 분께 축하의 꽃다발이라도 보내 주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이런 생각도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그 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선생님처럼 아이들도 최고가 되었을까? 최고가 되신 선생님 앞에서 아이들은 더 작아지지나 않았을까? 아이들이 더 작은 존재가 되었다면 그것을 과연 교사로서의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괜한 트집(?)을 잡게 된 것은 그 초등학교 선생님의 ‘꿈의 동기’가 아이들을 만나는 직업에 대한 초라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최고’ 보다는 ‘자기 분야’에 더 비중을 두어 말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왜 끝내 최고여야만 하는지, 왜 최고가 아니면 안 되는지, 그의 맹목적인 최고 숭배가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최고의 교사이기는커녕, 오히려 아이들을 다잡이하지도 못하는 무능한 교사에 가깝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도 제 담을 닮아서인지 최고와는 거리가 먼 아이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들에게 최고가 되라는 말을 잘하지 않습니다. 화초에 물을 주듯이 자기 삶을 잘 가꾸어 보라고 말해줄 뿐이지요.

물론 최고가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노력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다우니까요. 문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최고가 될 수 없는 아이들이 세상에는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최고가 되라고 하는 것은 곧 꿈을 포기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 최고가 되려는 욕심이 커질수록 더불어 사는 가치는 더욱 작아집니다.

제가 근무하는 실업계 학교에서 저는 열여섯 남짓한 나이에 이미 삶에 지쳐 버린 아이들을 만나고, 가난으로 엇나가는 아이들, 가정 불화로 끊임없이 방황하는 아이들과 마주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최고가 될 수 없는 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현실은 곧 삶에 대한 무기력으로, 불특정 다수를 향한 열등감으로 이들을 이끕니다. 삶의 가치가 ‘최고’만을 지향할 때, 최고가 될 수 없는 아이들에게는 비극이 탄생합니다.

이제 실업계 학생들마저 대다수가 대학 진학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이 반갑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학벌주의나 사회 불평등 구조가 심화되고 있는 것도 염려스럽거니와, 비교적 입시로부터 자유로웠기에 인간교육 냄새가 남아 있던 실업계 학교마저 입시 학원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누군가 학교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머뭇거림의 이유는 지금의 학교가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직도 아이들에게서는 사람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묻어나는 사람 냄새를 지켜주고 잃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교사로서의 제 몫입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절망과 희망은 안팎이 같은 한 줄의 고리로 이어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절망하다가도 희망을 갖고, 희망을 품다가도 다시 절망에 빠지기도 하니까요. 그러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 절망의 지점으로 기울어지더라도 그 너머에 있는 희망을 바라보게 하는 힘, 그것은 아마도 ‘사랑’일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보다 제 꿈이 더 커지지 않기를 늘 기도합니다. 최고의 교사가 되기보다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아이들과 함께 위대해지는 사랑의 교사로 오래오래 교단에 남고 싶습니다. 하여 저는 교사로서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유일하게 퍼 줄 수 있는 것이 그뿐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서툰 사랑으로 아이들을 원망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지만, 제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있고, 그들은 끊임없이 제 사랑의 힘을 증명해 줍니다.

사랑이랑 큰 이름에 비한다면 보잘것없지만, 이 책에는 제 얕은 사랑으로 스스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커 가는 아이들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때로는 제 삶을 힘겨워하고, 또 때로는 방황하는 아이들, 이 아이들을 이해하고 보듬어 안는 것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습니다.

 

- 안준철 『그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우리교육.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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