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엔 미안해요.
그런데 샘..
내가 예민한 건지 어떤건지 모르겠지만
직장에서 남선생님들이 젊은 여샘들에게 반말 쓰면서 명령하듯이 이야기하는 게 너무 싫어요.
그것이 '친밀함'의 표현이라면 더욱 경어를 써야하는것 아닐까 싶어서요.

자꾸 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말들만 생각나서 이쯤에서 그만할께요.
그저 아침부터 샘 잘못도 아닌 일, 샘이 어찌할 수 없는일에
반말 쓰는 사람에게는 말 못하고 괜히 샘한테 뭐라 한 것 같아 미안해서요.

그래도 샘..
용기를 내서 이야기를 한 번 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이렇게 한 사람, 두 사람.. 쉽고 편하게 반말 하다보면
의도하지 않게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그 남샘들 자꾸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젊은 여샘들에게는 이름 찍찍 부르고 반말해도 된다고..
우리가 앞으로 들어올 후배교사들에게 그런 학교 풍토를 물려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선배교사들에게 예의를 갖추어야하는 것처럼 후배교사들도 챙겨야하잖아요.
학교는 조금씩 더 민주적으로 대등한 관계에서 이야기되는 분위기여야 하는 거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샘한테
나이 많다고, 남자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반말하는 거 싫어서 말이 길어졌습니다.

샘께서 좀 더 정중하게, 거리를 두고, 공적으로 대한다면
상대방의 태도도 좀 달라지지 않을까...

미안해요,
선배교사로서 암것도 해준것도 없으면서 쓸데없는 참견해서..

그래도 내 일 아니라고,
남의 일이라고
모른 척 하는 것보다는 낫죠?

**샘의 답글

고마워요. 좋지 않은 것은 고쳐가야지요....
언니가 미안해 할 것이 아니지요, 바른 것을 말해 줘서 고마워요...그런데 제가 용기가 없어서 좀 그러네요~ 열심히 노력해 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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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5-06-24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렇다. 학교에서 가끔 어떤 남교사들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교무실에서 젊은 여교사의 이름을 찍찍 부르고 반말하고 그런다. 동료교사로서 **야~ 이렇게 부를 수 있을까? 아무리 나이가 많고 선배교사이고 또 보직교사라 하더라도..
친근함의 외피를 쓰고 빚어지는 인정주의의 부작용이 차고 넘치는 이 사회에서 학교도 예외가 아니다. '**형~',"** 형님"이라고 남교사들 사이에 호칭하며 둘 사이의 친함을 팍팍 드러내면서 은근히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키거나, 술자리에서 그들만의 판을 짜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 많이 보았다.

나는 학교의 이런 가부장적인 남성 문화가 너무 싫다.
그래서 가끔 예민한 날이면 그냥 두고보질 못하겠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는 그 남교사들에게는 결국 한 마디도 못하고 이렇게 약한 곳에 대고만 뭐라고 하는 내 모습도 한심하다.

학교에서 막강 권력을 휘두르는 이 권력지향형의 중장년 남교사들..
그들에게 똑 부러지게 뭐라고 말 할 수 있는 그런 날이 내게 올까?

글샘 2005-06-24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딱 제 이야기네요. 단 한 가지, 막강 권력이 없는 것만 빼면...
저도 젊은 선생님들 친근함을 가장해서 이름도 부르고... 형님도 부르는데...
근데, 저도 전혀 안 친한 넘들이 내 이름 막 부르면, 정색을 하기도 합니다.
정말 그때 그때 달라요~~~

해콩 2005-06-24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갑자기 당황스러워집니다만.. 정말로 친밀한 사이에 혹은 친밀하고 싶은 사이에 주고 받는 접근성 멘트의 경우는 당연히 제 이야기에서 제외됩니다... ^^ (저도 가끔 말끝이 짧아요. 서로 공감하는 친한 사이에는.. 그런데..저 분들은...)

해콩 2005-07-08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께서 올려주신 글...
(한겨레에 실린 글이었군요. 김소희 기자는 '오마이 섹스'라는 컬럼으로 잘 알려져있죠.. ^^::)

나, 미스 김!

새파란 여자애가 기자라며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영 신기했던 우익의 대부 고 오제도 변호사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미스 김'이라고 불렀다. 호칭에 대한 강박이 퍼렇게 살아있던 시절이라 "김 기자라 불러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그는 약간 당황하더니 나를 '미스김 기자'라고 불렀다. 오 변호사가 세상을 떠난 뒤 나를 그렇게 불러준 사람은 없었다. 한참 뒤 나를 놀랜 호칭은 '김 여사'다.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정계 은퇴 전 반주를 동반한 기자들과의 밥자리에서 나를 이렇게 부른 일이 있는데 그 눈길이 끈적하기보다는 되레 낭만적으로 느껴져 제풀에 화들짝 놀랐다. 아니 내가 벌써? 취재현장에서 불리던 내 호칭은 다양한 변주를 했다. 미스 김과 김 여사 사이에는 '아가씨' 가 있었고, '김양'과 '각시'에 이어 '아줌마'도 등장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를 자기들이 보고 싶은 방식으로 보고, 그렇게 불렀다. 남을 부를 때 직함만큼 편리한 게 없다. 그런데 직함을 무색케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나이와 서열이다. <한겨레21>취재편집팀에서는 한때 호칭 빼고 성 빼고 위아래 가리지 말고 이름만 부르자는 아이디어가 제안됐다. "경태! 기사 보냈어요" "창석은 또 밥 먹으로 나갔어요" 이렇게. 선배가 그렇게 부르면 괜찮지만 후배 처지에서는 영 어색했다. 그래서 이름에 이어 쉬지 않고 단숨에 다음 문장을 붙여서 말하곤 했다. "수병아무개가쓴그책어제봤는데,(참던 숨 내쉬고) 재밌었어요" 이런 식이다. 이런 '호칭의 민주화'는 한 며칠 쓰이다 숨을 참지 못한 대다수 구성원들의 '투항'으로 사라졌다. 나이와 서열을 간단하게 뛰어넘는 것은 내 호칭의 변천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별이다. 가끔 사무실에서 일하다 "기자님 좀 바꿔주세요"라는 전화를 받는다. "예 말씀하세요"라고 한다. 둘 중 하나는 "얘기(혹은 제보)할 게 있어서 그러니까 거기 기자 좀 바꿔주세요"라고 다시 말한다. "예, 저도 기잔데요"라고 하면, 잠깐 침묵 뒤, 이야기가 이어진다. 다시 전화하겠다면 끊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이런 제반 조건을 이용한 일이 있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다짜고짜 "야, 이 한걸레야" 하고 욕설을 퍼붓는 사람에게다. 난 '대대거리는' 말투로 "지금여, 다 취재하러 나가셨거등요? 전 옆방 아르바이트 학생이라 암것도 모르거덩요? 이렇게 대꾸한다. 이 대목에서 독자 서비스 정신을 들먹이고 싶진 않다. 나도 먹고살아야 하는데 한참 마감이나 취재 중에 그런 전화, 서로를 위해 좋지 않다. "저를 여자로 보지 말고 00로 봐주세요"하는 유의 얘기들은 이젠 '뒷담화'소재다. 여성이 대단히 드문 시절에 만들어진 사회적 강박이다. 왜 여자를 여자로 보지 말아야 하나.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고 언니를 언니라 부르지 못하는 세상, 지루하다. 여자 기자가 많아진 세상, 나이와 서열, 성별에 따른 차별이 없는 세상, 그래서 호칭에 대한 강박도 사라져버린 세상이 난 좋다. 미스김도 김 여사도 좋다. 뭐라 불러도 좋으니 나를 부디 기자이자 여자로 봐달라. 물론 굳이 고르자면 미스 김이 제일 좋다.
- 한겨레 21 (2005.5.31-취재뒷담화 김소희 기자) 2005-06-26 오후 9:23:00

해콩 2005-07-08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나 내 생각엔 아직도 여전히.. 전문직 여성에게도 그 직업으로 다가서기 보다는 그저 '여성'으로만 다가오는 남성이 더 많은 것 같다. 나도 여성이 하나의 여성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봐지기를 원하고, 평화롭고 평등하며 자유로운 여성성이 긍정받는 세상이 오기를 원한다. 그러나.. 최소한 여성인 내가 느끼기엔..아직도 '처녀'라는 말이 '교사'라는 단에 앞에 붙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흠... 실은 처녀라는 말 앞에 한 글자가 더 오는 게 보통이다. '노'라는 ...--;)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

 

날마다 한치씩 가라앉는 때

주변의 모두가 의자째 나를 타고 앉으려고 한다고

나 외의 모든 사람에겐

웃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될 때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

눈길 스치는 곳곳에서

없는 무서운 얼굴들이 얼핏얼핏 보일 때

발바닥 우묵한 곳의 신경이

하루 종일 하이힐 굽에 버티느라 늘어나고

가방 속의 책이 점점 늘어나

소용없는 내 잡식성의 지식의 무게로

등을 굽게 할 때

 

나는 내 방에 돌아와

바닥에 몸을 던지네

모든 짐을 풀고

모든 옷의 단추와 걸쇠들을 끄르고

한쪽 볼부터 발끝까지

캄캄한 속에서 천천히

바닥에 들어붙네

몸의 둥근 선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온몸을 써서 나는 바닥을 잡네

바닥에 매달리네

 

땅이 나를 받아주네

내일 아침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그녀가 나를 지그시 잡아주네.

 

- 양애경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 창비시선162. 84,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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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5-07-10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힘들 때는 바닥이 나를 받쳐주더라..
마음과 몸이 그저 아플 때
공허한 이 우주 어디 한 곳 마음 맬 곳 없고
그래서 몸도 마냥 헤매일 때
바닥에 달라붙어 깊히깊히 가라앉으면
조금씩 조금씩 떠오르더라
하지만 아침마다..
나를 받쳐주는 유일한 바닥
그 바닥을 스스로 밀어내는 것
여전히 힘들어서
동틀무렵 가슴을 쓸어내린다
 

추억에서 67

                                                      - 박재삼

 

晋州장터 生魚물전에는
바다밑이 깔리는 해 다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銀錢만큼 손 안 닿는 恨이던가
울엄매야 울 엄마,

별빛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 시리게 떨던가 손 시리게 떨던가,

晋州南江 맑다해도
오명가명
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 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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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으로 있는 김 진숙이라는 사람입니다.

철새는 그의 노동력 만큼만 날지만 문명의 이기라는 남의 노동력에 의지해 주로 이동하는 저는 어떤 날은 새보다 더 많은 거리를 옮겨다니는 날도 있습니다.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제가 만나는 노동자들은 대충 두가지 부류입니다.
하나는,파업을 안할 때도 "해골 두쪽나도 지킨다~"라는 라는 파업가를 들으면 빈속에 소주 첫잔을 부을 때처럼 가슴에서 불길이 확 땡길린다는 종류와,파업을 할 때마저도 노래가사에 '해골'같은 말이 꼭 들어가야하나 껄쩍지근하다는 종류.

지난 금요일에 만난 마산 예술노조 동지들은 전형적인 후자입니다.
상부구조는 억대를 호가한다는 악기와 더불어 우아하기 짝이 없는데 하부구조는 전혀 예술스럽지 못한 철저한 이중성.
저는 이런 사람들 종종 봅니다.
모이는 시간은 저녁 8시라고 공지해놨는데 아마도 10시나 돼야 행사가 시작될 수 있을거라는 지회장의 얘기에 제가 두 세번은 아마 물었을겁니다."왜 그렇게 늦어여?" "일찍 오는 사람도 있지만 다 모이면 그래 될껍니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사업장도 아니고 3교대 사업장도 아닌데 예술가들이 밤 10시나 돼야 모일 수 있다는 게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채로,마침 부산에 집이 있는 예술가의 차에 얹혀서 창원으로 갔습니다.
이 예술가,휴대폰 벨소리도 정말 크래식적이었고 이런 음악을 들으면서는 도대체 무슨 얘기가 합당할까 고민스러울 만치 차안의 음악소리도 예술적이었습니다.
한 5분은 점잖게 가다가 견디질 못하고 수정터널 안에서 결국은 제 방식대로 살기로 합니다.
"왜 그렇게 늦어여?" 드디어 음악소리가 줄어들고 "예?" 예술가가 묻습니다.
"아니,저녁도 모여서 먹는다메 왜 그렇게 늦게 모이냐구여?"
"아,예~.레쓴 마치고 모이면 그래 되거든예"

이 예술가들 마산시립교향악단에서 받는 한달 임금이 70만원이랍니다.오로지.
잔업이 없으니 잔업수당도 없을테고 담임이 아니니 담임수당도 없겠지요.
그래서 자기들끼리는 인간을 두 부류로 분류한답니다.
70만원으로 먹고 사는 사람과 못 먹고 사는 사람.
못 먹고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다른 짓을 해야 할거고,그 짓이 끝나는 시간이 대충 밤 9시가 넘는다는거지요.투잡스!
다른 짓의 종류는 대부분 레슨인데,그나마 피아노 바이올린 플룻 같은 말하자면 국영수는 건데기가 있지만 트럼펫 호른 같은(이밖에도 타악기 관악기 현악기 분류해가며 몇가지를 더 불러줬는데 못 알아들었음) 비인기 과목은 국물도 없답니다.
예술가는 이슬만 먹어도 살 수 있지만 탁란을 한 것도 아니건만 그의 새끼들은 우유도 먹고 기저귀도 차야 하기 때문에 야간에 경비일을 하는 예술가도 있답니다.
어려서부터 그 악기가 그냥 너무 좋았고 꿈에서도 그 악기를 불고 있으면 너무 행복할만치 그냥 좋았고 좋아하는 만큼 열심히 노력해서 대부분은 유학도 갔다오고 빵빵한 실력에 전문가라는 자부심까지 갖췄으니 그 일만 해서 먹고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노조를 만들었답니다.
우리가 노동자인가.그 질문에 몸은 천번 만번 동의하고 마음은 껄쩍지근한 채..

2003년 설립 초창기만 해도 전 단원이 조합원일 만큼 좋은 날도 있었답니다.
제가 겪어보면 초창기에 그만큼 분위기가 좋았다는 건 그만큼 불만이 컸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그 우아하고 자존심 강한 정신적 브라만들이 노동자라는 이 사회에서 불가촉천민의 취급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 대열로 스스로 하방할 생각을 다 했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진짜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 때 자신들에게 닥쳐올 탄압을 주로 걱정하지만 이런 부류들은 계급적 갈등을 참 많이 겪습니다.쓸데없이..
먹고 살기 고달픈 이들에게 봄날은 참 짧습니다.
먼저 합창단에서 부터 오디션이라는 복병을 만난답니다.
오디션은 노조를 만들기 전부터 있어왔는데 노조 설립 이후엔 왠지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되더랍니다.
노조활동에 열성인 사람이 피보는 것같은..
그런 분위기는 악단에서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는군요.
그러나 아무리 확연하면 뭐합니까?심증은 무궁무진한데 물증이 없으니..

오디션이란 게 마산시에서 위촉한(위촉의 권한을 가진 이들은 음악에 전혀 문외한인)3명의 전형위원과 지휘자의 전권에 의해 행사된답니다.
전형위원들이 있긴 하지만 오디션 자리에서 새파랗게 떨고 있는 이 파리목숨들의 생사 여탈권을 거머쥔 건 주로 지휘자랍니다.
지휘자가 고개를 갸웃한다던지 입꼬리를 살짝 아주 살짝 올린다던지 하면 영락없이 탈락하는..
그의 이상 야릇한 행동은 노조간부의 순서에서 주로 목격이 되는데 그렇다고 "얌마! 니 와 모가지 비트노?" 라거나 "조디 가마이 안두나?"라면서 멱살을 잡을 순 없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지난 번 악단 오디션을 15명이 봤는데 8명이 탈락을 했고 지회장과 그의 마누라를 비롯한 핵심간부가 다 짤렸답니다.
쪽 팔리게 징계해고도 아니고 실력미달로..
그래서 노조 집행부를 새롭게 구성했는데 이번에 새로 지회장이 된 분은 작년에 노조간부 하다가 오디션에서 짤리고 93일인가 4일인가를 천막을 치고 투쟁을 해서 겨우 복직을 한 사람이랍니다.
이 노조 제가 볼 땐 복직투쟁하다 날 샐 조직입니다.
어떤 사람은 조합원일 때는 81점을 받았는데 탈퇴를 하고나서는 89점을 받았답니다.(80점 이하면 탈락,90점 만점)
근데 이게 얼마나 웃기는 거냐 하면 처음엔 자기가 조합원이라 불이익을 받는다 생각했는데 89점 받고 생각해보니까 그날 자기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컨디션이 안 좋았다는 생각이 나중에 들더래요.
누가 노조를 탈퇴하라고 부당노동행위를 하는 것도 아니고 공권력이 투입된 것도 아닌데 이렇게 5분의 4가 노조의 대열에서 지발로 이탈하게 됩니다.

다음 날 첫차를 타고 인천을 가야 하는 일정이 있어서 자꾸 보채는 저 때문에 밤 9시 40분이 되어서야 입교식도 없고 그 흔해빠진 사천만 민중의 영원한 애국가도 없이 열세명이 모여서 시작을 하면서 지회장이 인사말을 하는데 첫마디가 그렇습디다.
"오늘 또 세명이 탈퇴를 해서 우리는 이제 스물네명 남았습니다."
나중에 끝나고 물으니 오늘 탈퇴한 사람들은 부산시향에 면접을 보러 가는데 혹시나 마산에서 조합원이었던 게 뽀록날까봐 미리 손 씻고 간 거라고..근데 결국은 뽀록날 거라고..워낙에 이 바닥이 좁은 바닥이니까..그래서 그 사람들은 욕할 수도 없다고..
백여명의 조합원이 이제 스물네명 남은 조직..
누군가 천막을 치고 있으니 버리고 가지도 못하고 버리지 못한다면 결국은 그 천막에 내가 앉아있어야 하는..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이 희망이 아니라 애물단지 근심덩어리가 된 조직..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서도 전망이 안보이는 조직..
이제 스물네명이 열네명이 되고 열네명이 네명이 되고 그 네명이 결국..비굴하게 무릎 꿇는 게 아니라 마지막까지 장렬히 전사하고 싶은 게 유일한 희망이라는 조직..
탈퇴한 사람들과 미처 그걸 하지 못한 사람 사이엔 같이 밥도 안먹고 말도 안한다는 조직..
자기들이 레슨을 하면서 가르치는 아이들이 결국은 자기들과 똑같은 길을 걸어갈 생각을 하면 죄스럽지만 그래도 그런 얘기를 솔직하게 하면 그마저도 밥줄 끊어질까봐 전전긍긍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한심스러울 수가 없다는 조직..
그러면서도 시민들에게 영혼의 안식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조직..
이 한심한 조직에서 저에게 요구한 건 오로지 힘을 달라는 거였습니다.힘을!
그 빌어먹을 힘이란 걸 살수만 있다면 땡빚을 내서라도 사주고 싶을만큼 저도 깝깝했습니다.
마지막에 그 말을 했던 거 같습니다.
나는 교향악단을 구경한 적도 없고 오케스트라 같은 건 지나가다라도 본 적이 없다.내가 만약 단 한번만이라도 여러분들의 연주를 듣고 노래를 듣고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나는 엄청난 죄책감에 사로잡혔을 거다.
한달에 70만원을 받고 그마저도 짤릴까봐 전전긍긍하면서 그 음악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하면 누가 그 음악을 듣고 행복할 수 있겠는가.
모멸감을 느끼면서 만들어진 음악이 도대체 누구의 영혼을 살 찌울 수 있겠는가.
그 시각이 이미 밤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70만원으론 못 먹고 사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꾸역 꾸역 스물네명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물론 오디션과 교원평가제가 같을 순 없습니다.
오디션이란 제도는 이들이 입단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거라 이들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결정되는 폭력이고 그 반면에 교평제는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객관의 탈을 쓴 과정이 그럴듯하게 꾸며지겠지요.
이른바 여론이라는 것에 밀려서 우리가 그 과정을 합의할 수도 있구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가진 힘은 바로 그거지요.
피해 당사자를 그 합의의 과정에 이끌어내고 결국은 지들끼리 적이 되게 만드는..
그래서 결국은 아무도 남지 않는..

(조금 생략)

-----신용길,김성태 선생님의 눈부시게 푸르른 시절을 기억하는 김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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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1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콩 2005-06-2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지금 교원평가는 어디로 가고 있나.. 김진숙씨가 보면 뭐라할까.. 잘 모르겠다. 나 역시 혼란스럽고 심란하다.. 몹시도..
 

학교와 불화하는 이들을 위하여

공부하는 놈, 저금하는 놈 2 - 학교와 교회를 떠나니 고전의 바다
“작가의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 10년 뒤에 온다”는 말은 나에게 악몽

▣ 이윤기/ 소설가·번역가

학교와 불화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쓴다. 학교와의 불화는 공부와의 불화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저금을 따로 하지 않는 나에게는 공부가 저금이다. 나는 <명심보감>에서 읽은 동악성제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철석같이 믿는다고 썼다. “착한 일을 하는 사람(爲善人)은 봄 뜰의 풀과 같아서 그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나날이 자라는 바 있으나, 착하지 못한 일을 하는 사람(爲不善人)은 칼 가는 숫돌과 같아서 그 닳아가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나날이 닳고 있는 것”이라는 옛글의 가르침을 지금도 믿는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선한가? 나는 선하지 아니한가?

문제는 선(善)과 불선(不善)의 구분이었다. 나는 선한가? 나는 선하지 아니한가? 고등학교 들어간 해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쁜 짓을 하고 다닌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학교와 교회가 금지하는 것들만 좋아했다. 나는 나에게 금과옥조 같은 동서양의 고전(古典)만을 좋아했는데 학교에서는 쓰레기 같은 것만 배우기를 강요했다. 나는 영화를 좋아했는데 학교는 영화관 출입하는 나를 쓰레기로 취급했다. 나는 음악 감상실 드나들면서 고전음악 듣기를 좋아했는데 학교는 쓸데없는 음악이론만 나에게 가르치려 들었다. 나는 그 시절에 이미 막걸리 마시기를 즐겼으니 학교쪽에서 보면 불량학생이라도 그런 불량학생이 없었다. 나는 절에 드나들기를, 굿판 따라다니기를 즐겼으니 교회쪽에서 보면 그런 우상숭배와 신성모독이 따로 없었다. 나는 ‘사도신경’ 외기를 한사코 거절했다. ‘사도신경’을 외지 못하면 세례를 받을 수 없다. 나는 세례받기를 한사코 거절했다. 나는 ‘불선인’인가? 불선(不善)은 악(惡)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걸 누가 규정하는가? 규정의 주체에 따라 달라지는 선악의 잣대에 과연 항복해야 하는가? 선은 악의 한 과정은 혹시 아닌가? 악은 또 다른 선의 한 과정은 혹시 아닌가?

나는 나에게 다시 물었다. 머리카락 박박 밀지 않는다고 몽둥이로 두들겨패는 학교를 너는 왜 용인해야 하는데? 술 마시다 걸리면 정학 처분 내리는 데를 왜 드나들어야 하는데? 무슨 권리로 때리고 무슨 권리로 벌을 주는데?

나는 동악성제의 가르침을 점검해보고는 또 한 차례의 소스라침을 경험했다. 아무래도 그가 말하는 ‘선’과 ‘불선’은 선악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도가(道家) 사람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무래도 ‘공부’에 대해서 쓴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하루 공부한다고 해서 현명함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무지에서는 멀어진다. 하루 나태하게 군다고 해서 무지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현명함에서는 멀어진다. 공부하는 사람은 봄 뜰의 풀과 같아서 그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나날이 자라는 바 있으나,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칼 가는 숫돌과 같아서 그 닳아가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나날이 닳고 있는 것이다.”


△ (사진/ EPA)

내가 보기에 학교는 공부하게 하는 곳이 아니었다. 나의 공부를 방해하는 곳이었다. 내가 보기에 교회는 당시의 내 눈높이에 맞추어 내가 선택한 곳이지 내 눈높이를 돋우어주는 곳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와 교회를 떠났다. 학교와 교회를 떠나고 보니 고전의 바다였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공부해둔 일본어로 고전읽기에 빠져들었다. 덕분에 나는 예수의 신비스러운 인격이 쏟아낸 말씀이 마음에 스며드는 것을 한사코 막지도 않고, 부처의 말씀의 향기를 한사코 외면하지도 않게 되었다. 노자와 장자는 어린 시절 나의 큰 스승들이었다. 밥맛 없어하던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 실만은 꼭 붙잡되, 놓치지 말아야지

요즘 나에게 이따금 악몽을 안기는 말 한마디가 있다. “작가의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 10년 뒤에 온다”는 프랑스 속담이다. 작가의 생물학적 죽음은 진정한 죽음이 아니라는 뜻일 터이다. 죽고 나서 10년 뒤에 작품이 남지 않는다면 그것이 작가의 진정한 죽음이라는 뜻일 터이다. 나는 많은 책을 번역하고 많은 책을 썼다.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내 책들이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때가 되면 나와 함께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징표는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나와 함께 사라지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만, 오래오래 남아 읽힌다면 그것도 근사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노자, 장자, 공자의 어록은 어떤가? 2천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 있지 않은가? 부처의 말씀은 어떤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또 어떤가? 셰익스피어 역시 그가 죽은 지 400년이 지난 지금도 펄펄 살아 있다.

나는 세월로부터 검증받지 않은 책은 잘 읽지 않는다. 나에게는 10년 뒤에 쓰레기가 될 가능성이 있는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 나에게는 가장 오래된 책, 가장 오래 살아남은 책이 가장 좋은 책이다.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책이 여기에 속한다. 여러 나라 신화 책이 여기에 속한다. 기나긴 세월의 터널을 지나 날빛 아래로 드러난 신화는 나에게 또 하나의 미궁이기도 하다. 나에게 고전은 ‘아리아드네의 실꾸리’ 같은 것이다. 영웅 테세우스를 미궁에서 빠져나오게 해주었던 바로 그 실꾸리 같은 것이다. 나도 미궁 탈출을 시도하고 싶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나의 실을 놓치지는 않을 것이다.

‘삶이라는 것은’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썼으니 시인 윌리엄 스태포드(1914~93)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임이 분명하다. “그대가 붙잡고 따라가는 한 가닥 실이 있다/…하지만 사람들 눈에는 이 실이 보이지 않아,/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이걸 잡고 있는 한, 길 잃을 염려는 없지./ 슬픈 일들은 일어나기 마련이어서/ 사람들은 다치기도 하고 죽어가기도 한다./ 그대 역시 고통 속에서 나이를 먹어가겠지./ 세월이 펼치는 것은 그대도 막을 수 없으니/ 오로지 실만은 꼭 붙잡되,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한겨레 21  제5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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